75화
솜털이 곤두서며 전신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가람은 혹시나 피로했던 자신이 재를 쏟아 버리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아예 재를 담았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며 필사적으로 직면한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지만 간수하지 못한 입이 먼저 움직였다.
“뽀삐야. 내가 혹시 오면서 무언가 버렸니?”
제발, 제발 버렸다고 해 주기를. 생각해 보니 쓸모가 없을 것 같아서 무의식적으로 버렸다고, 그렇게 말해 주기를.
가람의 떨리는 시선에 뽀삐도 덩달아 영문을 모르고 불안해져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아니요. 버린 것 없는데요…….”
갈피를 잡지 못한 생각이 마구 흔들려 혼란의 파편을 떨어뜨렸다. 쌓인 파편은 불안으로 굳어졌다.
설마,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근처에 있는 게 아닐 거야. 설마, 그렇게 재가 되었는데.
그러면 재는 어떻게 된 거지? 재는 어디로 간 거지? 다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설마, 아닐 거야. 나타나지 않을 거야. 분명 일부러 쫓아다닌 것도 아니라고 했었으니까,
이상한 놈이니까 차라리 따라오지 않을지도 몰라. 하지만, 하지만.
아무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동아줄 하나 없는 우물 안에 빠진 것 같은 컴컴한 두려움 속에서 가람의 몸이 잘게 떨렸다.
더웠으면 더웠지 결코 춥지는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갔다.
두렵다. 두려웠다. 누가 좀 도와줬으면, 아니, 누가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다.
어째서 그런 미친놈과 얽히게 된 건지. 처음에는 멀쩡해 보였는데. 방법,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라니? 무슨 방법? 사라진 모르드레드를 찾아올 방법?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르드레드를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다.
피로와 혼란 속에서 가람의 생각은 점점 갈피를 잃어 갔다. 방비하려는 생각을 해도 무엇에 대한 방비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벽에 기댄 가람은 마치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의식과 무의식을 헤매었다.
어떤 고민은 꿈속에서 실제로 나타나기도 하고, 악몽이 되어 구현되기도 했으며, 그 바람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면 다시 그 고민의 연장선이었다.
자도 잔 것이 아닌 상태로 막막함에 헤매던 가람은 어느 순간, 자신의 몸이 누군가에 의해 들려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자신이 졸고 있었음도, 그리고 누군가의 정체가 웨이크라는 것도 깨달았다.
웨이크. 웨이크, 왜 나를 옮기고 있지? 아침인가? 그러면 다시 길을 떠나야……. 패스는 충전되었나? 아니, 아니지. 그는 다쳤는데.
“웨이크?”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가람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아직도 그녀의 생각은 폐쇄된 막막한 고민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극심한 피로가 눈꺼풀을 잡아 내리고 있었다.
“웨이크?”
“예. 접니다.”
그는 아팠는데, 벌써 나은 건가?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었나. 멍하니 생각하던 가람은 다시 깨달았다. 모두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모르드레드가 주변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스러웠다면 당장 일어나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왜, 왜 그러지 않았지?
“괜찮습니까?”
웨이크가 그렇게 질문했을 때, 가람은 자신이 그에게 해야 할 말을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쳤던 것은 웨이크인데 왜 그가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네?”
“눈을 뜨고 자고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불렀는데…….”
가람은 웨이크를 올려다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쓰라리고 뻑뻑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눈을 뜨고 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웨이크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총을 잡아 빼자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총을 움켜쥐고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총을 끌어안고 눈 뜬 채 잠든 자신을 웨이크가 통째로 안아 올려 뉘인 모양이다. 고개를 돌려 보니 오른쪽에는 뮐러가 아직 자고 있다.
“아…….”
“여기는 어딥니까?”
“잘 모르겠어요. 근처에 있는, 아직 베녹사스인 것 같기도 하고. 미안해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흠, 제가 보기엔 베녹사스 근처의 아직 남아 있는 사냥꾼 산장인 것 같군요.”
“예. 그런 것 같아요.”
가람은 멍하니 동의하며 다시 고민 속으로 빠져들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엇을 고민하려고 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천장의 나뭇결을 따라 눈을 굴리는데 웨이크가 손을 뻗어 온다. 순식간에 시야가 새카맣게 물들었다.
“웨이크?”
눈꺼풀 위로 손의 체온이 뜨겁다. 그가 아직 열이 있는 모양이다. 침대를 비켜 줘야 하는데, 모르드레드가 두 사람을 공격했으니까. 다쳤는데.
“다 끝났습니다. 지금은 좀 쉬어야 할 것 같군요.”
그러나 가람은 잠들 수 없었다. 웨이크의 말에 가람은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해야 한다. 모르드레드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알고 싶지도 않지만 자신의 동료에게 칼을 들었다.
만약 다음에도 나타난다면 또 들게 되겠지. 그때도 살려 낼 수 있을지는, 요행수가 따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
두 사람이 가고 난 후 자신은 어쩌란 말인가? 언제 모르드레드가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그렇게 홀로 내던져진 채 있는 건 싫었다.
어떤 비난을 받아도 그런 끔찍한 일을 혼자 마주하는 것은 정말로 꺼려지는 일이다.
