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96화 (96/256)

96화

반사적으로 바텐더를 흘긋거린 가람은 그의 턱이 짧게 가로저어지는 것을 보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끼어든 남자의 시선이 가람이 내려놓은 금화에 못 박혀 있어 착한 사람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어버리고 있는 상태였다.

바텐더는 눈썹을 모으고 한껏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임으로써 가람을 도울 수 없다는 뜻을 내보였다.

난봉꾼과 이방인 중에 현지인들은 떠나면 끝인 이방인보다는 그래도 도시에 오래 산 난봉꾼의 편을 들어 준다. 떠날 사람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남은 사람은 해코지를 당할 수 있으니까.

악의가 아닌,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용기 없는 지혜의 다른 이름은 치사함이다. 이런 상황에 놓일 때마다 가람은 알면서도 치사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얼마나 착한데요?”

난봉꾼은 히죽 웃으며 친근한 척 가람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슬쩍 밀착해 오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가 가까이 오자 숨이 턱 막히는 악취가 났다.

그러나 가람은 난봉꾼의 행동에 동조하는 척 슬그머니 그의 다리 사이에 다리를 끼워 넣었다. 난봉꾼은 가람이 넘어왔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나랑 조용한 데 가면 알려 주지.”

“그건 좀, 싫은데.”

“어허, 가면 알려 준다니까. 자자― 가자고.”

어깨를 둘러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가더니 가람을 끌고 가려고 들었다. 가람이 버티자 여자는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헛소리도 잊지 않았다.

그가 다시 팔에 힘을 주는 순간, 그의 다리 사이에 겹치듯 놓여 있던 가람의 무릎이 당겨진다.

웨이크에게 단련받고 거친 땅을 밟아 다져진 탄탄한 다리는 충분히 만족스러울 만큼의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난봉꾼은 숨이 막힌 표정을 짓더니 헉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느릿하게 바닥에 손을 대고 무릎을 꿇었다. 벌려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 턱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쓰러진 난봉꾼을 걷어차고, 뭔가 한 소리 해 주려던 가람은 난봉꾼이 쓰러지고는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이 나타나자 눈을 크게 떴다.

검은 로브의 남자.

훅훅 찌는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로 가리고 있는 남자였다. 가슴께에는 은색 브로치가 매달려 있을 뿐 온통 검은 남자다.

순간 후드를 보고 모르드레드가 떠올라 가슴이 철렁했던 가람은 곧이어 기억 속에 매우 인상 깊게 박혀 있던 어떤 남자를 기억해 냈다.

설마 검은 로브를 입고 다니는 사람이 모두 그 남자일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전에 베록에서…….”

가람이 말꼬리를 흐리자 후드 밖으로 살짝 보이는 입매가 빙긋 미소 짓는다.

“오랜만입니다.”

그 남자가 맞았다.

베록에 처음 방문했을 때, 마찬가지로 지금처럼 난봉꾼에게 붙들려 곤욕을 치르던 가람을 도와준 남자다. 그 뒤 친절하게도 로아나의 여관에까지 데려다준 남자.

그때는 난봉꾼의 손에 단검을 박아 넣는 그의 손속이 잔인하고 무섭게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터라 가람은 그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어쨌거나 가람이 반가움에 다가서려는데 발치에 웅크리고 있던 난봉꾼이 끙끙 앓으며 이를 갈았다.

“네 이년, 내가 누군지나 알아? 친절하게 대해 주려고 했더니.”

“어째 볼 때마다 이런 상황이네요.”

가람이 난봉꾼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검은 로브의 남자가 다시 조용히 미소 짓는다.

도움이 필요한가 하고 묻는 남자에게 고개를 저어 거절한 가람은 난봉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봉꾼의 핏발 선 눈이 가람을 뚫어 버릴 듯이 노려본다.

“저런, 많이 아프세요?”

“너, 너― 이!”

가람이 가증스러워 못 견디겠는지, 아니면 통증을 참아 내기 힘들어서 그런지 난봉꾼은 몇 번이나 말을 더듬었다.

가람은 미소를 싹 지우고 권총을 꺼내 들어 단 한 동작으로 난봉꾼의 얼굴 옆에 놓여 있던 의자의 다리를 쏘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굉음이 터지긴 했으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라 눈을 껌뻑이던 난봉꾼의 시선이 천천히 의자 다리로 향한다.

무르하라의 건물은 모조리 모래를 구워 만들고, 의자나 테이블처럼 여느 도시라면 나무로 만들었을 물건들 또한 모래를 구워 만들어진 것들이 많았다.

