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84화 (84/256)

84화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어둠 속에서 칼을 밟고 올라간다.

손전등의 한 줄기 빛은 폐소 공포증을 더해 주는 효과밖에 없었다. 발밑에서 번들거리는 칼날들이 흉악한 짐승의 이빨처럼 느껴진다.

가람의 걸음을 기억하듯 턱 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칼날 위로 떨어져 짧게 빛났다.

가람은 온몸으로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긴장과 두려움은 지나치게 많은 호흡을 필요로 했고, 이따금씩 먼지를 들이켜 새된 기침을 할 때마다 가람은 혹시나 발을 헛디딜까 기겁했다.

벽을 짚고 간다면 좀 더 사정이 나았겠지만, 괜히 벽을 더듬고 가다가 어떤 기관을 또 건들지 몰랐기 때문에 가람은 오직 두 다리만을 이용해 기둥을 오르고 있었다.

기둥 안에는 횃불이나 기타 발광체를 피웠던 어떤 흔적도 없었다. 그 흔한 촛대 하나 없어서, 가람은 대체 이 기둥을 누가 오갔을지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어둠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 손전등의 짧고 날카로운 빛에 흩어지긴 했지만, 먼지와 어우러진 어둠은 어떤 질량감마저 느끼게 했다.

꺼림칙한 기분이다. 목에 너무 힘을 줘서 두통마저 일 것 같았다.

땀을 흘린 옷은 이제 완전히 푹 젖었고, 보이지도 않는 어둠을 꿰뚫어 보려 부릅뜬 눈은 빠질 것만 같다.

먼지에 유린당한 폐는 뽑아내어 탈탈 털어 보고 싶을 정도로 근질근질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도 눈앞을 가리는 어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얼마나 올라왔는지,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더욱 고달프다.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사방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둥 안은 너무 조용해서 자신의 숨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렸다. 땀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았다.

간혹 어둠 속에서 환영 같은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면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그러나 전진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미는 사람 없으나 떠밀리는, 이끄는 사람 없으나 이끌리는 삶.

숨이 차오르고 뺨이 벌겋게 달아올라 뜨거운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도 가람은 몸속에 서늘하게 가라앉는 고독감을 맛보았다.

뮐러와 웨이크, 이곳에서 만난 좋은 친구들은 도움을 요청한다면 두말 않고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홀로 싸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자신은 이런 것에 조금 더 익숙해져야 했다. 빨리, 익숙해져야 했다.

그래야 저 두 사람을 보내 줄 수 있을 테니까. 충분히 혼자서도 괜찮아지면 그 둘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자신을 돌봐 주었으면 하는 목적으로 함께하게 된 두 사람을 오히려 자신이 챙기고 있는 상황이 아이러니하지만, 일행을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였다.

계속해서 올라가던 가람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름을 느끼고 손전등을 세워 비추어 보았다.

막연하기만 하던 어둠 대신 확실하게 느껴지는 단단한 무언가가 있었다. 몇 계단 더 올라가 손을 뻗어 보니 차가운 돌이다. 지붕인 것이다.

그 앞에는 척 보기에도 문처럼 보이는 형태의 조각물이 있었는데, 섬세하고 아름다운 세공이긴 했지만 워낙 복잡해서 무엇을 세공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람은 문을 조금 밀고, 당겨 보다가 아래쪽의 자물쇠를 발견했다. 산화가 진행되어 자물쇠라고 하기도 뭣한 물건이라 가람은 힘주어 당기는 정도로 그것을 툭 끊어 냈다.

그리고 문을 밀자 좀 뻑뻑하긴 하지만 별 무리 없이 열렸다.

그런데, 이 방은 성녀의 방이 아니었던 걸까? 어째서 자물쇠가 밖에 걸려 있었던 걸까.

손전등으로 비춰 보니 방은 성녀의 방이 확실해 보였다. 조금 소박한 맛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물건들이 제법 소녀적이다.

다 갈라지고 비틀어지긴 했지만 우아한 곡선의 화장대와 침상, 거미줄이 쳐져 있는 캐노피는 물건들의 소싯적을 떠올리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가람은 일단 방 안에 먼지가 부옇게 쌓여 있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살아 있는 괴물이나 무언가 기괴한 것들이 돌아다니지는 않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추측하건대, 이 넓은 공간은 분명 기둥이 떠받들고 있는 둥근 돌 지붕의 내부일 것이다. 창문 하나 없는 이곳은 유폐라는 용도에 더없이 적합해 보였다.

유폐든 뭐든, 가람과는 별로 상관없는 말이다. 이곳이 돌 지붕의 내부라면 패스는 이곳 어딘가에 있음이 분명하다.

