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뮐러가 한참을 곤란해하자 눈치를 보던 웨이크가 이때다 싶었는지 재빨리 도와주려고 나섰다.
“저희 둘 중 누가 가람의 애인이냐는 질문 말입니까? 아니면 여자 하나가 남자 둘 데리고 다니면 다 그런 것 아니냐던 말?”
“도와줘서 아주 고맙군요. 웨이크.”
뮐러가 이를 갈듯 말하자 웨이크는 조금 쑥스러워했다. 가람은 두 남자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생각 안 했어요.”
“아, 예. 그렇군요. 그냥, 저기. 음, 그냥 생각이 나서 물어본 겁니다. 가끔 그냥 아무 뜻 없이 그런 거 있잖습니까. 그, 하하. 건포도 좀 더 드실래요?”
“주세요.”
가람은 다시 구름을 보았다. 사실 두 남자를 이성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신기할 정도다.
숲에서 야영하며 서로 대소변 보는 소리까지 듣는 사이에 야릇한 감정이 싹트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원인이 아니었다.
경주마처럼 눈 옆에 가림막을 치고 정면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가림막 너머에는 아마 사랑이나 여유, 결혼 뭐 그런 것들이 서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림막 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목적지인 가족과 세계뿐이다.
그것이 미래였다. 그것뿐이었다. 넘치는 장난감 돈 같은 것으로 뭘 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고,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녀의 가족은 죽은 것도 아니고 되찾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라진 것뿐이다. 그녀가 받아들일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가람은 문득 자신이 납득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다가 곧 머리를 비워 버렸다. 이제 정말 모르겠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가람에게 있던, 그리고 있을 미래는 그것뿐이었고 엄연히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내려놓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모든 걸 다 잊으면 풍족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당히, 적당히. 사람도 적당히 사귀고, 적당히 정을 주면서 넘치는 물질적 풍요를 흩뿌리며 그냥저냥 이곳에 안착한다면 몸은 편안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중 가장 큰 것은 ‘그런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람은 결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바랄라인의 인육을 탐하던 이들 앞에서 스스로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하던 감정과도 비슷했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으려던 그때 그 의지.
‘그런 인간’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다만 확실한 것은 만약 ‘그런 인간’이 앞에 있다면 가람은 주저 없이 그 인간을 비난하고 역겨워했을 것이다.
스스로가 그런 인간이 된다면 스스로를 역겨워하게 될까.
가람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어 털어 버리고 다시 건포도를 씹었다. 이곳의 건포도는 그리 달지 않다. 신맛이 더 강해서 침이 고였다.
“그,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을 겁니다.”
가람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갑자기 무언가를 변호하는 웨이크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몇 마디 더 듣고 나자 그가 사냥꾼들을 변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워낙 직업도 직업이고, 환경이 사람을 거칠게 만드는지라 보드랍지 못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가람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불편한 침묵이 다시 내려앉았다.
가람은 떨떠름한 생각들 속으로 파고들었고, 뮐러는 그런 가람을 보며 눈치를 살폈다.
마치 비밀의 문이라도 되는 양 열고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봐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진하고 작은 아가씨라고 생각했는데, 말하는 머리를 으깨고 불태우는 광기가 저 작은 몸 어디에 들어 있었던 걸까.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뮐러는 앞으로의 거취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저희, 지금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남쪽이에요.”
가람이 손등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뮐러의 눈에는 손등 위의 패스가 보이지 않았지만, 가람이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으므로 별로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가람은 다시 침묵했고, 웨이크는 대체 왜 이렇게 불편한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어 당황스러웠다.
뮐러는 원래도 조용했던 가람이 어두컴컴할 정도로 침묵을 흩뿌리자 그녀가 다시 정상적인,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침체된 분위기가 가신 것은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가람은 지평선 끝에서 기묘한 형태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산과 같은 크기였으나 산이라고 보기에는 형태가 매우 이상했다. 높이 솟은 그것은 곡선이었고, 윗부분이 넓적했다.
그렇다고 아주 넓적한 것은 아니었는데, 마치 거대한 중절모가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산이 여러 개가 줄 지어서 붙어 있었는데, 베레모나 토끼를 꺼내야 할 것 같은 기다란 마술사 모자 모양 외 각양각색이었다.
“저게, 뭐죠?”
보아하니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걷다 보면 결국 저 모자들에게 도착할 것 같았지만, 가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자산맥입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역광이 없어져 산의 색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가람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자를 닮은 산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뚜렷한 모자의 형태를 띠어 갔던 것이다. 색깔도, 형태도 완벽한 모자다.
“저건, 모자잖아요!”
눈앞에 인간을 개미로 보이게 할 만한 거대한 모자가 줄 지어 놓여 있다. 심지어 지평선 끝에 놓여 있다.
가까이 간다면 전체 형태를 눈에 다 담지도 못할 만큼 클 것이 분명했다. 가람이 깜짝 놀라자 웨이크가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모자산맥이니까 모자죠.”
그렇다면 거북산맥이나 호랑이산맥의 산들은 매일같이 움직여 대야 할 것이다. 가람이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산들을 바라보다가 뮐러와 웨이크에게 공감을 구하듯 질문했다.
“저게 이상하지 않아요? 흙이 아니라, 아니― 저렇게 커다란 모자를 누가 만든 거예요?”
