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남자는 야자 술 따위 음료수나 마찬가지라는 듯 호쾌하게 들이켰다. 바에 놓인 양초의 어두스름한 불빛이 목울대를 길게 칠한다.
단술로 반들반들한 입술을 핥으며 남자는 그제야 질문했다.
“그런데, 손님 맞지?”
묻는 낯이 어울리지 않게 어수룩해 보였지만 가람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팽팽하게 살아 있는 눈빛이 보통 아니다.
건들건들한 태도지만 저 눈은 분명 산전수전 다 겪고 굴러 대어 잔뜩 연마된 삶의 광택이다.
“맞아요. 여기, 가장 좋은 술로 내줘요.”
술을 주문하고 가람이 허리를 당겨 앉는다. 등뼈를 곧게 세운 모습이 갈기를 부풀린 목도리 도마뱀을 연상시킨다.
움츠러들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부풀리는 것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가람을 남자는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통 큰 손님이군. 그래, 어느 죄수를 꺼내 주면 되나?”
남자는 죄수가 마치 바지춤에 들어 있는 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말만 하면 얼마든지 꺼내 줄 수 있을 것 같은 여유작작한 말투에 가람은 지하 미궁의 위명을 의심했다.
그러나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거침없는 태도 하며,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 남자의 허리띠에는 커다란 오팔이 매달려 있었다.
“저예요.”
“이해가 안 되는데.”
남자는 애송이처럼 흥분하지 않았다. 차분하게 싱글싱글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눈은 고요하다.
“그보다 그거 마시고 자리를 옮기지 않을래요? 여긴,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다가 괜히 말이 새어 나가면 곤란해진다. 가람이 바텐더를 눈짓하자 남자가 술잔을 그대로 들고 일어섰다. 술잔째로 들고 가겠다는 뜻이 명백했다.
가람은 술잔까지 포함해 값을 치르고 남자와 주점을 나섰다. 그 바로 뒤로 뮐러와 웨이크가 조용히 따랐다.
미르드뿐만이 아니라 남쪽 도시의 대부분은 도시의 색감이 그리 풍부하지 않다.
모래색 자연환경에 모래색 건물들을 보고 있자면 도시 전체에 보호색이라도 입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천막이나 차양 따위가 색깔 있는 그림자를 드리우긴 하지만, 그나마도 어지럽기 짝이 없는 데다 별 특징이 없어 길을 기억하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찍어 낸 것 같은 네모난 건물들이 형성한 골목을 걷는 일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모래색 골목에서 모래색 골목으로, 모래색 벽돌을 따라 걷다가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 왼쪽, 또다시 모래색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모래색 골목이 나오고, 그 위에는 언젠가 보았던 붉은 차양이 드리워져 있다.
그쯤 되면 더위에 반쯤 익은 머리로 여기가 아까 거긴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그런 혼란은 밤이면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황금 모래 여관은 말 그대로 궁전 같은 자태 덕분에 이런 미로 같은 동네에서도 한눈에 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이었다.
가람이 황금 모래 여관으로 발걸음하자 처음에는 설마 하던 남자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겹겹의 천을 지나 안쪽으로 안내되자 남자는 조금 긴장하는 듯싶었다. 비자금으로 제법 호화로운 생활을 했었는지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별채로 안내되자 남자는 조금 질린 표정으로 도망치고 싶어 했다.
“당신, 정체가 뭐요?”
별채 안에서 내어올 수 있는 진미는 모두 내어오고 귀한 술에 둘러싸이자 조금 정신을 차린 남자가 질문했다. 조심스러운 어투에는 긴장이 배어 있다.
“여행자예요.”
“이봐, 장난하지 마십시오. 무슨, 여기 하루 묵는 데 얼마인지나 아는 거요? 이거 혹시 시찰입니까? 아니, 동양인이니 귀족일 리는 없지. 뭐요, 대체? 저쪽 대륙에서 감옥 탐방이라도 보내더이까?”