그런고로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들은 건물과 마찬가지로 그 단단하기가 돌과 같았다.

그런데 가람의 총탄은 그 단단한 의자의 다리 하나를 박살 내고 반대편 의자 다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저는 좀 단단한 남자를 좋아하는데, 주로 확인할 때 이걸 쓴답니다. 어디 시험해 봐도 되나요?”

길게 말하긴 했지만 가람의 뜻은 명확했다. 말하자면, 네 총과 내 총을 겨뤄 보자는 뜻이다.

정확히 자신의 다리 사이를 겨눈 총신에 난봉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뭘 하는 물건인지는 모르지만 가람의 행동이나 분위기만으로 자신이 어떤 위기에 놓여 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주춤주춤 기듯이 뒷걸음질 치던 난봉꾼은 곧 몸을 돌려 순식간에 여관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가 도망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가람은 황당한 표정의 바텐더에게 담담히 말했다.

“의자 값은 낼게요.”

“많이 변하셨군요.”

가람의 변화는 검은 로브의 남자에게도 놀랄 만한 것인 모양이다.

가람 또한 놀라웠다. 남자가 아주 잠깐 스쳤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변하더라고요. 여기, 먹을 것 좀 주고 마실 것도 좀 주세요. 어, 아.”

가까운 의자를 끌어다 앉으려던 가람은 방금 전 자신이 불구로 만든 가엾은 의자가 자신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조금 당황하고 있는데, 다행히 눈치 빠른 점원 하나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가람은 그 점원이 의자를 가져다주기 직전까지 주점에서 시간을 때우는 손님인 줄 알았다.

탁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자세가 절대로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적당히 음식을 시키고 자리를 권하자 크게 급한 일은 없는 모양인지 남자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가죽처럼 무거워 보이지만 천처럼 가볍게 펄럭이는 기묘한 옷자락이 한 차례 날리다가 가라앉았다.

가람은 새삼 남자의 기묘함이 조금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인이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무례겠지만,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사람을 다 만나 보고 나니 남자의 묘한 분위기로 짐작하건대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제 와서 묻긴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뭐 하시는 분이세요?”

“여행자입니다.”

애초에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대답은 지나치게 간결했다.

“아, 저도 여행자예요. 반갑네요, 같은 여행자끼리.”

그렇게 숨기면 이쪽도 숨기고 싶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가람의 대답에 남자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러나 그 선은 미소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시간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 온 지 오래되었습니까?”

“아― 아까 방금 도착했어요. 정말 놀랄 만한 도시라서, 여기 여관 안으로 도망쳐 있던 중이에요.”

대답한 가람은 희게 웃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 사흘도 걸리지 않는 황무지를 끼고 있는 주제에 이렇게나 문화가 다를 줄은 몰랐다며 앓는 소리를 하자 남자의 입에서 의외로 친절한 설명이 튀어나왔다.

“예전에는 저 황무지가 주요 전선이었던 것은 알고 있습니까?”

“아뇨.”

“거리로 셈한다면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누구도 넘지 못하는 경계선이 있던 곳입니다. 왕래하게 되었다고 해도 오랜 시간 각자 발달해 온 문화가 단숨에 같아지긴 힘든 일이죠.”

“아, 그 대륙 전쟁인가 뭔가 하는 것 말이군요. 하긴, 그렇게 오가기 힘들었다면 문화가 이렇게 다른 것도 이상하진 않네요.”

묵묵히 지켜보던 바텐더가 대화 사이로 꼬모도 한 잔을 내어놓았다. 남자의 몫이었다. 뒤이어 검은 소스가 끼얹어진 음식이 바에 놓였다.

한 입 먹어 보니 마치 숯을 끼얹은 것처럼 탄 맛이 지독했다. 얼굴을 구기던 가람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이 음식이 원래 이런 맛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처음 온 곳에서 적당히 달라고 했으니 수상한 음식이 나와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숯을 먹기는 싫었기 때문에, 가람은 다른 음식을 더 주문했다.

“전의 답례로 오늘은 제가 전부 살게요. 아, 통성명도 못 했네요, 우리. 저는 가람이에요. 그쪽은요?”

“서드라고 부르면 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서드. 그런데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뭡니까’ 혹은 ‘음?’ 하는 간단한 되물음도 없이 서드는 차분하게 가람의 말을 기다렸다. 푹 가라앉은 검은 로브가 지나칠 정도로 어울리는 남자였다.

아직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을뿐더러, 그나마 보이는 것은 후드 자락 아래로 살짝 보이는 턱과 입술뿐이었지만 가람은 남자의 성격을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안 더워요? 이 날씨에.”

