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그렇게 말한 꼬마는 사방을 꼼꼼히 둘러보며 누군가 자신들을 보고 있진 않은지 살폈다.
기둥의 위치나 각도 덕분에 꼬마가 서 있는 위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교묘하게 가려진 곳이었다.
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신중하게 구나 싶어 가람도 말없이 꼬마를 보고 있었다.
아주 잠시나마 패스에 대한 근심을 잊게 해 준 보답으로 가람은 꼬마가 보여 주는 것이 무엇이든 만족할 만큼 감탄해 주겠다고 결심했다.
꼬마는 몸을 숙이더니 기둥의 한 귀퉁이를 떼어 냈다. 당당한 문화재 훼손에 가람이 깜짝 놀라는데 떼어져 나온 돌조각이 누군가가 다듬은 것처럼 매끈했다.
그것은 아주 잘 감추어져 있는 어떤 장치였다.
워낙 낮은 위치에 있는 데다 발견하기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감추어져 있었기에 낮은 시야를 가진 호기심 많고 뒷일 생각하지 않는 꼬마 웨이크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발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귀퉁이는 총 네 개였는데, 대체 어떻게 찾았는지 신기할 정도로 잘 감추어져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떼어 낸 꼬마는 이번에는 위치를 바꾸어 떼어 낸 돌조각을 끼워 넣었다.
가람은 꼬마가 첫 돌조각을 떼어 낼 때부터 든 어떤 예감에 숨죽이고 그 모든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꼬마가 돌아본 순간, 가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조각나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잘 맞물려 있던 기둥의 일부분이 소리 없이 아래로 빠지더니 그 틈으로 기둥 안의 공간이 드러났던 것이다.
밤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둥 안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히 계단이었다.
위쪽으로 이어지는 둥근 계단. 기둥의 거대함은 계단을 감추기 위함이었나.
모두가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꼬마 웨이크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씨익 웃었다.
“어때요? 대단하죠?”
정말로 운이 좋았다. 이렇게 상황이 풀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꼬마가 다가왔을 때 귀찮다며 쫓아 버렸다면 상황이 어디까지 꼬이게 되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가람은 꼬마에게 거듭 감사했고, 으쓱대던 꼬마 웨이크는 막상 가람이 민망할 정도로 칭찬을 해 대자 오히려 부끄러워하며 코끝을 찡긋거리더니 덕분에 살았다며 머리를 쓰다듬는 가람의 손을 피해 몸을 뺐다. 뺨을 따라 쑥스러움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정말 고마워.”
“별말씀을요. 흠흠, 별것도 아닌데요. 뭐, 저한테는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죠. 이런 거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요. 흠흠, 그런데 이걸 찾고 있던 거였어요?”
“음.”
어디까지 말해도 될지 알 수 없어 가람이 얼버무리자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꼬마가 다시 질문했다.
“누나, 저기 들어갈 거예요?”
웨이크를 닮은 갈색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응시해 온다. 질문이긴 했지만, 그 의도는 분명했다. 전신으로 재밌겠다 외치고 있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나도, 나도!’ 하고 따라붙을 것 같았다. 아니, 분명히 따라붙는다. 가람은 아이의 다음 말을 이미 들은 것 같았다.
유적지이니 별것 없을 거라고 생각되었지만 그래도 밤중에 시커멓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구멍은 충분히 위험해 보였다.
가람이 구멍을 보며 망설이는 그 찰나의 시간 동안 눈치가 백 단인 꼬마 웨이크는 이미 상황을 다 파악했다. 이 누나가, 이렇게 나온다면 다 방법이 있었다.
사실 꼬마 웨이크가 이 구멍을 발견한 것은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정오쯤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대단한 것을 발견해 낸 자신에게 도취되어 한껏 고양되었던 웨이크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더럭 겁이 났다.
꼬마들의 용기란 누군가 지켜봐 주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 신비한 무언가인지라 혼자서는 도무지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를 구멍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부모님께 알리거나 하면 절대 못 들어가도록 할 것이 분명해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쉬움을 달래며 혼자만의 비밀 장소를 발견해 낸 것 정도로 만족하려던 차에 가람이 나타난 것이다.
혼자서는 무섭지만, 가람과 뒤의 두 남자가 함께 들어간다면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기회였다.
