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여기 나이로는 열두 살이에요.”
“흐음?”
“제가 살던 곳과 나이를 다르게 환산하는데, 그때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몰랐거든요.”
가람은 거듭 강조해서 절대 속이려는 의도가 없었음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말했다.
년과 월의 단위가 다르다고, 실제로 양력과 음력이라는 것이 있으니 대륙이 다른 이곳에서 날을 세는 것이 조금이나마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있지도 않은 두 달을 한 달로 쳐서 세는 방식의 달력이 순식간에 가람의 입을 통해 만들어지고, 전통 따위까지 들먹여지며 엉터리 건국 신화까지 만들어 내었다.
그저 조금이나마 신빙성 있게 들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예전에, 마차에서 이야기를 해 주었던 팀팀을 보면 북쪽 사람들은 이야기나 설화를 굉장히 좋아하는 듯싶었는데 트라키아도 그리 다르지 않은지 제법 흥미 있는 얼굴로 가람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북쪽은 문학이 대단히 발달한 지역이었다. 추운 겨울에 밖으로 나가기는 힘드니 집 안에서 글을 쓰거나 하며 소일거리 하는 것이다.
그 곰 같은 체구를 생각하면 문학이나, 여린 감성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데 어쨌거나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군. 난 계속 일을 하러 가 봐야 해서, 나중에 일이 생기면 부르렴.”
자신이 무슨 말을 떠드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이야기를 지어내던 가람은 길고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고 트라키아가 완전히 방을 떠나고 나서야 조금 안심했다.
가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것은 트라키아뿐만이 아니어서, 케르타 또한 이야기를 듣는 사이 당근에게 일어난 비극을 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너 열두 살이었어?”
“그럴 리가요.”
케르타의 질문에 대수롭잖게 대답한 가람은 트라키아가 금세 되돌아올 것 같아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다. 그녀가 다시 찾아오면 자고 있다고 전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게다가 으깨진 당근 탓에 거실이 온통 당근 냄새로 가득해서 고역스러웠다.
당근은 이제 정말 사양하고 싶은데. 뽀삐가 좀 먹고 나면 치워 버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가람은 책을 펼쳐 들었다.
무르하라에서 구입한 책들은 총 서른 권으로, 손에 들고 있는 이 마법 상식 책을 제외하곤 모조리 사막에 관련된 책이었다.
사막의 법률, 사막의 의복 양식, 역사, 영웅, 설화, 지역의 여행기나 각 도시의 유명한 물건, 주의할 점 등 겹치는 주제의 책도 더러 있었지만, 손으로 직접 책을 적어 내는 것이 보통인 이 세계에서는 그 지역을 벗어나면 똑같은 책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 사실은 가람이 가진 ‘호랑이 발톱’이라는 이름의 작은 소설책으로 더욱 잘 알 수 있는데, 이 책의 다음 권이 있다는 사실을 가람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하권에 계속’이라고 적혀 있어 제법 흥미롭게 끝난 내용에 하권을 찾아 헤매었지만 처음 베록에서 산 이 책의 하권을 아직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서점에 들르는데도 그랬다. 어쨌거나, 패스를 찾지 않을 때의 가람의 생활은 딱 네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식사, 잠, 운동, 책.
근육통이 있거나 하면 책을 읽고, 조금 나아지면 운동을 한다. 식사는 자주, 그러나 양은 적게 꾸준히 먹었다. 실컷 자고 다시 운동을 한다.
웨이크에게 지도를 받아 요즘은 가벼운 격투기나, 메이스를 휘두르는 법 따위를 배우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알아듣지 못할 내용이 나오면 뮐러에게 질문한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시간이 부쩍부쩍 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트라키아가 방문한 지 열흘이 지났고, 가람은 서른 권의 책 중 스물다섯 권을 읽었다.
발차기는 깔끔해진 데다, 웨이크를 한 번 쓰러뜨리기도 했다. 뮐러에게 배운 덕분에 상식은 더욱 견고해졌다.
그리고 패스의 바늘은 남쪽을 가리키고 있다. 기차도 남하하고 있는지라, 가람은 굳이 내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또다시 일주일 후, 가람은 종착역인 미르드에 하차했다. 사막 바람이 서늘한 밤중의 일이었다.
Chapter 13
역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케르타는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쏠랑 떠나 버렸다.
같이 다니는 것 아니었냐며 울상을 짓는 뮐러는 뽑아 먹을 것 많아 보이는 말이 떠나 버리니 퍽 아쉬운 눈치였다.
