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서툰 서대륙어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꼼꼼한 모습이었다. 그 차이에 좀 얼떨떨해하며 가람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동대륙으로 가서 운화의 무사함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하지만 가람은 지금 동대륙으로 갈 수 없었다.
운랑도 그것을 아는 것인지 터무니없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동대륙이 2, 3일 걸리는 거리도 아니니 가야겠다고 무턱대고 갈 수는 없다.
운랑은 초조한 얼굴로 가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결론은 명쾌하고 당연했다.
“저한테 차마 이야기는 못 하셨지만 해 줬으면 하는 건 있으실 거예요. 함께 동대륙으로 갔으면 하시는 거죠?”
“만약 운화의 진짜 은인이시라면, 염치없어 고개도 들지 못할 부탁이지만 그렇습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운랑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매우 낙담했다. 절망에 가까운 낙담이었다. 고개가 꺾이듯이 푹 숙여졌다가 곧 천천히 들렸다.
가람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불신과 희망, 간절함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한참 탁자와 가람을 번갈아 가며 보다가 한숨 쉬기를 반복하더니 곧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은인일지도 모르는 분을 이렇게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처음 운화와 떨어지게 된 것도 믿었던 동향 사람 때문이라. 타향에서 만나니 반가워 의심도 않고 무턱대고 믿었다가 너무 큰 해를 입었습니다.”
운랑과 운화는 서대륙에 발을 딛는 그 순간부터 내내 속았다. 환전을 하며 원래 가치보다 월등히 낮은 가격에 패물을 팔게 되는 바람에 노잣돈을 털어먹혔고, 그나마 여관을 잡아 품이라도 팔며 여비를 마련해 여행하자고 결심하던 차에 마침 동향 사람을 만나 친해졌다.
그리고 동생에게 큰일이 났다며 부르는 말에 채비도 하지 못하고 뛰쳐나갔더니 그 동향 사람이 진 빚을 운랑이 대신 갚기로 했으니 내놓으라며 칼잡이들이 덤벼드는 게 아닌가.
믿었던 친구가 그랬을 리가 없다며 불신했지만 칼날은 자비가 없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도망가며 운화의 무사만을 걱정했는데, 온갖 고초 끝에 돌아온 여관에는 운화가 없었다. 서툰 말로 물어보니 자신을 찾아 떠났다는 것이다.
운랑은 담담히 이야기했지만 고생은 끝도 없었다. 돈 한 푼 없어 태어나서 처음으로 구걸을 해 보고, 생각 같아서는 산적질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무예는 그런 곳에 쓰려고 배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든 고생 속에서 운화가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아팠고, 울며 오빠를 찾는 운화를 꿈에서 볼 때면 자다가도 캄캄한 새벽의 어둠에 눈물을 감춰 가며 몰래 울었다.
날품팔이를 했지만 한자리를 오래 지킬 수 없어 그나마 벌 수 있는 금액은 적었다.
그 정도 돈으로는 종잇장 같은 빵으로 간신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덕분에 운랑은 늘 배가 고팠다.
몇 끼를 굶으면서도 동양 여자를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달라는 대로 가진 돈을 쥐여 주고 정보를 샀다.
자신조차 이렇게 힘겨운 거친 땅에서 운화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하면 사나흘 굶는 정도는 힘들지도 않았다.
엉터리 언어를 주워 배우면서도, 그것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운랑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엉터리라도 이곳의 언어였다. 이것이라도 배워야 했다.
엉터리 같은 말을 하면 그래도 이 야박한 사람들은 웃어 주었다. 비록 조롱이라도, 관심을 끌었다면 동생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었다.
운랑은 허기진 배를 쥐고 시궁쥐와 함께 잠을 청하면서도 몇 번이나 엉터리 같은 언어를 되뇌며 발음을 교정했다.
그렇게 찾고 찾다가 결국 모자산맥까지 흘러들어 와 있던 차에 환각 같은, 여동생과 같은 체구의 동양 여자를 보고 숨죽여 접근했는데,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니 배에 구멍이 나고 피가 울컥울컥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여쁜 동생인 줄 알았다고,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서투른 서대륙어는 제대로 뜻을 전해 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향의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당신을 쉬이 믿을 수 없다며 운랑은 담담하게 말을 끝맺었다.
가람은 운랑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웨이크와 뮐러에게 전해 주었고, 가람과 운랑의 외국어 대화를 호기심에 차서 바라보던 두 남자는 숙연해졌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뮐러가 턱을 매만지며 오래된 기억을 꺼내 놓았다. 세 사람의 시선이 뮐러에게로 모였다.
“모자산맥의 마법사의 탑을 이용하는 겁니다. 아마 동대륙에 마법사 길드 지부가 있을 겁니다.
워낙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니 신대륙 운운할 때 벌써 그쪽에 가서 연구를 하려고 지부를 차려 놓았다 하더군요.
고액이긴 해도, 통신 마법을 의뢰한다면 시간을 잘 맞출 경우 직접 대화도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모자산맥의 마법사의 탑은 꽤 괜찮은 마법사가 많습니다.
아마 통신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도 있을 겁니다. 일종의, 이쪽 목소리를 저쪽으로 옮겨 주는 공간 마법이니 가격은 비싸겠지만요.”