“누나, 저 데려가요. 설마 두고 갈 거 아니죠? 제가 찾은 곳이니까 당연히 저도 가야죠!”
매우 타당한 말이었으나 가람은 ‘엄마에게 가서 허락받고 오렴.’이라 말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 내었다.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든데 꼬마까지 따라붙는다니.
게다가 이 모험심 강한 꼬마가 얼마나 사고를 칠지 생각하면 눈앞이 어찔해졌다.
가람은 최대한 조용하게 꼬마를 단념시킬 방법을 찾았지만 꼬마는 이미 그런 생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조용히 경고했다.
“소리 지를 거예요. 여기에 구멍 있다고. 그럼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못 들어가게 할걸요? 누나, 나 두고 가지 마요. 네? 그냥 안에 따라 들어갔다 오기만 할게요.”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어쩔 수 없다. 가람은 구멍 앞을 가리듯 서 있는 뮐러에게 턱짓했다. 비켜 주라는 뜻이었다.
뮐러는 순식간에 10년은 늙어 버리더니 정말로 싫은 일을 하는 것처럼 구멍 앞에서 비척비척 물러섰다.
꼬마는 갑자기 길을 터 주는 뮐러와 레미스, 가람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발견자에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영광을 줘야지.”
가람이 그렇게 말하자 꼬마 웨이크의 얼굴이 결연하고 당당하게 굳어졌다. 어리긴 했지만 웃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 표정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긴 했지만, 가람은 조용히 꼬마의 뒤로 따라붙었다.
꼬마 웨이크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모든 신경을 구멍 속으로 쏟으며 신중하게 한 걸음씩 내디뎠다.
눈으로 보일 정도로 바짝 긴장한 그 작은 등은 약간의 비장함까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구멍은 꼬마 웨이크가 무릎을 꿇고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의 크기였고, 가람이라면 완전히 몸을 움츠려야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였다.
덕분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완전히 무방비나 마찬가지였다. 꼬마 웨이크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신중한 태도로 내부를 탐색했다.
꼬마 웨이크의 첫 모험이 마침내 시작되려는 순간, 강렬한 냄새가 꼬마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어딘가 익숙한 냄새라는 생각과 동시에 구멍 안으로 들어서려던 몸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거, 엄마가 주던 차랑 비슷한 냄새인데…….
뮐러는 가람이 차분하게 꼬마를 기절시키는 모습에 소리 없이 경악했다.
뮐러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꼬마 웨이크의 몸을 홱 뒤집더니 숨은 정상적으로 쉬고 있는지, 어디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살피고는 망토를 벗어 그 위에 뉘어 놓았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영락없이 망토 위에서 잠에 빠진 모습이었다.
“가람, 지금 이게 무슨, 무슨 짓입니까? 대체 뭘 뿌린 겁니까?”
“베녹사스에서 사냥꾼들이 준 거예요. 원래 적은 양을 차에 타서 마시면 불면증에 좋은데, 웨이크가 말하기론 이렇게 쓰기도 한다더군요. 한 꼬집 정도 뿌렸을 뿐이니까 위험하진 않을 거예요. 몸에 해로운 성분은 아니라고 했고.”
“그래도, 아이에게 이런 걸 쓰다니.”
뮐러가 씁쓸한 표정으로 꼬마 웨이크의 뺨을 다독이더니 다시 한 번 호흡과 심박수 등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가람도 달가운 일은 아니었던지라 착잡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래도 따라오는 것보다는 나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람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말인지 꼬마를 위한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꼬마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했으니 그걸로 만족할 생각이었다.
“두 분은 여기에서 구멍을 막고 계세요.”
늘 있던 일이라 뮐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스는 어색한 태도로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가람은 마지막으로 늘어져 있는 꼬마에게 짧게 시선을 준 뒤, 칠흑 같은 어둠이 들어찬 구멍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뮐러는 가람이 구멍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이 그렇게 가람을 초조하게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을 찾고 있을 때의 가람은 마치 딴사람 같다.
그녀가 갖고 있는 상냥함이나 즐거움, 친근함 따위가 어딘가로 줄줄 새어 나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예전에는 좀 덜했던 것 같은데, 역시 베녹사스의 그 남자가 원인인 걸까. 웨이크는 몰라도 뮐러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실력이 없다 해도 뮐러는 마법사다. 마법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베녹사스의 그 남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마법사였다. 그라면, 불가능하다는 불사의 마법도 익히고 있을지도.
