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케르타의 시선을 따라가자 확실히 사람 비슷한 형상이 보였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점점 가까이 올수록 사람의 형상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팔이 일고여덟은 되고 다리도 열 개는 넘어 보이는 그것은, 마치 사람처럼 뿌리를 움직여 걷고 있는 나무 한 그루였다. 그 기괴한 광경에 가람은 잠시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누구―?”
나무와 나무가 마찰해 내는 탁한 소리에 뭉그러진 발음은 알아듣기 힘들었으나 분명히 인간의 언어였다.
그러나 너무나 오래된 억양이라 뮐러와 웨이크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이번에도 가람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나무의 옹이구멍이 마치 눈알처럼 움직이는 광경에 심취해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나무는 온건한 그냥 나무였다. 사람 같은 눈알이나 입술도 없었다. 커다란 옹이구멍 하나와 작은 옹이구멍 하나가 눈과 입을 대신하는 듯했다.
움직임 없는 옹이구멍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은 정말로 이상했다.
“손님이 좀 왔네. 그루.”
“손님―?”
그루라고 불린 나무가 세 사람을 돌아봤다. 텅 빈 옹이구멍은 셋 중 누구를 손님이라고 인식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듯 세 사람을 차례대로 오갔다. 그 옹이구멍 앞에 가람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안쪽으로 좀 들어가고 싶은데요.”
새카만 옹이구멍이 가람을 향한다. 가람은 나무가 뭐라 말할지 궁금해 입 같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 입 안으로 참새보다 작은 펭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말 그대로였다. 짧디짧은 날개로 포르르 날아든 작은 펭귄이 옹이구멍 안으로 쑥 들어간 것이다.
가람은 매우 당황했으나 그루는 그 상황 자체를 무시했다. 그러나 가람은 그루의 입을 들락날락하는 작은 펭귄이 매우 신경 쓰였다. 너무 이상한데.
“침입?”
그루라는 나무는 나무인 만큼 사고의 속도도 느린지 한참 뒤에야 결론을 도출해 냈다.
별로 좋은 결론은 아니었다. 가람이 조금 당황하자 케르타가 갑자기 나섰다.
“침입자 아냐, 선물도 가져왔어. 자자. 이거 봐 봐.”
‘이것’은 가람이 지금 들고 있는 주머니 속에도 들어 있는 것으로, 가람은 생전 처음으로 거대한 말의 배변 장면을 생으로 목격했다.
꼬리를 휙 쳐들더니 나무 앞에 거하게 싸 놓은 케르타는 매우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사실 달리면서도 해 줄 수 있긴 한데, 내 실력 알지?”
“오, 오오!”
가람과 두 남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그루는 매우 감동한 동작을 취하며 그 자리에 뿌리를 박았다. 사람으로 친다면 자리에 앉은 것이나 다름없는 자세다.
그루는 뿌리를 꿇고 케르타의 대변에 옹이구멍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한 작은 펭귄이 기겁을 하고 날아가 버린다. 그러나 그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진품, 진품!”
그루는 케르타의 대변이 진품이라 매우 감동받은 것 같았다. 그것들을 뿌리로 잘 모은 후 밑동으로 쑥 집어넣어 갈무리한 그루는 케르타를 10년 만에 본 아들처럼 환대했다.
가느다란 가지가 케르타의 목덜미와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이쯤 되자 가람은 자신이 든 주머니의 용도를 모를 수가 없었다.
가람은 어색하게 그루에게 다가가 손에 든 주머니를 건네었다.
“이거, 선물이에요.”
이런 선물은 태어나서 처음 해 본다. 부디 이 앞에서 펼치지 말아 주었으면 했는데, 그런 가람의 바람도 무의미하게 그루는 모두가 볼 수 있게 주머니를 활짝 펼치고 가람의 배설물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뮐러와 웨이크가 흠흠 목을 가다듬고 자신들의 주머니까지 공개하긴 했지만 가람은 귀까지 빨갛게 익어 버렸다.
“진품! 이것도 진품!”
그럼 가짜도 있겠냐. 가람이 배설물을 감정하는 그루를 보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부채질하는데 슬쩍 다가온 케르타가 귓속말했다.
“쟤넨 못 누거든. 쯧.”
다 좋은데, 가람은 케르타가 어째서 그 사실을 험담하듯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진품 대변을 선물받아 매우 기분이 좋아진 그루는 가람 일행을 기꺼이 자신의 영역으로 초대해 주었다.
초대받은 이 중 뽀삐와 케르타가 수시로 선물을 주어서 그루를 매우 기쁘게 해 준 것은 여담이다.
뽀삐와 케르타의 선물에 힘입어 가람은 보통 사람은 일생 발 디딜 기회조차 없는 비밀스러운 그루의 도시로 거칠 것 없이 안내되었다.
한순간 바뀌어 버린 시선 안에 불쑥 들어온 도시의 풍경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그루의 도시는 어떤 결계 속에 있는 듯싶었다.
