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98화 (98/256)

98화

순간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 벤실럿이 맞았다. 조금 나사가 빠진 것처럼 멍하긴 했지만 벤실럿이 분명했다.

그래도, 혹시나 다른 사람인가 싶어서― 그리고 이놈이 또 꼼수를 부리는 건가 싶어 혼란에 빠지려던 차에 뒤에서 누군가가 벤실럿의 이름을 부르며 후다닥 달려왔다.

“벤실럿에게 볼일이 있습니까?”

평범하게 생긴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 벤실럿의 형님뻘이 아닐까 싶었다.

어쨌거나, 그가 그렇게 말한 이상 눈앞의 이 멍해 보이는 남자가 벤실럿임은 확실했다.

“저번 의뢰의 의뢰주예요. 파기된 계약서의 위약금을 받으러 왔어요. 전에, 계약을 위반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혼자 도망쳤거든요.”

그렇게 말하자 남자는 ‘아’ 하고 무언가 깨닫더니 난감한 얼굴로 벤실럿을 내려다보았다.

벤실럿은 남자의 두 손에 꽉 붙들려 가람의 옷자락을 입에 넣고 싶어 안달하고 있었다. 입가에 침이 질질 흐르는데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제 소개부터 드리지요. 저는 벤실럿의 요양 담당자입니다. 얼마 전, 벤실럿이 이쪽으로 공간 이동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무언가 특수한 상황에서 공간 이동을 했는지, 사고가 좀 생겼죠. 사실 아주 없는 일도 아닙니다. 어디 결계 안이나 그런 곳에서 공간 이동을 하면 드물게 벌어지는 사고랍니다. 생물을 이동시키는 일 자체가 워낙 고난위도의 마법이다 보니.

일단 계약 위반은 명백하니 보상은 해 드리겠습니다. 벤실럿에게 재산이 좀 있으니, 보상을 해 드릴 만한 정도는 될 겁니다.”

남자는 매우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 벤실럿은 내내 가람의 곁에 달라붙어서 ‘누나 내 이름이 뭐야?’ 하고 멍청한 질문을 하거나, 갑자기 옷을 벗고 계단 아래로 뛰어내리려고 들어서 요양 담당자를 놀라게 만들었다.

증상 중 하나인지, 발작이 와서 몸을 뒤틀며 펄떡이는 것이 가람이 본 벤실럿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어떻게든 정신 차릴 만한 벌을 받았으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예 정신이 나가 버리니 입맛이 씁쓸했다.

“백치가 됐다는 거군요. 사실, 어쩌면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뮐러가 뜻밖에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 옆의 웨이크는 오랜만에 면도를 한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벤실럿에 대해 생각하는 건가 싶어 너무 씁쓸해하지 말라고 가람이 위로하자 웨이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미르드에서 여동생에게 보낸 선물들이 잘 도착했을지 확인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도 마법사 탑이 있습니까?”

완전히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무언가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웨이크이니 벤실럿이 백치가 되든, 천치가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일 것이다.

여동생에게 보냈다는 선물은 분명 가람이 사들인 잡동사니들 중 버려진 것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탑이 있을 거라고 대답해 주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누구지? 올 사람은 없는데.”

가람이 의아해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서는데, 뮐러가 객실 서비스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며 추측했다.

“누구세요?”

가람은 문의 잠금을 풀며 다른 손으로 총을 꺼내 들고 문틈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문 건너편의 대답을 들음과 동시에 심각하게 방에 없는 척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대답해 버렸으니 너무 늦은 후회였다.

“트라키아다.”

마법 열차는 북공의 무역 야심이 깃든 크페타인 공작가의 작품이었다.

약초 한 뿌리를 위해 얼음 강을 건너 창날 같은 산을 넘어야 하는 북쪽 사람들에게 이 기차가 어떤 의미일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 만큼 트라키아가 몸소 기차에 머물며 순찰을 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가람은 정말로, 문을 여는 법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부수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거대한 대검이 문짝을 후려치고 산산이 비산하는 파편 사이로 눈동자를 불태우며 들이닥치는 그 광경이 가람의 광활한 상상의 공간 가득 그려졌다.

