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88화 (88/256)

88화

획득 불가

비싸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아예 처음부터 획득이 불가능했다.

그 후로 몇 가지 소원의 가격을 더 알아보았는데, 모르드레드를 조종하는 능력이나 모르드레드를 갓난아이로 만드는 능력 등 그 대상이 ‘모르드레드’에 해당되는 소원들이었다.

모든 소원은 획득이 불가능했고, 가람은 오랫동안 마음 한편에서 자그마하게 남아 있던 의문에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사실 가람은 모르드레드가 자신을 조종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그의 취향대로, 마음대로 자신을 다루고 싶었다면 패스가 넘치는 그이니 더 쉬운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간단하게 가람을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만들면 된다.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패스가 아닌가.

하지만 모르드레드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굳이 번거로운 방법으로 미친 짓거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가람을 추적하지도 않았다. 재가 없어졌으니 아직 살아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가람을 쫓아오는 기색이 없다.

가람은 불안해하면서도 한 가지 가설을 생각했다. 쫓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쫓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패스를 얻기 전에는 무언가를 구입하거나 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람의 가설은 계속해서 가설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 패스를 손에 넣어 확인해 보니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는 쫓아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쫓아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람을 마음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패스로 얻는 소원은 그 대상이 다른 패스파인더가 될 수 없다.

패스파인더의 패스는 오로지 그 주인만의 것이다. 모르드레드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얻을 수는 있지만 모르드레드만을 죽이는 ‘능력’을 얻을 수는 없었다.

가람은 그 사실에 적지 않게 안심했다. 욕실에서 그 사실을 알아내었을 때, 너무나 기뻐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목욕 시중을 들겠다는 담당 점원을 내보냈으니 망정이지, 함께 있었더라면 수상한 시선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방금 전 안 사실이지만, 처음 이 여관에 왔을 때 기절한 가람을 씻긴 것도 그 점원이었다. 콧등의 주근깨가 귀여운 붉은 머리의 소녀였는데, 로아나와는 달리 아직 어려서 그런지 수줍음이 많았다.

기분은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 걸음조차 사뿐사뿐하다. 가람은 그대로 방을 나서서 바로 옆에 붙은 뮐러와 웨이크의 방 문을 두드렸다.

혹시나 자고 있을까 해서 노크 소리를 작게 했는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문이 달칵 열렸다.

문을 연 사람은 웨이크였고, 그 너머로 책을 들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뮐러도 보였다.

가장 의외의 구성원은 운랑이었다. 어제는 그토록 경계하더니, 오늘은 꽤 분위기가 괜찮다.

방을 들어서며 슬쩍 뮐러가 든 책의 제목을 보니 ‘첫 글공부를 위한 서대륙어’라는 글씨가 질 나쁜 양피지에 새겨져 있었다.

“공부하고 있었어요?”

“예.”

대답한 것은 뮐러다. 운랑은 조금 어색하게 가람을 맞이했다. 세 사람은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가람이 앉으라고 하고 나서야 의자에 앉았다.

방의 의자가 두 개뿐이라, 운랑과 뮐러는 침대를 의자 삼아 앉았다.

뮐러는 조금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의 입가에 매달린 미소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스운 일도 없는데 이렇게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는 가람은 처음 보는 것이다. 무언가 아주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꾸며 낸 미소는 절대로 아니었다. 솜털처럼 달콤한 표정은 세상에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걱정에 짓눌려 죽을 사람처럼 보였건만.

“가람, 무슨 일 있습니까?”

“아뇨, 전혀요. 다들 식사하셨어요? 전 배가 좀 고픈데.”

가람은 싱글싱글 웃으며 뮐러의 말에 대수롭잖게 대답하곤 그대로 방을 나가 점원을 불렀다.

그녀가 음식을 주문하는 사이 세 남자는 조금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번갈아 보며 눈으로 질문했다. 가람을 오래 알지 않았던 운랑조차도 지금의 가람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세 남자의 시선이 질문을 담고 정신없이 오간다. ‘왜 저러죠?’, ‘혹시 압니까?’, ‘당신은?’, ‘난 몰라요.’, ‘나도 몰라요.’

가람은 호사스러운 음식을 잔뜩 시켰다. 케이크와 이름을 알 수 없는 산열매 디저트까지 주문하자 완전히 귀족들의 정찬처럼 보였다.

