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신관들이 성녀를 유폐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성녀는 신의 대리자인데 직접적으로 신력을 이어받아 그 은혜를 입는 신관들에게 있어서 성녀를 거역한다는 것은 달걀이 닭을 죽이겠다고 소리치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다.
성녀를 가두어 둔 것은, 왕이었다.
가람은 성녀의 분노 어린 삿대질을 바라보며 그제야 이야기의 이상함을 깨달았다.
성녀를 사랑한 왕, 성녀를 유폐한 신관. 그 이야기 속에서 성녀의 입장은 없었다. 왕이 성녀를 사랑했을 뿐, 성녀 본인이 어찌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가람은 차분하게 앉아 왕이 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먹을 휘둘러 대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성녀라고 해서 발끝까지 오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얌전한 여자를 상상했는데, 이건 왕이 앞에 있으면 전치 10주는 사뿐히 끊어 주고 온몸으로 기어 다니는 신세로 만들어 줄 것 같은 기세다.
성격을 보니 순순히 갇히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람의 생각을 읽고 성녀가 한숨을 푹 내쉰다. 죽은 자의 한숨은 푸른색이다. 가람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의아해하거나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사실 오늘 아침부터 내내 돌아다니느라 매우 피곤했기 때문에 가람은 이 대화 방식이 매우 달가웠다.
“그 자식이 협박했어요. 신관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걔가 전쟁은 잘했거든요.”
그 자식이라니, 걔라니. 성녀면 좀 더 고풍스러운 말투를 쓸 줄 알았건만. 그래도 명색이 한 단체의 수장인데.
가람의 생각에 성녀는 귀엽다는 듯 후후 웃더니 슬쩍 가람을 놀렸다.
“이방인이면서 그런 고정 관념을 갖고 있군요. 위엄은 신께서 가지고 계신 거지 저는 그저 그분의 종일 뿐이랍니다. 저는 신이 아닌걸요. 전 그냥 저랍니다.”
이야기하던 성녀는 문득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언가 문제라도 생겼나 하고 가람이 바짝 긴장하는데 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사실, 가람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없네요. 전 갈 시간이에요. 원한다면 이곳에서 좀 더 쉬다가 가요.”
성녀는 자신의 방을 권했지만 가람은 시체 한 구와 부수어진 가구의 잔해, 쓰레기(본인이 그렇게 만들었지만), 먼지로 가득한 이 공간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가람은 성녀의 권유를 거절하고 내내 신경이 쓰이던 문제를 질문했다.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이 상당한 뒷북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냥 확인차 물어보는 건데, 정말로 저승이 있나요? 죽은 사람이 가는 그런 곳.”
상당히 의외의 질문이었는지 성녀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릿한 윤곽도 이제 눈에 익은 덕분인지 표정을 꽤 알아볼 만했다.
“물론이에요. 죽은 사람이 없어진다면 신께선 계속해서 영혼을 만드셔야 할 거예요. 아가씨의 세계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긴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의 경계가 매우 가깝거든요. 사실 죽어 보니 별로 다를 것도 없다 싶어요. 불량배 같은 악마들도 돌아다니고 그러죠.”
“악마요?”
가람이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찡그린 얼굴에는 거부감이 가득하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이미지에 모르드레드를 연결시켰다. 성녀는 가람의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조용히 웃으며 이야기했다.
“걱정 마세요. 악마 같은 것은 저에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으니까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차분한 반응에 가람은 처음으로 성녀는 성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이, 성녀에겐 위험하지 않다지만 자신에게는?
어쩐지 불길하다. 이 탑을 내려가서 악마를 퇴치하는 데 필요한 방법을 물어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 가람을 보며 성녀는 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사람은 어쩐지 힘들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말을 하면 오히려 걱정에 휩싸여 버려서 말한 자신이 미안할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풀어 줘서 고맙기도 하고 심지어 수다까지 들어 줘서 매우매우 고마운데, 마지막으로 찝찝한 기분까지 줘 버렸으니 성녀는 가람에게 마음의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기분 탓이 아니라 실제로 진 것이지만.
