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그가 이쪽 말에 매우 서툴러 원래 말하려던 의도와 다른 말을 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까지.
그사이 감시의 목적으로 곁에 서 있던 병사가 뮐러에게 슬쩍 질문했다.
“저 둘이 사귑니까?”
뮐러가 병사에게 한껏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주는 사이에도 남자는 두서없고 괴상한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다.
대부분 맥락도, 앞뒤도 없는 이상한 말들이었지만 그 모든 말들은 한 가지 규칙을 갖고 있었는데, 사랑, 귀여운 따위의 긍정적인 말과 죽음, 폭력 등의 어두운 단어가 문장 속에 공존한다는 사실이었다.
가람과 뮐러, 웨이크의 얼굴에서 점점 혼란이 사라지면서 표정까지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쯤 되자 남자도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사실, 남자는 아주 오랜만에 이쪽의 언어를 사용해 보고 있었던 터라 스스로가 얼마나 괴상한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것은 동생이었던 탓에 동생과 떨어진 후 그는 이곳의 언어를 거의 배우지 못했다.
물론 배우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지식하고 이쪽 문화를 잘 모르는 동양인 남자란 놀려 먹기 딱 좋은 사람이라, 간신히 배운 언어에는 상당수가 그가 알고 있는 뜻과 본래 의미가 많이 달랐다.
괴상한 말을 시키곤 낄낄 웃어 대던 서대륙인들 사이에서 그는 그들이 왜 웃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 점점 기분이 상하는 일이 많아졌고 남자는 차츰 서대륙인과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많은 불편이 따랐으나 조롱당하는 것보다는 백번 나았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그가 다시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꺼낸 말은 상당히 애처로운 반응을 낳았다.
“나는 야수들판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는 트리거의 영역인 야수들판과 닮은 부분이 없었다.
새카만 짧은 머리카락이 아주 조금 들판의 잡초 같기는 했으나 그 외에는 전혀 닮아 보이는 게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진지하고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알아들을 수 없으니 가람도 답답했다.
차라리 그가 저쪽 언어를 사용했다면 가람이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차원 동조가 일어나 그녀가 그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해 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가람은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한 번은 듣거나 보아야 그것을 더듬듯이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가람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손을 들어 그의 입 옆에 놓고 말을 하는 것처럼 꼼지락거리다가 그것을 자신의 귀까지 이어 와 마구 흔들어 풀어 버리고 어깨를 으쓱여 보임으로써 ‘당신의 말이 전혀 통하고 있지 않다.’를 전해 보였다.
“에이, 뭘 그렇게 번거롭게 합니까. 설마 전혀 못 알아듣겠어요?”
가람의 힘겨운 의사소통을 지켜보던 뮐러가 코웃음 치며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가람을 향해 있던 남자의 시선이 뮐러를 향한다. 한눈에 봐도 서대륙인인지라 그의 표정이 확 굳었다.
서대륙인보다는 벙어리인 가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 그는 가람이 동대륙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않고 손짓 발짓을 해 대는 이유가 그녀가 벙어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오래전에 몇 나라로 통합된 뒤 그 문화가 상당히 유사해진 데다 언어와 통화가 통일된 서대륙과 달리 동대륙은 아직 중소 국가가 존재하며 언어와 통화, 측량 기준, 사용하는 숫자조차 다른 나라가 많이 존재했다.
언어만도 오십 개가 넘다 보니 이처럼 외국에서 만나면 그 땅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가람은 이쪽 대륙어를 하지도 않았고, 모국어를 쓰지도 않았으므로 남자는 가람이 벙어리라고 생각했다. 타지에서 말을 못 하니 고생이 많을 것이다.
그에 공감해 짠해지려는데, 가람이 매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아주 유창한 서대륙어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은데요. 차라리 자기 나라 말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같은 동양인인데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동양 쪽은 나라만 이백 개가 넘고, 언어만 쉰 개가 넘는다구요. 그중에 무슨 말을 할지 파악할 수가 없네요.”
가람이 그럴듯하게 변명한다. 이렇게 되자 가장 난감해진 것은 병사였다. 피해자만 일어나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합의도 주선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크게 적대적이지 않아 보였으므로, 병사는 공무원 특유의 귀찮음을 발동해 사건을 빨리 매듭지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곤란하군요. 이곳이 여관도 아닌데 피해자라고 해서 계속 재워 줄 수는 없습니다.”
병사가 턱수염을 문지르듯 쓰다듬으며 말하자 뮐러는 눈치 빠르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닫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저희도 곤란해서, 빨리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역시 그러시죠? 보아하니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 같은데, 좋게 갑시다. 이 사람한테 5골드를 주십시오. 지금.”
