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89화 (89/256)

89화

“지금은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 왜요?”

“일단 동대륙의 집으로 저쪽 마법사 지부에서 편지를 띄운 뒤, 편지를 받고 운화가 마법사 지부로 와야만 대화가 가능하다더군요. 일단 운화가 있는지만이라도 확인할 수 있는지 알아보니, 한 달은 걸린다고 합니다. 지부가 흑목국의 이남에 있으니 제 집인 풍연국 북녘까지는 전서구로만 보름이 걸리는 거리라 직접 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겠지요.”

드문드문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가 많았지만 그래도 가람은 어렴풋이 의미를 파악했다.

불가능하진 않지만 시간이 좀 걸린다는 뜻이다.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가람은 마냥 함께 있어 줄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딱한 사정을 보아 얼마든지 함께해 주고 싶었지만, 패스가 찬다면 분명 바늘이 향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질 것이다. 가람은 책임지지 못할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하죠.”

가람은 들고 있던 잔돈 주머니를 운랑에게 내밀었다. 운랑은 멍하게 서 있다가 그 손의 의미를 깨닫고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잔돈이라곤 해도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금화다. 운랑은 그 주머니 속의 찬란함을 목격한 바가 있었다.

“이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품팔이를 해서 이 한 몸 정도는…….”

한사코 거부하는 그 말을 가람이 부드럽게 잘랐다.

“받아요. 통신 마법도 그렇고, 앞으로 돈 나갈 일이 많을 거예요. 남으면 뱃삯이라도 하세요.”

운랑은 계속해서 거절하다가 더 이상의 거절은 실례라 여겼는지 매우 정중하게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는 굳이 주머니 속을 확인해 보지 않았다. 다만 감동이 차오른 눈으로 가람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다.

이 사람이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운화를 팔아넘겼을 리가 없었다.

묵묵히 바라보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가람이 눈을 피하려 할 무렵, 그는 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목 뒤로 손을 돌려 목걸이를 끌러 냈다. 가람이 가진 운화의 것과 똑같은 물건이다.

“만약 당신이 운화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저의 은인입니다. 타지에서 받은 이 큰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 목걸이는 운화의 것과 한 쌍으로, 하늘가의 후계와 그 친족 중 한 명이 나누어 가지는 물건입니다. 둘 다 가지게 되면 가주의 호패를 대신할 수도 있는 물건입니다. 만약 동대륙으로 돌아와 무언가 문제가 생길 경우 이 목걸이를 제시하면 그 즉시 하늘 가문의 큰손님으로서 대우받아 어떤 국경이라도 넘을 수 있습니다.”

가람은 대충 깎은 이 곡옥 두 개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운랑은 가람의 손에 자신의 목걸이를 쥐여 주고 만약 동대륙에 온다면 하늘 가문을 찾아와 돌려 달라고 했다.

만약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대로 이 목걸이를 갖고 떠나면 어쩔 생각인가 하고 질문하자 운랑은 사람을 잘못 본 자신의 책임이라 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가람이 뮐러와 웨이크에게 전하자 뮐러는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모처럼 봄바람이 좀 부나 했더니 이 아가씨는 지지리 운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자신이 봄바람의 주인공이 되진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서른이 다 되도록 뮐러가 결혼하지 못한 이유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웨이크는 연애조차 하지 못했다.

아쉬움에 방을 빠져나오니 마침 경매장이 시작할 시간이라 네 사람은 대화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던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다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경매가 끝나고 저녁이 되자 뮐러는 가람의 전 재산이 얼마인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많다’의 수준을 넘었다. 어쩌면 가람은 어딘가의 황녀나 귀족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람이 경매장에서 쓴 금액은 가히 천문학적이라, 인구 십만 명의 도시를 10년간 먹여 살리고도 남을 금액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정작 본인은 이 일에 대해 아무런 자각이 없는 듯 다음 날이 되자 패스가 찰 때까지 방에 틀어박혀 구입한 물건들의 쓸모를 알아보느라 분주했다.

