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95화 (95/256)

95화

가람의 직설적인 질문에 딜런은 입꼬리를 간신히 수습하더니 갑자기 왁, 하고 소리쳤다.

“뜨거워! 아주 뜨겁다니까! 옷차림이 정말 뜨겁다고!”

“화끈하지, 끝내준다고!”

앞다투어 쏟아 내는 말들이 뜨겁니, 화끈하니 해서 가람은 무르하라 사람들은 불이라도 입고 다니나 불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무르하라에 도착하고 나자 상인들의 그 표현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 그대로 뜨거운 도시. 온통 살색과, 하늘거리는 천들의 향연이었다. 도시 전체가 하렘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눈이 돌아가게 환락적인 풍경들이 시야를 지배했다.

거기에 벽돌처럼 납작한 집들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견고하고 단단한 집들. 도시 전체를 가마에 넣어 구워 낸 것 같다.

모래를 녹이고 구워 만든 네모반듯한 집들은 그들만의 전통 기법으로 태양 아래에서 시간이 갈수록 더욱 단단하게 변한다. 10년쯤 지나고 나면 어지간한 돌보다도 단단해진다.

높다란 아치형 돌문은 붉은 천으로 이어져 있었다. 도시 전체를 묶은 리본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것은 도시에 열감을 더해 주었다.

그러나 상인들이 정말로 뜨겁다고 한 것은 그 천 아래의 그늘에 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배꼽, 풍만한 가슴을 절반이나 내어놓은 여자들은 모두 너 나 할 것 없이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녀들이다.

적절하게 탄 초콜릿빛 피부는 윤기가 돌았다. 그 위를 덮고 있는 천은 스타킹보다도 얇은 천 몇 겹이 전부라서, 화끈하다는 인상을 주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걸치고 있는 천들 중 유일하게 색이 진한 것은 속옷처럼 보이는 것이었는데, 정말로 간신히 가리고 있다는 것이 어울리는 차림새였다.

그러나 가느다란 허리인데도 허리춤에 무기 하나씩은 꼭 매달려 있었다.

어쨌든 그런 차림새를 하곤, 조심성도 없이 그 긴 다리를 쭉쭉 뻗어 성큼성큼 걷는다.

혹시나 봐선 안 될 것을 볼까 봐 화들짝 놀라는데, 그런 가람 옆으로 웬 무르하라 남자 하나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지춤을 내렸다.

가람이 서 있는 곳은 성문을 막 지나 조금 비켜선 위치의 성벽 아래였다. 남자는 가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벽에 쭈욱 오줌을 내갈겼다.

너무나 능청스러운 태도라 뭐라고 말도 못 하는데, 남자는 태연하게 툭툭 털더니 굳어 버린 가람에게 친절하게 웃어 보이곤 가던 길을 가 버렸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무언가 나쁜 의도가 있어서도 아닌, 정말로 자연스럽게 그런다는 태도였다.

뮐러와 웨이크, 가람은 모두 각각 반쯤 얼어붙은 상태로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는 상인들과 삐걱삐걱 헤어졌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어떻게 잡았는지도 모르게 여관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와서야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한참 동안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위쪽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나?

특히 뮐러와 웨이크는 아직도 눈앞에 커다란 가슴 두 짝이 떠다니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위쪽은 몰라도, 아래쪽은 처음 와 본다.

웨이크야 워낙 베녹사스 촌놈이니 그렇고, 뮐러는 ‘무르하라의 반라로 돌아다니는 여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다른 것이다.

가람 또한 바로 앞에서 갑자기 너무나 적나라하게 목격한 털이 부숭부숭 난 통통한 그것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거의 넋이 빠져 있던 세 사람은 조금 뒤늦게 케르타가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갔나 보죠.”

뮐러가 가까이 있던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는다. 등받이를 앞으로 돌리고 다리를 떡하니 벌린 채 앉은 그 자세 하나만으로 그는 밖으로 나갈 생각이 절대 없음을 간단하게 피력했다.

지금도 눈앞을 아른거리는 충격적인 풍경을 생각하면, 가람도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세 사람이 들어와 있는 이 여관방에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덥군요.”

찜통, 아니, 습도가 낮은 편이니 화로라고 하는 편이 좋으리라. 창문이 있긴 했지만 지나치게 작아서 통풍의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문이 컸다 한들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밖 또한 무시무시하게 더웠으니까.

“너무 덥기도 하고, 일단 제가 나가서 좀 시원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물어볼게요. 방도 하나 더 잡구요. 음식도 주문해야 하고, 뭐 더 있는지도 좀 찾아보고요.”

잠깐 들어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땀이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가람은 배낭과 무거운 메이스를 풀어 내려놓으며 흠뻑 젖은 앞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렸다.

웨이크는 여전히 양팔 가득 짐을 들고 멀뚱히 서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짐을 내려놓지도 않고 엉거주춤 서 있는 그 모양새에 가람은 별로 눈치채고 싶지 않던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뮐러는 어째서 등받이를 앞으로 돌리고 앉았을까.

웨이크는 왜 짐을 내려놓지 않고 앞으로 들고 있는 걸까.