뮐러는 주머니에서 5골드를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었다. 얼떨떨하게 그가 그것을 받자 병사가 언제 준비했는지 모를 종이에 선언하듯 이야기하며 단숨에 사건 종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보상금 5골드를 지급하고 합의하에 사건 종결.”
이런 일 외에도 진짜로 심각한 범죄들이 도시 가득 넘쳐 나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는 이런 식으로 일을 매듭짓는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피해자는 좀 쇠약해졌을 뿐, 눈을 뜰 정도로 회복되었으니 5골드 정도 있다면 여관을 잡아서 먹고 마시면서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여차저차 하고 얼떨결에 서명을 하고 나서 네 사람은 치안대 건물에서 쫓겨나다시피, 아니, 실제로 건물에서 쫓겨나 길가에 휑뎅그렁 서게 되었다.
핼쑥한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사방을 둘러보는 운화의 오빠―로 추정되는―를 보자 가람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버리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다 큰 어른인 데다가, 5골드 정도면 회복될 때까지 지낼 수 있을 겁니다. 사정 급한 가람이 챙길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요. 사실 여동생을 도와준 걸로 가람은 충분히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까?”
매우 솔깃한 뮐러의 말이었으나 가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사람 된 도리로서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영리하던 운화와는 달리 이 남자는 어디 나사가 한두 개, 아니, 한 뭉텅이는 빠져 있는 것 같아서 이렇게 헤어졌다가 다음 날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거나 하는 소식을 들으면 내내 죄책감이 들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패스의 충전 기간이니 급할 것도 없고, 도와주기로 했다면 끝까지 돌봐 주는 것이 좋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오빠가 걱정된다며 눈물짓던 운화의 얼굴이 생각나서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좀 더 알아봐야 할 필요성도 있다. 이 남자가 운화의 오빠라는 것은 가람의 추측일 뿐,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었다.
일단 통역을 구해야……. 아, 그것도 이 남자가 어떤 말을 할 줄 아는지 알아야 할 수 있는 조치다. 다시 머리가 아파졌다.
“급할 것도 없으니, 일단 데려가죠. 저도 쉬고 싶어요. 오랜만의 도시인데, 이러고 있기도 아깝잖아요?”
가람의 의견에 따라 세 사람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한 사람은 여관으로 돌아왔다.
가람은 두 남자에게 운화의 오빠를 맡기고 뽀삐와 나머지 말 두 마리의 안위를 확인한 뒤 여관 주인에게 특식을 넣어 줄 것을 요청하고 방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당연히 방에서 식사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세 남자는 사람이 들어차고 있는 시끄러운 여관의 홀에 앉아 있었다.
“왜 여기 있어요?”
곧 술 취한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산봉우리가 되어 여기저기서 야호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될 여관의 홀은 대화를 나누기에 그리 적절한 장소가 못 된다.
특히 대화 상대가 사람과 사랑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언어에 서툴다면 더욱 그러하다.
“안 들어가려고 하더라고요.”
운화의 오빠로 추정되는 남자는 갑자기 가람이 떠나고 낯선 서대륙인, 그것도 건장한 남자와 조금 덜 건장한 남자 하나와 밀폐된 방에 들어가는 상황을 매우 경계했다.
그는 최대한 통행인들, 그러니까 만약 뮐러와 웨이크가 자신에게 흉악한 짓을 저지를 경우에 그것을 목격하고 막아 주거나, 최소한 자신이 도망칠 경로가 존재하는 장소에 있기를 원했다.
그 경계 어린 태도만으로 가람은 그가 어떤 일을 겪어 왔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참치가 뛰는 골목에 갑니다.”
가람이 의자를 빼어 앉자 그사이 남자가 무언가 말했다.
이제 가람은 유추하기도 지쳐서 대충 ‘그렇군요.’ 하고 대답했다. 웨이크는 무언가를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 며칠간 면도를 하지 못해 까슬한 턱을 문지르며 남자를 보고 있고, 뮐러는 멍하니 남자를 보다가 갑자기 풉, 웃음을 터뜨리더니 급하게 입을 막고 참았다.
일단 앞뒤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이 순간만 본다면 웃기긴 했다.
“왜 이 사람은 자기 나라 말을 안 하는 겁니까?”
“일종의 룰이에요. 워낙 언어가 많으니, 타국에서는 그 나라 말을 쓰는 거죠. 거기에 있다는 건 그곳의 말을 할 줄 안다는 뜻이니까요.”
가람이 질리도록 읽었던 책, ‘동양인’의 설명을 떠올려 이야기하자 뮐러가 남자를 턱 끝으로 가리킨다.
“이 사람을 보면 전혀 아닌 것 같은데요.”