낡은 성녀의 물건들은 마치 잘 관리된 무덤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유쾌하지 못한 장소였다.

가람은 캐노피가 드리워진 침대에 흘긋 시선을 주고 방의 곳곳을 뒤져 나갔다.

사실 방이라고 해도 하나의 집이나 마찬가지라, 인간이 사는 데 필요한 대부분의 물건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벽에는 그림까지 걸려 있었는데, 무엇으로 그렸는지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곰팡이가 피거나 상한 흔적이 없었다.

가람은 일단 그림을 제쳐 두고 성녀의 옷방, 서재, 목욕탕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몇 개의 방을 뒤지고 장롱이라는 장롱은 다 열어서 속을 확인했다.

그러나 패스는 없었다. 분명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패스가 없다. 가람은 난폭해지려는 자신을 가라앉히려고 일부러 입술을 깨물었다.

두려움은 없었다. 패스가 이곳에 없는 것에 대한 실망과 짜증만 치밀었다.

가람은 화를 내는 대신,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꼼꼼하게 성녀의 베개까지 뜯어 안쪽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는 없다. 방 안에 멀쩡한 것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가람은 마지막으로 성녀의 방 벽에 걸린 거대한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그림 뒤? 그림 속? 아니면 액자 틀 뒤?

그림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그려져 있었다. 아마 예전 신전의 어떤 건물을 그린 것인 듯했다. 중앙에는 다소 커다란 문이 그려져 있었지만 워낙 변색이 많이 되어 원래 무슨 빛깔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잘 그린 그림이었다. 입체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커다란 문은 진짜 튀어나와 있는 것 같고 손을 대어 밀면 정말로 열릴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가람은 그것이 느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문은 아주 약간이지만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문의 윤곽을 따라 마치, 진짜 문처럼.

설마.

가람은 문의 손잡이를 잡아 보았다. 미친 소리 같지만, 그림의 문손잡이는 정말로 잡을 수 있었다. 가람은 그림의 문을 잡고 천천히 밀었다.

그러자 뒤에 숨겨져 있던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어두운 통로, 어두운 길. 이제 무섭지도 않다.

이토록이나 꼭꼭 숨겨 두었던 것이 무엇일지 가람은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이 길의 끝에는 아마도.

가람은 다시 신중하게 통로를 걸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일은 없었다. 일상적으로 사용되었던 길인 듯 벽에는 다 탄 횃불의 횃대와 촛대가 꽂혀 있다.

길을 걸어 들어갈수록 패스의 바늘도 점점 짧아졌다.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마침내 가람은 작은 방 앞에 도착했다. 온통 신성한 세공으로 가득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생각보다 아주 작은 방이 드러났다.

두세 평 남짓 될 만한 작은 공간은 그 내부가 온통 마법진 같은 기묘한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바닥의 둥근 진 중심에서 가람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은 체구의 유골.

죽을 때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넝마가 되어 뼈에 간신히 매달리듯 붙어 있을 뿐이고, 백골임에도 불구하고 듬성듬성 남아 있는 긴 머리칼 몇 뭉치가 유골의 주인이 여성임을 증거하고 있다.

이 유골은, 아마도 성녀일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를 탑 안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 버렸고, 그녀는 여기에서 생을 마감했다.

뼈가 부러지거나 한 흔적이 없는 것을 보니 자연사 같았다. 그로 미루어 보면 이곳은 기도실 같은 공간인가.

유골은 깍지를 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다. 마지막까지 기도를 했던 걸까?

가람은 도저히 손을 댈 수는 없어서 발로 툭 밀어 유골을 쓰러뜨렸다. 유골이 쓰러지며 먼지를 일으켰지만 가람은 이제 그런 건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쓰러진 유골의 갈비뼈 안에서 빛나고 있는 패스를 찾았으니까.

마침내 손에 넣은 패스는 40패스였다. 고생에 비해서는 많은 양이라고 해야 할까.

이제 아까 그 칼날의 계단을 다시 걸어 내려가기만 하면 끝난다. 모처럼 도시이니 푹 쉬어야지.

베녹사스에서 입었던 상처들도 치유 마법사에게 보여서 아주 싹 낫게 해야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손등을 바라보고 흐뭇하게 미소 짓던 가람은 다음 순간 숨도 못 쉴 만큼 놀라 얼어붙었다.

“찾던 것은 손에 넣었나요?”

가람은 기겁했지만 몸은 습관처럼 움직여 반사적으로 총탄을 쏘았다. 좁은 공간에 울리는 총성에 귀가 멍멍했다.