“순수한, 아주 순수한 호기심이에요.”
그 이상은 알 필요 없으시고요.
중얼거리듯 말했지만 남자는 가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순수하게 지옥으로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는 질문이 남자의 목구멍까지 기어 올라왔다.
그러나 느슨하게 앉아 관찰하듯 시선을 던지는 가람에게는 위압감이 있어서 남자는 말 대신 침만 삼켰다. 갑자기 남자가 몹시 불안해했기에 가람은 정리하듯 덧붙였다.
“제가 원하는 건, 제가 며칠 후 지하 미궁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그리고 며칠, 혹은 좀 오래 있다가 꺼내 달라고 하면 꺼내 주는 거예요.”
“귀한 집 아가씨 같은데, 대체 왜 들어가는 거요? 아니, 다 떠나서, 지하 미궁 깊숙이 들어가면 나도 어쩔 방법이 없소. 지하 1층으로 돌아와야만 꺼내 줄 수 있지. 게다가 아가씨 같은 사람은 안에서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거요. 만약 아가씨가 죽는다면 내 책임 아니니, 돈 돌려 달라고 하지 마시오.”
“버틸 수 있으니 걱정 말고, 그리고 나머지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꺼내 달라고 하면 꺼내 주는 거예요. 그게 전부예요. 할 수 있나요?”
사실 가람은 남자에게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어차피 된다면 좋은 거고, 안 된다면 패스를 쓰면 그만이다.
패스가 아깝긴 하지만, 다음 패스로 갈 수 있게 되니 전체적으로 보면 이득이다. 가람은 구운 밤의 껍질을 벗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남자는 한참 동안 스스로가 어떤 함정에 빠져들고 있는 건 아닌지 깨닫기 위해 골몰했다. 그러나 별실의 화려함은 경계심과 물욕 중 물욕 쪽에 추를 좀 더 얹게 만들었다.
남자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갑자기 뮐러와 웨이크가 방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람이 혼자일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지만 두 남자가 워낙 갑작스레 들이닥쳤기에 고민하던 남자는 탁자를 엎을 만큼 놀라 반쯤 일어섰다가 간신히 다시 앉았다.
“뭐, 뭐요?”
“제 일행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굴 안에서 죽거나 하면 당신에게 돈을 지급할 사람이기도 하니까. 고민은 끝났나요?”
남자는 태연하게 자신의 죽음을 입에 담는 가람을 아연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직.”
“뭐, 그래요.”
가람은 남자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기로 하고 뮐러와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었다.
요즘 들어 편지 왕래가 잦아진 뮐러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웨이크가 선물로 보내었던 물건들에 여동생이 답장을 보내왔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우체국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 보니 이곳의 물류는 대부분 은행에서 처리했는데, 그 비용이 이전 세계의 우체국과는 수백 배나 차이가 나서 일반인들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딱히 주소지가 없으니 어떻게 편지를 받는지 가람은 늘 그것이 의아했는데, 결국 그것도 마법이었다.
은행에 등록을 해 두면 등록자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는데, 등록자가 은행에 방문하면 공간 마법으로 물건을 이송시켜 전해 준다.
물론 이제나저제나 은행을 방문하기를 기다릴 수만은 없으니, 돈을 받고 각 도시에서 사람을 찾아 주는 직업도 있었다.
인상착의와 이름, 나이 따위를 듣고 물어물어 찾아가 은행에 편지가 있다고 전해 주는 것이다.
어쨌거나 요즘 들어 부쩍 여동생이 그리운지 웨이크는 여동생에 관해 말하는 일이 잦아졌다.
웨이크보다 조금 옅은 머리칼에 상냥하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는데, 무뚝뚝한 웨이크를 보면 가람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상냥한 여동생과 무뚝뚝한 오빠는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다.
두런두런 오가는 이야기 속으로 고민하던 간수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긴 했지만 결심은 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좋소. 맡겠소.”