가람은 할 말이 없어서 입맛을 다시곤 점원을 불러 대충 음식을 시켰다. 배가 고프다.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 전에 배가 몹시 고팠다.
마치 웨이크라도 된 것처럼 패스를 쫓고 있을 때는 허기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충전의 기간이 되면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와 평소의 배가 넘는 음식을 먹어 치우게 된다.
음식을 시킨 가람은 이렇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말은 통하지 않더라도 통성명 정도는 가능하겠지.
가람은 진지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이름을 말했다.
“가람, 가람.”
몇 번 반복하자 남자는 가람의 의도를 알아채고 천천히 무의미한 문장의 반복을 멈췄다. 묵묵히 닫혀 있던 입이 열리더니 처음으로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 흘러나왔다.
“하늘 운랑입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서대륙어가 아니라 동대륙어였으나 가람은 처음 이 차원에 와서 말을 하고 글자를 읽었던 것처럼 그 언어에 동조할 수 있었다.
들은 적도 없는 언어가 마치 옛날 언젠가 배웠던 것처럼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일이란 새삼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갑자기 유창하게 동대륙어를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 남자와 오래 대화해 동조가 강해질수록 더 자연스럽게 저쪽 말을 사용할 수 있으리라.
가람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언어를 추슬러 간신히 더듬더듬 질문했다.
“당신은 하늘 운화의 오빠인가요?”
그 말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운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가 천천히 다시 앉았다.
그리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동생을 아는지, 동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목걸이는 어떻게 된 것인지 질문을 쏟아 냈다.
가람은 몇 개의 질문을 놓쳤으나 대부분의 질문에 대답했고 뮐러는 가람이 외국어를 하자 새삼 신기한 기분에 감탄했다.
“언어가 쉰 개나 있다면서 그걸 또 할 줄 아는군요. 대단한데요.”
운랑은 여전히 뮐러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다소 신이 난 그의 어투가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운랑은 서투른 서대륙어를 사용해 엄숙한 어조로 경고했다. 정말로 진지하고 엄숙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울려 나온다.
“골뱅이를 때리지 마라.”
뮐러는 결국 탁자 위로 쓰러졌다. 끅끅 웃으면서 골뱅이를 때리지 않겠다고 사과하는 뮐러는 오래도록 탁자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번에는 가람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웨이크마저도 씰룩거리는 입가를 추스르기 위해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그러나 정작 운랑은 초연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다.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매 속의 눈동자가 아래를 향하고 있다. 그것을 봐 버린 가람은 오래 웃지 못했다.
타지에 있다는 동질감 덕분에 가람은 그의 체념한 것 같은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깨달았다.
이곳에 와서, 모르드레드에게 배신당했던 그때, 덩그러니 혼자 남았던 그 막막한 순간에 간신히 청한 도움 요청이나 절박한 말들이 가벼운 웃음거리 취급 당했다면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동생도 잃어버리고 타지에서 얼마나 막막할까.
잠시 그 심정을 상상해 본 가람은 그의 모든 말실수에 진지하게 대처하기로 했다. 다행히 지금은 패스를 찾기 전의 휴식기이다. 덕분에 여유가 좀 있었다.
만약 지금이 휴식기가 아닌, 당장 패스를 찾으러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가람은 운랑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아침까지만 해도 가람은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패스를 찾느라 여관을 떠나 걷는 사이 드문드문 가람이 느낀 것은 생각보다 자신의 세상이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르드레드를 죽이고 애꿎은 사람을 공격하기까지 했다.
그런 짓을 하면 마음속에서 악마라도 자라나거나 이마에 낙인이라도 찍히거나 세상이 시뻘건 색으로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워하고 꺼려했는데, 허무하게도 해는 전과 같이 밝고 도시는 여전히 도시이며 거리는 변함없이 거리였다.
자신은 웃을 수도 있고, 여전히 이렇게 수다도 떨 수 있었다.
바뀐 것은 없었다. 내적으로 그렇게 나쁜 기분도 아니었다.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막상 저지르고 보니 생각보다 별것 아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신경 사이를 파고들어 살금살금 간질인다.
그래, 누가 알겠어? 이렇게 지내다가, 여기서 사고를 치고 온갖 짓을 다 저지른다고 해도 저쪽으로 갔을 때, 누가 알겠어? 뇌물이든 범죄든 뭐든 편리할 대로 이용하다가 저쪽에서만 멀쩡하게 살아가면 되잖아?
게다가 이곳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곳이잖아. 여기선 이래도 돼.
아침까지만 해도 가람은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었다. 비록 이것이 옳지 않다고 해도, 옳고 옳지 않고를 누가 알겠는가? 엄마가? 아빠가? 아니면, 친구들이?