뽀삐와 둘이서 케르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이로 물고 푸릉푸릉 잉잉대는 것을 가람은 팔짱을 낀 채 지켜보았다.
남쪽은 하늘이 더 높다. 별이 더 멀리서 보이는 듯했다. 가람은 아직도 옅은 빛을 내며 정차해 있는 기차를 바라보다가 역을 휘도는 찬 바람에 팔을 감싸 안고 떨었다.
무르하라에서 두꺼운 옷을 다 내버리고 더위에 적합한 얇은 옷으로 모조리 바꿔 입은 탓에 솜털이 다닥다닥 곤두섰다.
달달 떨리도록 춥지만 낮이 되면 대번에 안면을 바꾸어 폭염이 이글거리게 될 것이다. 납작납작한 지붕들은 무르하라의 것들과 거의 흡사하다.
그러나 못 보던 동물들이 많았다. 말 대신 쌍봉낙타가 흔했는데, 말을 끌고 다니는 사람은 가람과 가끔 보이는 몇 명이 전부였다. 거의 열에 하나꼴이다.
마침내 뮐러와 뽀삐를 떨궈 낸 케르타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다. 트리거에게 안부 전해 달라는 외침을 듣고 있는데, 가람의 어깨 위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웨이크가 짐에서 모포를 꺼내어 덮어 준 것이다. 뮐러에게도 모포를 챙겨 준 웨이크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포를 꺼내어 둘렀다.
말없는 상냥함. 처음에는 그저 무뚝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끔 생각지도 않은 부분에서 상냥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가람은 함께한 시간을 실감했다.
자신도 많이 변했지만 두 사람도 변했다. 뮐러의 경우는 지금보다 좀 더 삶에 염세적이었던 것 같은데, 가람과 다니면서 그를 찌들게 만들었던 금전적인 압박감이 사라져서 그런지 많이 순수해졌다.
“기차에서 주워듣기로, 여기서 동쪽으로 가면 괜찮은 여관이 있답니다.”
뮐러가 슬쩍 이야기한다. 마을에 도착할 때마다 여관이나 도시의 명물 따위를 알려 주는 것은 언제나 뮐러의 몫이다.
이제 아주 습관이 되어 버려 그의 소개를 듣지 않으면 마을에 정식으로 도착한 기분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없었다면 이만큼이나 안락한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뮐러와 동행한 이후로 가람은 여관에서 도둑을 맞거나, 사기를 당하거나, 불친절한 대우를 받거나 한 경우가 거의 없었다.
딱 한 번 있었던 경우가 바로 앞 무르하라의 여관에서 무뢰배를 만난 일이다. 그때야 워낙 더워 아무 여관이나 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여관 이름 알려 주고 뮐러가 먼저 가서 잡아 둬요. 저는 갈 곳이 있어요.”
뮐러는 조금 의아해하다가 가람이 손을 들어 보이자 수긍했다. 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가람의 손등에는 바늘 같은 것이 그려져 있다 했다.
이럴 때의 가람은 예민해서 어지간하면 토 달지 않는 것이 좋았다.
“예. 이름은 ‘황금 모래 여관’입니다. 유명하니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가람은 여관 이름을 몇 번 되뇌고 고개를 끄덕였다.
“말들도 데려가요.”
뮐러에게 말과 짐을 떠맡긴 가람은 웨이크를 뒤에 달고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충전이 되었는데도 요 며칠 기차에 있었던지라 조바심이 잔뜩 난 상태였다.
게다가 운 좋게도 패스는 미르드에 있는지 바늘이 짧다. 운이 좋다면 도시 안에서 돌아다니다가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시 안을 돌아다녀야 한다면 낮보다 서늘한 밤이 더 나았다. 낮의 남쪽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대한 고기 불판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동일하다.
뜨거운 열을 받은 모래들은 번쩍거리며 빛과 열을 반사한다. 그러면 걸어 다니는 행인들은 불판 위의 고깃덩이처럼 익어 갔다.
속도가 매우 느리긴 했지만, 옷자락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없었다면 그런 식으로 익어 버렸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미르드의 밤거리는 인적이 드문 편이 아니었다. 한낮의 더위에 달궈진 몸을 식히려는지 손에 술잔을 든 행인들이 흥청망청 걸어 다녔다. 밤의 시원한 공기를 즐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네모반듯한 건물들이 만들어 내는 골목들은 사거리의 연속이었는데, 모퉁이마다 자그마한 벤치가 놓여 있어 밤을 즐기는 행인들이 앉아 쉬고 있었다.
바늘은 서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주택가인 듯한 길을 따라 계속 걷자 차양을 드리운 길이 나타났다.