통째로 구운 작은 메추라기의 부드러운 살을 씹으며 가람은 커다란 포도알을 집은 포크로 운랑을 가리켰다.

“이거 먹고 마법사의 탑으로 가요. 가서 통신 마법을 이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도록 해요. 그리고 탑에서 한다는 그 경매에도 참여해 보구요. 다들 살 것 있나요? 최대한 준비해 두세요. 그래야 나중에 고생을 덜하니까.”

“감사합니다.”

운랑의 대답은 서대륙어였다. 운랑의 나라 말로 이야기하고 있던 가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간단한 감사 말이긴 하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못 하던 것이다. 뮐러가 잘 가르친 모양이었다.

교육자의 자질이 있다며 거듭 칭찬하자 뮐러가 으쓱해져서 콧대를 높이 들었다.

뻐기는 것 같은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운랑이 소리 죽여 웃는다. 웨이크는 말없이 음식을 먹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은 매우 포근하고 음식은 맛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운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아서 가람은 새삼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묵히 음식을 씹는 웨이크와 잠깐 사이에 다시 공부에 집중한 운랑과 뮐러. 그 얼굴들을 새기듯이 눈에 담은 가람은 커다란 딸기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일단 이것만 먹고 일어나요.”

가람이 분명하게 말한다. 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난 것은 바닥에 노을이 깔리는 오후였다.

배가 부르니 영 움직이기가 싫어서 가람은 아주 오랜만에 게으름을 부렸다. 헤실헤실 웃는 것도, 게으름을 피우는 모습도 마치 남처럼 낯설어서 뮐러와 웨이크는 매우 어색해했다. 심지어 여관을 나와 마법사의 탑으로 걷던 가람은 가벼운 어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까지 했다.

비밀로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가람이 이렇게 나오자 무섭기까지 해서, 뮐러는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가람의 어제와 오늘을 빠짐없이 되감아 보고 있었다.

웨이크는 웨이크 나름대로 가람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찾아다니거나, 그걸 하고 있지 않을 때는 무언가를 찾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체력을 단련하거나 팔 근육을 키우거나 하는 가람은 익숙했지만, 남색 치마를 팔랑이며 운랑과 농담을 주고받는 가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혹스러울 따름이다. 농담이라니?

그나마 이런 가람에게 가장 빨리 적응한 사람은 운랑이었다. 두 사람은 매우 친숙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운랑도 동생을 떠올리게 하는 가람이 싫지 않은지 매우 친절했고, 가람 또한 그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법사의 탑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친근하게 손까지 잡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한 뮐러는 갑자기 가람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생물로 보여서 몹시 당황했다.

웨이크와 뮐러가 가벼운 패닉에 빠진 것도 모른 채 가람은 한껏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불렀다.

그 나이 또래 여자다운 발랄함이라, 뮐러와 웨이크는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왜 저러죠. 혹시 아나요, 웨이크? 하긴 알 리가 없죠. 내가 모르는데 알 턱이 있나.

슬쩍 질문하던 뮐러는 자신이 질문할 대상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적응하기 참 힘들지만, 일단은 좀 두고 봐야겠다.

뮐러가 가람의 변화를 관찰하는 사이 그녀는 탑의 문을 지나 새삼 이 건축물의 화려함을 재발견하고 있었다.

최초로 탑을 방문했을 때, 가람은 뱀이 휘감고 있는 계단과 패스로 향하는 높다란 탑의 꼭대기밖에 보지 못했다. 탑은 그 본래의 목적이 어떻든 가람에겐 그저 계단으로 이루어진 산에 불과했다.

웅장함을 자랑한다는 탑의 높이도 고층 건물의 숲에서 살았던 가람에게는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솔직히, 고층이라는 말이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다시 오니 첫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건축물이었다.

마치 쓰디쓴 잡초 뿌리인 줄 알고 먹었는데 알고 보니 산삼이었더라 하는 종류의 감동이었다. 올라가기가 극악스러웠던 계단은 방문자를 빨아들일 것처럼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정점에서 쏟아지는 모자산맥의 기묘한 무늬의 햇살들은 어떤 상징적인 풍경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가람은 재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가람을 놓칠까 꽉 붙잡는 손은 운랑의 것이다.

