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아니, 혼자서가 아니다. 어처구니없게도 괴물들이 말과 함께 탭댄스를 추기 시작한 것이다.
탭댄스의 좋은 점은 음악이 없어도 박자 자체로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긴장이 휘몰아치던 절벽 위에 갑자기 리듬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절로 들썩이게 만드는 그 박자는 놀라운 솜씨라서, 갑자기 뽀삐가 휙 뛰어들더니 춤판에 가세했다. 거기에 뮐러와 웨이크의 말도 뛰어들어 춤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신이 난 말들의 푸히힝, 푸르릉 소리가 요란하다.
가람은 허망한 시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춤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뽀삐의 춤 솜씨가 생각보다 매우 뛰어나다.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저 말은 대체?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은 약 반 시간 후 검은 흑마가 능숙한 인간어로 자신을 케르타라고 소개하자 그제야 조금 수습되었다.
“난 케르타다.”
한바탕 벌어진 춤판의 여운이 남아 케르타는 조금 들뜬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 이름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뮐러였다. 그는 박수까지 쳐 가며 자신의 깨달음을 토해 내었다.
“케르타! 야수들판의 전 주인!”
덕분에 가람과 웨이크는 기억을 뒤질 필요 없이 케르타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날 아는 걸 보니 베록 출신인가?”
“아닙니다.”
너무나 단호한 뮐러의 부정에 케르타는 조금 겸연쩍게 앞발로 땅을 긁었다.
“트리거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가람의 말에 케르타가 따각따각 걸어 그녀에게 다가왔다. 평균적인 말의 체고를 훌쩍 뛰어넘는 거대함은 가람을 위축되게 만들었다.
케르타는 그녀의 긴장을 읽고 일부러 앞다리를 구부려 바닥에 앉아 주었다. 그러나 배려에도 불구하고 케르타는 여전히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람은 높은 곳에 위치한 말 머리가 움썩움썩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름이?”
“가람이에요. 이쪽은 뮐러와 웨이크.”
케르타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람에게로 머리를 들이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트리거의 냄새를 확인하려는 건가 싶어 가만히 앉아 있던 가람은 거대한 말 머리가 곤혹스러울 정도로 품을 파고들자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다.
“트리거와는 꽤 오래전에 헤어졌어요. 냄새를 맡아도 소용없을 거예요.”
“음. 아닌데.”
“네?”
“트리거 냄새 맡은 거 아냐.”
‘아가씨 냄새 맡은 거야.’ 하고 케르타가 히죽 웃었다. 가람은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대단히 당황했다.
사람이라면 추행이겠지만 상대가 말이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동물들은 냄새로 상대를 인식한다던가?
가람이 당황해 있는 사이 케르타는 얌전히 기립하고 있는 괴물, 아니, 정체불명의 생물들에게 앞발을 들어 까딱였다.
그러자 세 명의 가짜 가람과 뮐러, 웨이크가 꿀렁꿀렁 찰흙의 형상으로 변하더니 나무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저거 뭡니까? 당신이 저 괴물들을.”
케르타가 질문하는 뮐러의 말을 자른다.
“괴물이라니, 그냥 방문자들의 행동을 따라 하는 동물이야. 좋은 녀석들이지. 보아하니 다짜고짜 공격한 것 같은데 저 애들을 괴물이라고 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군.”
“하지만 숲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변했단 말입니다.”
뮐러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케르타는 콧방귀만 뀌었다.
“갑자기 숲에 나타난 낯선 형상들보단 덜 괴물처럼 느껴졌을 거 아닌가. 저 애들은 나름 친근감을 주려고 같은 종족으로 보이게 한 거야. 그 후론 보통 상대의 행동을 따라 할 뿐인데. 인사를 하면 인사를 하는 식으로.”
다짜고짜 총을 쏴 버렸던 가람의 뺨이 붉어졌다. 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위험한 무언가라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뮐러와 웨이크의 사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뺨을 붉히는 대신 충분한 관찰 없이 섣불리 공격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있었다.
“그래, 트리거와는 셋 다 친구인가?”
“그렇습니다. 가람 덕분에 소개받을 수 있었죠.”
케르타의 시선이 다시 가람을 향한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팔로 제 품을 여몄다.