가람은 문을 열고 나서며 그때까지도 어색하게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두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다른 때였다면 따라가겠다거나, 자신이 하겠다며 나섰을 텐데 시선을 피하기에 급급하다.

그나마 뮐러는 능청스럽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고 있었지만 긴장한 목이 빳빳했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그럼 괜찮아지면 내려오세요.”

닫히는 문 사이로 뮐러와 웨이크의 목덜미에 붉은 기가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말하고 나니 괜히 말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문이 닫힘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여관은 지금까지 가람이 왔던 여관 중에 가장 작았다. 사실 이 여관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그 충격적인 광경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최대한 가까운 여관 아무 곳이나 뛰어들고 보니 이곳이었다.

그런 만큼 방도, 건물도 매우 작고 층수도 2층에, 복도랄 것도 없이 방을 나오면 마치 베란다 같은 난간이 있고, 그 아래를 내려다보면 여관에 딸린 선술집이 보이는 구조였다.

건물 안이라고 해도 헐벗은 여자들이 앉아 있는 것은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관이라 외지인이 꽤 있어서 비율이 높지 않았다.

게다가 한 가지 가람을 크게 안심시키는 점은, 건물 안이기 때문에 노상 방뇨 같은 풍경을 목격할 일이 없다는 점이다.

일단 내려왔으니 점원을 찾아야 할 텐데, 특이하게도 서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베록이나 다른 여관에서는 늘 양손에 무언가를 든 점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서빙을 하고 있어 한눈에 누가 점원인지 알 수 있었는데, 이 여관에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누군가가 음식을 주문하면 점원이 누군지 알 수 있을 테지만, 가람은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가람은 즉각 바의 빈자리로 걸어가 다짜고짜 청했다.

“일단, 차가운 것 좀 줘요.”

“술?”

바에는 늘 바텐더가 있기 마련이다. 그의 시선이 이채를 띤다. 어쨌거나 가람은 동양인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시선은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가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저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실 생각은 없다.

“아니, 주스로. 얼음 있어요?”

“있는데, 좀 비싸.”

“줘요.”

1골드 금화 하나를 터억 하니 내려놓자 바텐더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조심스레 금화를 확인하고 밀려 있는 모든 주문에 우선해서 가람의 주스를 만들어 내어놓았다.

돈이란 좋은 것이다. 냉장고 하나 없는 이곳에서도 얼음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니까.

주먹 세 개만 한 은잔에는 얼음이 동동 뜬 하늘색 음료수가 들어 있었다.

색만 봐서는 무슨 섬유 유연제 같은데, 어쨌거나 걸쭉한 것이 지독하게 달아 보였다.

빨대랄 것이 없어 잔에 입을 대고 쭈욱 마시자 민트와 수박을 섞은 것 같은 향이 훅 끼친다.

맛은 깔끔하게 달았다. 지금까지 가람이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는 맛이다. 맛있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낯설었다.

“이게 뭐예요?”

질문한 가람은 은잔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손으로 직접 부순 모양인지 얼음의 크기는 들쭉날쭉했다.

“꼬모도.”

“꼬모도? 주스를 만든 열매 이름이에요?”

“아니. 남쪽은 처음인가?”

“뭐, 그런 셈이에요.”

그렇게 대답하고 한 모금 더 마시자 두 번째라 그런지 처음보다는 좀 나았다. 그사이 얼음이 녹아서 걸쭉하던 음료가 제법 묽어졌다.

가람은 얼음 녹은 물과 음료가 잘 섞이도록 잔을 살살 흔들었다. 달그락거리는 얼음 소리를 배경으로 바텐더가 조용히 대답했다.

“많이 더워하던데. 괜찮은가?”

“이거 덕분에 간신히 살았죠. 제 동료들은 다 죽어 가지만.”

“동료?”

가람은 대답 대신 턱짓으로 2층을 가리켰다. 막 다른 얼음 하나를 입에 문 상태라 대답하기가 좀 곤란했다. 대충 2층에 있다는 뜻을 알아들은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인다.

“방에 있다면, 남자겠군. 처음 오면 남자들은 좀 충격받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나중에는 떠나고 싶지 않아서 울고불고한다네.”

“벌써 좀 곤란해하고 있더라고요.”

“충격은 빨리 지나가고, 그 여운은 뒤에 오는 법이거든.”

바텐더가 빙그레 웃음 짓는다. 구릿빛으로 탄 얼굴에 미소 주름이 깊어졌다. 그사이 은잔 안의 얼음이 다 녹아 버렸다.

가람이 다시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그는 은잔 속에 얼음을 더 채워 주었다.

“이거, 꼬모도라구요?”

“응. 집집마다 만들어서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지. 무르하라 전통 음료야. 재료는 기본적으로 사탕수수인데, 집마다 전해 내려오는 비전(祕傳)이 있어서 맛이 다 달라. 얼음이 아주 귀하기 때문에, 얼음을 넣은 꼬모도는 옛날이었다면 왕이나 되어야 먹어 볼 수 있는 거였어. 전쟁 후에는 도시의 마법사 탑에서 얼음을 팔아서 그리 귀하지는 않게 됐지만.”

