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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77화 (77/256)

77화

가람은 뮐러와 웨이크에게 외치며 손짓했다. 마침 웨이크도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지만 두 남자는 말과 함께 가람에게로 걸어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도착하기도 전에 가람이 서 있던 건물의 현관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문 안에서 나온 사람은 사십 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객인가?”

“예?”

가람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여자는 물에 푹 젖은 생쥐 꼴인 가람을 훑어보더니 끌끌 혀를 차며 물었다.

“바닥이 다 젖겠군. 일행이 더 있슈?”

“아, 예.”

가람이 대답할 무렵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두 남자가 곁에 섰다. 인원을 눈으로 확인한 여자는 다시 확인하듯 질문했다.

“세 사람?”

“예.”

“한 사람당 2실버고 밥을 먹을 거면 3실버유. 묵을 거면 선불이유.”

조금 퉁명스럽게 말한 여자는 가람이 가방에서 10실버 동전을 꺼내어 주고 나서야 문에서 비켜서 주었다.

말투는 매우 퉁명스러웠지만 세 사람이 들어서자 재빨리 벽난로 쪽 자리를 내어주는 친절을 발휘했다.

그러나 가람 일행이 들어오며 떨어뜨린 물방울들을 매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닦고 있어서 친절한 것인지 불친절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짐은 거기다 내려놓으슈. 얼마나 묵을 거유?”

그 말에 웨이크가 뽀삐의 등에서 끌러 낸 짐을 내려놓았다. 뽀삐 등은 지붕 옆에서 간신히 비만 피하고 서 있었다. 제대로 된 마구간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최대한 빨리 길을 떠나 제대로 된 도시로 향할 생각이었다. 정확히는, 패스까지 가는 길 도중에 있는 도시지만.

“비가 그치면 다시 출발할 생각입니다.”

웨이크가 단정하게 대답하자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세 사람에게 천 뭉치를 던져 주었다.

“닦으슈. 계속 젖은 채로 있으면 벽난로가 있다고 해도 감기 걸려.”

툭 뱉어 내듯 말한 여자는 바쁜 움직임으로 주방을 향했다. 집은 마치 커다란 원룸 같은 구조라서, 가람 일행은 여자의 행동을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끓이는 듯 항아리에서 물을 떠다가 벽난로의 걸쇠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탁자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치즈를 집어다가 듬성듬성 잘라 넣더니 마른 풀 따위와 오래된 빵을 토막 내어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단출한 살림이었다. 객을 위한 침대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침대가 방의 각 끝에 하나씩 놓여 있었고 주방에는 투박한 나무 탁자, 선반에는 치즈와 마른 풀 따위가 놓여 있었다.

옷장으로 보이는 가구는 문의 한 귀퉁이가 일그러져 제대로 열릴지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한때는 괜찮은 집이었다는 듯 창문가를 막고 있는 낡은 커튼은 아주 작지만 레이스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가람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낡은 레이스가 아니었다.

늘어진 커튼 뒤에 무언가가 있었다. 어른은 아니었고, 아주 작은 무언가였다.

벽난로 앞에서 스튜를 휘젓던 여자가 가람의 시선을 알아채고 스치듯 말했다.

“내 딸이유. 바실리. 와서 인사해야지.”

퉁명스럽던 말투도 바실리라고 불린 딸에게만은 부드러웠다.

여자가 그렇게 말하자 커튼 뒤의 그림자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빼꼼,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작은 머리가 눈까지만 나온 상태로 밖을 살피고 있었다.

여섯? 일곱쯤 되었을 것 같은 작은 여자아이였다. 경계와 설렘이 담긴 시선에 가람은 몸의 물기를 닦아 내던 천을 내려놓고 최대한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자아이는 커튼 뒤로 쏙 숨었다. 가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좀 갈아입어야겠어요. 난로 앞에 옷을 좀 말려도 될까요?”

“그을음 묻을 텐데.”

여자의 말에 가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요.”

워낙 관리를 잘 안 하고 험하게 다루어서 그을음이 좀 묻는다고 해도 바다에 소금 한 스푼이 들어가는 정도의 변화일 뿐이다.

여자가 허락하자 가람은 가죽옷을 벗어 걸어 놓고 짐 가방에서 마른 옷을 꺼내었다.

로브를 목 아래까지 두르고 그 안에서 손을 놀려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니 살 만했다.

처음에 가람이 그런 식으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두 남자도 무덤덤한 얼굴로 같은 방법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야외 생활이 길어지면 이런 식으로 옷을 갈아입는 수밖에 없다. 가람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두 남자가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빈번해지자 금세 적응하더니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조차도 그 방법을 애용하고 있었다.

마른 옷을 입고 나자 그제야 으슬으슬 떨리던 몸이 좀 안정되었다. 가람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조금 더 닦아 낸 후 짐 가방을 뒤적여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가람의 손에 색색깔의 알사탕이 담긴 병이 잡혀 나왔다.

