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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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병이 데려온 마법사는 마치 역병이 도는 마을에라도 들어서는 듯한 꺼림칙한 태도로 걸어 들어왔다.
의자도 없어 바닥에 앉아 환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가람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상태 그대로 마법사를 맞이했다.
마법사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람의 상태는 준환자 같은 처지였다.
“저 여자가 의뢰인이오?”
악취를 쫓으려는 듯 코앞을 부채질하던 마법사가 의혹을 담아 질문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나이를 꽤 먹은 남자의 것이다. 가람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나이가 많은 마법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법사는 유약하고 오만한 인상의 남자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장년과 노년의 경계처럼 남자의 인상을 가르고 있었다.
가람이 남자의 매부리코에 시선을 주는 사이 병사가 대신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환자입니다.”
환자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마법사의 태도가 민망했던지 병사가 묻지도 않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그 사실에 주목하는 대신 가람의 행색에 주목했다.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군. 급한 마음에 마구 부른 것 아닌가?”
마법사는 불편한 심경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않은 덕분에 가람은 마법사의 무시를 넘어 멸시에 가까운 속내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시간 낭비를 했다는 짜증과 감히 거짓말로 마법사의 귀중한 시간을 빼앗은 자에 대한 괘씸함이 얼굴에서 뚝뚝 묻어났다.
가람은 마법사를 이해했다. 마법사의 무례에 화를 내기에는 그녀가 너무 가라앉아 있었다. 피곤하고 피곤했다. 들이마시는 공기 한 자락마저 몸을 녹슬게 하고 있는 듯했다.
게다가 가람이 앉아 있는 더러운 감옥의 바닥과 가람의 행색은 굳이 마법사 같은 오만한 자가 아니더라도 코를 쥐고 흘겨보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마법사는 코를 쥐지 않았다. 본디 무례한 사람은 아닌 듯했다. 다만 헛걸음했다는 기분이 마법사를 무례한 사람으로 만든 것이겠지.
가람은 말없이 로브 속의 웃옷을 올리고 복대에서 남은 반지들 중 하나를 꺼내었다. 알이 굵은 다이아 반지다. 수정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투명한 보석이 박힌 반지였다. 가람은 그것을 무심한 동작으로 마법사에게 보여 주었다.
“오늘 안에 이 사람을 낫게 해 주면 이 반지를 드릴게요.”
가람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눈을 감아 버리자 마법사는 반지의 값어치와 스스로가 방금 홀대했던 사람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실 사이에서 다투기 시작했다.
돈과 자존심의 대결이었다. 입만 열지 않았다면 마법사는 마법을 쓰기 위한 수고만으로 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시하는 말을 한 탓에 자신의 자존심까지 걸어야 했다. 스스로가 낮추어 본 사람보다 더 낮아지는 것은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매우 힘든 일이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머리를 가졌다면 더욱.
마법사는 결국 반지를 받아 들고 침댓가로 다가섰다.
그러나 가람은 마법사의 자존심을 구입한 사실에 대해 어떤 승리감도 느끼지 못했다. 가람은 하늘 운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이 아가씨는 가람의 안에서 매우 작아져 있었다. 아마 1년쯤 지나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하늘 운화와 관련해 희미한 기억을 더듬었지만 안타깝게도 별 소득이 없었다.
대신 다른 것들이 기억났다. 그즈음의 가람에 대한 기억이다.
신기하게도 하늘 운화를 떠올리려고 할수록 예전의 가람, 물에 젖은 새끼 새처럼 가냘프고 혼란스러워하던 자신이 선명하게 수면 밖으로 떠올랐다.
무엇 하나에도 조심스럽던 시절. 그래도 지금처럼 이렇게 힘겹지는 않았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의문의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모르드레드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장소란 장소는 다 가리키는 패스의 바늘 때문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무언가를 보면 아주 잠깐이나마 진심으로 즐거워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저 불안하기만 했다.
“저기, 괜찮소?”
무릎을 끌어안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가람은 병사의 상냥한 말에 고개를 들었다.
병사는 저 스스로도 그런 말을 한 자신이 믿기지 않는지 어색한 표정이었다.
임시 사면이라고 해도 가람은 아직 엄연한 범죄자였고 병사는 가람을 취조해야 할 입장이었다. 가람은 피곤한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네?”
