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97화 (97/256)

97화

서드는 가람의 되물음에 답하지 않고 고개를 조금 숙여 보인 뒤 그대로 여관을 떠나 버렸다.

그도 이 여관에 묵고 있었을 텐데 본의 아니게 쫓아낸 것이 되었다.

뮐러는 이 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가람은 서드의 로브 자락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지켜보다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설명해 주세요.”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습니까?”

“신성 제국이 남아 있다는 부분까지요.”

너무나 위대해 그저 신성 제국이라는 칭호 자체가 나라의 이름이었던 그 제국은 국경이 존재하던 시절에도 이미 발 뻗지 못하는 나라가 없을 만큼 강성했다.

어떤 위대한 존재의 보살핌이 있으며, 그 존재의 구원이라는 것은 본디 힘든 것이 당연한 삶에서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구원은 오지 않았고, 거대화된 권력이 그러하듯 자연스레 부패와 타락의 길을 걸었다. 지상에 적이 없을 정도로 강력했던 제국은 결국 통합의 깃발 아래 스러졌다.

그 후 사람들은 신이 아닌 인간을 믿고, 스스로를 믿었다. 새로운 세상에 신은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하고.

“완전히 망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신성 제국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긴 합니다.

사실 이름만 제국일 뿐, 크기는 이 여관 세 개만 한 땅덩어리입니다. 비탄의 절벽 아래에 비명의 호수가 있는데, 그 호수 중앙에는 죄의 땅이 있습니다.

지금은 신성 제국이라고 불리는 땅이긴 하지만, 예전에는 제국의 극악 범죄자를 가두던 땅이죠.

아무 쓸모도 없고, 정복하러 가 봐야 병사들만 고생이라 그냥 내버려 둔 땅입니다.

그 안에 아마 몇 살아 있긴 했던 모양이죠. 아직 저런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틈만 나면 거짓말을 떠벌려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고 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이쪽 문화에 무지한 가람이라면 그냥 넘어갈지도 몰라요. 가람 같은 사람을 꾀어내는 데 아주 도가 튼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신경 쓰이는 말을 하던데요.”

“원래 그런 거에 도가 튼 사람들이라니까요. 믿을 거 없습니다. 다 거짓말이에요.”

가람은 쉽게 거짓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바로 얼마 전에 직접 성녀의 유령까지 목격했으니 아무래도 뮐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균적인 견해인 모양이니 어디 가서 신이 있다거나 성녀를 보았다는 식의 주장을 펼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새로 나온 음식을 한 점 씹어 삼켰다.

“그래도 악마가 돌아다닌다고 하던데. 저한테 조심하라고 하던걸요?”

무슨 헛소리냐고 할 거라 생각했는데, 뮐러는 의외로 짚이는 곳이 있는지 턱을 쓰다듬었다. 잠시 무언가를 가늠해 보던 그는 서두를 끌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모자산맥의 마법사 소식지에 조금 이상한 것이 있긴 했습니다.”

“어떤 거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아하른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도시인 멜론다스가 하루아침에 궤멸했다더군요.

싸그리 다 죽었답니다. 그냥 그 안에 있던 것들은 다 죽어서 재만 남았대요. 불이 났다면 아하른의 망루에서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아침이 되니 갑자기 도시가 사라져 버렸다고 하더군요.

뭐, 용의 습격이라는 말도 있고. 아무튼 학회가 그걸 조사하기 위해 요즘 분주하다 하네요. 악마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으니, 쯧쯧.

아무튼 광신도들은 세상이 조금 떠들썩하다 싶으면 나타나서 악마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니까요. 그러니까, 가람은…….”

뮐러가 다시 주의를 주기 시작했지만 가람은 그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설마, 아니. 겨우 이런 일에 그를 떠올리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그러나 가람은 필사적으로 부정하면서도 어떤 이름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한 그런 짓을 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모르드레드.

그는 이제 자신을 쫓지 못한다. 정말로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마주할 일이 없으리라.

어쩌면 그가 자신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날지도 몰랐지만, 가람은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생각해 봐야 별로 소용이 없다.

만약 모르드레드가 정말로 가람 자신을 찾으려고 했다면 가람이 어떤 수를 써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가람은 어렴풋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지금은 아직까지 모르드레드가 자신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로 애써 위안할 뿐이다.

“가람, 제 말 듣고 있습니까?”

“아뇨.”

솔직한 대답에 뮐러가 벙찐 표정이 되어 버렸다. 가람은 자신만큼이나 뮐러의 잔소리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웨이크가 이미 음식을 꽤 시켜 둔 것을 보고 심드렁하게 그것을 집어 먹었다.

