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뮐러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하던 점원이 뒤따라 들어오는 가람의 악취에 코를 막는다.
뮐러가 재빨리 눈치를 준 덕분에 가람을 거지 취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당장 내쫓고 싶다는 욕구가 얼굴 가득이었다.
점원은 주근깨가 깨알 같은 갈색 머리의 소년이었는데 워낙 귀염상이라 코를 움켜쥐어도 그리 미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관에서 일하는 어린 점원들은 모두 인상이 참 좋은 것 같다고 가람은 생각했다.
“목욕 준비, 최대한 빨리.”
은화 하나를 탁 튕기며 뮐러가 지시했다. 대단히 오만해 보이는 그 태도에 가람은 입을 쩌억 벌리고 싶었다.
뮐러가 언제부터 저렇게 사람 부리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더라? 아무래도 여행을 다니며 변한 것은 자신만이 아닌 모양이다.
가람이 그렇게 바라보는 동안 솜씨 좋게 은화를 탁 받아 든 점원이 바로 허리를 굽히며 가람을 안내했다.
돈 앞에서는 후각도 사라지는지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기는커녕 방긋방긋 미소하며 가람을 잡아끌었다.
귀여운 얼굴이 몇 번이고 돌아보며 축축 처지는 걸음의 가람이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한다.
소년의 눈동자에 자신이 커다란 동전으로 비쳐지고 있는 모양이다. 점원의 등과 돌아보는 얼굴이 번갈아 가며 가람의 시야를 채웠다.
계단, 소년, 다시 등과 계단.
그리고 가람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고 나서도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결 좋은 나무 천장을 보니 야외는 아닌 모양인데, 좀 이상하다. 들어와서 누워 잔 기억이 없다.
악취가 났던 것 같은 몸도 뽀송뽀송했다. 꿈? 어디서부터 꿈이지?
현실감의 부재 속에서 가람은 한참이나 아침 햇살 속을 날아다니는 먼지들과 대화했다.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둘러본 결과 가람은 멀지 않은 곳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놓여 있는 자신의 짐을 발견했다.
짐의 형태가 눈에 익다. 아마 어제 있었던 일은 꿈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피곤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계단을 걸으면서 잠들어 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런 모양이다. 잠이 들면서 계단에서 호되게 굴렀는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유난히 욱신거리는 등허리 쪽을 보려고 웃옷을 걷어 올리던 가람은 멈칫했다.
배를 세로로 가르고 있는 가느다란 윤곽.
가람은 제 배에 생긴 생소한 윤곽을 쓸어 보았다. 거북의 등처럼 잘 쪼개어져 있지는 않지만 육안으로 보기에도 꽤 탄탄해 보이는 복근이었다.
언제 생겼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눈으로 확인하긴 처음이라 신기했다.
이제 1년 정도 되었나.
10개월, 그즈음 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산과 바다, 길을 쏘다니고 하루 종일 말을 타며 지내 온 지가 벌써 그렇게 되었다.
여행의 기록은 마음보다 몸에 더 뚜렷하게 남아서 이제 이틀 정도는 말을 타고 달려도 거뜬했고, 땅에서 자도 죽을 만큼 삭신이 쑤시는 일은 없었다.
최근 잡생각이 많이 든다 했더니 몸이 덜 힘들어서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등허리에서 퍼렇고 시커먼 멍을 발견하고 짧게 웃어 버렸다. 원래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이긴 하지만 계단에서 잠이 들어 구르고 다음 날 하는 생각이 몸이 덜 힘들어서라니.
자신도 정말 못 말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통증과는 별개로 누군가가 정성 들여 씻겼는지 몸은 아주 개운했다.
비에 젖어 쿰쿰한 곰팡내를 뿜어내며 버섯이라도 자랄 것 같던 머리카락은 오랜만에 가볍게 찰랑거렸고, 길과 가람의 몸에서 묻어난 각종 오물로 지저분하던 옷들도 뽀송뽀송 햇볕 냄새가 나는 청결한 것들로 바뀌어 있었다.