새빨간 차양에 일렁이는 그림자와 불빛, 얇은 천이 살랑대는 유혹적인 차림의 여자와 상의를 탈의하거나 한껏 빼입은 남자가 저마다 호객을 하느라 바쁘다.
갑자기 확 펼쳐진 화려한 거리에 잠시 멈칫했던 가람은 다시 길을 따라 걸었다.
“아가씨, 위로가 필요한가? 즐거움이 필요한가? 잘 해 줄 테니 놀다 가라고!”
남자 하나가 가람에게 슬쩍 따라붙는다. 반사적으로 웨이크를 찾던 가람은 그 또한 별다를 것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발견했다.
팔뚝이 가람의 팔목만큼이나 가느다란 아가씨가 웨이크의 굵은 팔을 붙잡고 나풀나풀 몸을 붙여 온다.
팔을 가볍게 휘두르기만 해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이는데, 그랬다간 나동그라진 아가씨가 무사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떠민다고 해도 떠밀 곳도 없을 정도로 가느다란 여자였다. 허리가 한 줌이나 될까 말까 하다.
모진 말로 쫓아 버리는 편이 좋겠지만, 불빛 탓에 살짝 촉촉해서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마치 사슴과 같다.
선하고 약한 동물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다. 어쨌거나 대단한 미색이라 가람마저 잠시 당황했다.
“아가씨는 어떤 게 좋으신가요? 화끈한 남자? 아니면 정중한 남자가 좋으십니까? 원하는 대로 해 드리지요.”
잠시 시선을 빼앗긴 사이 따라붙기만 하던 남자가 가람의 팔 하나를 꿰어 찼다.
옅게 호선을 그리는 미소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정신을 차리니 이번에는 꿀처럼 달콤한 시선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팔을 붙잡은 손도 아주 자연스럽고 정중하게 취급받는 느낌이 들었다.
불빛에 얼비쳐 홍차 같은 적금안이 시선을 사로잡을 만하다. 외모 또한 웨이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달콤한 향내가 나는 것이, 유혹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유혹을 당하고 있는 것이 맞다. 가람은 몹시 당혹스러워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자신이 더 당혹스러워하고 있음에 당황했다.
이곳은 이제 누가 말하지 않아도 어딘지 알겠다. 책에서 잠깐 읽었던, 유명하다는 미르드의 환락가이리라.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를 대상으로도 영업을 하는 줄은 몰랐다.
“아니, 저는…….”
“응? 말해 봐요, 아가씨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들을 테니. 그것보다― 우리 조용한 데서 통성명이나 하며…….”
남자의 손이 은밀하게 가람의 등줄기를 훑어 내린다. 노골적인 그 의사 표현에 가람은 남자가 쓰다듬은 등줄기를 꼿꼿이 곤두세우며 얼어붙었다. 걷던 걸음마저 뚜둑 멈춰 버렸다.
“좋은 시간이라도 보낼까?”
입술을 살짝 핥는 혀가 몹시도 붉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던 가람이 화들짝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남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제 외모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다는 태도다.
이 상황에서 총칼을 빼어 드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동안 이렇게, 여자 취급을 당해 본 적이 없어 가람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물컵에 빠진 각설탕보다도 무력하게 가람은 그저 녹아 갔다. 기분이 좋지만 나쁜, 그러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모순되는 감정이 쉴 새 없이 충돌한다.
남자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이것으로 먹고사니 당연한 말이겠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봉착한 가람은 남자의 나긋나긋한 시선과 뭐든 들어줄 것 같은 표정이 무섭다고 생각했다.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평소의 가람이었다면 그깟 것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을 테지만, 환락가의 분위기 탓인지 쉽지가 않다.
도와줘요.
힘겹게 웨이크의 시선을 끌어낸 가람이 입 모양만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웨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남자를 두드려 팰까요?”
순간 가람은 그러라고 할 뻔했다. 난폭한 모습을 보인다면 웨이크의 팔에 고양이처럼 매달린 여자도 떨어져 나갈 것이다.
하지만 별로 좋은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저 좀 끈질기다는 이유로 사람을 두들겨 팰 수는 없었다. 정말이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다. 절대로 남자의 매력에 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뇨, 그냥 좀,”
떼어 줘요.
다시 입 모양이 벙긋벙긋. 웨이크는 고민했다.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 이 상황을 벗어나기란 힘들어 보인다.
뮐러라면 재치 있는 방법으로 빠져나갔을 텐데. 그가 고민하는 사이 가람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남자에게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웨이크의 팔뚝에 달라붙은 여자도 실력을 발휘하려는지 교태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슬슬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웨이크의 머릿속으로 기가 막히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웨이크는 팔에 달라붙은 여자를 그대로 두고 저벅저벅 걸어 남자에게 접근했다.