뮐러는 운랑에게 말을 가르치며 20만 골드에 구입한, 몸을 조종해 춤을 잘 추게 해 주는 마법이 걸린 드레스가 내팽개쳐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제법 쓸모가 있어 보이는데 여행에는 영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버릴 기세다.

그 드레스를 웨이크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기쁜 기색으로 챙긴다. 설마 입을 생각인가 하고 뮐러가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에게 여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기억해 냈다.

“저는 강도가 맞았습니다.”

멍하니 가람과 웨이크가 한낮을 보내는 것을 바라보던 뮐러는 귓바퀴에 고여 드는 괴이한 문장에 고개를 들었다.

강도가 맞았다니. 새삼 자신이 강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건가. 왜 그런 이상한 문장이 교재에 있는 걸까 해서 보니, 전혀 다른 문장이다.

“강도가 맞은 게 아니라, 강도를 맞은 겁니다. ‘저는 강도를 맞았습니다.’, ‘강도를 당했습니다.’라고 하세요.”

뮐러의 가르침대로 운랑이 다시 문장을 고친다. 잠시 정상적인 문장이 이어지다가 또다시 삐끗.

“몸 건강하시군요. 저는 잘 지냅니다.”

“‘건강하십니까’입니다. 상대가 건강하다고 마음대로 결론 내리지 마세요. 뒤의 문장은 맞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가람이 부피가 크고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 하나를 또 내다 버린다. 예쁜 여성용 팔찌였다.

웨이크가 검을 닦다가 툭 버려지는 팔찌에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는 이번에도 기쁘게 팔찌를 챙기더니 냉큼 자신의 왼팔에 차 보는 게 아닌가.

팔찌도 여동생에게 주려나 하고 심드렁하게 바라보던 뮐러는 깜짝 놀랐다. 설마 드레스도……. 아닐 거야.

뮐러는 웨이크가 드레스를 들어 제 몸에 대어 보듯 하는 것을 외면했다.

아닐 거야.

그렇게 나른하게 충전의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Chapter 12

흐트러진 네 인영이 새벽녘의 어두운 안개를 헤친다. 패스는 열흘 만에 찼고, 가람은 작별의 아쉬움을 느낄 새 없이 모자산맥을 떠났다. 그것이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다.

여느 때 같으면 기차를 타려고 했겠지만, 모자산맥은 그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단히 유명한 관광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마법 열차가 설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지는 어쩔 수 없이 도보로 이동하는 것밖에 없었는데, 뮐러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모자산맥의 마법사들은 바랄라인 다음으로 실력이 좋다. 다른 도시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공간 마법사를 이곳에서는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모자산맥에는 이동 마법진이 있었다. 비록 그 거리에 한계가 있긴 했지만, 놀랍도록 편리한 기능임은 분명했다.

그 특이한 공간적인 특성 덕분인지 모자산맥 출신의 마법사들은 뛰어난 공간 마법사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공간 감각을 갖고 자라난 아이들은 마법사가 되면 거의 십중팔구는 공간 마법사가 되었다.

따라서 공간 마법사 용병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인력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람은 탑의 마법진을 사용해 공간 마법을 이용하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혹시나 해서 찾아간 용병 길드에서 공간 마법사를 한 명 고용할 수 있었다.

만약 위험에 처하거나 비상사태가 닥친다면 그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설령 모르드레드와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도, 도망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눈 튀어나올 만큼 비싼 의뢰금 때문에 헐값에 팔려 버린 게 된 뮐러가 씁쓸해했지만 그래도 모두 마법사를 환영했다.

귀하다는 공간 마법사, 그중에서 용병으로 나서는 공간 마법사는 정말로 손에 꼽는다.

아니, 사실 공간 마법사가 용병 노릇을 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두 달간의 계약이긴 했지만 구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 운이 정말로 좋았다.

그의 마법을 이용해 모자산맥을 떠날 수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을 옮기는 수준의 마법은 한 번 펼치면 열흘은 앓아누워야 한다는 말에 가람은 기꺼이 탑의 마법사들을 이용했다.

그의 이름은 벤실럿. 밀빛 머리칼이 삐죽삐죽 자라 다소 허수아비 같은 인상의 남자였다.

