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원숭이라고 하기엔 너무 크다. 마치 아지랑이에 흔들리는 신기루 같은 느낌이었다.
그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갑자기 심장이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무언가가 있다.
혈관 속으로 긴장한 혈액들이 쏟아져 들어갔다. 다리에 피가 몰려 근육이 단단해진다. 차가워진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가람은 긴장하며 양손에 권총을 빼 들고 웨이크의 시선 끝을 겨냥했다. 신중하게 호흡을 끝까지 내뱉고 천천히 들이마신다.
슬쩍 스친 것을 보기만 했지만 예사로운 느낌이 아니었다.
“뭐, 뭡니까?”
“쉿.”
엉거주춤한 자세의 벤실럿에게 가람이 눈짓했다. 만일을 대비해 도주로를 확보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눈치도 없는지 벤실럿은 멀뚱멀뚱 보다가 ‘뭐요?’ 하고 되물었다. 그에게는 저 기묘한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걸까.
심장이 귓속에서 뛰는 느낌이다. 가람은 어디선가 북소리가 울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자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지척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형상이 다 드러났을 때, 가람은 망설임 없이 발포했다. 절대 사람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모르겠다. 형태 없는 기묘한 것이 검은 빛을 뚝뚝 떨어뜨리며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언뜻 보면 마구 빚은 찰흙 같기도 하다. 쾅 하는 격발음에 놀랐는지 그 형상이 찢어질 듯 날카로워졌다가 곧 안정되었다.
그리고 꾸물꾸물 무언가 형태를 만들어 내더니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그것은 가람과 뮐러, 그리고 웨이크, 벤실럿으로 변했다. 색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확실하게 자신들이었다.
가람은 그 광경을 경이롭게 바라보다가 다음 순간 경악하고 외쳤다.
“뛰어요!”
찰흙이 변해 만들어진 가람의 형상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어 들었던 것이다. 그 자리를 피하기가 무섭게 격발음이 울렸다.
뮐러와 웨이크는 각자 공격을 시도하다가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가람을 따라 뛰었다. 그 뒤를 또 다른 괴물 일행이 뒤쫓듯 달렸다.
“저건, 헉, 헉. 대체 뭐죠?”
“모르겠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생물이 아닐까요.”
“정체는 몰라도 무기가 안 통합니다. 상황이 안 좋은데요. 저것들이 우릴 쫓아오며 지치고 있는지나 모르겠습니다.”
가람과 뮐러, 웨이크가 차례대로 한마디씩 하자 시선들은 자연스레 벤실럿으로 향했다.
벤실럿은 너무나 놀랐음이 분명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바로 이동 마법을 쓰는 건 불가능합니다. 일단 저를 지켜 주면 그사이에 준비해 보겠습니다.”
가람은 패스의 근처까지 와서 돌아가는 것이 몹시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음을 깨닫고 수긍했다.
웨이크가 길을 뚫고 뮐러와 가람이 벤실럿의 양어깨를 끼고 그를 들다시피 하며 달렸다.
벤실럿은 어깨를 잡혀 이동당하면서 주머니에서 기묘한 가루와 종이를 꺼내어 마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어, 어차피 멀리는 못 갑니다.”
“알아요. 이 숲을 벗어나는 정도로도 충분해요.”
변명하지 말고 빨리 하기나 하라고 닦달하고 싶었지만 가람은 그의 어깨를 붙잡고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홀로 뛰기도 힘든데 누군가를 들고 달리는 것은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새삼 뽀삐의 고충을 깨달으며 가람은 다리에 힘을 집중했다.
저 멀리 보이던 나무가 순식간에 옆을 지나쳐 간다. 가람은 그것만으로 자신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 뒤의 그림자들은 계속해서 쫓아왔다. 뒤따르는 풀잎 헤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마침내 가람은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이었다. 뽀삐가 달리던 힘을 못 이기고 거의 절벽 아래로 떨어질 뻔하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가람에게 툭 걷어차인 자갈이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그 돌멩이에 가람은 무거운 침을 삼키고 뒷걸음질 쳤다.