어쩌면 이다지도 쉽고 빠르게 상상될 수 있는지. 아스라한 환청마저 들리는 기분이다. 크하하핫 하는 그런 미친 사람 같은 웃음소리.

사실 트라키아는 그렇게 웃은 적이 없다. 가람이 보았던 것은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하며 기묘하게 일그러진 것 같던 미소뿐이다. 손목을 부러뜨린 도둑들에게 지어 주던 것과 별반 다를 것 없었지만, 어쨌거나 트라키아는 의외로 조용히 웃음 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거세어지고 있었다.

똑똑똑이 툭툭툭으로, 탕탕탕으로, 다시 쾅쾅쾅으로 바뀌었다. 잠깐 망설이며 현실을 도피하다 돌아오니 가람의 눈앞에는 비명을 지르는 빗장이 비꺽이고 있었다.

이대로 5초 정도면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현실 따위 거부하고 싶었던 가람은 재빨리 빗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세 걸음쯤 후다닥 물러섰다.

정말로 부수려고 했던 모양인지 트라키아가 늘 등에 메고 다니는 대검을 끌러 내고 있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술과 가라앉은 시선에 가람은 저도 모르게 쫄아들었다. 굳이 트라키아의 외형적인 요인이 아니더라도 가람이 쫄아들 만한 건수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가장 큰 것은 본의 아니게 그녀를 속였다는 것.

거짓말은 빨리 풀수록 좋은 것이지만, 그것도 상대를 봐 가며 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대로 뒀다간 점점 더 큰 거짓말이 될 테고, 앞으로 마법 열차를 이용하는 내내 그녀를 피하고 다녀야 할 것이다.

물론 한정된 열차 안에서 얼마나 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진실을 밝히긴 밝혀야 할 텐데, 다짜고짜 밝히면 ‘아, 그래? 사실 나도 널 토막 내고 싶었단다.’ 하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가람이 고심하는 사이 트라키아가 고개를 들었다.

“음? 너로군.”

살벌한 기세를 흘리고 있던 사람답지 않게 트라키아는 의외로 담백한 태도로 가람에게 인사했다.

가람이 어색하게 마주 인사하자 턱짓으로 인사를 받더니 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웨이크와 뮐러가 흠칫 경계하며 표 나지 않게 무기를 챙기는데, 무심한 시선으로 두 남자를 스윽 훑어본 트라키아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가람의 방은 현재 시끄러웠다. 깡깡, 깽깽, 캉캉, 짖어 대는 당근들이 저마다 제 심기 사나운 티를 내며 으르렁대는 통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그 당근 무더기 앞으로 트라키아의 거침없는 걸음이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등의 대검을 꺼내어 들자 웨이크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갈 듯 몸을 긴장시켰다.

가람은 그때까지도 트라키아가 정확히 뭘 하려는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상태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이참에 나이를 밝히고 사과를 해 버리는 게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트라키아의 대검이 움직였다.

검이 꺼내어지고 휘둘러지는 것이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후웅― 하고 무겁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그 소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굉음이 바람 소리를 집어삼켰다. 열차 바닥을 뚫어 버릴 것처럼 대검이 가로로 내리쳐졌다.

그 목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 운명을 모르고 당돌하게 짖어 대던 당근 한 무더기다. 말이 한 무더기지, 10kg은 거뜬히 넘을 것 같던 당근은 작은 당근의 산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이제는 없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거대한 충돌음 뒤에 남은 것은 으깨어진 당근과 적막뿐이다.

무슨 수를 썼는지 트라키아의 검에는 즙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대충 털어 내듯 허공에 두어 번 휘두른 트라키아는 그대로 등 뒤에 검을 찼다.