비록 누군가 도와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곁에 있었으면.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누구든 좋으니 곁에 있었으면.
하지만 두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다음에도 같은 방법으로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예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른다. 보라, 재가 사라진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 불안하긴 하지만 심각하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 번 이겨 냈으니 또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죽지 않을 거다.
그러나 같은 수법이 두 번 통할까? 그놈이 얼마나 영악한데. 아니, 의외로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놈은 이상한 놈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의지하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내가 익숙해지고 조금만 더 강해져서, 지금처럼 이렇게 흔들리는 상태가 아니라 충분히 각오가 되었을 때, 그때 보내 주면 되지 않을까?
웨이크는 눈을 감겨 주었는데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가람을 내려다보았다. 핏발이 서고 가슴팍에는 진흙과 피가 뒤엉켜 묻어 있는 꼴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잠들지 못하다니,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상하네.’ 하고 넘어갔을 일이지만, 조금 신경이 쓰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수평 저울의 기울기가 맹렬하게 바뀌어 간다. 가람의 입술이 갈등으로 ‘네’, ‘아니오’를 덧그렸다. 파르르 떨리던 그 입은 결국.
“아무 일도 없어요. 괜찮아요.”
“정말입니까?”
“물론이죠! 좀 아파서 그런 거예요. 정말이에요.”
가람은 억지 섞인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뮐러에게라면 절대 통하지 않았을 그 미소는 웨이크에게는 통했다.
그는 나름대로 이유를 만들어 내어 납득했다. 자신이 신경 쓰여서 잠들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완전히 틀린 추측이었지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사이 뭘 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가뿐하군요. 밖으로 나가서 정보를 좀 구해 보고 상황 파악도 해야겠습니다. 일단 주무시고, 일어나면 다시 말하죠.”
조금 망설이던 웨이크는 등짐에서 모포를 꺼내어 덧덮어 주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낡은 경첩이 우는 소리를 들으며 가람은 돌아누운 채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없을 거야. 해결법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최면뿐이었다.
한없는 검은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이 방법이 최선이다. 그것이 어떤 후회스러운 결말로 이어지더라도, 지금은 괜찮을 수 있었다.
Chapter 11
폭우가 지나간 뒤의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가람은 높이 흐르는 구름을 보고 있었다.
적당히 흔들거리는 몸이 편안하게 안장 위에 안착되어 있다. 익숙해진 뽀삐의 등에 앉아 있는 것은 TV 앞에 놓인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이 느껴진다.
많은 것이 익숙해졌다. 종이가 아닌 동전으로 이루어진 금속 화폐, 플라스틱 대신 나무, 비닐이나 합성가죽으로 만든 가방 대신 진짜 가죽 가방, 패딩 점퍼 대신 냄새나는 가죽 로브, 그리고 총.
가죽을 처음 접했을 때 가죽 냄새와 무게에 익숙해져야 했듯 총도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굳이 총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다. 장난감 같았던 금속 동전에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달라진 금전 감각처럼 총도 마찬가지로 가람의 정신적인 부분을 바꾸려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절대로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인정해야 했다.
노예라는 제도가 거북하지만 매우 편리한 것처럼, 막아서는 사람을 총으로 삭제하는 것은 얼마나 일을 간단하게 만드는가.
만약 모르드레드에게 총을 들지 않으려고 했다면 사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졌을 것이다. 생각의 흐름은 다시 이어진다. 모르드레드.
그날, 숲에서 나온 날 이후로 벌써 3일이 흘렀다. 불안의 그림자는 여전히 발밑에 따라붙어 있지만 가람은 그것을 내려다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눈치 빠른 뮐러가 깨어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가람이 자신의 양심을 향한 자해를 때려치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울질을 너무 해서 중심추가 부러질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가람은 현재 상태에 만족하기로 했다.
불안 속에서 홀로 두려워하는 것과 불안을 묻어 두고 겉으로나마 함께 안심하는 척하고 웃는 것.
어느 쪽이 쉬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숨기고 웃으면 다른 사람도 웃는다. 그러면 가람은 그 웃음을 보고 웃을 수 있었다.
“아까 그 말 생각합니까?”
뮐러였다. 그는 깨어난 뒤 하루 동안 내장이 다 찢어진 것 같다며 끙끙거리다가 이틀째가 되어서야 무언가 먹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내내 입에 뭔가를 달고 있었다.
가람은 그가 내미는 건포도를 받아 들어 씹었다. 이 건포도는 산장에 있던 사냥꾼들에게서 웨이크가 강탈해 온 것인데, 그럭저럭 질이 좋았다.
다만 가람 세계의 건포도와 달리 안에 씨앗이 있다는 점이 좀 불편했다. 손으로 씨를 일일이 빼낸 건포도는 훨씬 비싸서 귀족들이나 먹는 물건이다. 다음 마을에서 그걸 좀 사야겠다고 가람은 건조하게 생각했다.
좋은 걸 먹고, 좋은 것을 입고, 좋은 곳에서 잘 것이다.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이 사람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자신은 이들에게 그렇게 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안전을 속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무슨 말이요?”
“엄, 그― 사냥꾼들이 했던.”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