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가람은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저항하며 그대로 상대의 복부에 총을 쏴 버렸다.
커다란 총성이 골목에서 반사되며 웅웅 하게 울려 끝까지 퍼져 나갔다. 대로의 모든 행인들이 아주 잠깐 멈췄다.
가람은 풀릴 리 없는 손이 스르륵 풀리며 등 뒤의 남자가 쓰러지자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가람은 배를 움켜쥐고 신음하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피에 젖은 권총과 뒹구는 남자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다. 모르드레드가, 이 정도로?
망설이던 가람은 떨리는 손을 뻗어 남자의 로브를 벗기려고 했다. 그러나 먼저 가람의 손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제압하고 손안의 총을 빼앗아 갈 때까지 가람의 시선은 로브를 쓴 남자에게 못 박혀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누구야? 누군데 나를 쫓아온 거지? 왜 나를 붙잡은 거지?
정말로 모르드레드가 아닌 거야?
멍하니 남자를 내려다보는 가람의 머리 위로 경비대가 선언했다.
“살인 미수로 체포한다.”
멀리서 사람들이 소란스레 외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미쳤나 봐, 거리 한복판에서 마법사가 사람을 죽였어!
* * *
두 남자는 실바람 여관에 도착해 입구에 들어서고 나서야 가람이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대단히 늦게 깨달은 편이지만, 잠자는 돌도 깨울 수 있을 것 같은 이 도시의 소란스러움을 생각하면 오히려 빠른 편이었다.
“음.”
뮐러가 침음성을 흘리며 잔수염이 난 턱을 매만졌다. 그간 면도도 뭣도 할 여유가 없었던지라 털이 잘 나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수염이 생겨 버렸다.
그에 비해 웨이크는 거의 산적이나 다름없는 모양새였다. 두 남자는 잠시 서로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에 했던 그, 추적술인가 뭔가를 써 보면 어떨까요?”
“흔적이 남아 있어야 쓸 수 있습니다.”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한 웨이크는 입을 다물고 다시 뮐러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뮐러의 시선을 따라 여관의 입구로 눈을 돌렸다.
여관의 입구는 짧은 순간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호숫가의 물살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뮐러가 다시 조심스레 웨이크를 살폈다. 웨이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뮐러는 웨이크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힘들고, 피곤할 터다. 어제는 천둥이 쳐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총대를 메야 하나.
“여기에서 기다립시다.”
웨이크가 약한 비난을 담아 뮐러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뮐러는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별수 없지 않습니까? 가람이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게다가 이 도시의 치안은 최고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뮐러는 웨이크를 끌어다가 여관 입구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기, 저기. 저게 다 경비병입니다. 아무래도 온갖 사람이 몰려드는데, 그중에 귀족이니 뭐니 호락호락한 사람이 없으니 경비가 삼엄하죠. 어떤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도 가람이 비명이라도 지른다면 그놈은 10초 만에 붙잡히고 말 겁니다.”
웨이크는 뮐러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과연, 창대를 세우고 서 있는 기개가 경비병을 하기엔 아까운 사람들이었다. 매우 뛰어난 전사들이다.
뭐가 뭔지도 모를 길거리에서 소리 없이 소매치기 하나를 현장 검거하는 모습을 확인한 웨이크는 그제야 안심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크가 고개를 끄덕이자 뮐러는 가볍게 웨이크의 어깨를 치며 웃었다.
베녹사스 이후로 어쩐지 친근하게 구는 뮐러가 좀 어색했지만 웨이크는 이런 친구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가람을 좀 믿어요. 우리는 일단 방을 잡고, 가람이 올 때를 대비해서 먹을 것이나 주문해 둡시다. 오면 바로 먹고 좋지 않습니까?”
“예.”
웨이크는 확실히 뮐러의 이런 섬세한 부분은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 웨이크에게 옆에서 걷던 뮐러가 떠보듯 슬쩍 질문했다.
“그런데, 나 기절해 있을 때 가람에게 무슨 일 있었습니까? 생각해 봐요.”
웨이크는 곧바로 없었다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말을 시켜 두고 갑자기 점원을 불러 세우는 뮐러 덕분에 잠시 말을 멈췄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뜻인 것 같아 웨이크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사이 뮐러가 다시 소리 높여 점원을 부른다.