그러나 케르타는 다가와서 코를 박는 대신 고개를 주억거려 뮐러와 웨이크를 앉혔다. 엉거주춤 가람도 따라 앉자 비로소 대화가 시작되었다.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그래, 우리 트리거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
‘우리’ 트리거라는 말이 생소해서 가람은 몇 번이나 그 단어를 곱씹다가 케르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처음 이쪽 차원으로 와서 혼란스러워하던 시절에 절 돌봐 줬거든요.”
얼른 대답해야겠다 싶어 생각 없이 입을 열었던 가람은 저도 모르게 제 입을 꾹 눌렀다. 뮐러와 웨이크의 시선이 따가웠다. 잠시간의 침묵 후 뮐러가 확인하듯 질문했다.
“이쪽 차원?”
가람은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떼어 내고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리고 숨과 침을 동시에 들이켜고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사레를 수습하고 눈물 맺힌 얼굴을 들어도 그때까지 뮐러와 웨이크는 가람의 부연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잠깐의 유혹이 뒤따랐다. 다른 대륙이라고 말하려던 것을 잘못 표현했다고 할까. 하지만 뮐러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생각을 접었다.
뮐러의 얼굴은 아주 오랫동안 의혹으로만 갖고 있던 무언가의 실마리를 잡은 듯한 표정이었다. 호락호락한 설명으론 결코 넘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람은 침을 삼키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케르타는 기묘한 분위기에 침묵을 지켰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태도에 가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뮐러와 웨이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야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어디부터? 어디까지?
“사실 저는 동대륙 사람이 아니에요.”
가람은 일단 고백했다. 웨이크와 뮐러는 묵묵히 다음 말을 기다림으로써 그 한마디로 상황을 넘겨 보려던 가람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가람은 생각을 좀 더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이쪽 차원,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어느 세계의 사람입니까?”
“여기와는 아주 다른 세계의 사람이죠.”
뮐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케르타와 뽀삐는 나란히 앉아 뮐러의 혼란을 바라보았다. 가장 의외의 것은 웨이크로, 그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하고 간단히 수긍했다.
“웨이크는 놀랍지 않아요?”
“놀랍습니다. 하지만 저와는 상관이 없는 문제니까요. 지금까지와 바뀌는 것은 없지 않습니까? 사실 느낌이 좀 이상하다곤 생각했습니다.”
“어떤 느낌이요?”
“당신은 운랑이나 운화라는 동양인과 너무 달랐으니까요. 좀 다르구나 하고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굉장히 수상하긴 해서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뮐러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것일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제라도 말해 줘서 고맙다며 웨이크는 상투적인 감사 말을 늘어놓았다.
가람은 순간 그가 화가 난 것이 아닌가 해서 안색을 살폈지만 웨이크는 화나지 않았다. 그저 정말로 별 관심이 없을 뿐이었다.
가람이 다른 차원에서 온 것과, 다른 대륙에서 온 것은 웨이크에게 비슷한 가치를 가지는 듯싶었다. 둘 다 모르는 곳이니 어차피 상관이 없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그러나 웨이크와는 달리 뮐러는 굉장한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차원이나 신세계가 웨이크에게 뜬구름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 개념인 것과 달리 뮐러는 마법사로서 가람의 말을 이해했다.
공간 마법사들의 학회지에 가끔 등장하는 개념인 다른 차원에 대한 가설은 아직까지 힘이 없는, 가설로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람이 정말로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면 차원론에 대한 학설이 정설로서 자리 잡게 된다. 그 논문을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뮐러는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마법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들에 앞서, 뮐러는 질문했다.
“진짭니까? 진짜 다른 차원이 있고, 거기서 온 사람이라고요?”
“진실이에요.”
뮐러는 믿기지 않는지 입을 여닫으며 단어를 찾다가 다시 질문했다. ‘진짭니까?’, ‘진짜예요.’ 한참 동안 같은 대화가 도돌이표를 도는 동안 케르타와 뽀삐는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다른 차원이 무슨 뜻이에요?’, ‘우리와는 상관없는 거란다.’, ‘그렇구나.’
“그렇다면 이쪽 세계에는 왜 온 겁니까?”
대답하려던 가람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아주 많은 것들을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가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뮐러는 가람의 감옥처럼 닫힌 얼굴에 많은 질문들을 삼켜 버렸다. 스스로도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가람은 혼란을 수습하듯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건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은 급한 일을 처리해요. 케르타, 저를 좀 도와줄 수 있나요?”