뒤늦게 아차 했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멀쩡했다. 총탄의 파괴력으로 형체가 조금 흩어지긴 했지만 다시 빠르게 모여들고 있었다. 수증기를 때린 것 같았다.

제단 한쪽에 서 있는 푸르스름한 형체의 반투명한 여자.

그녀는 기품 있는 태도로 희미하게 미소 짓고 치맛자락을 끌어 올리며 인사했다.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반가워서 그만. 당신은, 이방인이군요.”

가람은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기도실의 희미한 유령. 소름이 오싹 돋는 상황에서 가람은 간신히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당신은 성녀구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가람은 스스로의 담담한 대응에 감탄하고 있었다. 귀가 빠지고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으면서도 목소리는 담담하다.

하지만 푸른 인영은 가람의 진짜 속내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빙긋 웃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연기 같은 형상이라 섬세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의 연기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맞아요. 제가 성녀예요.”

담담한 소개였으나 가람은 제대로 된 대답을 꺼낼 수 없었다. 사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하다.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처음 만나는 사람 등 수십 가지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지만 죽은 사람과는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려 했지만 목욕탕 수증기 같은 형상의 성녀는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이 성녀라고 소개했으니 자신도 소개를 하는 것이 좋을까?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라면 그것이 올바른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성녀이기 이전에 귀신이다. 악령일지도 모른다. 이곳에 남은 흔적만으로도 성녀가 죽을 때 악령이 되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섣불리 이름을 알려 줘도 될까? 아니, 그 전에 대화를 나누어도 될까.

차분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악령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죽은 사람인데.

가람은 불가해한 혼란 속에서 습관처럼 일단 평범한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태도를 취했다.

“저는 가람이에요.”

상투적인 어조의 인사에 성녀는 입가의 미소를 더욱 진하게 했다.

“이방인이죠?”

그렇게 단정한 성녀는 가람이 미처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유추하기도 전에 빠르게 뒷말을 이었다.

“당신에게서 다른 세계의 냄새가 나요. 그리고 뭔가, 아주 맛있는 냄새도 나고요. 당신, 악마들이 좋아하겠군요.”

살아 있는 사람은 같은 사람에게 맛있는 냄새 운운하지 않는다. 역시 귀신과 평범한 대화는 무리였다.

가람은 성녀가 순식간에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덤벼들 것 같아 바짝 긴장했다.

귀신에겐 총이 통하지 않는 것 같던데? 뭔가 주문 같은 것 없나? 기도라도 해 볼까?

하지만 상대가 성녀다. 기도라면 오히려 그녀가 더 뛰어날 터다. 밥 먹고 기도만 한 사람이 아닌가. 죽었긴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말아요.”

성녀는 소리 없이 후후 웃었다. 기묘한 울림 같은 웃음에 가람은 성녀의 이야기를 귀로 듣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낯설지 않은 음역이다. 차원 문을 열 때마다, 차원을 건널 때마다 듣던 기묘한 소리. 성녀의 목소리는 그 기이한 음역을 닮아 있었다.

웃는 것을 보니 아직까지는 평화적으로 나올 모양으로 보였으나 가람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일단, 간단한 질문을 던져 대답하는지 봐야겠다. 그걸로 상대가 얼마나 평화적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 왜 여기 있죠?”

“음? 그게 궁금한가요?”

되묻는 성녀는 소녀처럼 명랑했다.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고, 죽음의 순간조차 감금당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도저히 명랑할 수 없는 조합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유순하고 발랄한 유령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그 사실에 별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성녀는 유령이었고, 가람의 유일한 무기인 총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긴장을 풀기엔 가람은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말 돌리지 말아요.”

악령 같은 게 아닐까 하고 긴장하는 가람을 보며 성녀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뱅그르르 돌았다. 스스로의 가벼움을 뽐내는 것 같은 동작이다.

실제로 그녀는 가람이 숨을 좀 세게 내뿜기만 해도 갖추고 있는 형상에 구멍이 파이고 흩어졌다. 물리력으로라면 바람 한 줄기만도 못한 전투력이었지만 얕볼 수 없다.

가람은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무언가 기묘한 재주를 부릴지도 모른다.

여전히 날이 서 있는 가람을 보며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짓더니 다소 힘 빠진 기색으로 말했다.

“당신이 부수고 들어온 그 자물쇠는 보통 자물쇠가 아니에요. 세월에 낡긴 했지만, 안에 있는 나는 절대로 부술 수 없는 물건이죠. 그 자물쇠는 봉령의 자물쇠. 영혼의 감옥을 만들어 내는 끔찍한 물건이에요.”