뮐러는 가람까지 애가 되어 버렸다며 이마를 짚었지만, 웨이크와 가람은 들리지 않는 척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한바탕 먹고 나니 해가 제법 기울어 노을이 살짝 깔리는 시간이 되었다. 해가 기우니 더위도 한풀 꺾이는 느낌이다.

“밖에 좀 다녀와야겠어요.”

“벤실럿 일을 처리하려는 겁니까?”

가람은 역시 뮐러는 눈치가 빠르다고 짧게 감탄했다. 그 와중에 웨이크는 심각한 표정으로 음식 접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점 안의 파격적인 차림을 한 여자들을 피해 보려는 몸부림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그의 주의를 끈다거나 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

물론, 뮐러 또한 필요 이상으로 가람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맞아요. 그리고 시원한 옷도 좀 사고, 여관에는 목욕 시설이 없다고 하니 좀 씻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용병 길드보다 마법사 탑에 직접 가서 신고하는 게 좋을 겁니다.”

가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당연히 따라 일어날 것 같던 뮐러와 웨이크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관 1층을 주욱 둘러본 가람은 멀지 않은 곳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파격적인 옷차림의 주민들이 여관 안이라고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가람은 한숨을 억눌렀다. 또예요?

“알았어요. 혼자 다녀올게요. 목욕은 못 해도 여기서 샤워는 할 수 있는 모양이니 해 둬요. 그리고 두 사람 옷도 내가 사 올게요. 방 잡아 놨으니 확인하시구요.”

“미안합니다.”

웨이크가 정중하게 사과해 왔다. 가람은 손을 휘저어 그 사과 말을 연기처럼 날려 버렸다.

“아니에요. 하지만 빨리 익숙해지던가, 아니면 이 도시를 떠나던가 둘 중 하나를 해야겠네요.”

그리고 다음 날 가람 일행은 무르하라를 떠나 남쪽으로 향하는 마법 열차에 몸을 실었다.

방 밖을 나서면 앉은뱅이가 되어 버리는 두 남자는 결국 패배감과 함께 무르하라에서 서둘러 도망쳤다.

하루 정도는 버티는가 싶었는데, 다음 날 오후가 되자 뮐러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도시를 떠나면 안 되겠느냐 호소했다.

가람 또한 아무 데서나 고추를 달랑거리며 똥오줌을 누는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뮐러의 앓는 소리를 군말 없이 들어 주었다. 내내 홀로 돌아다니며 시달릴 대로 시달린 터라 결정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길로 여관을 나와 돈을 환불받으려 하니 이미 얼음을 다 주문했다며 여관 주인이 울상이라, 가람은 잔금을 받지 않고 그대로 기차역으로 떠났다.

마침 그 날 바로 저녁에 기차가 있었고, 비록 북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긴 했지만 무르하라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람은 즉시 그 마법 열차에 승차했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 가람이 구입한 객실은 2등석으로, 운임만 세금 포함 6천600골드에 달하는 호화로운 객실이었다.

물론 가격과 질이 늘 비례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에 탔던 객실보다는 훨씬 호화롭다.

가장 좋은 점은, 객실 안에 마구간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마구간으로 통하는 문에 빠끔히 난 창문으로 뽀삐와 대화 정도는 나눌 수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가람은 거금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호화로운 객실은 현재 강아지 당근 짖는 소리로 터져 나갈 듯이 시끄러웠다.

홀연히 사라졌던 케르타는 사라졌던 것처럼 홀연히 나타났다. 홑몸은 아니었다.

그 품 가득, 도시에 있는 강아지 당근이란 당근은 다 쓸어 온 것 같은 대량의 당근이 안겨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케르타의 방에 당근을 넣고 문을 꼭꼭 걸어 잠가도 복도까지 강아지 당근 짖는 소리로 매우 시끄러웠다.

사실 도시를 떠난 이유 중에는 케르타의 당근도 끼어 있었다.

먹어 버리든가, 버리라고 하려 해도 침을 줄줄 흘리는 뽀삐와 날름날름 당근을 씹으니 뭐라 하기가 힘들었다.

여관을 옮기려고 해도 깽깽 짖는 강아지 당근을 받아 줄 만한 여관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아서, 가람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를 핑계로 삼아 무르하라를 떠났던 것이다.

“케르타. 당근 좀 조용히 시켜요.”

아까부터 하고 있는 말을 가람이 다시 한 번 말한다. 물론 전혀 소용이 없었다.

“음, 너도 하나 먹어.”

가람은 한숨을 쉬곤 케르타가 내미는 당근을 받아 씹었다. 자신이라도 먹는 데 거들어야 조금이나마 빨리 저 당근들이 줄어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더운 땅에 당근은 또 어디서 났는지, 그래도 뙤약볕에 큰 당근들이 당도는 좋았다.