킁킁, 옷에서 냄새를 맡아 보던 가람은 어쩐지 마을에 온 것이 아주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깨끗한 옷과 고소한 햇살 냄새가 나는 이불이 낯설 정도다.
슬슬 침대를 내려가야겠다 싶어 아쉽게 몸을 일으키려던 가람은 문득 탁자 근처에 놓인 거울을 발견했다.
거울이라니. 아주 오랜만에 보는 물건이었다. 가람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거울을 집었다. 그리고 조금 망설이다가 제 얼굴을 비추었다.
아주 밉게 변하지는 않았을까. 어쩐지 조마조마한 기분이다. 그렇게 들여다본 거울 안에는 조금 낯선 자신이 묘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상이 바뀌어 있었다.
하얗던 피부는 없었다. 살이 빠지고 피부가 타서 그런지 상냥하다, 착해 보인다 소리를 듣던 얼굴에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얌전해 보인다는 평가를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오히려 차갑고 퉁명스러워 보였다.
가무스름한 작은 얼굴에 박힌 가라앉은 눈이 낯설었다. 내가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던가? 평소에, 아무 일도 없을 때는 이런 표정을 지었었나?
아무리 봐도 상냥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가람은 제 얼굴이 낯설어 손으로 쓸어 보다가 빙긋 웃어 보았다. 웃어도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것에 놀라 얼굴에 지어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가람은 한참이나 거울을 바라보았다. 바뀐 얼굴은 낯설다. 그러나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천천히 거울을 내려놓은 가람은 바닥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많이 변했네. 하지만.
“마음에 들어.”
적어도 지금 거울 속의 자신은 강해 보였다. 예전보다.
가만히 거울을 바라보고 있던 가람은 문득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바람 소리가 나도록 몸을 일으키자 그 기세에 놀란 먼지가 나풀나풀 나부낀다.
그러나 가람은 시선도 주지 않고 황급히 손을 뻗어 차림새를 갖추었다.
이렇게 넋 놓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다. 패스의 충전이 끝난 지 오래되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패스를 찾고, 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패스가 모두 충전되어 있을 때의 가람은 누군가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급박하게 행동했다. 지치더라도 멈추거나 쉬는 법이 없었다.
수백 번이나 했던 동작들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머리맡의 복대를 배에 두른 뒤 부드러운 재질의 겉옷을 걸치고 자는 사이 사다 둔 것이 분명한 가죽옷을 걸친다.
가죽옷의 세탁에는 많은 시간이 들었기에 가람은 빨아 입는 대신 늘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뮐러와 웨이크에게 새 옷을 준비해 달라고 청했었다.
처음 보는 가죽옷은 새것임에도 불구하고 길이 잘 든 것처럼 몸에 딱 맞게 달라붙었다.
비록 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거칠거나 딱딱한 면이 전혀 없어 일상복으로 입기에 부담이 없다.
양옆의 허리를 따라 이어진 끈을 잡아당겨 허리에 딱 맞도록 조이고 꼼꼼하게 매듭을 지어 안쪽으로 쏙 집어넣는다. 바지를 꿰어 입고 마찬가지로 벨트 겸 허리 주머니들을 둘러찼다.
안으로 말려 들어간 천 옷의 옷깃을 꺼내고 조금 자라 어깨를 덮는 머리를 다시 단단하게 묶는다. 시계를 차고 가죽 부츠를 단단히 조여 신은 가람은 다시 배낭으로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피 묻은 권총.
이름을 알 수 없는 은색의 권총은 분명 어제 골목길에서 사건을 일으켰던 물건이다.
한국이었다면 증거품으로 압수되었겠지만 이곳에는 그런 제도가 없는 모양인지 권총은 얌전히 가람의 물건들과 함께 놓여 있었다.
닦아 내긴 했는지 이리저리 피가 쓸어 닦인 흔적이 있긴 했지만 그립감을 위해 파내어진 홈 사이에 끼인 핏자국까지 지우지는 못한 모양이다.
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니 마법 물품처럼 보이는 자신의 물건에 함부로 물을 대거나 하지 못했으리라. 가람은 그렇게 추측하며 묘한 표정으로 권총을 바라보았다.