막상 남자가 결정하자 이야기는 몹시 빠르게 진행되었다. 얼마를 원하냐 가람이 물었더니 남자는 조심스레 금화 천 골드를 제안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세게 부른 금액이라, 가람은 일부러 기가 질리라고 눈앞에서 2천 골드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부른 금액의 두 배인 2천 골드를 주되, 들어가는 것까지 책임져 줄 것.
그리고 선금은 없으며, 가람이 나오거나 1년이 지나도록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면 돈은 남자의 것이 되도록 계약서를 작성했다.
실제로 범죄자가 될 각오까지 반쯤 했던 가람은 감옥의 입소식이 조금 싱겁게 끝난 셈이었다. 입맛을 다시는 가람에게 뮐러가 넌지시 묻는다.
“어떻게 들어갈 생각이었습니까?”
“어디 지나가는 귀족 따귀라도 치려고 했죠.”
입을 쩌억 벌리고 황당해하는 뮐러에게 가람은 대수롭잖게 대답하며 덧붙였다.
“귀족 폭행죄가 지하 미궁 형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안에서 빌빌 기면서 스스로의 하찮음을 깨닫고 나자빠져 죽으라는 뜻의 형벌이래요. 기차에서 읽었는데, 뮐러도 읽어 봐요. 아무튼 벌을 만든 사람의 창의력이 대단한 것 같았어요. 모래 속에 반만 묻고 발바닥을 내밀게 하고 계속 때리거나, 온몸을 묶고 얼굴 위로 전갈이 지나가게 하는 것까지― 많던데요?”
“사양하겠습니다.”
“잔인한 것만 있진 않았다니까요? 알아 두는 게 좋잖아요.”
“그 책 다 읽었으면 다시 팔아 버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귀족은 무슨 죕니까? 괜히 따귀 맞는 봉변이나 당하고.”
“그래서 성격 더러워 보이는 귀족을 찾으려고 했어요.”
“이런.”
뮐러는 혀를 찼고 가람은 어깨를 으쓱였다.
지나치게 태연한 대화에 간수는 그들이 무언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양배추 농사꾼이나 제빵사 같은 사람이 있을 리야 없겠지만, 이 대화는 뭔가 이상했다.
간수는 가람이 정말로 좀 이상한 여자거나, 혹은 세상에 태어나서 아직 쓴맛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철부지일 거라고 짐작했다.
“들어갈 때 갖고 갈 짐을 챙겨 두는 게 좋을 거요.”
“짐을 갖고 갈 수 있어요?”
의외였다. 가람이 묻자 간수는 무뚝뚝하게 끄덕였다.
“그렇소. 혼자 들 수 있는 정도의 양은 허락되어 있지. 하지만 욕심부리지는 마시오.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면 다 빼앗길 테니까. 일주일 뒤 들어갈 수 있으니 그때까지 준비하시오.”
“일주일이나?”
“마지막으로 태양을 볼 수 있는 시간일지도 모르니 소중하게 보내는 게 좋을 거요. 일주일 뒤 해 뜨기 전에 중앙 감옥으로 와서 나를 찾으면 임시 감옥에 수감해 주겠소. 그리고 그날 정오에 수감될 거요. 만약 되돌리고 싶으면 그날 아침밖에 기회가 없으니 잘 생각하시오.”
“뭐라고 찾으면 되죠?”
“팔쿰. 내 이름이오. 그날 새벽 경계 담당이 나이니 문 앞에서 만날 수 있을 거요.”
“좋아요. 팔쿰. 일주일 뒤 감옥 앞에서 봐요.”
가람은 새기듯 말하며 계약서를 챙겨 뮐러에게 건네었다. 팔쿰도 받은 계약서를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서려던 그가 문득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 혼자 들어가는 거요?”
가람이 그렇다고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웨이크가 불쑥 나섰다.
“아니, 둘이오.”
“웨이크!”
가람이 웨이크의 말을 지우려는 듯 소리쳤다. 팔쿰은 가람과 웨이크를 번갈아 보다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상관없긴 하지만, 돈은 두 배요.”