“그런 것도 있었습니까?”

“부피가 작고 오래 먹을 수 있는 걸로 챙겨야 했거든요.”

가람은 그렇게 대답하며 소리가 나도록 사탕 병을 흔들어 보였다.

유리와 사탕이 부딪히는 소리에 슬쩍 커튼 밖으로 고개를 내민 여자아이가 그대로 병에 시선을 빼앗겼다. 벽난로의 빛을 받아 이리저리 빛나는 사탕 병은 제법 로맨틱하게 보였다.

가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일 정도이니 저 꼬마 아가씨의 눈에는 꿈처럼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가람은 어쩐지 고양이를 먹이로 꼬드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슬쩍 웃어 버렸다.

“맛있는 사탕이란다. 사탕 좋아하니?”

사탕은 사실 제법 고가의 간식이다. 단맛을 내는 것이라고 하면 잘 익은 호박이나 양파 정도의 단맛일 뿐이고 옥수수의 수숫대를 간식 삼아 쪽쪽 빨며 단맛을 탐하는 것이 보통이다.

사탕수수 자체가 흔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고, 그 귀한 사탕수수를 정제해서 한 덩어리로 만드는 것이 사탕이니 기본적으로 한 알의 가격이 실버 단위를 오간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잘 변질되지 않는 특성 덕분에 사탕수수가 흔한 중부 지방에서 수입해 오기가 쉽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경을 여러 번 넘고 관세가 붙다 보면 한 알에 1실버 하던 사탕이 20, 30실버가 되기 부지기수였다.

아이의 한 입에 홀랑 넣기에는 좀 큰 금액이라, 보통은 있는 집 자식들이나 가끔 맛보는 물건이었다.

아이는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다가 매우 수줍은 태도로 가람의 앞까지 다가왔다.

가람은 사탕 병에서 미리 한 줌을 꺼내 쥐고 있다가 아이의 작은 두 손에 가득 사탕을 쥐여 주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하더니 역시 부끄러운지 후다닥 도망치는 것이 매우 귀엽다. 그 와중에도 날름 한 알을 입에 넣은 아이의 뺨이 발그레하게 변한다.

그 사랑스러움은 남루한 옷으로도 가릴 수가 없는 것이라서 가람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어디로 가는 사람들이우?”

사탕 때문인지 여자의 태도는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아무래도 민박을 하다 보니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치여서 성격이 바뀐 것이지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닌 듯했다.

가람은 여자가 내미는 스튜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모자산맥 쪽으로 가요.”

“마법사 경매에 가는 사람들이우?”

사탕도 그렇고, 말을 세 마리나 갖고 있는 것을 보니 돈깨나 있어 보이는 일행인지라 여자는 그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은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마법사 경매가 뭔지 몰랐기 때문이다. 책을 읽긴 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

“그게 목적은 아니지만 그쪽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맞습니다.”

당황하는 가람 대신 질문을 받은 것은 뮐러였다. 뮐러는 덧붙여 마법사 경매가 무엇인지도 작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별것은 없었다. 마법 물품을 경매하는 것.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 물품을 가져다가 경매 형식으로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런 경매는 다른 도시에도 있잖아요?”

경매장은 어디든 있다. 굳이 특별할 것이 있나? 베록에서도 경매장은 있었다. 하지만 뮐러는 빙그레 웃더니 ‘물론이죠.’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냥 불이나 켜고 그러는 마법 물품이 아닙니다. 보통 좀 특이하거나, 고급품이면 대부분은 마법 물품이라고 하죠. 그냥 보통 물건이 아닌 것 같으면 다들 마법 물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경매에 나오는 것들은 정말로 학회에서 인정받은 굉장한 물건들뿐이라, 가격도 장난이 아니거든요. 그냥 단순히 구경만 하러 오는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어느 나라의 고위 귀족들도 많이 방문하는지라 구경거리가 많답니다.”

마법 물품이라. 가람에게는 솔깃한 이야기였다. 패스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사실 가람이 지금까지 마법 물품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 물품이랍시고 시장에서 봤던 물건들은 어느 것 하나 실망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람의 손전등이 마법 물품 취급당하며 팔려 나간 것만 봐도 마법 물품이라는 것의 수준을 알 만해서, 더 이상 그쪽으로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굉장한 물건이라면 구미가 꽤 동한다. 언제 모르드레드가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까.

간신히 몰아냈던 생각이 다시 들자 등줄기가 오싹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르드레드가 바짝 뒤를 쫓아오고 있을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났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점이 그나마 가람의 마음을 달래 주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은 가시지 않았다.