그냥 걸어서는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그루의 허락을 받은 자들만 진입할 수 있는 도시.
그루의 안내를 받아 그 영역으로 들어가는 내내 가람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루의 뿌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뿌리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진리일 텐데 원래 그렇게 움직이는 게 당연하다는 듯 스스럼없는 동작이 신기하기 짝이 없다.
가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루가 걷는 중간중간 돌아보았다. 놀랍도록 예민한 나무였다.
“나는 여기까지.”
그렇게 말한 그루는 땅에 그대로 뿌리를 박더니 인사할 틈도 없이 옹이구멍을 닫고 잠들었다. 뿌리가 땅을 쓸어 내던 소리가 사라지자 삽시간에 적막이 휘돌았다.
그 틈바구니 속에 멀리서 산새 우는 소리가 비집고 든다. 그 울림 안에서 가람은 단정하게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쭉 젖혀야 했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거대한 나무는 그 형태를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어져서 이렇게 목을 빼지 않으면 보기가 힘들다.
가람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손날을 세워 해를 가리며 나무 틈과 바늘을 대조해 보았다.
신전에서의 경험 탓에 설마 이 거대한 나무에 불이라도 지르게 될까 걱정했던 가람은 바늘이 나무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고 안도했다.
바늘의 길이를 가늠해 보건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패스가 있었다. 적어도 오백 보 안에 있다. 이대로 계속 직진한다면 패스를 맞닥뜨릴 것이다.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가람은 잠든 그루의 나무껍질을 훑듯이 쓰다듬고 그루의 도시 안쪽으로 더 들어갔다.
우거진 여린 나뭇잎 사이로 빗살같이 쏟아지는 햇살이 모자산맥을 연상하게 만든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나뭇잎과 햇빛으로 만든 점묘 작품을 보는 듯싶었다.
한껏 숨을 들이쉬면 그 아름다운 공기가 몸을 가득 채운다. 아찔할 만치 평온하고 조용했다.
“이 나무들은 전부 그루처럼 말하고 움직이나요?”
“그렇지. 전부 그루들이니까.”
커다란 케르타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 나무들이 모두 말하는 나무들이라 생각하니 가람은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만약 이 나무들이 정말 사람처럼 모두 눈 뜨고 떠들어 댄다면, 그런 풍경을 상상하면 기분이 정말 이상해졌다.
당혹스럽고, 조금 기쁘기도 하면서 유쾌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그런 기분이었다.
이런 곳을 맞닥뜨릴 때마다 언제나 이곳이 이계라는 사실을 실감하곤 한다. 사실 중세풍의 도시나 옷가지, 문화는 많이 익숙해져서 이젠 그리 이질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상황 속에 놓일 때마다 가람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뮐러?”
계속 걷던 가람은 뮐러가 따라오지 않음을 깨닫고 뒤돌아보았다. 뮐러는 아쉬움이 역력한 표정으로 어느새 등 뒤에 자리하게 된 만과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있다는 이야기만 무성하고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 없는 전설의 나무를 목도했으니 그 심경이 어떨지 예상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람은 가야 했다.
“뮐러, 나중에 봐도 되잖아요. 일단 가요.”
가람의 재촉에 반응한 것은 뮐러가 아닌 케르타였다.
“간다고? 그러고 보니 너, 그루의 도시가 목적이 아니었나?”
케르타는 조금 어리둥절한 듯했다. 만과나무를 보았으니 당연히 만과나무에 머무르거나 그루들을 귀찮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람은 그런 것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도시를 관통해 나가고 있으니 케르타가 혼란스러울 만했다.
실제로 이 커다란 흑마는 자신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서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그럼?”
“그냥, 제 눈에만 보이는 어떤 것을 찾고 있어요.”
케르타는 더욱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를 뮐러가 납득시켰다.
“가람은 이계인이잖습니까. 뭐든 우리가 이해 못 할 것들이 있어도 놀랄 일은 아니죠.”
달래듯 이야기하면서도 뮐러는 이계와 다른 차원 등에 대한 사건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내보였다.
이대로 패스를 찾고 대충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하던 가람은 어색하게 웃었다. 걸음에 힘을 줘 발을 바삐 놀리는데, 그런 가람에게 뮐러가 재빨리 따라붙었다.
“가람, 또 질문이 있습니다.”
“음, 뭔데요?”
“혹시 제가 선택받거나 한 겁니까?”
가람은 뮐러의 두서없는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그러나 대체 무엇에 대한 선택인지 이해할 수 없어 반문하자 뮐러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뭐, 전설의 용사라던가 그런 걸로 선택받았다거나, 그래서 이계에서 저를 선택해서 돌보게 한다거나 뭐 그런 것 말입니다. 혹시 저를 이계로 데려가려고 하거나 뭐, 그런 거라면 숨기지 말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따라나설 용의가 있으니까요. 제 부모님께 작별 인사는 하고 말입니다.”
그대로 둔다면 고향에 대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편지라도 띄울 것 같은 기세였다.
가람은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황당한 감정을 그대로 내보였다.