“이봐요!”
그러나 그 소리는 혼잡한 다른 소리들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가람은 귓가가 웅웅 울리는 것 같은 소리들의 틈에서 멍하니 탁자의 얼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람은 총을 쏘고, 남자가 쓰러진 지 7초 만에 붙잡혔다. 뮐러가 웨이크에게 장담했던 대로지만, 피해자와 가해자는 그의 예상과 많이 달랐다.
“이봐, 왜 저 남자를 해쳤지? 돈? 뭐가 목적이야?”
한껏 험상궂은 표정을 지은 병사 하나가 가람에게 으르렁거렸다.
가람은 여전히 탁자의 얼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가로 침이라도 흐를 것처럼 넋을 잃은 표정이었다.
그 앞에서 몇 번이고 앵무새처럼 의미 없이 으르렁거리던 병사는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다소 폭력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가람을 두드려 팬다거나 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병사는 충분히 큰 소리가 나도록 가람이 쳐다보고 있는 얼룩을 내리쳤다.
효과가 있었다.
그 소음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람은 정신을 차렸다.
가람은 멍한 시선을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여기에 있더라. 아.
“이봐요, 아가씨. 나도 험하게 할 생각 없어. 조사에만 잘 응해 달라고. 피해자와는 무슨 관계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모르는 사람을 대로변에서 피가 나도록 공격했다? 무기는 뭐야. 처음 보는 물건인데.”
“총이에요.”
“총? 좋아. 왜 피해자를 공격했지?”
“저를 따라와서…….”
“따라왔다고 사람을 죽이려고 해?”
“그게 아니라…….”
말을 하면서 가람은 점점 더 맑은 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굉장히 피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경비대에서 일단 현행범인 가람에게 샤워나 새 옷을 제공해 줄 리 없을뿐더러 가람은 지금 당장 구걸을 해도 괜찮을 정도로 꼬질꼬질한 몰골이었다.
심지어 새벽부터 말을 타고 달려온 데다 지금까지 누적된 피로도 상당했다.
거기에 이 상황이 가져다주는 피로까지 더해지자 그야말로 영혼이 빠져나갈 것처럼 피곤했다. 실제로 방금 조금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니면 설명을 해 봐.”
“좋아요.”
병사는 가람이 무언가 말을 할 생각처럼 보이자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범죄자를 심문하는 고문관에서 범죄자를 취조하는 고문관 정도의 변화였지만, 가람은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그러니까 얼룩에 집중하고 있던 때보다 비교적 객관적으로 자신의 위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자신은 지금 스스로를 변호해야 했다. 저 병사는 가람을 완전히 범죄자로 보고 있었다. 무리는 아니다. 경비병의 지척에서 사람을 쐈으니.
“저는 여행자고, 오늘 이 도시에 들어왔어요. 아시다시피, 도시가 굉장히 혼잡하더군요.”
“첫 방문이면 그렇지.”
제법 공손해진 가람의 태도에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근차근 말하는 모습이 방금까지 백치 같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라, 병사의 눈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잠깐 눈을 판 사이 일행과 헤어졌는데…….”
“일행이 있나?”
“네.”
“어디에 있지?”
“그게, 잘 기억이 안 나요. 무슨 여관인데, 유명한 여관이라고 했는데. 거기 가기로 하고 그쪽으로 가다가 놓쳤어요. 들으면 기억이 날 것 같은데.”
“여신의 휴식 여관, 마력의 샘 여관, 황금 맥주 여관, 실바람 여관, 노래하는 양 떼 여관. 이 중에 그 여관이 있나?”
“실바람! 실바람 여관이에요!”
“그쪽으로 병사를 보내 확인해 보지. 일행의 이름은?”
“웨이크, 뮐러라는 남자 두 명, 뽀삐라는 말과 다른 말이 두 마리 있어요.”
병사는 종이에 무언가 적더니 취조실 문에 난 작은 구멍으로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가람에게 질문했다.
“그리고?”
“그리고 너무 당황해서, 사람들은 너무 많은데 일행이 전혀 보이지 않으니 정말 당황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일단 조용한 골목으로 들어가서 침착해지려고 하다가 점점 골목 안쪽으로 걸어갔어요.”