가람이 사람들의 물결에 휩쓸려 가는 것을 끌어낸 후로 운랑은 줄곧 가람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어 하고 멀어지기에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는데, 놓을 시기를 잡지 못한 덕분에 손에 땀이 차도록 그러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가람은 천 옷에 가죽 장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맨손이었다.

외간 여자의 맨살에 손이 닿은 운랑은 자연스럽게 떨어질 만한 능청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뮐러와 웨이크는 반보 뒤에서 운랑의 귓가에 당황이 모여들어 붉게 괴이는 것을 즐겁게 구경했다.

신선한데요, 웨이크.

뮐러가 작게 속삭였으나 웨이크는 무엇이 신선한지 알 수 없어 반문했다. 어처구니없어진 것은 뮐러다.

그럼 왜 즐겁다는 듯 보고 있었던 것인가? 질문했더니 웨이크는 스스로도 즐겁게 웃고 있던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그저 뮐러가 즐거워하니 즐거워야 하는 상황인가 하고 따라 한 것뿐이다. 뮐러는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대뜸 질문했다.

“저 두 사람 분위기가 어때 보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가람이 뭘 잡고 있는진 압니까?”

“손?”

“운랑이 왜 곤란해 보입니까?”

“그가 곤란합니까?”

곤란하다면 도와줘야겠다는 태도로 돌아서는 웨이크의 팔을 뮐러가 급하게 잡아챈다. 뮐러는 갑자기 왜 팔을 잡냐는 순수한 의문 어린 눈동자와 마주쳤다.

“여기가 어딘진 알아요?”

웨이크는 뮐러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뮐러는 모처럼 재미있는 풍경이건만 입방아를 찧어 줄 사람이 없음에 한탄하며 조용히 가람과 운랑의 뒤를 밟았다. 웨이크는 이곳은 마법사의 탑이라고 대답해 주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올바른 결정이었다.

“이렇게 근사한 곳이었군요.”

가람이 탑을 구경 온 관광객에 어울리게끔 적절한 목소리로 소리 내어 감탄한다.

낡고, 쓸데없이 계단만 많은 괴상한 건물이 아니었다. 다시 보니, 세월이 붓질한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래되긴 했지만 정성으로 잘 관리되어 있어서, 건물 자체가 유서 깊은 유물이나 보물처럼 보였다.

패스를 찾아 처음 이 건물을 오를 때, 가람이 내린 감상은 경복궁을 보고 ‘불에 잘 타겠군.’ 하고 감상한 것과 동급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여유를 갖고 깊은 눈을 가지자 건물의 가치가 제대로 보였다.

계단 손잡이, 무늬, 바닥 돌의 세공까지 무엇 하나 대충 한 것이 없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고 계단을 올라 2층으로 들어서자 마치 박물관 같은 구조가 펼쳐졌다.

일반적인 박물관과 달리 물건을 덮은 유리 상자 하나하나마다 지키는 사람이 붙어 있었고, 가격표가 붙어 있어 백화점 같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소곤소곤 정숙하게 대화했고 드레스는 우아하게 움직였다.

어두운 조명 덕분인지 전체적으로 매우 차분하고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그 속에 있자니 갑자기 가람 자신의 남색 치마가 몹시 초라하게 느껴진다. 초라하다기보다, 이런 복장으로 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쪽의 느낌이 강했다.

화려한 파티에서 자신만 집에서 입는 늘어난 티셔츠에 줄줄 흘러내리는 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씩 가람에게 머무를 때마다 그 느낌은 점점 강해졌다.

가람 혼자만의 느낌은 아닌 모양이었다. 드레스를 차려입은 귀부인이 다가서자 마음껏 감상하라는 듯 유리 상자에서 비켜서고 물건의 기능과 유래를 설명하던 마법사들은 가람이 다가서자 유리 앞을 막아서고 얼굴을 굳혔다.

영업도 없었다. 한번 써 보시라고까지 하며 구입을 종용하던 마법사는 가람이 다가오면 물건이 망가지기라도 할 듯 경계했다.

그 태도에 기분이 상하긴 했지만 가람은 자신의 차림새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원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울리는 차림새를 갖추지 못한 자신의 탓이다.