나이는 마흔으로, 일행 중에 가장 연장자였기 때문에 가람은 최대한 그의 말을 따라 주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그가 일행의 목숨을 책임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데다, 가만히 앉아 은행에서 물건을 이동시켜 주는 정도로 한 시간에 수백 골드를 만질 수 있는데 굳이 궂은 길을 따라나서 준 것도 고마웠기 때문이다.

탑의 마법을 이용해서 도착한 곳은 대응 마법진이 그려진, 모자산맥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숲이었다.

남쪽으로 3일간 더 달리자 황무지가 나타났고, 너머로 모래 구릉이 진 사막이 어렴풋이 보였다. 이곳을 지나면 이제부터 남공이 다스리는 땅, 칸이 시작된다.

그러나 가람이 갈 곳은 사막이 아니었다. 훨씬 더 나쁜 곳이었다.

사막의 모래 구릉을 외면하고 동쪽을 바라보면 인위적으로 느껴질 만큼 우거진 정글을 발견할 수 있다.

그 근처에 사는 주민들조차 절대 50미터 이상 들어가지 않는 그 숲의 이름은 ‘유령의 숲’. 무엇이 살고 있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그 땅이 패스를 품고 있었다.

가람은 그런 소문들이 별로 두렵지 않았다. 미신이 팽배한 토착민들의 소문일 뿐 대부분은 전쟁 시절 정복자들의 사기를 꺾으려고 만들어 낸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언제나 깊은 숲이 있는 마을 근처에서는 그런 소문들이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그리고 라쿠카나 용이 사는 이런 세상에 위험하지 않은 깊은 숲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용이 나타난다고 해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디서든 도망칠 수 있게 해 주는 공간 마법사가 있으니까.

“이 근처에 동물이 좀 있는 모양이군요. 덫입니다.”

앞서 걷던 웨이크가 젖은 나뭇가지를 헤쳐 내고 조잡한 모양의 덫을 보여 주었다. 곰이나 사슴 같은 것을 노린 큰 덫이 아니라 토끼나 다람쥐를 잡기 위한 통발 형태의 덫이었다. 그래도 근처에 다른 덫이 더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며 웨이크가 주의를 준다.

사막이 지척인데도 기묘하게도 이 숲에만은 비가 자주 왔다. 거의 이틀에 한 번꼴로 내리는 듯했다. 숲에 들어왔을 때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웨이크가 근처 나무에 기어 올라가 수면을 취하는 법을 알려 주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빗물이 흐르는 바닥에서 지렁이와 동침해야 했을 것이다.

비가 온 후의 숲은 온통 젖은 물 냄새로 자욱했다. 쭉쭉 뻗은 잎사귀 적은 수목들은 해를 가리지 않아 그 큰 키에도 불구하고 이슬은 반짝일 수 있었다.

바지런한 새들은 이때를 틈타 기어 나온 지렁이나 달팽이로 성찬을 벌인다.

겁도 없는 새 한 마리가 가람의 바로 옆으로 스치듯 비행했다. 잠깐 사이에 운 없는 한 달팽이의 목숨이 끝났다.

비 온 후의 집을 보수하는 곤충이나, 작은 짐승들의 소란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귀로는 느껴진다.

이슬 떨어지는 소리, 금슬 좋은 나뭇잎 잉꼬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소리, 버섯이 싱싱하게 피어나는 소리,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 새싹이 씨앗의 꺼풀에서 벗어나는 소리.

그리고 나뭇잎 위로 살짝 고인 빗물을 으스러뜨리는 자신의 걸음 소리.

이 숲은 유난히 버섯이 많았다. 키 큰 나무들의 옆에 올망졸망 난 버섯들은 그 종류와 빛깔도 다양해서 먹음직스러운 것도 있고, 이것도 버섯인가 싶을 정도로 기괴한 것도 있었다.

가람은 마치 산호초처럼 생긴 붉은 버섯과 빵처럼 노릇노릇한 빵 버섯 등을 구경하다가 문득 걸음을 가로막는 돌덩이에 멈칫했다.