앞은 절벽, 뒤는 정체불명의 괴물들.
마법사의 마법은 느리기 짝이 없고, 동료들 또한 긴장으로 얼어붙어 있다. 이런 순간이면 가람은 강렬한 유혹을 참아 내기가 힘이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달콤하고도 매혹적인, 홀리기에 충분한 선택지.
자신에게는 신전에서 얻어 낸 40패스가 있다. 가람은 아직도 혈관을 휘돌며 심장을 뛰게 하던 그 감각을 기억한다.
모르드레드를 단번에 뭉개었던 그 힘, 놀라운 기적이자 권능에 가까운 그 능력을 기억한다. 어떤 시련도 고난도 모조리 파괴해 줄 힘. 절대적인 패스의 힘.
이토록 나약하고 가련한 처지에 그 유혹을 뿌리치기란 얼마나 힘겨운가. 섣불리 사용해 버리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큰 자제력이 필요한지는 누구도 모를 것이다.
가람은 이를 악물고 문양이 그려진 손등을 외면하며 벤실럿에게 소리쳤다.
“아직 멀었어요?!”
그림자는 이제 지척에 있다. 육안으로 또 다른 가람의 표정이 확연하게 보인다. 괴물인데도 괴물 가람은 지친 얼굴로 달리고 있었다.
자신처럼 생긴 것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보는 기분은, 너무나 소름 끼치는 것이다.
가람이 다시 뒷걸음질 치다가 뒤쪽이 절벽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뮐러가 다급하게 가람을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벤실럿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안간힘을 써서 마법진을 그려 내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혼자서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뮐러였다. 뮐러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저 개자식! 저럴 줄 알았어!”
“혼자서, 간 거예요?”
가람이 얼떨떨하게 질문함과 동시에 괴물들이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실제 벤실럿이 사라지자 괴물들 사이에서도 벤실럿의 모습이 사라져 있었다.
포위하듯 둘러싼 그들 속에서 가람은 욕지거리를 삼키며 왼쪽 손을 강하게 주먹 쥐었다.
40패스, 이 위기를 벗어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으니 공격하는 능력은 무의미하다.
도망치는 능력이 좋겠는데, 어떤 능력이 적절할까? 한 시간 정도 비행할 수 있는 능력? 아니면, 공간 이동?
써야 한다. 써야 할 상황이지만 가람은 달갑지 않았다. 바로 전의 패스가 단 하나도 없었을 때 느꼈던 그 무력함, 무기력함, 희망도 무엇도 믿을 것 없는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고 생각하면 아찔할 지경이다.
다행히 괴물들은 포위하고 서 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공격도 하지 않는다. 이대로 천천히, 도망치면 괜찮지 않을까.
“다들 숨 골랐죠?”
“충분히 쉬었습니다.”
웨이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웨이크와 달리 가람은 여전히 숨이 찼지만, 뛰기로 했다. 혹시나 섣부른 움직임에 저것들이 반응할까 가람이 바짝 긴장하자 그것들도 바짝 긴장해 튕겨 나올 것 같은 기세로 가람외 일행들을 주시했다.
가람은 천천히 옆 걸음으로 움직였고, 그것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여 가람을 뒤따랐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 가람이 달음박질을 결심하는 순간, 갑자기 시커멓고 거대한 무언가가 상황 속으로 난입했다.
난입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으리라.
그것은 뽀삐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거대한 흑마였다. 야성적으로 휘날리는 갈기는 웅장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은 날렵하기 짝이 없어서, 세 사람은 잠깐 상황도 잊고 압도당했다.
말은 난입하자마자 갑자기 신나게 말발굽을 찍기 시작했다. 현란한 탭댄스였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가감 없는 담백한 사실이다.
난입한 말은 탭댄스를 췄다. 갑자기, 혼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