“그야 신이겠죠. 뭐, 쭉 계속 있었는데 새삼 놀랄 거 있습니까? 모자의 신이라도 있나 보죠.”
뮐러는 대수롭잖은 듯 어깨를 으쓱인 후 ‘가람의 나라에는 저런 산이 없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가람은 입을 딱 벌리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답 대신 그 표정을 접수한 뮐러는 동화를 들려주듯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람의 나라에서는 어떤 신을 모시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대륙에서 신을 믿는다거나 하는 일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신화들은 좀 남아 있죠. 들으시겠습니까?”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경이로운 모자들에 놀라서 일주일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모르드레드나, 그와 관련하여 갈등하던 것들을 좀 잊어버린 상태였다.
그 이야기를 들어서 좀 더 잊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가 없겠지.
“뭐, 다 아는 이야깁니다만,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고 그 위로 올라가면 창조의 신이 있습니다. 신은 전능한 롯드를 휘둘러 세상을 만들어 냈다고 전해집니다. 그 롯드는 거대한 펜의 형태로, 무언가를 그리거나 쓰면 그대로 형태가 되어 나타나 혼을 갖고 움직였다는군요.”
“그걸 진짜 믿어요?”
가람이 의문스러워하자 뮐러가 픽 웃었다. 이제야 순진한 아가씨의 모습이 좀 돌아왔다.
그는 그것이 반가워서 일부러 극적인 어조로 몇 개의 이야기를 더 꺼내 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저녁 야영지에서 잠이 들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고, 가람은 덕분에 일주일 내내 지속되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걱정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약은 재미있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 * *
연일 쾌청하던 날씨는 가람 일행이 모자산맥의 그림자 속으로 들어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흐려졌다.
그냥 흐린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검게 보일 정도로 구름이 꽉 끼어서, 만약 빗방울을 떨어뜨리기 시작한다면 보통 장대비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모자산맥의 근처는 비를 피할 동굴도, 임시 피난처를 만들 튼튼한 나무도 없는 그저 메마른 황무지뿐이라 가람 일행은 조마조마해하며 저녁도 먹지 않고 걸음을 바삐 놀렸다.
“불빛이 보여요. 저 근처에 마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행 중 가장 시력이 좋은 뽀삐가 걸음에 속도를 붙이며 말했다. 세 사람은 아직 불빛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머지 말들은 곧 뽀삐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달리는 세 사람의 뒤로 비구름이 추격자처럼 따라붙었다. 벌써부터 빗방울이 땅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람은 짐 중에 젖어서는 안 될 것들, 라이터나 마른 음식 등에 방수 천을 씌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도착하는 것보다 비를 맞는 것이 더 빠를 듯하다.
“마을이 보입니다.”
웨이크의 보고를 한쪽 귀로 들으며 가람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돌려 방수 천을 꺼내었다.
침낭 옆에 돌돌 말아 매어 둔 덕분에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얼마 전이었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일이다.
말고삐를 꽉 잡고 앞을 보기도 바쁜데 몸을 돌려 무언가를 꺼내다니, 서 있는 말도 아니고 달리는 말 위에서 말이다.
뽀삐의 배 옆에 매달린 짐 꾸러미에 천을 씌우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소낙비였다.
가람은 가죽 로브의 모자를 당겨 쓰려다가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순식간에 젖어서 머리에 착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타고 물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
“금방 그칠 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웨이크가 말했지만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와 말발굽이 수면을 때리는 소리로 굉장히 시끄러웠다.
바람만 휭하니 불던 황무지가 이렇게 순식간에 소란해져 버렸다. 늘 겪는 일이지만 자연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다. 가람은 아예 고삐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눈썹에 붙이고 비가림으로 쓰기 시작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우비라도 챙겨 와야겠다.
지금까지는 비가 자주 오지 않아서 별생각이 없었는데, 이번 주만 해도 두 번이나 비가 내렸으니 챙겨 와도 손해 볼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저쪽, 저쪽으로 가야겠습니다.”
비안개 때문에 시야가 많이 짧아졌다. 가람은 여전히 마을이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만 끄덕이고 웨이크를 따라 달렸다.
일행 중 가장 시력이 나쁜 탓에 보이지 않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은 이제 익숙한 일이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달린 지 두 시간, 가람 일행은 마침내 작은 마을의 어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마을에 도착하면 제대로 된 여관에서 묵으며 몸을 좀 추슬러야겠다고 생각하던 가람은 막상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 매우 당황했다.
여관은커녕 그럴듯한 건물 하나 없는 마을이었다.
비가 와서 그런지 길가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가람은 텅 빈 작은 마을의 거리에서 당황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경비병도 없는데, 특이하게도 집집마다 말들이 두세 마리씩 묶여 있었다.
“중간 마을이군요. 민박을 해야 할 듯하니 자리가 있는 집을 찾아봐야겠습니다.”
“민박이요?”
“예. 여관이 없어 보이니까요. 웨이크는 저쪽을 봐 주시죠. 민박을 하는 집은 문에 표시가 걸려 있을 겁니다. 퉤!”
그렇게 지시한 뮐러는 입 안으로 들어온 빗물을 뱉어 내고 말에서 내려 집집마다 표식이 걸려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람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웨이크와 뮐러가 살펴보지 않는 방향의 집들을 돌아보았다.
대부분 현관문에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았지만, 계속 찾아보니 과연 무언가 걸려 있는 집이 있었다.
“여기!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