서드의 입매가 다시 옅은 호선을 그렸다. 신기한 사람이다. 아무 표정을 짓지 않을 때는 후드 속의 얼굴이 냉혹하기 짝이 없을 것 같은데, 잠깐 아주 엷은 미소라도 지으면 어쩐지 매우 상냥한 얼굴이 들어 있을 것 같다.

“원래 더위나 추위를 많이 타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너무 더운데.”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정도로 더운 도시다.

가죽옷만 걸치고 있는 자신도 이렇게나 더운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로브라니. 밤하늘처럼 새카만 것이 빛이든 열이든 쭉쭉 빨아들일 것 같다.

저런 것을 입고 다닌다면 틀림없이 30분 안에 일사병에 걸려 쓰러지게 될 거라는 데에 가람은 머리 위에 얹고 있는 얼음주머니를 걸 수도 있었다.

“음, 어쨌거나 부러운 체질이네요. 그런데 여행을 다닌다고 하셨는데, 다음 여행지는 어디세요?”

“위쪽으로 갑니다.”

“혹시 특별한 목적이 있으신 게 아니면 저와 동행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보통 가람은 이렇게 쉽게 동행 제의를 하지 않지만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에 자신을 구해 주면서 형성된 호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얼굴도 모르는 이 남자가 좋은 일행이 되어 줄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다 되물었다.

“어느 쪽으로 갑니까?”

하지만 결국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가람은 스스로가 어디로 갈지, 언제 갈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길을 떠나 주려면 어지간한 한량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가람에게 큰 도움이 될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이 무엇이 아쉬워 목적지도 모르는 괴상한 여행길에 동참하겠는가?

“그게, 잘 모르겠네요. 마음 가는 대로 가서요.”

가람은 결국 씁쓸한 속내를 감추며 웃어 버렸다. 다 녹은 꼬모도를 한 잔 쭈욱 들이켜고 다음 잔을 청하는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서드가 돌연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저는 무언가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무언가요?”

“예. 봉인의 궤라고 불리는 물건입니다.”

서드는 싱거울 정도로 순순히 대답했다. 도리어 가람이 조심스러워질 지경이다.

“그런 거 막 말해 줘도 되는 거예요?”

“글쎄요. 하지만 아가씨가 별로 관심이 없을 물건인 것은 확실합니다.”

“어떤 건데요?”

“그 안에 무언가를 넣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봉인할 수 있습니다. 신의 유산이지요.”

남자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당신, 광신도군요?”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뮐러와 웨이크가 등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뮐러는 한눈에 보기에도 서드를 달가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기묘한 경멸과 혐오까지 느껴지는 그 얼굴에 가람은 매우 당황했다.

서드는 서드대로 뮐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을 딱 다물었다. 모욕에 가까운 힐난을 받았음에도 서드의 입매에는 분노의 떨림이 나타나지 않았다.

“뮐러, 왜 그래요. 이분은 전에 저를 도와주셨어요. 보답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서 지금 보답 겸 밥을 사고 있는 중인데.”

그 말에 한결 누그러지긴 했으나 뮐러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바라보던 뮐러는 바 한쪽에 앉더니 자연스레 그 옆에 웨이크를 앉혔다.

순식간에 어색해진 분위기에 가람은 매우 당혹스러워졌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져 가람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후였다.

뮐러는 남자가 듣고 있다는 사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전에 모자산맥에서 신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 기억납니까?”

어디선가 비슷한 걸 들은 것 같다 생각했는데 성녀의 유령을 만난 곳에서 봉령의 자물쇠라는 것을 보았던 것 같다. 서드가 찾아다니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가람은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네, 지금은 믿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지만 저 사람은 그걸 정말로 믿는 사람입니다. 광신도들 같으니. 사실 이 땅에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아직 신성 제국이 남아 있긴 하답니다.”

사실 가람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저 뮐러가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무례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며, 서드가 뮐러를 대상으로 가람을 구해 줄 때 보여 주었던 싸움 솜씨를 다시 보이게 될까 조마조마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서드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일단 서드를 보내고 뮐러의 이야기를 듣기로 결정했다.

“뮐러. 그만해요. 제 은인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아 주세요. 서드 씨, 정말 죄송합니다.”

가람이 고개 숙여 사과하자 뮐러는 머리가 조금 식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서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아가씨, 건강한 모습을 봐서 좋았습니다. 다음 여행도 계속 평안하길 바랍니다.”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던 서드는 갑자기 멈칫하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가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경고했다.

“요즘 악마가 날뛰고 있다고 하니 조심하십시오.”

“악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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