“음, 어떤 도움을 원하지?”
“이 숲 안쪽으로 더 들어가고 싶어요. 도와줄 수 있나요?”
“이 안쪽은 그루들의 영역이야.”
“그루? 그루가 뭐예요?”
“그루는 그루지.”
케르타는 전혀 대답 같지 않은 대답을 했다. 미간을 모으고 그 대답의 의미를 유추하던 가람은 그루가 뭐든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못 들어가나요?”
“아니. 들어갈 순 있어. 다만 준비물이 좀 필요하지.”
그 말을 하는 케르타의 얼굴은 뿌듯함과 자부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준비물이 뭐죠?”
“음, 그냥 알려 줄 수는 없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동안 나한테 트리거 소식이나 좀 들려줘. 그럼 알려 주지.”
“좋아요. 그래서 준비물이 뭐예요?”
케르타는 순순히 준비물이 무엇인지 알려 주었다. 그러나 대답을 들은 가람은 매우 곤혹스러워졌다.
구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서 그런 것이 필요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필요하다면 마련하긴 해야 해서, 가람은 숲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그것을 만들어 오기로 했다.
이 숲에 오래도록 살고 있는 케르타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위험한 숲이 아니었다. 홀로 나무 사이로 들어가도 별로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람이 일행과 떨어져 나오려는데, 갑자기 뮐러가 가람을 붙잡고 질문했다. 나름대로 어떤 결론을 얻었는지 혼란스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걱정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가람, 한 가지 질문할 것이 있습니다.”
“하세요.”
가람이 순순히 대답하자 뮐러는 숨을 끝까지 들이마시고 내쉬길 반복하다가 비장하게 질문했다.
“이쪽 차원으로 온 이유가 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입니까?”
긴장한 뮐러의 얼굴은 매우 진지하기 짝이 없었지만 가람은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요.”
“그러면 이쪽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입니까?”
“전혀요.”
“그렇다면 이쪽 세계를…….”
가람은 뮐러의 수많은(정복하거나 멸망시키거나 식민지로 삼거나 실험 대상으로 삼거나 이쪽 차원의 사람들을 납치하거나 하는) 노파심 가득한 질문에 일일이 대답해 주고 나서야 케르타가 말한 준비물을 제조하러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약 반 시간 후, 세 사람은 각각 멀찌감치 떨어져서 만들어 온 자신들의 배설물을 들고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 * *
가람은 불편한 기분으로 뮐러의 시선을 외면했다. 막 만들어 와 아직 따듯한 기운이 남아 있는 그것은 현재 가죽 부대에 담겨 가람의 손에 들려 있었다.
가람 외에 뮐러와 웨이크의 손에 들려 있는 가죽 부대도 아직 식지 않았으리라. 민망하고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케르타만이 쾌활했다.
“좋아, 좋아. 모두 잘 준비해 왔군. 이제 따라와.”
거대한 흑마가 길을 뚫으면 그 뒤를 세 사람이 따른다. 마지막으로 뒤따르는 것은 뽀삐와 두 마리의 말이었다.
케르타가 있어 든든해진 덕분에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졌으나 어색하고 민망한 침묵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가람은 생각 같아서는 손에 든 미지근한 것을 내던지고 싶었지만 패스를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트리거의 이름까지 언급했는데 케르타가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야 어쨌건 그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정말로 필요한 것이리라. 가람은 부디 케르타의 다음 요구가 더 곤혹스럽지 않기만을 바랐다.
“트리거는 요즘 뭐 하나? 아직도 베르하르트에 놀러 가고 그러나?”
“베르하르트요?”
가람은 케르타의 바로 뒤에 서 있었던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기분이 불편했다.
대화를 나누며 화자의 얼굴 대신 엉덩이를 마주 봐야 한다면 누구나 편안한 기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응. 요즘은 안 그러나?”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제가 아는 트리거는 엄청 잘 챙겨 주고, 아는 것 많은 호랑이인데, 영역을 지키느라 저랑 함께 가지도 못했어요.”
따각따각 걷던 케르타의 걸음이 예고 없이 멈추었다. 덕분에 말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을 뻔한 가람이 기겁했다. 케르타는 흐음 하고 생각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 짓 그만뒀나 보군. 하긴 슬슬 철들 때도 됐지.”