매우 충격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런 기분은 없었다. 그냥 어제의 사실을 건조하고 이성적으로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되었을 뿐이다. 약간의 자책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가람은 망설임 없이 총을 잡았다. 그래도 손이 닿는 부분은 꼼꼼하게 닦아 냈는지 피가 묻어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역시나 남의 피가 묻어 있는 물건을 쓰기엔 조금 꺼림칙해서 적당히 쓰다가 새 총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가람의 메마른 반응에 놀란 것은 먼지뿐이라, 부석부석 날아다니던 그것들은 창틀에 앉아 가람을 지켜보았다.
가람은 이어 가방에서 탄창을 챙겼다.
베녹사스 숲의 일로 가지고 있는 탄환의 대부분을 소비해 버렸기 때문에 남은 탄창은 세 개뿐이었다.
총탄의 보충을 위해 조만간 저쪽으로 한 번 가긴 가야 했다. 소총탄은 완전히 다 써 버렸고, 권총탄도 지금 자신이 쥔 탄창 세 개가 마지막이다.
총탄이 채워져 있음을 확인한 가람은 허벅지에 조이는 형식의 작은 벨트를 매어 탄창들을 허벅지에 고정시켰다. 양쪽에 둘, 허리에 하나.
바로 옆에 돈주머니를 차고 반망토를 둘러 감추고 나면 비로소 채비가 끝난다. 가람은 더 챙길 것도 없이 그대로 방을 나왔다.
“어? 손님! 일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세요?”
방을 나오자마자 복도를 지나던 점원이 가람을 발견하고 싹싹하게 말을 걸었다. 얼굴이 낯익다. 아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던 가람은 오래지 않아 소년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아, 괜찮아요.”
어제 잠들기 직전까지 보았던 얼굴이다.
“다행이네요. 어제 진짜 호되게 구르셨거든요. 그 일행이신 분이 붙잡지 않았다면 어디 하나 부러지셨을지도 몰라요! 덕분에 잠든 손님을 옮기느라 제가 고생을…….”
소년은 가람을 붙잡고 무언가 더 떠들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가람은 은화 하나를 꺼내어 소년의 수다를 멈추게 했다.
“제 일행은 어디 있죠?”
10실버 주화를 확인한 소년은 함지박만 하게 벌어지려는 입을 애써 끌어 모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 갈색 머리 남자분은 아가씨가 들어오시던 날 나가서 안 들어오셨고, 백금발 머리 남자분은 대장간에 다녀온다고 하시더군요.”
뮐러가 대장간에? 웨이크면 몰라도 그가?
가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의 메이스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모르드레드를 다진 고기로 만들었던 덕분에 메이스는 군데군데 날이 나가고 더러워진 상태였다. 아마 그것을 수리하러 간 모양이다.
“배고프시죠?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오늘 정찬이 정말로…….”
가람이 나름 추측하느라 조용히 있자 점원이 다시 말을 걸었다. 가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배가 고프긴 하지만 느긋하게 뭔가 먹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냥 간단하게 들고 가면서 먹을 거나 준비해 줘요. 그리고 여기서 가장 높은 곳이 어디죠?”
모자산맥의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은 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마법사의 탑이다.
여느 도시보다 훨씬 높고 날카로운 그 탑은 높이가 거의 15층 아파트 정도는 될 듯했다. 콘크리트도 철골도 없이 오직 돌과 이곳의 기술만으로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가람은 점원이 싸 준 샌드위치를 씹으며 탑을 올려다보았다. 딱히 출입이 금지되거나 한 곳은 아닌 모양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러고 보니 마법 경매라고 했던가? 그런 게 열린다는 이야기도 있었지.
어제는 너무 지쳐 있어서 도시의 부산함을 이겨 내지 못했지만 한잠 자고 깔끔한 기분으로 둘러보니 생각보다 그렇게 정신없이 혼란스러운 도시는 아니었다.
여관들이 모여 있는 일반 상가 거리가 붐볐을 뿐 조금 외곽으로 나오자 베록 정도의 번잡함이 있을 뿐이다.