일종의, 한국으로 따지면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그런 것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가람은 손부채를 부쳤다. 얼음을 먹어서 잠깐 시원해졌나 했는데, 금세 또 더워진다.

가람이 땀을 흘리기 시작하자 바텐더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주먹만 한 가죽 부대에 얼음을 담아 내주었다.

“머리에 얹고 있어.”

분명 웃기는 꼴이 될 테지만 가람은 사양치 않고 받아 들어 얼음주머니를 머리에 올려놓았다. 머리부터 냉기가 내려오자 그래도 좀 살 만하다.

가죽 부대를 뺨에도 대어 열을 식히던 가람은 열대야가 몹시 걱정이 되었다.

“밤이면 더워서 자기 힘들겠죠? 혹시 방을 좀 시원하게 하는 마법 없어요?”

마법이 횡행하는 세상이니 에어컨 마법 같은 건 없을까 싶어 한 질문이었다. 바텐더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마법은 없는 것 같던데. 그리고 잘 때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곳의 밤은 제법 추운 편이니까.”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메마른 황무지에서도 덥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 쌀쌀한 편이었지.

열대야가 없으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폭염 속에서, 그 찜통 같은 방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영 달갑지 않다.

더위 정도에 엄살이냐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모처럼 도시에 왔으니 푹 쉬고 싶었던 것이다. 이 충전 시기를 그저 더위에 시달리며 보내고 싶진 않았다.

“뭔가 방법 없을까요?”

“흠.”

바텐더는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질문했다.

“손님, 돈 많은가?”

“없진 않죠.”

“이건 정말 돈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방법이긴 한데, 마법사 탑에 가서 얼음 큰 걸 사다가 방에 놔둬. 낮 동안에는 방 안을 좀 시원하게 해 주지. 한 3골드 정도면 아가씨 두 배 정도 크기를 살 수 있을 건데, 그거면 네 시간은 시원하다더군. 좀 시원하자고 3골드나 주느니 나는 차라리 덥고 말겠지만.”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탑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것이 있다. 굳이 얼음이 아니더라도 마법사 탑에는 볼일이 있었다.

벤실럿이던가 반실럿이던가, 이제 이름도 가물가물하지만 그가 파기하고 달아났던 용병 계약서가 아직 수중에 있었다. 이 일은 마법사 탑으로 가서 직접 따지거나, 신고할 생각이다.

“어, 손님 정말로 얼음 사 올 생각인가?”

“네.”

“그럼 우리가 사다 줄게. 운반해서 방에다 놓아 주는 것까지 해결해 주지. 얼음 녹은 물을 받을 대야는 대여해 줄 테니 그걸 써.”

“그래요, 그럼. 아, 그리고 2인실 하나 더 잡아 주시고 거기도 얼음 놔 주세요. 여기 지내는 동안 잔심부름할 만한 사람도 하나 쓰고 싶은데, 얼마면 될까요?”

“잔심부름?”

“길 안내나, 의사를 불러오거나 하는 것들이요. 동료들이 있긴 한데, 밖으로 내보내기 좀 힘든 도시잖아요?”

“의사? 어디 다쳤나?”

가람은 대답 대신 손에 감은 붕대를 보여 주었다.

바텐더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 아래에서 액자 같은 것을 꺼내었다.

액자처럼 네 방향이 나무로 막혀 있는 그것은 가운데가 찰흙으로 되어 있는 물건이었는데, 바텐더는 그 위에 뾰족한 나무 꼬챙이로 글씨를 쓰며 한참 계산하더니 계산이 끝나자 흙을 토닥여 다시 판판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종이 대신 이것을 쓰는 모양이었다.

“얼음이 6골드어치씩 두 방에 놓인다고 하면, 얼음값만 하루 12골드고 운반비나 설치, 물받이 대여료 20실버, 식사는 할 건가?”

“제일 좋은 걸로요.”

“특정식은 한 끼에 3실버씩, 일행이 모두 몇 명인가?”

“저까지 세 명이에요.”

“9실버, 1실버 더 쓰면 마실 것에 얼음을 좀 넣어 주지. 그리고 꼬맹이 하루 심부름값 10실버.”

“목욕은 못 해요?”

“그건 목욕탕에 가야지. 위쪽만 다녀서 모르는 모양인데, 이 아래쪽에 집집마다 목욕 시설을 갖추고 있는 곳이 어디 있나? 어쨌든 다 해서 하루 12골드 40실버가 드는군.”

가람은 50골드 금화를 내밀었다. 가람이 가진 얼마 안 되는 작은 단위의 돈이다.

“4일 치예요. 남는 돈 40실버는 제 마구간 말한테 좋은 거 먹여 주세요.”

가람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시에 바텐더가 입을 딱 다문다.

끼어든 남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매우 불량해 보이는 작자였다. 깡마른 체구에 야비해 보이는 눈매, 좁은 턱과 거의 없다시피 한 얇은 입술을 조금 멀건 색의 혀가 연신 핥아 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운 마나님이네. 여긴 처음? 심부름꾼이 필요하면 내가 해 줄까? 나 아주 착한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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