아삭, 하고 베어 물자 깨갱! 하고 죽는 소리를 낸다. 베어 먹을수록 깨갱 하는 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리고 꽁지만 남으면 낑낑대다가 곧 조용해진다.

이 호화로운 객실은 한 개의 마구간과 두 개의 객실, 하나의 거실과 욕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실이라곤 해도 기차라는 한정된 공간에서의 호화로움에는 한계가 있어서, 사실 아주 푹신한 소파 두 개와 그럴듯한 테이블 하나 정도가 거실이 가진 가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람은 그 거실의 소파에 무릎을 당기고 앉아 무르하라에서 구입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서는 왜? 마법이라도 배우려고?”

“그런 책 아니에요.”

가람은 변명하고 책을 내려놓았다. 글자에 집중하려고 해도 깨갱깨갱하는 소리 때문에 멀쩡한 글자들이 모조리 ‘깨갱’으로 탈바꿈되는 것 같다.

지금 당장 이거 한 권 정도 읽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남쪽 종착역인 미르드까지는 열흘은 달려야 한다. 덕분에 시간은 많았다.

“그럼 무슨 책인데?”

“그냥, 상식서요. 마법 상식?”

“흐음.”

케르타는 자신을 향해 한껏 으르렁거리는 당근을 가소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와작, 소리 내어 씹었다. 깨갱!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커다란 입 가득 당근을 우적우적 씹던 뽀삐가 슬쩍 묻는다. 가람은 뽀삐가 머리를 내민 구멍 옆에 길게 늘어져 앉은 장신의 케르타에게 다 먹은 당근의 꽁지 부분을 던졌다.

당연히 손으로 받을 줄 알았던 케르타는 마치 재주 부리는 곰처럼 입을 벌리더니 꽁지를 받아 와작와작 먹어 버렸다.

처음에야 꽤 놀랐지만, 벌써 이런 식으로 받아먹은 꽁지가 세 개쯤 되어서, 가람은 별반 놀라지 않고 뽀삐의 말에 대답했다.

“어젯밤에, 마법사 탑에 갔었잖아. 몇 가지 확인도 하고, 따질 것도 있어서. 벤실럿이랑, 운화 오빠는 어떻게 됐나 싶기도 하고.”

이번에는 케르타가 가람에게 당근을 집어 던진다. 가람은 사람의 도리를 지켜 한 손으로 가볍게 당근을 받았다.

겁이 많은 놈인지, 가람의 손에 잡히자 낑! 하고 죽는 소리를 낸다. 그러나 금세 기운을 차리고 캉캉 짖는 것을 가람이 무심하게 베어 물었다.

“운화 오빠는 아직 모자산맥에 있대. 탑끼리 연락할 수 있다는 그, 통신? 아무튼 그걸로 연결해서 알아봤어. 아, 이건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냥, 그 벤실럿이라는 사람. 뒷맛이 좀 씁쓸해서.”

눈을 대록대록 굴리던 뽀삐가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더니 뒤늦게 벤실럿을 기억해 낸다.

“벤실럿 이야기하는 겁니까?”

때마침 한 방에서 뮐러와 웨이크가 튀어나왔다. 아주 푹 잔 모양인지 얼굴이 반질반질했다.

두 사람은 곧장 가람 앞에 앉아 소파에 몸을 푹 묻었다. 웨이크는 등을 펴고 꼿꼿하게 앉은 자세였지만, 뮐러는 소파에 먹히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파묻혀 있는 상태였다.

“네. 잘 잤어요?”

“오랜만에 푹 잤습니다. 무르하라에선 쉬지를 못해서, 흠흠. 어디쯤 왔습니까?”

“아직 다음 도시에 도착 안 했어요. 무르하라 떠나고 얼마 안 됐네요.”

“생각보다 얼마 안 잤군요. 그런데 벤실럿과 무슨 일 있었습니까? 계약서가 있으니 별로 걱정하지 않았는데. 마법사 탑이 싸고돌기라도 하던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싸고돌았다면 당장 협회에 편지를 띄워 항의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뮐러를 바라보며 가람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벤실럿이 어떤 식으로든 합당하게 벌을 받기를 원했지만 그런 식은 아니었다. 가람은 마법사 탑에서 만났던 벤실럿을 떠올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각종 신고를 하는 3층으로 올라가 두리번거리다가 제법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한 순간에는 눈에 불이 튀는 것 같았다.

과격하게 보일 정도의 거친 걸음으로 다가가 단숨에 낚아채니 어리둥절한 얼굴의 벤실럿이 멀뚱멀뚱하게 가람을 쳐다봤다.

그 뻔뻔한 태도에 머리에 피가 더 오르려는데, 벤실럿이 불쑥 말하는 게 아닌가.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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