가람의 초조함은 그 남자 때문인가.
가람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무슨 사이인지도 알려 주지 않았으며,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이 발을 빼야 할 때였지만 뮐러는 그러기가 힘이 들었다.
지금까지 가람에게서 도움받은 것들을 안면 몰수하고 저버린다 하더라도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이미 너무 깊은 곳까지 와 버렸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가람이 저렇게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위험하다면 가람은 분명 말해 줄 사람이었으니까.
뮐러의 그런 믿음을 뒤로하고 가람은 허리춤의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어 온통 새카만 기둥 내부를 비춰 보았다.
손전등의 곧은 빛이 갑작스러운 침입자에 놀라 너울너울 몸을 일으키는 먼지를 관통한다.
몇 백 년간 쌓였음이 분명한 먼지라, 가람은 그것을 들이켜고 싶지 않았으나 마스크도 없는 상태라 한껏 들이마시고 거하게 기침을 했다.
폐가 끊어질 것 같은 기침 소리가 가신 뒤 가람은 불빛을 위로 세워 보았다. 얼마나 높은지 빛이 미처 끝까지 닿지도 못했다.
아득한 어둠은 마치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기기묘묘한, 입이 찢어지고 팔다리가 몇 개씩이나 달린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가람은 애써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둥 안에 만들어진 원형 계단은 그대로 돌을 깎아 만든 물건인 듯했다. 딱히 함정 같은 것은 없어 보여서 가람은 그것이 아직 견고하다는 확인만 하고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무게를 싣기 직전, 갑자기 뇌리를 관통하는 불길한 예감에 멈칫했다.
언제나 다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방심하면 안 된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고, 아무것도 없었으면 했지만 의외로 아주 위험한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가람이 멈칫해 발을 떼는 순간, 계단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가람의 구두 앞코를 아슬아슬하게 베고 지나갔다.
몇 백 년의 세월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리한 칼날이었다. 계단에 무게가 실리자 순식간에 날이 튀어나왔다.
세로로, 그리고 가로로 튀어나온 칼날은 각각 발목과 발바닥을 가르는 모양새다. 순식간에 발을 잃을 뻔한 가람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이대로는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밋밋한 돌벽에는 기관을 해제하는 스위치나 단추는 없어 보였다.
계단을 깎아 만든 후 남은 부산물인 듯한 돌멩이 몇 개만 굴러다닐 뿐.
기둥이라는 공간의 협소함을 생각하면 그렇게 섬세한 기관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람은 그렇게 유추하며 몇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레미스의 마법으로 날아서 가는 건 금방 제외되었다. 가람 혼자 올라가기도 좁은 계단이다. 레미스가 자신을 보며 통제하기엔 지나치게 좁았다.
이 기둥을 모두 물로 채워 헤엄치듯 올라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커다란 기둥을 물로 채우려면 적어도 작은 호수만 한 양의 물은 필요할 것이다.
뮐러의 마법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다.
분명히 방법이 있을 텐데, 누군가 올라가긴 했으니 계단을 만들어 두지 않았겠는가.
고민하던 가람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탄성을 터뜨렸다. 생각해 내고 나니 정말로 간단한 방법이었다.
정말로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가람은 일단 시도해 보기로 했다.
세월에도 불구하고 돌은 여전히 그 무게를 간직하고 있다. 가람은 그 무게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손전등을 내려놓고 사방에 늘어선 돌을 주워 계단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 둘씩 올려 둘 때마다 가람의 숨이 긴장으로 빨라졌다.
마침내 적정 무게를 넘어선 순간, 칼날이 튀어나왔다.
하나의 계단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마치 뱀의 비늘이 일어서는 것처럼 촤르륵 연속으로 튀어나온 칼날들은 곧 서로 맞물려 계단 위로 포개어졌다.
옆에서 보면 니은 자의 계단 위에 기역 자의 칼날이 덧덮고 있는 모양새다.
칼날이 중앙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가장자리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가능했다. 돌계단이 칼날의 계단을 입어 시리게 빛난다.
가람은 천천히 기역 자 모양의 칼이 덮고 있는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다.
흔들림 없이 발밑을 든든하게 받쳐 주는 느낌이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해 주는 듯하다.
그러나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모서리 부분은 아직 칼날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계단은 아득하다.
이제부터는 정신력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