점원에게는 자신이 마법사의 탑으로 갔다고 뮐러가 오면 전하라 했으니 그도 곧 도착할 것이다. 가람은 지금 뮐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예상보다 늦자 점점 혼자 들어가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가던 참이었다.
어차피 도시 안에 있는 건물이니 홀로 들어간다고 해도 큰 문제는 생기지 않겠지. 위험한 곳도 아니니까.
가람은 마지막 한 입의 샌드위치를 입 안으로 던져 넣고 손을 털었다. 그 자세나 행색이 나무랄 데 없는 여행자 그 자체다.
어찌나 자연스레 섞여 들었는지 여관에서 소식을 듣고 가람을 찾아 탑으로 온 뮐러가 지척에 두고도 찾지 못했을 정도였다.
뮐러는 두리번거리다가 결국 가람이 홀로 들어간 게 아닌가 싶어 탑으로 들어섰다. 가람이 탑으로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조금 뒤의 일이다.
마법사의 탑은 15층 고층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모든 계단은 돌벽에 바짝 달라붙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형태로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계단 전체를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조각해 둔 덕분에 멀리서 보면 뱀이 탑의 안쪽을 기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세월에 많이 마모되어 섬세한 맛은 없었다.
자연스레 섞여 든 가람은 사람들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꼭대기에 전망대가 있다고 하니 그곳까지 가 볼 생각이었다.
묵묵히 걷는 틈틈이 손목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으며 가람은 패스의 고도를 확인했다.
이 근처에 패스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 바늘이 가리키는 고도가 전에 없이 높았다.
허공에라도 떠 있는 걸까? 떠 있다면 어느 정도 고도에 있는 건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대로 걸어 5층 정도 올라가자 점점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갔다. 가람은 숨이 찼지만 쉬지 않았다. 쉬는 것은 패스를 찾고 나서 해도 되는 일이다.
계속, 계속해서 올라가자 나가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았다. 중간중간 방문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광경들이 층마다 이어졌지만 가람의 시선은 올곧았다.
마침내 15층에 도착했을 때 가람은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앞 머리카락에서 흐른 땀이 턱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15층까지 이렇게 단숨에 올라오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2, 3층에서 탑의 전시물들을 즐기다가 다시 5, 6층을 둘러보고 천천히 쉬어 가며 올라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 이유로 15층의 전망대는 노을이 질 무렵에야 사람들이 찾아왔기 때문에 정오도 되지 않은 지금은 거의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가람은 문에서 조금 비켜서서 손등을 들어 보았다. 거리가 줄긴 했지만 바늘은 아직도 더 높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15층을 올라온 수고에 비하면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가람은 전망대의 가장자리로 걸어가 발돋움을 하고 섰다. 혹시나 육안으로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해가 떠 있는 밖이었다면 눈이 부셔서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이곳은 사방이 천으로 둘러싸인 모자산맥의 안쪽이다.
높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뚜렷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한참 눈을 찌푸리고 손으로 빛을 가려 보며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려고 노력하던 가람은 자신이 점점 앞으로 몸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사고는 언제나 어느 한 곳에 정신을 빼앗긴 순간 일어나는 법이다.
이곳 사람들의 허술한 안전 의식 덕분에 이곳의 난간은 계단 두 개 정도의 높이밖에 안 됐다.
주의한다면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몸을 내민다면 순식간에 균형을 잃을 수도 있는 높이다.
가람은 자신이 지나치게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분명 난간 밖으로 떨어지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무게 중심을 옮기기엔 너무 늦어 있었고, 가람은 패스에 너무 신경을 쏟았던 사실을 후회했다.
하늘을 보던 시야가 순식간에 홱 뒤집어져 아래로 향했다. 뭐든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난간을 쓰다듬듯 만지게 되었을 뿐이다.
너무나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난간을 붙잡으려고 한 행동도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 하는 순간, 가람은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죽는다.
이런 식으로, 이렇게 허무하게? 하늘을 나는 능력을, 아니, 패스가 없잖아. 방법이, 방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