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81화 (81/256)

81화

방법이 있긴 했다. 차원의 문.

그러나 차원의 문을 열려던 가람은 자신의 몸이 부드럽게 공중을 부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앞의 땅이 점점 멀어져 간다.

가람은 뒤집어진 상태로 천천히 날아올라 결국 마법사의 탑 꼭대기로 귀환했다.

아래쪽에서 가람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 누군가가 지른 비명 덕분에 급히 그 모습을 목격했던 뮐러도 간이 쪼그라들 만큼 놀란 상태였다.

그는 가람이 천천히 탑 위로 안착하자 뛰듯이 달려가 가람이 무사한지 확인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탑의 꼭대기라고 해도 꽤 넓어서, 둘러보며 가람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던 차에 비명이 들려 그쪽을 보니 웬 익숙한 여자가 난간을 넘어 떨어지려고 하는 게 아닌가.

“가람, 괜찮습니까? 괜찮아요? 눈이 좀 풀렸는데. 머리를 부딪쳤나? 가람, 나 누군지 알겠습니까?”

너무나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넋을 빼고 있던 가람은 조금 늦게 눈앞의 사람을 인식했다.

“어, 뮐러.”

“알아보니 다행이군요. 좀 조심하지 않고 뭐 했습니까? 진짜 놀라서 소름이 다 돋았습니다.”

“여기 있었어요?”

가람의 말에 뮐러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죽다 살아난 마당에 지금 그게 궁금합니까?”

“아니, 그냥, 있어서…….”

멍한 가람의 대답에 뮐러는 한숨을 푹 쉬었다. 많이 놀란 모양이군.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는 모양이군요. 여기서 볼일이 다 끝났으면 그만 내려갑시다. 할 일이 많습니다. 웨이크도 감옥에서 빼내 줘야 하구요.”

“아.”

“예. 설마, 들르지도 않고 왔습니까? 전 가람이 들렀을 줄 알고 바로 여기로 왔는데. 가람 대신 잡혀 있습니다.”

“저 대신요?”

“예.”

“저 임시 사면이라 거기 있을 필요 없는데.”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웨이크가 안 보이긴 했다. 어제는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경비대에 그대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가람의 말에 뮐러가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가는 가람이 공격한 사람이 정신을 차리는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아아.”

그 시각 웨이크는 어제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심각하게 냄새가 나는 자신의 머리칼에 곤란해하고 있었다.

분명 잠깐이면 될 줄 알았는데 다음 날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가람이 깨어나지 않았다 해도 뮐러는 왔어야 했다.

웨이크가 그렇게 감옥에 버려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가람은 표정 변화 없이 어쩌면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으로 결론 내렸다.

“당분간은 거기 있는 게 좋겠어요. 지금은 바쁘고, 괜찮다면 뮐러가 잠깐씩 가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나 확인해 줘요. 그 남자가 깨어나면 합의하고 여관으로 데려다 놓거나, 여동생의 행방을 알려 주고요.”

“그러죠.”

뮐러는 웨이크에게 심심한 동정을 느끼며 대답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남자가 대화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저기, 대화 다 끝나셨습니까?”

연한 베이지색 조끼와 검은 바지를 걸친 웃는 인상의 남자였다. 제법 미남형의 얼굴에 습관 같은 미소가 매달려 있다. 진남색의 머리칼이 다소 차가워 보일 법도 한데 그 표정 덕분에 전혀 그런 느낌이 안 들었다.

마찬가지로 깊은 녹색의 눈동자가 현명하고 다정한 인상을 준다. 가람은 직감적으로 이 남자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음을 깨달았다.

“아, 혹시 저를 구해 주신?”

“예. 바람 마법사 레미스입니다.”

“아,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요.”

“별말씀을요. 정말 큰일 날 뻔하셨습니다.”

“예, 정말요.”

가람은 더 이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레미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가만히 웃고 있던 레미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사례비는 5골드만 주십시오.”

“네?”

잘못 들었나 싶어 가람이 반문하자 레미스는 여전히 부처님처럼 인자하게 미소 띤 얼굴로 다시 말했다.

“사례비는 5골드입니다.”

가람은 황당했지만 담담히 주머니에서 5골드를 꺼내어 레미스에게 건넸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 챙기는 레미스의 태도에는 능숙함이 배어 있다.

돈을 건네고도 황당해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자 레미스가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여전히 상냥한 표정이었다.