체구는 비슷했지만 허리춤에 날붙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무장한 웨이크의 모습에 남자가 흠칫했다.
이런 장사를 하다 보면 재수가 없으면 괜히 칼부림이 나곤 한다. 어떻게 봐도 연인 관계는 아닌 것 같아서 작업을 시작했는데, 설마?
오늘도 텄다고 생각하며 혀를 차던 남자에게 향한 것은 웨이크의 단검이 아니었다. 그저 눈물겨운 희생정신일 뿐이었다.
“그녀 대신 나를 잡아라.”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웨이크의 팔뚝을 붙잡고 있던 여자도 묘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선다. 가람도 흠칫했다. 아니, 웨이크,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웨이크의 결론은 간단했다. 남자를 물리적인 방법으로 저지해서는 안 된다. 즉 험하게 다루어선 안 된다.
하지만 떨쳐 내긴 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람 대신 저 남자를 붙잡아 두는 방법으로 가람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의도 그대로 말이 전달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 장소와 상황적 특성 때문에 웨이크의 말은 조금 분홍색으로 물들어져 전달되었다.
“음, 저, 손님. 저는 그쪽으로는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나를 잡는 게 좋을 텐데.”
나름대로 가람에게서 떨어지라는 위협이었는데 어째 남자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웨이크와 가람을 번갈아 보다가 반보 물러섰다. 그리고 거의 도망치는 것에 가깝게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여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웨이크는 영업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습게도 남자는 도망치는 중간중간 웨이크를 돌아보며 혹시나 따라오진 않는지 경계했다.
웨이크는 갑자기 지나치게 쉽게 상황이 해결되어 어리둥절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뿌듯해했다. 뮐러의 처세술을 곁에서 조금이나마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칼날보다 혀가 더 도움이 되는 법이다.
가람은 이유 없이 밝고 뿌듯해하는 웨이크를 조금 가엾게 바라보았다. 본바탕은 나쁜 사람이 아닌데, 눈치가 없어 고생이다. 하지만 본인은 행복한 듯하니 다행인가.
가람은 한숨을 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거리를 주파하겠다는 듯 거의 뛰듯이 걷자 아무도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바늘을 따라 한참 걷자, 이번에는 커다란 벽이 불쑥 나타났다.
기묘한 건축물이었다. 넓적한 모래판을 엎어 놓은 것 같았는데, 건물의 담장인가 싶어 계속 따라갔더니 한참을 가야 겨우 모퉁이가 나왔다.
모퉁이를 돌아 다시 한참 걸으니 길거리의 분위기가 점점 어두워져 간다.
다시 또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아 쭈욱 걷자 병사처럼 보이는 사람 두 명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패스는 이 기묘한 건축물의 안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무지 무엇인지 가늠되지가 않아서 가람은 병사에게 건물의 정체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병사는 별 시시한 질문 다 듣는다는 듯이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미르드 처음 온 거요? 유명한 지하 미궁이잖소.”
그 말에 가람은 불현듯 기차 안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래로 뻗은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할 수 없고, 그 층수가 몇 층인지는 오직 미르드의 옛 왕만이 알고 있다는 이 미궁은 하늘에서 보면 도시 서쪽에 놓인 거대한 사각형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미궁의 크기는 그 사각형보다 훨씬 컸다.
대대로 극악 범죄자만 가둔다는 이 미궁은 왕이 바뀔 때마다 증축하고, 안의 죄인들이 탈출을 위해 뚫어 댄 땅굴로 인해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하고 있던 길이 무너지기도 하면서 형태가 바뀌어, 그야말로 개미굴보다도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지상과 이어진 1층은 그나마 괜찮지만, 그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이었다.
일단 들어가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당연히 식사 따위도 받을 수 없다.
전갈이나 운 좋게 흘러들어 온 뱀 따위로 연명하고 가끔은 죄수들끼리 서로를 죽여 먹기도 한다.
지하의 가장 아래쪽에는 물이 솟는 샘이 있다고 하는데, 그걸 쫓아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백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바늘은 당연하다는 듯 지하 미궁을 가리키고 있었다. 가람은 진심으로 손등을 물어뜯고 싶었다.
* * *
“그래서 정말로 지―스나하로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지스나하가 뭐예요?”
“그 미궁 말입니다.”
“지스나하, 지, 스나하? 꼭 여자 이름 같네요.”