가람은 오소소 돋는 소름을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뮐러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한 가람은 따끔거리는 마음을 외면하며 자연스러운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뮐러의 눈은 날카롭게 가람을 살피고 있었다. 숨기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요즘의 가람은 확실히 이상했다. 우울한가 하면 농담에 반응하며 웃었고, 그렇다고 웃음이 밝은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자신들에게 불만이 있는가 싶었지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잘해 주는 것을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노예는 자신들인데도 가람은 마치 큰 빚을 진 사람이라도 되는 듯 자신과 웨이크를 대했다.

어찌나 조심스레 말을 고르는지 하루에 한 마디도 하지 않을 때가 많았다.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았지만, 가람이 뭔가를 감추는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라서 뮐러는 대체 언제쯤 되면 비밀을 이야기해 줄지 기다리면서, 일행의 분위기가 더 이상 침체되지 않도록 이야깃거리를 꺼내어 놓았다.

“덕분에 관광지로 이름이 제법 높아서 물가가 매우 비쌉니다. 귀족들이 많이 오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요. 집을 마련하려면 바랄라인만큼이나 부자여야 해서 이렇게 도시 안으로는 못 들어가고 주변에 마을을 차리고 객들을 잡아 민박으로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의문점이 생겼다. 모자산맥에 도시가 있던가?

이제 모자가 더는 모자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커다랗게 보이는 지점까지 왔지만 모자산맥 위의 어디에도 도시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나무나 풀이 없는 그저 매끈하고 거대한 천 뭉치 같은 외형 덕분에 간단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혹시 판판한 꼭대기 어딘가에 있는 걸까?

“도시는 산꼭대기에 있나요?”

뮐러는 대답 대신 씨익 웃었다.

“직접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다음 날 즉시 날이 개었고, 가람은 귀여운 꼬마와 친해지지도 못한 채 떠나게 되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아쉬운 듯 기둥 뒤에 숨어서 배웅하는 꼬마를 보니 그리 슬픈 기분은 아니었다.

가람은 남은 사탕을 모두 털어 선물해 주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난 지 반나절 만에 모자산맥의 입구, 모자산맥의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도시는 뮐러가 말한 대로였다.

우선 그 압도적인 규모에 질려 버렸다. 도시의 입구는 모자산맥이었다. 거대한 모자는 산맥인 동시에 도시의 지붕이 되고 있었다.

실제로 가까이 와 보니 모자의 짜임은 제법 성기게 되어 있어서 그 사이로 가람의 팔뚝이 숭숭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가장 아래쪽에는 도시의 입구가 열려 있었다.

어떤 도시와도 다른 특별한 형태였다. 도시 전체를 거대한 모자가 마치 돔이라도 되는 듯 덮고 있었던 것이다.

모자의 짜임 사이로 빗살 같은 햇빛이 쏟아져 도시 전체를 아롱지게 만들고 있었다. 점박이 같은 햇빛들.

“여기에 살고 있는 인구는 못 되어도 10만 명은 넘습니다. 거기에 관광객들까지 합하면 20만이 조금 안 되죠. 그만한 인원을 수용하는 거대한 도시가 산맥 안에 있는 모습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정말 인상적이죠.”

마치 여행 가이드처럼 뮐러가 설명했다. 웨이크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는 표정으로 가람만큼이나 넋이 빠져 있었다.

촌스럽게 구는 것은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첫 방문으로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가람과 웨이크처럼 도시의 지붕을 한 번, 다시 점박이 햇빛으로 가득한 도시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특이하게 내리쬐는 햇볕의 형태 덕분에 도시는 마치 섬세한 점묘화처럼 보였다.

그 현란한 형태만으로도 어지러울 지경인데, 도시 안을 오가는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다채로웠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종류의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았다.

사막 쪽에서 왔는지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코끼리에 앉아 대로를 지나는 무희가 있었고, 그 옆으로 산더미 같은 화살을 등에 진 난쟁이들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둘러보는 여행 중인 동양인들과 그 주위로 갑옷을 입은, 너풀너풀한 옷을 입은, 곡도를 허리에 찬, 창을 치켜세운 각양각색의 전사들이 돌아다닌다.

그 사이로 각종 과일 수레와 간식 수레가 지나갔다. 말과 낙타, 거대한 오리와 도마뱀, 호랑이 따위의 온갖 짐승들이 섞여 빈틈을 채운다.

그렇게나 정신없고 혼잡한데도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가람.”

뮐러가 가람을 툭 치곤 도시의 가장자리로 잡아끌었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길을 막고 서 있었음을 깨닫고 민망한 기분으로 매서운 시선을 던지며 지나치는 행인들에게 자그마하게 사과했다.

사막 쪽에서 왔는지 상의를 엑스 자로 교차시킨 끈 정도로만 입고 있는 남자들이었는데 신장 차이 때문에 가람의 눈 바로 앞에서 가슴께가 지나갔다.