“물 마법사와 바람 마법사는 벌이가 잘 안 되는 마법사의 대표적인 직업이거든요. 뭐, 물 마법사야 그래도 여행길에서 물을 만들어 내니 사막 국가로 가면 몸값이 높아지지만 바람 마법사는 정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렇게 가끔 벌이가 될 때 벌어 두지 않으면 굶어 죽습니다. 보아하니 그 가죽옷, 한두 푼 하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5골드 정도면 싼 것 아닙니까? 너무 그런 표정 하지 마십시오.”

확실히 가람에게는 그깟 5골드는 돈도 아니다.

실제로 가끔 동전으로 된 돈들이 무거우면 버려 버릴까 싶을 정도였지만 늘 뮐러가 기겁하고 뜯어말리는 통에 그러지 못하고 있을 뿐, 바닥의 돌만큼이나 하찮은 물건이다.

그나저나, 남자의 말을 듣다 보니 좋은 생각이 났다. 마을에 패스가 있으면 좋은 점은 주변의 조력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험난한 산이나 계곡, 얼어붙은 땅 따위로 가야 한다는 점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구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누가 목숨을 내놓고 거기로 간단 말인가?

만약 가이드를 구한다고 해도 가람에게는 별 쓸모가 없을 것이다. 지름길이나 안전한 길만을 알려 주는 가이드는 가람이 절벽을 타자고 말하는 순간 모든 걸 때려치울 테니까.

가람은 새삼 뮐러와 웨이크의 소중함을 느꼈다.

“화끈하게, 돈 한번 벌어 보고 싶지 않아요?”

생활고에 찌든 레미스(남, 32세 바람 마법사)는 그 말에 솔깃한 얼굴로 다가섰다. 가람은 그에게 미소 지으며 달콤하기 짝이 없는 제안을 했다.

“길어야 3일. 나를 도와주면 천 골드를 드릴게요.”

그 속삭임에 더해 가람은 실제로 눈앞에 네모반듯한 천 골드 주화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기까지 했다.

레미스는 꼬리가 있다면 격렬하게 흔들고 있었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난생처음 보는 고액 금화에 넋이 나간 그에게 악마의 유혹처럼 가람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어때요, 하실 건가요?”

눈앞의 번쩍이는 금화, 찬란하디찬란한 그 빛에 레미스는 품에 숨겨 놓았던 마법 계약서까지 꺼내어 그 자리에서 덜컥 계약을 맺었다.

바람 마법사 인생에 이런 대박은 쉽게 찾기 힘든 일이다. 이건 기회였다. 살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더니! 드디어 지금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의 끈은 레미스에게 여태껏 겪어 본 적 없던 혹사의 지옥을 보여 주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람은 그와 하루 종일 도시의 위쪽을 날아다니며 뭘 찾는지 이 잡듯 허공을 뒤져 댔기 때문이다.

결국 노을이 질 무렵 완전히 탈진한 그에게 가람은 담담히 말했다.

“안쪽에는 없는 모양이네요. 위로 가 보죠.”

“위요?”

믿을 수 없다는 그 되물음에는 경악이 섞여 있었다. 모를 리도 없는데, 가람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네. 이 모자산맥의 꼭대기요. 꼭대기엔 뭐가 있나요?”

곁에서 실실 웃으며 레미스의 고생을 지켜보던 뮐러가 재깍 그 질문을 받는다.

“저 위엔, 신전이 있죠.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랍니다. 오르기가 쉽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그래요?”

그 말은 수긍과 의문인 동시에 레미스를 향한 지시이기도 했다. ‘그렇다는데, 어서 가죠.’라는 뜻의 그 시선에 레미스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급한지,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정말로 마소도 이렇게 부려 먹히진 못할 것이다.

마법을 쓰려면 체력과 정신이 많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레미스는 정말로 오늘 하루 종일 영혼의 엑기스까지 빨아먹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가람, 오늘은 쉬고 내일 올라가는 게 어떻습니까? 마법은 마법사의 체력과 정신력이 중요합니다. 지친 상태에선 사고가 생길 수도 있어요.”

보다 못한 뮐러가 슬쩍 레미스를 도와주려 했지만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그 고갯짓에 말없이 뮐러를 응원하고 있던 레미스는 크게 좌절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올라만 가요.”

뮐러는 어쩔 수 없다는 표시로 작게 고개를 저었고 신호를 알아들은 레미스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 짜내어 가람과 뮐러를 산맥 위로 날려 보내는 것에 집중했다.

작은 태풍을 닮은 바람이 세 사람을 감싸고 휘돌면 그 중앙에 형성되는 상승 기류를 타고 올라가는 식이다.

뮐러는 발이 땅에서 뜨기 시작하자 바짝 긴장했지만 가람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것을 보며 레미스는 새삼 감탄했다.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이렇게 허공을 날아오르는 것은 숙련되지 않았다면 바람 마법사 본인조차 잔뜩 긴장하는 일이다.