“저 남자가 만약 완전히 깨어나게 되면 살인에 관련된 항목의 범죄 사실은 사라지게 되오. 나머지 사항들은 저 남자와 합의해야겠지만.”
“합의요?”
“저 남자를 공격했지 않소? 그 사항에 대해 남자가 보상을 요구한다면 적절한 범위 내에서 보상해 줘야 한다는 뜻이오.”
“아…… 네…….”
그런 이야기였나. 대충 병사의 말을 이해한 가람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치료하는 마법사와 무릎에 얼굴을 묻은 가람,
그리고 어색해하는 병사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병사가 다시 입을 열어 침묵을 깨트렸다.
“좀 있으면 아가씨 일행이 올 거요. 여관에 연락이 닿았을 테니까.”
가람은 병사가 자신을 좀 내버려 뒀으면 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병사는 측은한 얼굴로 가람을 보고 있었다.
가람은 그가 왜 측은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어째서 공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뭔가 다른 일이 있었나?
“먹을 거라도 좀 들겠소? 별건 없지만 마른 빵 정도라면 있소.”
“아뇨, 괜찮아요.”
가람은 병사가 왜 느닷없이 친절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많이 지쳐 보여서 하는 말이오. 뭔지 모르겠지만 힘들어 보이는군.”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얼굴을 문질렀다. 그렇게 지쳐 보이나? 피로하긴 하지만.
그런 가람에게 병사는 다 안다는 듯 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순해진 얼굴이 아까 전의 취조하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다.
“오늘 일도 있고 여러모로 힘든 일이 많겠지. 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오. 하지만 이걸 명심해요, 아가씨.”
병사는 자세를 낮추어 가람과 눈을 마주했다. 나이로 주름이 진 눈매 속에는 단단한 갈색 눈동자가 들어 있었다. 가람은 얼떨결에 자세를 바로 하고 병사의 말을 기다렸다.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건 다 지나가기 마련이오. 힘겨운 순간이 고될수록 그 끝의 성공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지. 고생 없이는 성공도 없소. 지금 하는 고생을 기회라고 여기시오. 많은 것을 배우며 버티면 결국 승리할 수 있을 거요.”
가람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는 진지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세상에서 가장 엿 같다고 생각한 순간에 살았던 적이 있소. 하지만 순간이라는 건 지나가는 거요. 험, 그럼 아가씨 일행을 데려오겠소.”
말을 마친 병사는 그제야 민망함이 밀려오는지 낯간지럽다는 듯 얼굴을 긁적이곤 냄새나는 방을 나갔다.
가람은 잠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지 못하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냥 우스웠다. 고생을 기회로 여기라니.
병사의 말이 뒷덜미를 바짝바짝 쫓아오는 것 같은 모르드레드에 대한 두려움에도 해당이 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흔해 빠진 명언록 따위에 적혀 있을 것 같은 말인데도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가람은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우중충하게 두려워하던 자신이 갑자기 바보같이 느껴졌다. 두려워하나 두려워하지 않으나 어차피 결과는 같다.
후드를 쓴 사람을 보면 여전히 심장이 쿵쾅거리고 아직 누가 갑자기 뒤에서 말을 걸거나 하면 깜짝깜짝 놀라겠지만 한없이 가라앉게끔 하던 무언가가 조금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가람은 여전히 지치고 고단했으나 더 이상 무릎에 얼굴을 파묻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뮐러와 웨이크가 병사와 함께 나타났다.
가람은 두 남자의 행색을 보고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뭔가 먹다가 왔는지 뮐러의 입가에는 흰 크림소스가 말라붙어 있었고 웨이크는 씻다가 왔는지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길을 찾는 데 오래 걸리나 보다 하고 여관에서 기다리던 두 남자는 병사의 방문에 깜짝 놀라 가람이 있다는 치안대까지 부랴부랴 달려왔다.
요 근래 불안정해 보이던 가람이라 뮐러는 가람의 정신 상태가 매우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가람이 마치 미친 것처럼 웃어 대니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잠시 웃음을 멈췄던 가람은 황망한 표정의 두 남자를 보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가람, 저기 재밌는 와중에 미안합니다만, 괜찮습니까?”
뮐러의 얼굴에는 노골적으로 ‘혹시 미친 건 아니지요?’ 하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가람은 손사래 치며 웃음을 수습했다.