“오늘 정말 고마워요. 뭔가 답례를 하고 싶은데, 해 드릴 게 없어서 민망하네요.”
“잠깐.”
작별 인사로 맺으려는 성녀의 말을 가람이 급히 자른다.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만약, 저승이 정말로 있다면, 그리고 이쪽과 달리 꽤 위험한 곳이라면.
“혹시 죽은 사람 중에 누군가를 돌봐 달라는 부탁도 들어줄 수 있나요?”
“음? 물론이죠. 제가 그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면요.”
가람은 갑자기 입술이 무거워진 것 같았다. 혀가 입 안에서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오래도록 짐이었다. 마음의 앙금이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어서 너무나 안타까웠다.
“에녹사 뷔 비트리코.”
조금 불분명한 발음이었다. 갑자기 목구멍이 아려 와서 가람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시 또렷한 발음으로.
“에녹사 뷔 비트리코. 머리칼은 금발에 가까운 옅은 갈색이고, 치유 마법사였어요. 정말로 훌륭하고, 훌륭한, 멋있는 사람이에요. 좋은 곳에 있을 거예요. 만약 있지 않다면, 좋은 곳으로 데려다줘요.”
“좋아요.”
성녀가 대답하는 순간, 그대로 그녀의 몸이 사라져 버렸다. 흩어지듯 사라졌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으레 그러하듯 그렇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남은 것은 낡은 침대와 먼지, 한 구의 시신과 먼지투성이의 적막한 공간뿐이다. 방금까지의 수다가 거짓말 같은 고요함에 가람은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별 인사도 없이 느닷없이 사라져 버린 덕분에 좀 허무하기도 하다.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 봉령의 자물쇠라는 거창한 고물을 찾아보던 가람은 그 몰골이 성녀가 말한 대로 정말로 비참함을 깨닫고 다시 그것을 버렸다.
두 번 내동댕이쳐진 자물쇠는, 녹슬고 검게 산화되긴 했으나 간신히 자물쇠의 기본 형태는 유지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잠금을 유지하는 고리 부분을 가람이 당겨 부수어 버렸기 때문에 쓰임을 다하고 말았다.
가람은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 다시 칼날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두 번째는 쉬웠다. 긴장이 풀리고 피로한 탓에 복사뼈와 아킬레스건이 조금 베이긴 했지만 발목을 잘리는 것에 비하면 흠집이 좀 나는 정도라 별로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에는 온 신경을 다 집중했다.
계단이 가파르고 발밑이 어두워 까딱하면 금세 넘어질 것 같은데, 이런 칼날 계단에서 넘어지면 같은 높이의 돌계단에서 넘어진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몰골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계단은, 신관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왕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만든 기관이었구나.
내려가던 가람은 갑작스럽게 어둠 속에서 등장한 희끗한 인형에 기겁하고 놀랐다.
그러나 상대 쪽에서 더 놀랐는지 거의 동시에 히이익 하고 숨 들이켜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목소리긴 하지만, 그 톤이 어쩐지 상당히 귀에 익어 슬쩍 불러 보았더니, 역시 뮐러다.
“헉, 허억, 가람, 놀랐잖습니까. 너무 안 내려와서 걱정이 되어 올라왔더니.”
손전등으로 비추어 보니 뮐러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앞머리가 촉촉해져 있었다. 흘러내린 백금발이 창백한 얼굴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녹색 눈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베녹사스에서도 그렇고 뮐러는 조금 심약한 경향이 있다.
가람은 일부러 안심하라고 손전등을 자신에게 비추어 확인시켜 주었다. 결국 뮐러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턱부터 얼굴만 동동 떠오른 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러고 싶을 것이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초췌해진 여자의 얼굴이라면 더더욱.
성대하게 지른 비명이 기둥 전체에 울려 퍼지고, 아침을 맞이해 한바탕 울어 젖히려던 수탉이 고개를 갸웃하며 위를 바라보았지만 모자산맥 위로 둘러쳐진 천 탓에 찾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마침내 닭이 울고, 모자산맥의 아침이 분주하게 시작되었다.