높이 수백 미터의 하늘에서 마법사의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르니 두렵고 꺼려지는 일임이 당연하다.

그런데도 가람은 위험할지 모른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무모할 정도로 그 무언가를 찾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목숨을 도외시한 저돌적인 수색 작업이다.

산맥의 높이는 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기에 세 사람은 중턱, 그러니까 모자의 주름 사이사이에 안착해 쉬어 가며 산을 올랐다.

그동안 뮐러는 자신의 풍부한 잡학 지식을 가람에게 뽐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요즘 신전이니 신이니 하는 건 다 사라진 지 오랩니다.

전쟁 때 모조리 다 쓸려 나갔죠. 워낙 부패해서 종교에 대한 불신이 매우 팽배했고요. 세상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도 신이란 작자가 말이 없으니, 믿어 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사실 믿는다는 것도 저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입니다. 제가 아주 어릴 때 종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거든요.”

“그럼 아무도 종교를 믿지 않나요?”

“믿지 않죠. 전 누가 종교를 믿는다고 하면 정말로 웃어 버릴 것 같습니다.

아니, 사실 그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한때 있었다는 기도이니 뭐니 하는 행위도 그냥 요행을 바라는 것 아닙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자신에게 집중해도 모를 판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놈에게 빌어 댄다니, 솔직히 진짜 멍청하다고 생각됩니다.

아, 어― 혹시 가람의 나라에는 신을 믿습니까?”

가람은 문득 친구를 따라 몇 번 가 봤지만 주말마저 학원에 다니게 되어 결국 갈 수 없었던 성당을 떠올렸다.

그리 나쁜 인상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조용했고, 조금 지루했지만 평화로운 분위기였던 것 같다. 색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마치 외국에 온 것 같은 근사한 기분까지 주었었다.

그러나 신을 믿은 적은 없다. 솔직히 그냥 별생각이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관심이 아예 없었으니까.

“아뇨.”

가람의 대답에 뮐러는 크게 안도했다.

“말하고 나니 혹시 가람의 문화에서는 신을 믿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찔끔했지 뭡니까. 뭐, 어쨌거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어, 제가 하려던 이야기는 이 모자산맥 꼭대기, 신전의 성녀에 얽혀 있는 이야기입니다.”

“말해 봐요.”

뮐러는 목청을 가다듬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레미스를 흘긋 바라본 뒤 조용조용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람에게 이 땅의 신기한, 어떤 문화의 유래 따위를 설명할 때 자주 내는 이야기용 목소리였다.

“예전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능력 좋고 잘생겼지만 한 가지 흠은, 여성 편력이 아주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여인 또한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왕비나 후궁 같은 귀족 여자들은 그의 눈에 그냥 평범하기만 했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성녀를 만난 겁니다.”

“반했군요.”

“아뇨, 아직 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흥미를 느낀 정도였죠. 사실 말이 성녀지, 신님 전용 편지지라고 보면 됩니다.

고위 신관이 말하면, 성녀가 그 내용을 신에게 전해 주는 거죠. 사실 그것도 믿기지 않습니다만. 뭐, 일단 전설이 그러니 그런 모양이죠.

어쨌거나, 성녀는 편지지가 될 때마다 신열이라고 불리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 모양입니다.

그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오직 봉사 정신으로 인간을 위해 늘 신과 교신했던 거죠.”

“이제 반했나요?”

뮐러는 잠시 가람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가람이 외로운가?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하는 이야기는 소녀들이 좋아할 만한 로맨틱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예. 뭐, 한눈에 반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흥미가 점점 강해져서 애착으로 바뀌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성녀에 대한 감정이 사랑으로 바뀔수록 왕은 점점 고통스러워졌습니다. 그냥 흥미로울 때는 고귀하고 특별하게만 보였던 성녀의 고통이 사랑하는 여인의 고통이 되니 견디기 힘들었던 거죠.

성녀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그 고통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가니 견딜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왕은 성녀에게 편지지 일을 그만두라고 했죠.”

“그만뒀나요?”

“뭐, 거의 그럴 뻔했던 모양입니다. 신전 측에서 알아채고 득달같이 말리지 않았다면 그렇게 됐겠죠.

신전은 소중한 편지지를 모자산맥의 신전 꼭대기에 유폐했고, 성녀는 신전의 꼭대기에서 지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왕은, 뭐 신전과 다투다가 세가 기울어져 망했다더군요.

그다음 왕은, 평소 왕에게 박대받던 왕비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 그대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 대 왕을 해 먹다가 대륙 전쟁 때 지금과 같은 나라가 되었고요.

아, 저게 그 신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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