“나 혼자 가게 될 거예요.”
“두 사람분을 준비하시오.”
가람과 웨이크가 번갈아 주장하자 팔쿰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휙 하니 자리를 떠나 버렸다. 남은 방 안에서 웨이크와 가람의 시선이 충돌했다.
“혼자 갈 거예요.”
웨이크는 가람과 입씨름하는 대신 앞에 놓인 타조 가슴살을 집어 먹었다.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에 가람이 한숨을 쉬며 이번에는 뮐러를 설득했다.
“웨이크는 여기에 남아야 해요.”
“그가 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웨이크는 훌륭해요. 그가 있으면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을걸요. 사실 같이 가면 도움이 많이 될 거예요. 하지만, 아― 날 좀 이해해 줘요. 굳이 같이 갈 필요 없잖아요? 지금까지 계속 혼자 뛰어들었다고요. 절벽에서도, 바다에서도, 어디서든.”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오.”
접시 위에 양배추가 하나 통째로 놓여 있어 뭔가 싶어 잘랐더니 안이 고기 다진 것으로 꽉 차 있었다. 뮐러는 즐겁게 신기한 요리를 맛보며 가람을 응대했다.
“굳이 가서 나 한 명이 잘못되면 끝날 일을 두 명이나 잘못되게 할 필요는 없다고요. 아, 그리고 저 간수가 뮐러에게 해코지라도 하면 어떡해요? 돈을 노리고 수작을 부릴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웨이크가 있어야 막아 주지요.”
뮐러는 조금 애매하게 웃었다.
“웨이크보다 신체적으로는 약하지만 가람에게 직접 그렇게 들으니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가람은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주장을 펼쳤지만 모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두 사람에게는 이미 신세를 지고 있다.
사실 처음에야 이들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정이 들고 보니 되도록 위험한 곳에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두 사람을 모르드레드라는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던가.
모르드레드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있는지 간에 그 위험에 대해 두 남자에게 숨기고 있는 것만으로 가람은 죄책감이 컸다.
그러니 되도록 더 이상 위험하게 하고 싶지 않은데.
가람은 한숨을 쉬고 주먹만 한 새 요리를 잘게 쪼개었다. 일단 먹으면서 설득하자.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 * *
“잠을 덜 자도 되는 브로치는, 아, 달고 있군요. 그럼 여기 챙긴 약병들 중 없는 것 있나 확인해 보세요. 이게 상처 회복을 빠르게 해 주는 약, 이건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게 해 주는 약, 뿌리면 잠들게 하는 가루, 해독제,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는 약, 마시면 3일간 배고프지 않게 해 주는 약, 그리고…….”
가방을 챙기던 뮐러는 가람이 창틀 밖을 내다보며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래서야 듣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결국 뮐러는 직접 가람에게 다가가 주의를 끌기로 결정했다.
미궁으로 들어가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현재 바닥은 요 며칠간 마을에서 사 와 늘어놓은 물건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는 웨이크가 만들어 놓은 덫, 밟으면 발목이 잘리는 덫도 놓여 있어 매우 조심해야 했다.
웨이크는 이 도시에서는 덫을 만들 만한 재료를 구할 수 없다며 바닥에 앉아 직접 올가미를 엮어 가며 덫을 만들었다.
최대한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좋다며 지금도 방의 구석에 앉아 덫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현재 고급스러운 객실은 공장을 방불케 하는 몰골이 되어 버렸다.
“뭐 합니까?”
가람은 아래를 바라보고 있는 상태 그대로 대답했다.
“양배추 수레요.”
“수레?”
별채 3층에서 동쪽 창문으로는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다.
대로변은 아니었지만 양배추 수레나 넓적한 복숭아, 죽은 동물을 실은 수레, 콩과 올리브 따위를 팔며 돌아다니는 행상인 등이 쉬지 않고 지나다녔다.
그들은 집집마다 문을 두드려 직접 가진 물건들을 판매하기도 했다.