“어떤 짓인데요?”
“아가씨가 전혀 모르는 걸 보니 이제 그만둔 게 확실한가 보군. 그 녀석 어릴 땐 정말 말이 아니었지. 이갈이 할 땐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했다니까.”
케르타의 입으로 듣는 트리거의 과거사는 매우 생소하고 재미있었다. 그 호랑이에게도 마냥 어리던 시절이 있는 모양이다.
솜털 보송보송하던 시절에는 케르타처럼 풀을 먹으려고 들다가 매일 토하기가 일쑤였고, 보다 못한 케르타가 결국 고기나무를 널리 퍼뜨려 심어서 트리거의 이유식을 해결했다.
그 전에는 고기나무가 지금처럼 아주 널려 있지는 않았던 탓이었다.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트리거의 한 끼 식사가 되기 싫었던 다람쥐들이 열심히 도와준 덕분에 씨앗은 금세 퍼졌다.
“예전엔 아주 난리도 아니었지. 하루, 이틀씩 사라질 때마다 베르하르트에 놀러 가서 사람 여럿 물어 죽이곤 했는데. 질풍노도의 시기였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케르타를 보며 가람은 그런 것은 놀러 간다고 표현하지 않는다고 정정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려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확 바뀌었다. 마치 문을 열고 어떤 다른 공간 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이 바로 눈앞에 생겨난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그루의 도시야.”
나무들이 사는 도시가 있다면 이러하지 않을까.
언뜻 보기에는 마치 계단식 농업 같았지만, 또 어찌 보면 잘 다듬어진 자그마한 산 같기도 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둥치의 나무를 중심으로 키 작은 나무들이 스며들듯 자라나 융합되고 있었다.
거대한 고목에 난 구멍 사이사이로 어린 나무들의 가지가 뻗어 나와 있다. 수백, 수천 그루의 나무들이 한데 뭉쳐 어지간한 도시만 한 둥치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가지는 각각 모두 다른 나뭇잎과 꽃, 과실수를 매달고 있어 마치 세상의 모든 나무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보였다.
아주 멀리 있는데도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나무였다.
“이건……. 만과나무!”
뮐러가 경악하며 반쯤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케르타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피식 실소한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알려져 있기도 하지.”
“만과나무요?”
“세상의 모든 열매와 잎사귀를 다 맺는다는 나무야. 한 그루라고 알려져 있긴 하지만, 실제론 한 그루이되 한 그루가 아니지. 보다시피 말이야.”
케르타의 설명은 어딘가 트리거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 트리거가 케르타의 어투를 닮아 간 것이 아닐까 짐작하며 가람은 케르타가 어린 트리거에게 인간의 말을 가르치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트리거의 말은 케르타가 가르친 건가요?”
“그렇지. 그맘때의 트리거는 보통 사나운 게 아니라서 나 아니었으면 감당할 수 없었거든.”
그때 갑자기 케르타가 예고 없이 멈춰 섰다. 처음에는 엉덩이에 얼굴을 박을 뻔한 가람은 거리를 좀 두고 있었던 덕분에 이번에는 안정되게 멈춰 설 수 있었다.
가람이 고개를 주욱 빼고 보니 멈춰 선 케르타의 앞에 아까 숲에서 보았던 뭉글거리는 형상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잠깐 있어.”
“아, 예.”
가볍게 대답하고 서 있으니 케르타가 갑자기 스텝을 밟기 시작했다. 처음보다 그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아서 한바탕 춤판이 끝나자 가람은 침착하게 질문할 수 있었다.
“그, 춤은 왜 추는 거예요?”
“아, 이거? 신호야, 신호. 쟤들이 좋아하기도 하고, 나도 좋아하고.”
감명받은 시선으로 물러가는 덩어리들을 바라보던 케르타가 매우 상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가람은 무슨 신호인지 궁금했으나 뽀삐가 케르타에게 바짝 달라붙어 푸릉푸릉 매달리는 바람에 질문을 뒤로 미루었다.
뽀삐는 케르타가 매우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마치 헤어졌던 아버지라도 만난 듯이 굴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가람은 뽀삐와 케르타가 둘 다 흑마라는 생각에 멈칫했다. 에이, 설마.
“저기 문지기가 오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