“예전에 왕이 사랑했던 왕비의 이름이라더군요.”
“왜 왕비 이름을 감옥 이름으로 지은 거예요?”
“엄청난 마성의 여자라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가 없었다더군요. 결국 왕국 내의 모든 기사단의 기사단장을 자신에게 빠지게 만들어 반란을 일으켜 여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뭐, 죽은 줄 알았던 왕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요. 그래서 진짜로 거기로 들어갈 겁니까?”
뮐러가 입술에 묻은 낙타 기름을 핥으며 말한다. 가람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며 꿀에 절인 대추를 씹었다. 그리고 곧 얼굴을 팍 구겼다.
반들반들 맛있어 보여서 입에 넣었더니 혀가 사라질 정도로 달다. 간신히 뱉지 않고 삼켰지만 그뿐이었다.
“세상에, 가람이 저쪽 사람이란 걸 몰랐으면 아마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뮐러는 이계라는 말 대신 저쪽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이유는 등 뒤에서 손을 모으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시중꾼들과 관련이 있었다.
시중꾼이 딸린 여관이라니. 뮐러가 ‘괜찮은’ 여관이라고 한 황금 모래인지 모래 황금인지 하는 여관은 그가 말한 대로 호사스럽기로 유명했다.
어느 정도냐면, 지나가던 행인에게 황금 모래의 위치가 어디냐고 묻는 것만으로 매우 친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 정도다.
그렇게 도착한 황금 모래 여관은 ‘여관’이라고 칭하기가 황공할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예전 전쟁 전의 대귀족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가람은 과연 하고 납득했다. 그냥 문짝이 달린 건물 따위가 아니었다. 정통 ‘칸’ 건축 양식의 대저택이다.
여관의 시작은 문 대신 기다란 인공 수로가 대신했다. 바로 양쪽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새하얀 대리석 기둥이 이어진다. 그 끝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새하얀 분수가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었다.
거기까지 걸어가고 나니 가람은 도저히 그 건물이 여관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분수대 뒤에 있는 것은 궁전이었다.
황금 모래라는 이름이 여관과 매우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관까지 가는 길이 온통 새하얀 색, 흰 대리석 바닥과 흰 대리석 기둥이었다면 이번에는 온통 황금색이었다.
둥그스름한 황금빛 지붕에 달빛이 부서진다. 건물 전체를 휘덮고, 늘어뜨려진 올이 성긴 하늘하늘한 금빛 직물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은 마치 금빛 모래가 궁전을 휘감고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진짜 여관인가, 들어가도 되는 건가 해서 멍하니 서 있자니 교육받았음이 분명한 걸음으로 선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얼떨결에 가람이 뮐러의 이름을 대자, 안내하겠다며 나선다.
몇 개의 금빛 직물을 지나는 내내 가람은 홀린 것 같은 기분을 떨치지 못했다. 안의 공간은 매우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었는데, 모든 공간마다 하늘거리는 천이 가로막고 있어 직물을 들출 때마다 완전히 다른 공간이 펼쳐졌다.
마침내 마지막 직물이 걷혔을 때, 가람은 종업원―이라고 하기도 어색하지만―의 태도가 그토록 정중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수증기를 피워 올리는 거대한 욕탕이 정원 한복판에 있었다. 옥으로 만들어진 욕탕에 금빛 트리거, 아니, 호랑이 머리상이 물을 토해 낸다. 사자가 아니라 호랑이인 것이 기묘했다.
어쨌거나, 그 뒤에는 공주님이나 살 것 같은 작은 2층 건물이 있었는데, 종업원은 그 건물을 별채라고 불렀다.
한마디로, 정원에 뜨거운 욕탕이 항시 준비된 2층짜리 별채를 뮐러가 빌렸다는 뜻이었다. 별채에는 심지어 개인 욕실도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특별한 곳이었다.
솔직히, 가람은 만족스러웠다. 뷔페식으로 마련된 기다란 식탁에 눕듯이 앉아 낙타 다리를 뜯어 먹고 있으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심지어 다소곳이 뒤에 대기하고 서 있던 시종이 뜨거운 천으로 가람의 얼굴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닦아 주기까지 했다.
어색해하는 가람에게 이것이 바로 ‘칸’의 귀한 손님 접대법이라며 종업원이 말갛게 웃는다. 그야말로 호사스러움의 극치였다.
“그렇게 미친 짓이에요? 그러니까, 그, 지사?”
“지―스나하.”
북쪽의 억양이나 발음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가람은 그 이름이 쉽게 혀에 붙지 않았다. 결국 몇 번이나 발음해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스나하에 들어가는 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