“옆방에 갓난아이가 자고 있다.”

아, 예, 그렇군요.

그야말로 당당한 태도라 가람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조용히 제 나이를 밝히겠다는 생각을 접어 버렸다.

아주 순간적이지만 열차가 조금 출렁인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데, 저런 것을 상대로 싸웠다간 단숨에 두 토막이 나고 말 것이다.

가람이 흘긋 보니 웨이크 또한 충격받은 얼굴로 멀거니 서 있었다. 반쯤 뽑다 만 검이 그가 충격을 받았다는 걸 설명하고 있다.

무리는 아니다. 가람은 아예 반응도 못 했다. 그만큼 빨랐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금 다른 이유로 충격받은 사람이 또 한 명, 아니, 말이 또 두 마리가 있었다.

케르타는 멍하니 바닥에 눌어붙은 당근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뽀삐 또한 대단히 허망한 표정이었다.

두 마리를 간단히 무시한 트라키아가 이번에는 가람을 빙글 돌아보았다.

내리꽂히는 것 같은 강렬한 시선에 케르타와 당근을 바라보던 가람이 멈칫해서 트라키아를 허둥지둥 마주한다. 시선을 피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피했다간 목덜미가 물어뜯길 것 같은 위협이 느껴졌다.

트라키아가 동물도 아닌데 물어뜯기야 하겠냐마는, 지은 죄가 있다 보니 찔렸다.

트라키아는 가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 시선에 칼날이라도 달린 것 같아서 가람은 저도 모르게 흠칫흠칫 몸을 사렸다.

뽀얗던 예전이야 그렇다 쳐도 뙤약볕에 타고 얼굴이 굳은 가람은 절대로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고생을 하면 얼굴로 나이를 먹는 법이다. 가람은 웃으면 그나마 동안으로 보이지 않을까 싶어 노력해 보려고 했지만, 낭패함에 저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참는 것이 고작인 얼굴 근육은 좀처럼 협조해 주지 않았다.

‘가만 보니 어린애가 아닌 것 같은데?’라고 으르렁거린다거나, ‘이 거짓말쟁이―’로 이어지는 말이 시작될까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도 모르게 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러면 더 의심을 산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람은 목숨 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총을 질끈 움켜쥐었다.

“역시 애들은 빨리 자라.”

가람의 심장이 혈관을 다리 삼아 뛰쳐나오기 직전에 트라키아가 깔끔하게 품평했다.

‘역시’까지만 들었을 때 온갖 나쁜 상상에 휘말려―역시 아이가 아닌 것 같은데 따위의―끔찍한 어딘가를 부유하던 가람의 뇌는 그제야 조금 차분하게 두개골에 안착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것이다.

“여관에서 듣기로 열두 살이라고 하던데, 나한테는 다섯이라고 했었지?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여섯 살인가? 어느 게 진짜 나이냐?”

순간 방 안이 창백해졌다.

가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차분했지만 이미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완전히 패닉에 빠졌다. 혼이 잠깐 나가 버렸을 정도다. 사정을 다 아는 사람이 본다면, 가람은 완벽하게 위기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가늘게 좁아진 트라키아의 눈매가 가소롭다는 듯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아 등이 흠뻑 젖는 것 같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트라키아의 대검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들킬세라 재빨리 시선을 수습했다.

“그건…….”

“그건?”

지금에야 깨닫는 것이지만, 가람 자신은 순발력이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오히려 마음은 차분해졌다.

가람은 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해야 한다. 정말로 잘 해야 한다.

웨이크는 그저 검을 잡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고, 뮐러는 트라키아의 앞에 나설 담력이 없는지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은폐하며 벽과 한 몸이 되어 멀찌감치 멀어져 있다.

그나마 입담 좋은 뮐러가 이 상황에 도움이 된다면 되었을 텐데, 보아하니 입을 열 상황이 못 되는 것 같다.

두 마리 말은 여전히 실의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는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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