베이스캠프를 찾게 되면 다시는 볼 일도 없을 이쪽 세계의 사람들이나 알게 될 뿐이다.
그러니까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분탕질을 친다 해도, 망친다고 해도 안 보면 그만이라고.
그러나 성녀.
그녀를 만난 후 가람은 생각을 다시 바꿨다. 만약 정말로 저승이란 게 있다면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정말로 죽은 후의 세계라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옳은 길을 가야 한다.’라는 가치관이 잃었던 왕관을 되찾아 가람의 머리 위로 올라앉았다.
그러므로 가람은 자신이 총으로 쏜 데다 사정이 딱하기 그지없는 운랑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하늘 운화 씨는 집으로 돌아갔어요.”
가람의 말에 운랑이 흥분해 벌떡 일어서다가 가까스로 자제하고 몸을 낮췄다. 그사이 테이블 위로 음식이 내려앉았다.
음식 이름을 들어도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대충 추천을 받아 시켰는데, 시키고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말고기가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바랄라인의 음식 양식과 비슷했다.
삶고 찐 고기를 신맛이 나는 채소와 함께 썰어 내놓은 것에 찍어 먹는 소스가 별도로 붙어 있는 요리, 커다란 민물고기를 토막 내어 맵게 조리한 음식과 갖은 종류의 산열매를 잘게 다져 종이처럼 얇게 썬 고기에 싸 먹는 고기쌈 요리도 있다.
통째로 구운 거위는 배를 꿰맨 실밥을 드문드문 내보이고 있다. 거위라서 그런지 오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다랬는데, 거의 가람의 상체만 한 커다란 거위였다.
거기에 웨이크의 흑맥주와 뮐러의 브랜디, 가람의 단맛 도는 과실주와 운랑의 과일주스가 한 잔씩 따라붙어 있었다.
“들어요. 술이 아니에요.”
경계심이 가득한 운랑이니 술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생각해 가람은 일부러 주스를 시켜 주었다. 배즙 같은 갈색의 음료는 식욕이 도는 색은 아니었지만 맛은 꽤 좋은 모양이었다.
운랑은 입술을 간신히 적실 정도의 양을 홀짝여 맛을 보더니 특별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지 한 번에 들이켜고 음식에도 손을 뻗었다.
잠시 가람의 눈치를 보는 듯싶더니 거위 다리 한쪽을 뜯어내어 급히 입 안으로 욱여넣는다. 배가 매우 고팠던 것이 틀림없었다.
환자이니 죽을 먹여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뒤늦게 죽을 시키려던 가람이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순식간에, 정말로 순식간에 가람의 팔뚝만 한 거위 다리가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세상에, 얼마나 굶었으면.
단순히 허기가 졌다거나 그런 차원이 아니었다. 지금 먹지 않으면 다시는 먹을 수 없게 될 것처럼 운랑은 음식을 탐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저 거위는 웨이크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이크는 고기쌈에만 손을 뻗을 뿐 거위는 먹을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운랑은 간신히 얻은 먹을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했다.
“저기, 음식은 더 시켜 드릴 테니까 천천히 드세요.”
가람은 그렇게 말하며 과일주스를 세 잔 더 시키고 커다란 햄 요리까지 시켰다. 육즙이 줄줄 흘러나오는 햄은 주방장이 직접 만든 것으로, 실바람 여관의 특선 메뉴 중 하나였다.
운랑은 말도 없이 그것까지 집어삼켰다. 삼켰다는 말이 어울리는 식사법이었다.
묵묵히 배를 채우는 데만 집중하는 그 모습은 운화에 대한 것은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맹목적이다.
가람도 꽤 배가 고팠지만 그 먹는 서슬에 질려 좀처럼 속도가 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운랑은 거위 한 마리와 돼지 다리로 만든 햄까지 먹어 치우고 나서야 배가 좀 찼다는 듯 여유를 가지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먹어 치운 양이 운랑의 상체만 한데도 그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배가 볼록해지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동생이 집으로 갔다고 했습니까?”
운랑의 모국어였다. 가람은 입 안에 있던 민물고기 살을 삼키고 과실주를 마시며 대답했다. 앵두로 만든 것인지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다.
“네. 노예 경매장에서 만났는데, 제가 사정이 되어서 도와줬어요. 동대륙으로 가는 배를 탔고요. 목걸이는 고맙다며 선물로 받은 물건인데.”
“다른 말은 없었습니까?”
“오빠가 걱정된다곤 하더군요.”
운랑은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을 여닫던 그는 한참 단어를 고르다가 힘겹게 질문했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가 제 동생을 노예로 팔고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제가 믿도록 도와줄 방법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