아래에선 구운 빵이 가득 찬 등짐을 멘 남자가 행인들에게 빵을 홍보하고 있었다. 개당 10쿠퍼라며 가격을 외치는 소리가 가람의 창문까지 들릴 정도다.
“그렇군요. 그런데 이걸 왜 보고 있습니까?”
“내일이 되면 얼마나 지나야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으음.”
“준비는 다 끝났나요?”
가람이 돌아보며 질문하자 뮐러는 턱 끝으로 배낭을 가리킴으로써 대답했다.
한참 동안 밖을 내다보느라 자신의 등 뒤가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고 있던 가람은 바닥에 즐비한 잡동사니에 첫 번째로 놀라고, 웨이크도 못 메고 갈 것 같은 거대한 봇짐에 또 한 번 놀랐다.
“가방을 몇 개나 싼 거예요?”
“일곱 개밖에 안 됩니다.”
얼마나 눌러 담았는지 모든 가방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빵빵하다. 몇몇 가방은 채 닫히지도 않아서, 그 입구로 빵의 끄트머리나 병의 주둥이 따위를 내밀고 있었다.
“뮐러. 소풍 가는 게 아니라고요.”
가람이 아연하게 중얼거리자 뮐러도 뒤늦게 자신이 싼 가방을 자각했다.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싶어 넣고, 또 넣다 보니 어느새 이 꼴이 되고 말았다.
가람은 가방에서 부피가 큰 빵이나 감자를 꺼내었다. 뮐러가 챙긴 것들 중에는 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동물의 이빨 조각 따위의 물건들도 있었는데, 가람은 그것들을 모조리 짐 꾸러미에서 추방했다.
식량이나 모포 같은, 저쪽 세계에서 조달해 올 수 있는 물건들을 제외하자 짐이 가방 한 개 분량으로 줄었다.
그러나 뮐러는 다음 날 새벽까지 가람의 짐에 몰래 무언가를 쑤셔 넣으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그 모든 시도는 심란한 마음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가람에게 한결같이 저지되었다.
다음 날, 새벽 3시쯤 가람과 웨이크는 여관을 나섰다. 광원 하나 없는 도시는 몹시 어둡고 조용해서 비장한 감정을 증폭시켰다. 두 사람은 무거운 걸음을 밟아 나갔다.
길은 이미 알고 있다. 몇 번이나 미리 가 보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른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가람은 물러설 수 없었다.
어스름을 헤치고 조금 더 걷자 임시 감옥임을 알리는 기둥이 나타났다. 기둥 앞에 선 보초는 낯익은 얼굴이다. 오며 가며 몇 번이나 마주쳤던 팔쿰 또한 가람과 웨이크를 발견했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팔쿰은 미리 말했던 대로 가람과 웨이크를 범죄자 취급하며 임시 감옥 건물 안으로 데려갔다.
몇 개의 감옥을 지나 가장 깊숙한 감옥에 도착하자 먼저 수감되어 있던 다섯 명의 죄수들 틈에 섞여 들 수 있었다.
죄수들은 저마다 작은 봇짐을 갖고 있었지만 가람과 웨이크만큼 큰 짐을 가진 죄수는 없었다.
매우 이른 시간인 탓에 죄수들은 대부분 잠에 취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날이 밝아도 죄수들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죄수들은 하나같이 절망에 허덕이며 독한 술이 간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람과 웨이크처럼 돈을 주고 수감된 사람은 없으리라.
가람과 웨이크는 숨죽이고 최대한 죄수들의 절망 속에 묻어 들어갔다. 괜히 이상한 낌새를 줄 필요는 없다.
“왔어, 왔다고…….”
갑자기 나이 든 죄수 하나가 중얼거렸다. 적막 속으로 아주 작은 소리들이 파고든다. 다섯, 여섯 정도는 될 것 같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금 기다리자 걸음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곧 감옥 앞으로 세 명의 간수들이 나타났다. 모두 가람이 모르는 얼굴이다.
“일어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