민망하고 불쾌한 기분이었지만 가람은 한숨을 내쉬는 거로 대신했다. 어째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헐벗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구나.

“여관을 잡읍시다. 여긴 ‘실바람 여관’이 유명하다더군요. 좀 비싸긴 하지만 비싼 값을 한다고 합니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한지 뮐러가 서둘러 걸으며 말했다. 말은 안 했지만 웨이크도 동감인지 뮐러의 걸음을 따라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가람도 어제 비를 맞고 제대로 씻지도 않았더니 온몸에서 곰팡내가 진동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두 사람의 걸음이 너무 빨라 당황스러웠다.

다른 도시라면 별 상관이 없었겠지만 여기는 뮐러와 가람의 간격이 30cm만 떨어져도 그 사이로 온갖 오리, 닭, 사람, 무희, 전사 따위가 끼어들어 지나갔던 것이다.

아차 하는 사이 뮐러를 놓칠 뻔한 것이 몇 번인지 모른다. 다른 날이면 가람을 챙기며 걸었을 뽀삐도 어제 비 오는 야외에서 보낸 것이 힘들었는지 자기 걸음 챙기기 바빴다.

그래도 가람은 앞을 가로막는, 그리고 발밑을 지나가는 닭을 밟거나 걷어차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열심히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늦춰 달라고 소리 지르지 않은 이유는, 외쳐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데다 가람도 빨리 가서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이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가람은 숨을 몰아쉬며 뮐러의 어깨를 잡고 웃었다.

“아, 하마터면 놓칠 뻔했잖아요.”

무릎을 잡고 숨을 몰아쉬던 가람은 응당 들려야 할 대답이 없자 의아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대단히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보고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했다.

남자는 뮐러와 매우 닮은 차림이었고, 머리색도 비슷했지만 뮐러가 아니었던 것이다. 점묘화 같은 도시 풍경 탓에 눈이 잠시 미쳐 버렸던 모양이다.

“아, 저, 그,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봤네요!”

정말 이상한 여자 다 보겠다는 듯 내려다보는 사람을 피해 가람은 무작정 당황해서 달렸다. 부끄러움도 부끄러움이지만 두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당황도 컸다.

우왕좌왕하던 가람은 일단 숨을 돌리고 어깨를 떠미는 인파도 피할 겸 한산한 골목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두 사람도 당황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뽀삐의 후각을 믿고 여기에서 기다려 볼까?

더 움직일 기력이 없는 가람에게는 달콤한 생각이었다. 무작정 그냥 기다리는 것.

하지만 온갖 향신료 냄새가 소용돌이치는 이곳에서는 뽀삐의 코도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자신이 찾아가는 편이 좋다는 건데. 최대한 빨리 가는 것이 좋다. 두 사람도 자신을 찾아 나오게 되면 길이 엇갈릴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뮐러가 무슨 여관이라고 했더라?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금 들었는데. 다시 들으면 알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꺼내려니 꺼내어지지가 않는다.

가람은 한참 고민하며 자신도 모르게 점점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끄러운 대로에서 멀어지고 싶은 생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참 골목으로 들어와 매우 조용해졌을 무렵, 가람은 자신이 너무 많이 걸어 들어왔음을 깨닫고 돌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실도 깨닫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뒤를 밟아 오는 걸음이 있었다.

솜털이 바짝 곤두서며 낙인처럼 지울 수 없는 이름이 떠올랐다. 모르드레드. 설마 벌써 따라온 건가?

두 사람이 없을 때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달달 떨렸다.

가람은 조용한 움직임으로 재킷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별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권총을 잡은 가람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눈치채지 못한 척 걸었다.

이 골목은 대로와 대로 사이에 낀 골목인지 저 끝으로 또 다른 대로가 보였다.

많이 들어온 덕분에 조금만 더 걸으면 가람이 들어왔던 대로의 반대편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천천히, 하지만 빠르게 걸어야 한다.

가죽신의 밑창이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걸음과 걸음 사이에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뚜벅뚜벅 의식적으로 규칙적이게 걷던 걸음이 점점 침착함을 잃어버린다. 들이쉬고 내쉬는 간격이 점점 빨라졌다.

가람은 자신의 헐떡이는 숨을 자각하며 자신이 어느새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뛰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빠르게, 더 빠르게. 날쌔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었던 뜀박질은 어느새 돌부리에 걸리면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고 팽팽하게 변해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 무섭다. 무서웠다.

웨이크와 뮐러가 실질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곁에 없으니 원망스러웠다.

너무나 무서워서 뭐라도 원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무섭다.

가람은 오래도록 살아온 모르드레드가 자신을 고문하거나 괴롭게 할 방법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두렵다.

걸음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람은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추격자도 이미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자신을 틀어쥐는 순간, 가람은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후드. 이 로브! 추격자는 로브를 입고 있었다.

모르드레드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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