돌멩이라고 부르긴 좀 크고, 바위라도 부르기엔 좀 작다. 머리통만 한 갈색의 반질반질한 돌이었다.

가람은 짧은 순간 뛰어넘을까, 돌아갈까, 밟고 지나갈까 하다가 괜히 다리를 뻗어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발을 사용해 옆으로 치워 버리려는 의도였는데, 돌을 걷어찬 가람은 대단히 당황해서 들어 올렸던 다리를 화다닥 내리며 두어 걸음 물러섰다.

가람의 두 걸음 앞에는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한 두꺼비가 새하얀 배를 드러내고 황망한 기색으로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모처럼의 비가 기분이 좋아 양다리를 얌전하게 모으고 그 축축함을 즐기고 있었는데, 무언가가 자신을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꼼짝 않고 있으면 돌과 다를 바 없이 보이기 때문에 포식자들의 눈에 띈 적도 없건만.

두꺼비는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걷어차이고도 어안이 벙벙해서 멍하니 가람을 올려다보는 것이 자신에게 닥친 일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람이 나뒹구는 두꺼비의 비난 어린 시선에 당황하는데, 가람이 따라오지 않음을 깨달은 세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왔다.

그러곤 가까스로 상황 파악을 끝내고 멍하니 벌린 입을 추스르는 두꺼비의 뒷다리를 웨이크가 덜렁 집어 든다.

“독이 없는 종류군요. 먹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딘가의 시장에서 장이라도 보는 듯한 어조로 웨이크가 감정한다.

잘되었다며 허리춤에 두꺼비의 뒷다리를 잘 엮어 매달자 거꾸로 뒤집힌 두꺼비가 발악하며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워낙 단단히 묶인 탓에 풀려나기는 어려워 보였다.

가람이 어차피 식량도 많으니 두꺼비를 풀어 주자고 하려는데, 돌풍이 분다 싶더니 대담한 수리 한 마리가 날아들어 두꺼비를 채어 갔다.

끔찍하게도 두꺼비의 발목 부분은 아직 웨이크의 허리춤에 남아 있었다.

“이런.”

웨이크는 자연스럽게 바닥에서 돌을 집어 수리를 겨냥했다. 창살 같은 가지 사이로 곡예비행을 하는지라 맞추기 불가능해 보이는데 당연히 맞출 수 있다는 듯 자연스러운 자세였다.

가람은 손을 들어 웨이크의 팔을 잡고 돌이 빗나가도록 했다.

“잡지 마요. 식량은 많잖아요.”

“하지만 더 안으로 들어가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으나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만약 정말로 식량이 모자랄 지경이라면 자신이 저쪽으로 갔다가 와도 되고, 식량이 절반 남는 시점에서 다시 나갔다가 와도 된다.

하지만 패스의 바늘과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식량이 모자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근처예요.”

“아가씨 말대로 하지? 아침부터 살생은 좋지 않네.”

벤실럿까지 끼어들자 웨이크는 손에 든 돌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뮐러는 벤실럿이 일행이 된 이후로 줄곧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자신도 똑같은 마법사인데 한 명은 노예 신세, 한 명은 깍듯한 대우를 받는 용병이니 자존심이 상할 만도 했다.

가람은 그런 것은 상관없다고 위로해 주려다가 그것이 별 위안이 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하나?”

“안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슬슬 식사를 했으면 좋겠는데.”

“벌써, 아니. 그래요, 그럼.”

뮐러와 달리 마법사는 여행 경험이 적거나 아예 없는 모양인지 식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끼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본인이 공간 마법사라 공간이나 거리적인 제약을 받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공간 마법사의 영입은 환영할 일이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행은 더 불편해졌다.

어쩐지 마법사가 일행이 된 후 뽀삐는 전혀 말을 하지 않고 있었고 뮐러도 마찬가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가람도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만큼 안전해진 것은 사실이라 모두는 그런 불편을 꾹 참고 있었다.

“여기서 식사를 하고 들어가요.”

그렇게 말한 가람은 풀 많은 곳에 뽀삐를 세워 두고 등짐에서 절인 고깃덩이와 캔 두어 개, 빵을 꺼내어 인원수만큼 등분을 나누었다.