눈을 질끈 감고 부르르 떠는 모습이 정말로 치가 떨린다는 투다. 가람은 낡고 보잘것없던 자물쇠를 떠올렸다.

세월에 물어뜯겨 그 명칭에 비해 지나치게 초라한 꼴이 된 그 물건은 가람이 아무렇게나 던져둔 잡동사니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물건이라면 가져가 볼까 하고 생각하는데 성녀가 고개를 젓는다.

“그만둬요. 너무 낡아서 다시 채우려고 하면 부스러질 거예요.”

가람은 성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생각이 읽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 생각과 동시에 성녀는 가볍게 긍정했다.

“맞아요. 당신 생각은 다 흘러 들어오거든요.”

새삼 유령과 이야기하고 있다는 실감이 난다. 가람은 발끝부터 긴장을 재무장하며 얼굴을 굳혔다.

앙다문 가람의 표정에 성녀가 곤란한 기색으로 팔짱을 끼더니 치마를 나풀거리며 다시 재단의 한쪽에 앉아 턱을 괴었다. 긴장감이라곤 없는 태도다.

“특별히 훔쳐보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당신 영혼의 파장이 너무 강렬해서 흘러 들어오거든요.”

“당신이, 유령이라서 그런 건가요?”

“아뇨, 정확히는 제가 성녀에, 유령이라서 그런 거예요. 당신의 그 파장, 꼭 신탁을 받을 때처럼 느껴져요. 신을 마주한 것 같은 강한 힘이나 의지, 위대한 무언가를 마주한 감동 같은 건 아니에요. 그냥, 견고한 영혼? 뭐라고 할 수 없네요. 그냥 좀, 이상해요. 당신은 뭐죠? 그냥 이방인은 아닌 것 같네요.”

“저도 잘 몰라요.”

가람은 조금 심란한 기분으로 대꾸했다. 그런 가람의 생각을 읽었는지, 성녀가 활짝 웃으며 갑자기 친근하게 굴기 시작했다.

“긴장 풀어요. 안 잡아먹어요. 여기서 해방시켜 준 것이 고마워서 뭐라도 해 주고 싶지만. 내 신세가 이러니 해 줄 것이 없네요. 음, 혹시 바쁘지 않다면 내 이야기나 좀 듣지 않을래요? 궁금한 게 있다면 제가 아는 한에서 이야기해 드릴게요.”

발을 까딱거리며 그렇게 이야기하는 성녀를 보자 갑자기 가람은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어쩐지 이 구도가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진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새벽안개처럼 푸르스름한 성녀, 그리고 그 성녀에게 총을 겨누고 땀과 먼지로 꼬질꼬질해져선 한껏 눈을 치켜뜬 자신.

에라, 모르겠다. 정 위험하면 총을 쏘거나 저쪽으로 넘어가면 되겠지. 마녀나 괴물도 아니고 성녀라는데 무슨 일 있겠어? 있어도 괜히 경계해 봐야 손해다.

가람은 근처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곤 맨바닥에 풀썩 앉아 성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디 한번 이야기해 보라는 자세에 성녀가 꺄아 하고 웃는다. 손을 맞잡고 지르는 그 환호성이 너무나 잘 어울려 가람은 할 말이 없어졌다.

‘안녕, 나는 성녀야. 내 이야기 좀 들어 볼래?’라는 투가 어울리는 가벼운 어조로 성녀의 기나긴 이야기가 이어졌다.

궁금한 것을 대답해 준다곤 했지만 본인이 수다를 떨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소녀다운 과장과 홍조 대신 푸른빛을 뺨에 띄워 가며 흩어지는 손과 발을 휘둘러 최대한 박진감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는 성녀는 외형적으로 보이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어쩐지 여동생의 수다를 듣고 있는 기분이라,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래, 그래, 맞장구를 치며 무릎을 모아 성녀와 똑같이 턱을 괴고 앉았다.

조금 전의 긴장이 우스워질 정도로 태평한 분위기 속에서 죽은 자의 수다가 죽은 자의 공간을 채운다.

“정말 완전히 미친 사람이었어.”

성녀가 방금 이야기한 미친 사람은 가람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는 이야기로밖에 듣지 못했지만, 뮐러가 들려주었던 성녀를 열렬히 사랑했던 왕, 그 본인이다.

성녀는 호쾌하고 날렵한 말투로 세간에 알려진 그 로맨스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신파로 날조된 것인지 쩌렁쩌렁 울리도록 항변했다.

죽느라 바빠 몰랐는데, 세상에 그런 소문이 나다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투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들은 진실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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