가람은 뮐러의 말을 운랑에게 그대로 전했고, 운랑은 반색하며 좋아했다. 방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술이 들어가자 쌓여 있던 피로가 몰려든다. 가람은 까무룩 감기려는 눈을 무겁게 끔뻑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밤을 샜었지. 이걸로 일단락이 되었다면 이제 그만 자도 되지 않을까. 그래, 자야겠다. 더 이상은 못 하겠다.
아직 노을이 불타고 있을 뿐 땅거미도 지지 않은 시간이지만 가람은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있었다.
피곤한 몸에 술 한 잔은 피로를 폭발시키는 촉매와도 같다. 혈관 속을 누비는 피로가 독처럼 가람을 마비시키려 들고 있었다.
가람은 더 마비되어 잠 속에 빠져들기 전에 느릿하게 뮐러와 웨이크에게 지시했다.
“일단 좀 쉬고, 일어나서 가도록 해요. 어차피 마법 경매에 참여하려고 했었으니 가는 길에 하면 되겠네요. 운랑 씨에겐 별실을 잡아 주고, 외국인을 위한 초급 공통 서대륙어 교본이라도 좀 사다가 주시구요.”
몇 가지 더 지시할 것이 있는가 생각하던 가람은 피로가 더 커져 감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땀에 얼룩진 더러운 몸을 씻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흉악하기 짝이 없는 짓에 햇살을 머금은 이불은 가람을 푹 감싸 안았다.
다음 날 아침까지. 깊게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람의 아침은 작은 새의 지저귐으로 시작되었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것 같은 낭만적인 상황이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새가 지저귄 위치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것이다.
새는 가람의 귓가에 대고 울었다. 정말로, 고막과 그리 멀지 않은 귓바퀴에 대고 성대하게 울부짖었던 것이다.
새의 입장에서는 짹, 하고 가볍게 운 것에 불과했지만 가람은 잠자다가 갑자기 따귀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끼고 튕기듯 일어났다.
눈도 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곳으로 손을 뻗은 가람은 손끝에 닿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눈을 뜬 후 자신이 새를 맨손으로 잡고 있음을 깨닫고 매우 당혹스러워졌다.
당황한 것은 새도 마찬가지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이 분명한 표정으로 가람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자는 줄 알았는데 무슨 손이 이렇게 빠르다냐. 이 인간은.
이 새는 모자산맥 지빠귀라는 종으로, 갈색 깃에 드문드문 흰 털이 섞여 있는 흔한 외형을 갖고 있다.
언뜻 보면 좀 커다란 참새처럼 생겼는데, 머리가 매우 좋기로 유명한 새였다.
이 새의 다른 별명은 도둑 새.
여관 투숙객들이 잠든 사이 열려 있는 창문으로 숨어들어 빵 부스러기 따위를 훔쳐 먹기도 한다. 가람은 이 새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모자산맥 내에서 종종 두세 마리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것을 보거나, 횃대나 지붕에 앉아 있는 것을 보긴 했지만 이처럼 가까이 보는 것은, 심지어 잡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걸 어떡하지. 밖으로 보내 주면 되려나?”
가람은 새를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혼잣말이었는데 새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보드라운 깃털이 새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손가락에 스쳐 간질간질하다. 가람은 혹시나 해서 새에게 슬쩍 말을 걸어 보았다.
“너, 혹시 말할 수 있니?”
“쪼끔여.”
새는 대단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구강 구조상 혀가 좀 짧고 발음이 많이 샜지만, 그래도 잘 구부려지지 않는 그 혀로 대단한 실력이었다.
새삼 놀랍지도 않아서 가람은 가볍게 감탄만 하는 데에서 그쳤다.
생각 같아서는 오랜만의 단잠을 깨운 새를 창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었지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가람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보아하니 여관의 식탁 위에 놓여 있는 빵을 보고 들어온 것 같아서 슬쩍 빵 부스러기를 떼어 주자 두 발로 야무지게 붙잡더니 인사도 없이 포르르 떠나 버린다.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져 가는 새의 뒷모습이 제법 통통해서 가람은 입맛을 다셨다. 어제 거위 구이를 거의 못 먹었는데, 아침은 새고기로 해야겠다.
여관 측에 더운물을 청해 오랜만에 느긋하게 씻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으니 날아갈 듯이 상쾌하다.
지금 입은 것은 가죽옷이 아닌 천 옷이었는데, 당분간은 도시를 떠날 일이 없으니 천 옷을 입고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오랜만에 무거운 가죽옷이 아닌 천 옷을 걸치니 옷이 아니라 날개라도 입은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그래도 총과 돈주머니를 떼어 두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가람은 허벅지 양쪽에 권총을 매달고 남색 치마를 내려 가려 놓았다.
이 옷은 가람이 아닌 뮐러가 골라 온 옷인데, 치마가 무릎을 살짝 넘는 길이의 평상복이었다.
치마를 입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 어쩐지 다리 사이가 허전한 것 같은 기분에 가람은 자꾸만 치마를 내리 쓰다듬으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기분이 아주 좋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불안으로 떨리던 심장에 느긋하고 따듯한 물이 들어찬다.
아주 오랜만이었다. 패스가 아니라 가람 자신이 충전되고 있는 것 같은 충실감. 그 충실감 속에 모르드레드의 그림자는 없었다.
가람은 목욕을 하며 40패스를 통해 몇 가지 확인을 했다. 그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모르드레드에 관한 것이었는데, 만약 모르드레드를 이길 수 없다면 그의 추적만이라도 피하자는 것이 가람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능력을 구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문장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