“아, 미안해요. 갑자기 너무 웃음이 나와서 그만.”
뮐러는 가람이 있는 장소를 둘러보았다. 벽지는커녕 나무도 덧대지 않은 그냥 돌벽은 다듬지 않은 싸구려 벽돌이라 울퉁불퉁했다. 바닥은 오물로 더러웠고 가람은 그 오물 사이에 그냥 앉아 있었다.
그나마 작은 창문이 있긴 했지만 거미줄로 가득했고, 낡은 탁상에 놓여 있는 작은 양초 하나가 이 방에 있는 유일한 광원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재밌어 보이는 것은 없었다.
“다 웃었으면 일단 여관으로 가서 좀 씻죠.”
“가도 돼요? 아직 환자가 깨어나지 않았는데.”
뮐러는 주머니에서 1골드 금화 하나를 꺼내어 병사에게 건네었다. 방금까지 삶의 철학을 가람에게 이야기했던 병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이 바뀌어 금화를 받아 들었다.
뮐러는 그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짓는 가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아직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웨이크를 턱짓했다.
“웨이크가 가람 대신 남을 겁니다.”
웨이크는 조금 당황하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뮐러는 거기에 돈주머니까지 던져 주며 지시했다.
“웨이크, 저 남자의 치료가 끝나면 이 돈주머니로 합의하고 돌아와요.”
“아, 잠깐. 깨어나면 데리고 여관으로 와 주세요.”
“아는 사람입니까?”
뮐러는 질문하며 동시에 유추했다. 그러고 보니 같은 동양인이다. 혹시 저쪽 대륙에서 알던 사람인 걸까?
“혹시 전에 베록에서 만난 하늘 운화 기억해요? 오빠를 찾는다는.”
“아. 이 사람이 그 오빠군요. 그런데 어쩌다가 총으로 쏜 겁니까?”
“그게, 말하자면 좀 길어요.”
뮐러는 휘청거리는 가람을 부축하며 혀를 찼다. 뭔지 모르겠지만 잠깐 사이 엄청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일단 가서 좀 씻고 쉰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가람은 두말없이 동의했고 뮐러와 치안대를 떠났다. 그리고 묵묵히 남겨진 웨이크에게 병사가 슬쩍 말을 걸었다.
“저 두 사람이 사귀는 겁니까?”
웨이크는 병사에게 대답하는 대신 요청했다.
“머리 닦을 거나 좀 주십시오.”
병사는 고분고분한 태도로 웨이크에게 닦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그 천의 정체가 걸레라는 말은 하지 않았기에 웨이크는 그저 좀 더러운 수건인가 하고 그것을 사용했다.
웨이크가 병사에게서 받은 걸레로 머리칼의 물기를 닦아 내는 동안 가람은 해가 떨어져 한결 열기가 가신 길을 걸었다.
길에는 환각을 자아내는 것 같던 점박이 햇살도 더 이상 없었고, 민망하게 가슴을 드러내고 활보하는 남자들도 없었다.
밤의 선선한 날씨를 즐기려는지 얌전한 차림을 한 몇몇 사람들이 아이와 산책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가람은 그 생소한 광경에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해가 떨어졌는데도 길에 아이들이 돌아다니고 있다니. 지금까지 거쳐 온 도시 중에 가장 치안이 좋은 듯했다.
빗자루로 쓸어 내기라도 했는지 확 줄어든 사람들 덕분에 도시는 일견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채로운 옷과 장신구, 피부와 머리형이 넘쳐 나 빙글빙글 눈을 현혹시키던 낮의 그 거리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모두 땅으로 꺼지기라도 했는지 선선하게 부는 바람만이 길을 채우고 있어서 가람은 그 고요함을 즐기면서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활활 타던 불에 누가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 같다.
그러나 가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소재를 찾을 수 있었다. 구미가 당기기에 충분할 만큼 밝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가람의 지치고 늘어진 걸음을 잠시 잡아끌었다.
노란 램프 불빛이 창문가로 새어 나오는 선술집.
살짝 열린 창문 아래로, 달랑달랑 흔들리는 입구의 문 너머로 그 은은한 빛깔이 흘러나왔다.
가람이 우뚝 멈춰 서자 부축하듯 그녀를 붙잡고 걷던 뮐러가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이 가람을 살핀다. 가람은 넋이 나가기라도 한 듯 멍하니 선술집을 보고 있다.