반쯤 멍하게 벌어진 입술은 뮐러가 또 다른 추측, ‘사실 제가 황제가 될 운명이라거나 그렇습니까?’ 하고 질문할 때쯤 간신히 다물어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아니. 아니에요. 전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하필 저와 웨이크입니까?”
“그냥, 이쪽 차원으로 와서 우연히 시간이 맞았던 것뿐이에요.”
“정말로? 그냥 우연입니까?”
“그럼요. 어떤 조작도 없어요.”
뮐러가 갑자기 매우 실망했기 때문에 가람은 거짓말로라도 어떤 운명적인 관여가 있었다고 이야기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했다. 그러나 뮐러는 곧 기운을 차리고 다시 약간의 가능성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람조차 모르는 어떤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없어요, 없다니까요.”
“범상치 않은 만남이 있으니 분명 제 운명도 범상치 않게 흘러가겠죠. 사실 만과나무를 내 눈으로 보게 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이지만 말입니다.”
그 후로 가람은 뮐러의 기상천외한, 어떻게든 스스로의 운명을 특별한 영역으로 결부시키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을 계속해서 부정해야 했다.
연이어 부정당한 뮐러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제 가람에게 질문하지도 않고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가람의 원래 세계에는 마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무렵에는 정말로 굉장해서, 마법이 없는 가람의 세계로 자신이 넘어간다면 그 세계의 유일무이한 마법사가 되는 것이라며 흥분했다.
가람은 뺨이 발개진 뮐러를 조금 씁쓸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텅 빈 그 세계에서, 뮐러는 유일무이한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유일무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일무이한 남자, 유일무이한 이계인, 유일무이한 서른, 유일무이한 백금발 머리, 유일무이한 녹색 눈 등, 굳이 마법사가 아니라도 살아 있는 인간이 가람 단 하나뿐인 세계에서는 수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가람은 어두운 감정 속으로 빠져들다가 애써 그것들을 수습했다. 그러나 흥분에 겨운 뮐러는 가람의 그늘을 알아채지 못하고 재차 질문했다.
“그런데 정말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가족이나, 동료 같은 건 없습니까? 임무를 같이 맡았다거나.”
“없어요.”
“어? 이계인은 원래 가족이라는 개념이 없는 겁니까?”
가람은 걸음을 멈췄다. 계속해서 따라붙으며 이야기하던 뮐러는 그제야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가람의 얼굴에 조금의 표정도 없다. 너무나 많이 갈무리해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은 분노나 비난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갖고 있었다.
텁텁하리만치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가람은 뮐러의 얼굴을 묵묵히 응시했다.
“지금은 없어요. 예전엔 있었지만.”
“아, 그렇겠군요. 이쪽으로 왔으니까 가족들과 만날 수 없는 겁니까? 어? 그러고 보니 가람이 동양의 물건이라고 하던 것들은 모두 이계의 것 아닙니까. 며칠 걸러 그걸 갖고 올 때도 있었으니, 사실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뮐러는 자신이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입이 멈춰지지 않았다. 뮐러라는 사람이 아닌, 마법사로서의 호기심이라는 또 다른 인격이 자신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람의 턱 밑에 주름이 지고 어금니가 단단하게 맞물렸다. 한 대 맞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데, 가람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없어요. 제 실수로 모두 잃었거든요.”
말의 끝 지점에서 가람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뮐러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사방은 또다시 적막에 빠졌다. 뮐러는 웨이크가 아닌 자신이 이렇게 눈치 없이 행동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 이런 상황에선 웨이크의 무심함이 옮은 것이다. 그는 잠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가 어색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아니에요. 이왕 말 나온 김에 다 말하자면, 그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지금 이렇게 돌아다니는 거예요. 이제 가요.”
깔끔하게 끝맺은 가람은 성큼성큼 걸어 앞서 나가 버렸다. 뮐러는 그 뒤로 바짝 붙으려는 웨이크를 붙잡아 걸음을 늦추게 했다. 살짝 붉어진 가람의 눈을 봐 버렸기에 수습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잠깐 어리둥절해하던 웨이크는 뮐러의 표정이 진지한 것을 보고 말없이 보폭을 줄였다.
안쪽으로 계속 들어간 가람은 절벽을 발견했다. 깎아지른 절벽과 반대편 절벽 사이에는 외줄 다리가 놓여 있었다.
온통 나무만 가득한 이곳에 외줄 다리라니, 혹시 이 너머에 누군가 살고 있기라도 한 걸까.
추측하며 외줄 다리 가까이로 간 가람은 전에는 누군가 살았을지 몰라도 지금은 이 다리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으리라고 확신했다.
제대로 다리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다리였다. 디딤 줄은 이끼로 미끈거리고 손으로 잡고 건너도록 되어 있는 부분은 드문드문 마디가 끊어져 있다.
물건에도 은퇴가 있다면 이 줄다리는 이미 은퇴한 지 오래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패스의 바늘은 심술궂게도 외줄 다리 너머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