“왜 그랬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대로가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생각하고 싶었나 봐요.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저를 조용히 따라오더라구요. 갑자기 무서워져서 달려서 도망치는데 그 사람도 똑같이 달려서 저를 쫓아왔어요. 그리고 저를 잡는 순간 너무 놀라서 총을 쏴 버렸어요. 여기까지예요.”
말을 마친 가람은 다시 얼룩으로 시선을 옮겼다. 병사는 가람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대낮에 사람을 죽이려고 할 극악무도한 살인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는 말을 그대로 믿을 수도 없겠지만, 이렇게 충격을 받은 것 같은 모습을 보니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았다. 게다가 조사에 협조적인 고분고분한 태도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좋소. 일단은 임시 사면이오. 하지만 공격받은 남자가 일어나서 증언하는 말을 들어야 확답을 내릴 수 있소.”
일단 가람이 범죄자라는 확신이 사라지자 병사의 말투가 바뀌었다. 하지만 가람은 병사의 말투보다 내용에 주목했다.
“살아 있나요?”
가람은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 내어 질문하고 말았다. 병사는 조금 놀라더니 곧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태지만 숨은 쉬고 있소.”
“제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가능하오. 하지만 나와 동행한 상태로 감시하에서 만날 수 있소. 당신이 증인인 남자를 죽이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만나 보고 싶어요. 저를 왜 쫓아왔는지, 누군지 궁금해요.”
“따라오시오.”
병사는 몸을 일으켜 가람에게 손짓했다. 가람은 주춤주춤 걸어 병사를 따라갔다.
잡혀 들어올 때는 무슨 정신으로 들어왔는지 몰랐지만, 이곳은 거의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감옥마다 죄수가 하나, 혹은 대여섯씩 들어앉아 있었고 가람처럼 병사에게 취조당하는 죄수도 있었다.
코로 퀴퀴한 냄새가 맡아진다. 가람은 그 냄새가 감옥 특유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가람의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그걸 깨닫자 갑자기 목욕이 정말로 하고 싶었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가람은 스스로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드레드의 말이 어느 정도는 맞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이미 이상해졌을지도. 자기가 쏴서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데 목욕하고 싶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변했다. 무엇이 변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무언가 변했다.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싶기도 하고 가슴이 울렁이기도 했다.
울렁이는 그 느낌은 기쁨을 닮아 있었고, 입술을 깨무는 것은 무엇을 닮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기쁨은 아니었다.
자신이 괜찮아서 기뻤다. 그러나 자신이 괜찮아서…… 슬펐다.
불안했다. 두려웠다. 무언가 정말 중요한 것이 변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이었다면 사나흘, 아니 그 이상, 슬픔을 꾹꾹 내리누르고 참아야 했을 텐데 지금은 참을 것도 없었다.
그냥, 목욕이 하고 싶었다. 이대로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냥 넘어가 버릴까.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설렘은 아니다.
“다 왔소.”
병사의 말에 가람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따라 들어간 환자의 방은 생각보다 훨씬 열악했다.
남자는 마치 창살 대신 벽이 쳐져 있을 뿐인 감옥에 있는 것 같았다. 배에 두른 붕대에서는 고름과 약 냄새가 뒤섞여 고약했다. 고약한 냄새는 방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남자는 신음할 기력도 없는지 이마에 식은땀을 매달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마침내 보게 된 그 얼굴은 가람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람은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까만 머리. 조금 그을린 피부. 고생이 심했는지 강퍅해진 뺨. 결정적으로, 배를 치료하느라 풀어 헤친 상반신의 가슴께에 흐트러져 있는 초생달 모양의 곡옥 목걸이.
하늘 운화에게 받아 가람이 습관적으로 목에 걸고 다니던 곡옥 목걸이와 같은 물건이다.
병사는 가람과 남자가 둘 다 동양인임을 안 후 조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남매인가? 아니면 연인? 동양에서부터 이어진 인연? 도피?
병사의 생각이 20부작 드라마로 발전하기 직전에, 가람은 침착하게 요청했다.
“치유 마법사를 불러 주세요. 이 사람은 절대로 죽으면 안 돼요. 돈이 수천만 골드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오겠다는 마법사 중 가장 뛰어난 마법사를 불러 주세요.”
남자는 하늘 운화의 오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