만약 가람이 직원이고, 물건을 살 능력이 없어 보이는 데다 어쩐지 거칠어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선다면 저러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만약 망가지기라도 하면 책임져야 할 사람은 저 마법사였다. 그러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가람만 해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노숙자가 들어오면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경계하지 않았던가.

물건을 살 능력이 없어 보이니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좀 좋은 것으로 사 입고 오는 거였는데. 가람이 아쉬움으로 입맛을 다셨다.

스치듯 슬쩍 보니 마법사가 지키고 있는 것은 새끼손톱만 한 브로치였다.

마치 오팔처럼 다채로운 색을 띠고 있긴 하지만,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했다. 루비나 사파이어 따위를 마구 섞어 놓은 것 같은 빛깔이다.

설명을 청하려던 차에, 때마침 다른 손님이 끼어들었다. 루비 같은 눈동자가 발랄한 붉은 머리칼의 귀족 소녀였다. 새하얀 피부와 도자기 같은 생김새로 귀족임을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리 상자 옆의 마법사는 그녀가 다가오자 놀라운 속도로 태도가 돌변했다. 마법사가 영업 사원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1초도 되지 않았다.

가람은 내친김에 그 옆에 서서 귀족 소녀의 곁다리로 끼어 설명을 듣기로 했다.

“어마, 예뻐라!”

“안목이 있으시군요.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몸에 지니면 숙면을 취할 수 있게 해 주죠.”

“에계, 그게 다예요?”

소녀는 대단히 실망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고 설명을 덧붙였다.

“하루 네 시간만 자도 열 시간은 잔 것처럼 개운하답니다. 잔 시간의 두 배는 개운하죠. 세 달은 쓸 수 있습니다.”

“우웅, 하지만 잘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있는걸요. 게다가 마법의 효력이 겨우 세 달?”

소녀의 시선은 브로치 앞의 가격표에 못 박혀 있었다. 가람은 소녀의 어깨 너머로 가격표를 훔쳐보았다. 하얀 나뭇조각에 검은 음각의 글씨가 선명하다.

5만 골드.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람에게 있어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숫자에 불과하다. 소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마법사에게 질문했다.

“피부가 좋아지거나 하는 마법으로 바꿀 수는 없어요?”

마법사가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실 획기적이라면 획기적인 이 마법 물품은 그 수요자를 찾지 못해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수면을 줄여 주는 마법은 정신계와 치유계의 두 고등 마법이 합해져 만들어진, 쓰인 마법만으로만 볼 때에도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작비와 합해지면서 가격이 껑충 뛰는 바람에 이 물건은 영영 주인을 찾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 학자나 같은 마법사들은 기능에 비해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못했고, 돈 좀 있는 귀족들은 마법의 효용 가치를 찾지 못해 구입하지 않았다.

잠이야 졸리면 자면 되는 것이다. 성에는 그들을 위한 안락한 깃털 침대가 늘 쾌적한 상태로 준비되어 있다. 가격이 5천 골드만 되어도 팔릴 만한 물건이건만, 5만 골드라서 망했다.

“죄송하지만 그렇게 휙휙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흐응. 다음에 올게요.”

소녀가 떠나자 마법사는 조용히 짧게 절망했다. 가람은 한 발짝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마법사가 충분히 다음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자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기, 이거 구입하려고 하는데요.”

이 물건은 딱 가람을 위한 물건이었다. 밖에서, 특히 선잠을 잘 때 매우 유용할 것 같았다.

그 기능이 실제로 어떤지는 사용해 봐야 알겠지만, 부피가 그리 크지도 않으니 하나 사서 써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가람의 부름에 마법사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완전한 무시였다. 아무리 차림새가 맞지 않는다고 해도, 마법사의 태도는 옳지 않은 것이다.

“이봐요. 이거 사려고 한다고요.”

가람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다. 곁에 서 있던 운랑이 조금 당황하고, 멀찍이서 여전히 두 사람을 구경하던 뮐러와 웨이크가 뒤늦게 다가섰다.

뮐러가 끼어들기 직전에 뮐러의 정체가 마법사임을 알아챈 브로치 판매자는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처럼 툭 내뱉었다.

“이거 비싸요.”

심드렁한 어투였고, 충분히 무례했다. 가람은 착한 사람으로 있을 시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하, 하고 숨을 내쉰 가람의 자세가 삐딱해진다.