가람은 밤새 개운하게 잘 잔 레미스와 산맥을 날아 내려와 그의 손에 금화를 쥐여 주고 돌려보냈다. 하루 만에 천 골드를 번 레미스의 표정은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환희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그대로 하늘로 날아가 승천해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희희낙락하며 지금 세계가 현실로 실존하는 공간인지 온갖 방법으로 확인해 보던 레미스는 가람에게 달려들어 뽀뽀하려다가 뮐러의 만류에 뮐러에게 뽀뽀했다.
너무나 좋아서 미쳐 버릴 것 같다거나, 인생의 여신님이라거나 온갖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은 레미스는 흥에 겨워 춤추는 것 같은 모양새로 즐거이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그리고 걸어가는 모습이, 춤을 추던가 걷던가 둘 중 하나만 하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추했다.
마치 다리 두 개 달린 오징어가 흐느적거리며 걷는 것을 보는 것 같다. 스스로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뮐러는 그런 레미스의 뒷모습을 보며 원치 않게 입맞춤당한 뺨을 없애 버리기라도 할 듯이 닦아 대고 있었다.
이를 갈며 인상을 구기는 것이 가람이 있어 차마 입에 담지 못했을 뿐, 속으로 레미스를 달달 볶아 쓰레기통에 처넣기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레미스 씨, 정말 좋아하네요.”
가람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가 레미스가 간 방향을 향해 폭탄이라도 던지고 싶다는 표정의 뮐러를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뮐러는 빠드득 이를 갈더니 깊게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더없이 차분하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부디 저 즐거움이 오래도록 갔으면 좋겠군요. 모자산맥은 관광 도시라 소매치기도 많은데 말입니다.”
살벌하게 말하는 투가 소매치기를 당하라는 저주처럼 들려서 가람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가람도 구하러 와 준 뮐러를 놀라게 만들어 결국 찔끔 울게 만들지 않았던가. 급히 닦긴 했지만 분명 눈물이었다.
“이제 웨이크에게로 갑시다.”
이어지는 뮐러의 말에 가람은 그제야 오래도록 웨이크를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직 그가 감옥에 있는 것이다. 피곤하고 피곤했지만, 가야 했다.
일단 그 일을 마무리하면 정말로 쉴 수 있는 것이다. 숲이나 산이 아닌 진짜 도시, 그것도 관광 도시에서. 가람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치안대의 병사는 생각보다 가람을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그리고 뮐러에게는 더 친절하게 대했다.
가람은 뮐러가 병사에게 돈을 주었다는 소문이 어디까지 났을까 생각하며 병사를 따라 며칠 전에 갔던 환자의 방으로 향했다.
환자의 방은 여전히 그 상태 그대로였다. 모포는 더러웠고, 웨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반가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란 통에 며칠간 의식을 잃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꿈틀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병사였는데, 그는 가람 일행을 조용히 시키더니 주의를 끌어모았다.
뺨이 움푹 들어간 그는 퀭한 눈으로 천장을 보며 두어 번 눈을 끔뻑였다. 그러는 사이 다가온 가람과 뮐러 등의 얼굴이 그 시야에 들어찬다.
기운 없이 누워 눈꺼풀만 끔뻑이던 그는 가람을 발견하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피죽도 못 먹고 누워 있었던 덕분에 그 시도는 목을 까딱하는 정도로 끝났다.
덕분에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보게 된 그는 몸을 쓰는 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뚫어져라 바라봄으로써 가람이 자신에게 집중하게 만들었다.
충분한 주의가 기울여졌다고 판단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환자의 메마른 입술이 열린다. 비장하기까지 했다. 매우 진지한 그 분위기는 누워 있는 자세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세까지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는 천천히 엄숙하게 선언하듯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나랑 죽습니다.”
어색한 발음의 갑작스럽고 기괴한 발언에 가람은 아주 잠시, 자신이 그의 머리를 다치게 한 것은 아닌가 죄책감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