뮐러와 웨이크도 뽀삐 옆에 말을 세워 둔 뒤 각각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의 몫을 챙길 준비를 하는 가운데 공간 마법사만이 여유롭게 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사가 식사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모두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연장자인 그에게 무언가 지시하기가 부담스럽기도 했거니와 본인도 그런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완연해져 숲 안이 조금 밝아질 무렵 능숙한 솜씨로 식사 준비가 끝났다.

막 식사 준비가 끝나 스튜를 묻혀 부드럽게 만든 빵을 가람이 한 입 베어 먹으려는데 벤실럿이 입을 열었다.

“원래 이렇게 대화를 안 합니까?”

뮐러와 웨이크가 냉큼 자신의 입 안에 빵을 던져 넣음으로써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신호를 보냈기에 가람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대표로 대답했다.

“체력을 아끼려고요. 수다를 떨면 그만큼 힘이 들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가람도 입 안으로 빵을 쑤셔 넣었다. 벤실럿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스튜에 시선을 주며 슬쩍 흘리듯 이야기했다.

“여행이라고 해서 좋은 것만 생각했는데, 이건 여행이 아니라 고행에 가깝군요.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런 투덜거림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람과 뮐러, 웨이크는 묵묵히 식사에 집중했다. 사실 가람도 처음부터 이렇게 무뚝뚝하진 않았었다. 패스를 찾느라 날카로운 상태이긴 했어도 그럭저럭 맞장구도 쳐 줬었다.

그러나 입을 열면 5할이 투덜거림에 3할이 자기 자랑인 데다 2할은 은근히 자신을 칭찬하고 떠받들어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을 상대로 즐거운 대화를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사실 저도 용병으로 경험이 많지만 이렇게 홀대받기는 처음이네요. 하하, 오면 구원자라도 될 줄 알았는데. 아, 농담입니다.”

농담이라고 했으나 농담이 아님을 가람은 잘 알고 있었다. 흔히 있는 타입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한 모양인지, 가람은 이런 타입의 사람들을 저쪽 세상에서도 꽤 많이 보았었다.

단순히 거들먹거리는 것이 아닌 어리광을 부리는 어른, 그것도 가람보다 열 살 이상 많은 어른들이 어리광을 부리는 것 말이다.

“홀대라고 하시니 섭섭하군요. 다른 때는 이것보다 훨씬 날카로운 분위기랍니다.”

보다 못한 뮐러가 부드럽게 말을 받는다.

“그렇습니까? 저는 공간 마법사라 이런 경우는 처음이거든요.”

안 나가는 물 마법사라 이런 경우를 많이 겪어 본 뮐러의 얼굴이 굳는다. 점점 식사 시간이 침묵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가람은 간단하게 벤실럿이 어떤 사람인지 추측해 냈다. 분명 공간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그리 뛰어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공간 마법사님께서 여행자들 사이에서 떠받들어지고 싶어서 용병으로 나선 건가.

“그렇게 해 주실 필요 없는데도 전에 분들은 민망할 정도로 잘해 주셔서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답니다. 하하, 사이가 틀어지면 제가 도와주지 않을 것 같기라도 했던 모양입니다.”

가람의 표정이 굳었다. 점점 도가 지나치고 있다. 본인은 웃고 있었지만 가람은 절대 농담으로 들을 수 없었다. 무언가 한마디 하려는 차에 웨이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그가 검 자루에 손을 가져가는 것을 본 가람은 드디어 웨이크가 짜증을 참지 못하고 그 남자를 베어 버리려는가 생각했지만, 뮐러는 다른 의미로 긴장했다. 눈치 없는 웨이크가 벤실럿이 돌려 말한 이야기들을 다 알아들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웨이크는 벤실럿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그 추측은 정확했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뽀삐가 조심스레 가람을 잡아끈다. 서서히 일어나며 가람은 웨이크의 시선을 따라 수목 사이를 살폈다.

무언가가 있는 걸까? 생각하는 순간, 나무와 나무 사이로 기묘하게 일렁이는 그림자가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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