내민 턱은 마법사를 공격할 창날이라도 된 듯 날카롭다. 모아진 미간과 내려다보는 시선이 답지 않은 건방을 만들어 내었다.

오만 당당한 자세로 가람은 쏘아붙였다.

“댁한테나 비싸겠죠.”

가람은 일부러 소리 나게 금화 주머니를 꺼내었다. 철그렁하는 묵직한 주머니에서 미스릴 주화를 꺼내고,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내민다.

마법사는 그제야 이자들이 황제보다도 보기 힘들다는 돈 많은 여행자임을 깨달았다.

마법사의 태도 변화는 눈 깜빡이는 사이 끝났다. 마법사는 저질렀던 무례를 가람의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지 필사적으로 친절을 덧씌우려고 노력했다.

어색하게 헤헤 웃으며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혀 가람에게 시선의 높이를 맞추는 마법사의 태도에 가람은 다시 착해졌다.

어디든 돈이 얽히면 서글픈 법이다. 가난하고 연구비가 많이 드는 마법사들은 두 배로 서글픈 듯했다.

마법사는 가람에게 마시면 근육의 피로를 풀어 주는 물약과 어떤 맛없는 음식이라도 즐겁게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조미료 따위를 팔아 치웠다.

가람은 태어났을 때부터 욱신거렸던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익숙해진 근육통과 크페타인 같은 곳의 극악한 노린내 나는 고기 스튜 따위를 먹게 되는 사태를 대비해 그것들을 기꺼이 구입했다.

휩쓴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변변찮아 보이는 물건까지 가람은 모조리 사들였다.

뮐러가 슬쩍 귀띔하기를, 이 정도의 물건은 모자산맥의 마법사 탑이나 바랄라인에서밖에 구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마트나 서점이 있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은 해당 도시에서밖에 구할 수 없다. 괜히 나중에 아쉬워하는 것보다 버리더라도 일단 사서 써 보자는 심산이었다.

대부분 변변찮았지만, 그래도 방어 결계 마법이 걸려 있는 목걸이나 착용감이 거의 없는 장갑, 내부가 차가워지는 가방, 뒤집어쓰고 움직이지 않으면 투명하게 보이는 망토 등은 가람의 눈에도 제법 신기하게 보였다.

그 밖에, 귀가 잠시 들리지 않게 되는 물약, 시력이 매우 좋아지는 물약, 바른 부분이 차가워지는 물약 등 어디에 쓸모 있을까 싶은 물건들은 내부가 차가워지는 마법이 걸린 가방 안에 차곡차곡 들어가 쌓였다.

가방이 한가득히 될 때까지 즐겁게 쇼핑을 하던 가람은 자신이 쇼핑에 너무 매진해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달았다.

원래 목적은 운랑이 동대륙과 통신하도록 해 주는 것이었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

방금 몸이 가벼워지는 물약을 판매한 마법사에게 물어보니, 제작한 마법 물품을 모조리 팔아 치워 기분이 좋아진 마법사는 노래라도 부르는 것처럼 흥겹게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자처했다.

“보통 사람들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만, 손님들은 오늘 탑의 큰손님이시니 제가 특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꼭, 꼭, 다음에도 찾아 주시기 바랍니다.”

마법사는 마지막 말을 몇 번이나 단어만 바꾸어 강조했다. 두 개의 층을 올라가고 복도를 걸어 대화의 방에 도착할 때까지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가람은 매우 지친 상태로 방에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좀 쉬나 싶던 가람이 대화의 방 귀퉁이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려는데 마법사가 자연스럽게 그 앞에 앉았다.

“저기, 이제 가셔도 되는데요.”

가람이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뮐러와 웨이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운랑을 위해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에게 그의 목적을 설명해 주고 있다.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혼자 계시면 지루하실 테니, 제 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가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이 태반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명료했다. 제법 쓸 만한 연구이니 연구비를 좀 지원해 달라는 뜻이다. 연구비를 지원해 준다면 여행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 따라붙었다.

가람은 심드렁하게 그 이야기를 듣다가 운랑이 마법사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됐어요?”

운랑의 표정이 어둡다. 가람은 질문하며 동시에 유추했다.

마법을 쓸 수 없다고 했나? 아니면, 운화가 돌아가지 않았나? 하지만 확실하게 배는 탔는데. 아니면 동대륙 땅에서 잘못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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