웨이크였다면 가람이 술이 마시고 싶은가 했겠지만, 뮐러는 가람의 시선을 읽어 내었다. 멀리, 아주 멀리 과거를 보고 있는 시선이다.
그 선술집부터 술집의 거리가 이어지는지 골목 전체가 시끌시끌하다.
아직 초저녁인데 벌써부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고래고래 악을 써서 단조로운 가락의 노래를 불렀다.
노래라기보다 리듬 있는 고함 소리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소음이었지만, 가람은 작사 작곡 모조리 취객 본인이 한 것 같은 노래에 흠뻑 취해 향수에 젖어 들었다.
싸움, 노래, 싱거운 농담, 웃어 대는 목소리들. 뤼미아가 누구인지 청년 하나가 혀 꼬인 목소리로 ‘쏴랑한다 뤼미아아아!’ 하고 고함쳤다.
선술집 문을 뚫고 나올 기세라 일순 길을 걷던 사람들 모두가 그 목소리에 짧게 웃었다.
낯선 길, 낯선 풍경. 어느 것 하나 일치하는 것 없건만 가람은 이 주정뱅이들의 목소리가 떠도는 거리에서 익숙한 대학로 술집 거리의 냄새를 맡았다.
소란스럽고 소란스러운. 왁자지껄하고 왁자지껄한. 그 불똥이 튀기는 것 같은 즐거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람은 저녁 공기와 함께 홀로 차분히 가라앉아 향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뮐러가 재촉할 때까지.
“가람?”
뮐러가 부르자 가람은 아, 하고 반쪽짜리 대답을 내어놓았다.
대답도 무엇도 아니었지만 뮐러는 일단 그걸 대답이라고 챙기고 가람을 잡아끌었다.
“어서 가서 쉬죠. 너무 피곤해 보입니다.”
그렇게 말한 그는 가람이 어어 하는 사이에 그녀를 잡아끌고 주정뱅이들의 거리를 지나쳤다. 목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밤벌레 우는 소리에 금세 묻혀 사라졌다.
가람은 뮐러의 손에 몸을 맡기고 끌려가면서도 찌르는 것 같은 웃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하면 마치 기억으로만 존재하고 있는 그 시간으로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아쉽게, 아쉽게.
그 거리를 지나 주정뱅이들의 목소리를 벗어나자 적막이 어색하게 내려앉았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행동했음을 깨달았다. 뮐러가 무언가 추궁하면 어쩌지? 가람은 불편한 기분으로 뮐러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뮐러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아니, 아닌가? 단순히 내가 찔리는 것이 있어서 제 발 저린 걸까?
가람은 고요하게 이어지는 침묵에 안도하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혹시나 뮐러가 무언가 추궁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에 일부러 피곤함을 끌어 올려 얼굴에 풀어놓았다.
부옇게 죽어 가는 가람의 표정에 뮐러는 실바람 여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행히도.
실바람 여관은 그렇게 헤매고 돌아온 것이 아까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감옥을 나와 주정뱅이의 거리를 잠깐 걸어 지나치고 난 뒤 골목을 돌자 바로 나오는 커다란 건물이 바로 그 여관이었다.
마침내 여관에 도착하자 가람은 갑자기 자신의 피로를 자각했다. 배가 고프다. 몸에서 악취도 나고 있다. 최대한 빨리 씻고 자고 싶어서 가람은 보폭을 크게 했다.
실바람 여관은 지붕이 삼각에 벽은 직각으로 꺾어지는, 보통 건축물들과 판이하게 다른 형태를 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가람은 거리에서 여관을 처음 본 순간 누군가가 제멋대로 깎아 놓은 치즈를 떠올렸다.
건물 전체가 특이하게 샛노란 빛깔을 내는 나무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다각형의 노란 건물 벽에 가득 달린 노란 램프에서 불이 쏟아지자 음영이 짙어져 마치 구멍 뚫린 노란 치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가람이 그 이야기를 하자 뮐러는 웃으며 대답했다.
“가람이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이군요. 치즈라니. 전 저 샛노란 색이 마치 금덩어리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가람은 뮐러가 돈이 궁한 걸까 생각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기력이 없었던 가람은 그냥 입을 다물고 뮐러를 따라 여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선택했다.
“어서옵, 우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