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죄수 중 누군가가 외쳤다. 캬악, 크악, 하던 위협 어린 괴성만 내지르기에 말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나 했던 가람은 깜짝 놀랐다.
사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아서 좀 더 편하게 도살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막 달려드는 죄수 하나를 발로 걷어차 쓰러뜨린 뒤 말을 한 죄수를 찾아보니 비쩍 말라 좀비 같은 몰골의 늙은 남자였다.
그는 아귀다툼 속에서 가람의 짐 꾸러미를 뒤져 사과 한 알을 꺼내어 걸신들린 듯이 먹어 치우고 있었다.
머리 바로 위에 칼날이 날아다니는데도 이 한 입을 먹을 수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미친 것처럼 달려드는 죄수야 그렇다 치더라도, 달려들지도 않는 사람을 먼저 공격하기는 좀 꺼림칙했던 가람은 마지막 죄수를 마무리하고 식량을 훔쳐 먹는 죄수에게 걸어갔다.
“이봐요.”
사과를 베어 먹던 죄수는 가람이 저벅거리며 걸어올 때까지도 정신없이 음식을 먹다가 소리 내어 부르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이라 별로 보이는 것도 없을 텐데, 한 손에는 총을, 다른 손에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단검을 든 가람을 보곤 히익 하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사, 사, 사, 살려 주십시오. 저는, 저, 저는 나쁜 놈이 아닙니다. 살려, 살려 주십시오.”
죄수는 벌벌 떨며 가람의 발끝에 머리를 박고 흐느끼듯 호소했다. 가람은 그를 비스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있다면, 어차피 범죄자다. 그것도 흉악한.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지나가던 귀족에게 버릇없이 굴었다가 재수 없이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첫 번째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로웠다.
“이름이?”
“람카차로입니다. 살려 주십시오. 저는 누명을 쓰고 들어온 사람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이 몸 다 바쳐 모시겠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길 잘 알아요?”
람카차로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는 혀로 가람의 신발 바닥이라도 핥을 듯이 애절하게 호소했다.
“압니다. 알다마다요. 여기서 반년이나 버텼습니다. 제 집마냥 잘 알지요. 가시고 싶으신 곳은 어디든 안내하겠습니다. 예, 암요.”
람카차로는 다소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설설 기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고 불쌍하게 이 감옥에 수감되었는지 호소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람카차로는 무죄였다.
그는 감자를 사다가 구워 팔며 생계를 꾸려 가는 평범한 미르드의 시민이었다.
그러나 감자를 구워 파는 정도의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제대로 납품을 받아 주는 거래처를 구하는 데에는 심한 경쟁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람카차로는 운이 좋아서 영주의 산하 기관에 배속된 식량 기관의 하위 점포에 감자를 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이 코딱지만 한 점포는 아주 고약한 사람의 것으로, 그 근방에서도 유명한 난봉꾼이라고 했다.
여러 단계를 거치긴 하나 영주에게 줄이 닿아 있으니 뒷배야 두둑했고 알게 모르게 뒷세계와 손이 닿아 있기도 했다.
그가 람카차로 본인에게 직접 무언가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람카차로가 감자를 굽느라 집을 비운 사이 그의 집으로 은밀히 찾아가 당시 열네 살이던 딸을 상습적으로 해코지했다.
아버지에게 알리면 당장 그를 해고하겠다는 경고에 어린 딸은 두려움에 떨며 급격히 말수를 잃어 갔고, 아버지는 감자를 굽고 어머니는 감자를 캐러 간 사이 그 집에는 홀로 남겨진 딸과 악마 같은 점포 주인의 방문만이 남았다.
특히 그 점포 주인은 가학성 변태라는 타이틀도 거머쥐고 있어서 딸의 여린 몸에는 상처가 늘어 갔다.
딸의 증세는 점점 심해져 문을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경련을 일으키며 얼어붙고 숟가락을 떨어뜨리거나 하는 사소한 실수에 지나치게 울며 잘못을 빌었다.
그런 딸이 점점 이상하게 생각된 람카차로의 부인은 딸의 옷을 벗겨 충격적인 진상을 확인했고, 곧 그 사실은 람카차로의 귀에 들어갔다.
이 도시에도 법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아서, 람카차로는 즉시 그를 고발했다. 감자 따위 팔지 못해도 그만이다.
어린 딸이 완전히 망가진 것에 람카차로는 이성을 잃었다. 영주 성은 순순히 그 고발을 받아들였고 재판 날짜가 잡혔다. 그리고 문제의 끔찍한 날이 찾아왔다.
이상하게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그 악마 같은 놈을 심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람카차로는 기분 좋게 감자를 팔고 집으로 돌아왔다.
점포에서 감자를 사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도시 사람들은 람카차로의 감자를 사 주었던 것이다. 재판에는 돈이 들었고, 람카차로는 돈을 벌어야 했다.
문을 연 순간 갑자기 쇠비린내가 훅 끼쳤다. 람카차로는 불길한 마음에 떨리는 손짓으로 감자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집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조심스레 딸과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들어서던 람카차로는 갑자기 눈앞에 드러난 상황에 넋이 나가 버렸다.
두 눈이 뽑히고, 차마 말을 못 할 정도로 고문당한 흔적이 역력한 아내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이빨이 다 뽑혀 입 안에 피가 흥건했고 잘려 나간 손가락 몇 개가 그 주위에 뒹굴고 있었다.
딸은 간신히 살아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혀가 잘려 피거품을 꺽꺽 내뱉던 딸은 아비를 보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그리고 저는 짜 맞춘 것처럼 도착한 경비병에게, 현행범으로 붙잡혔습니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딸은 목숨을 이어 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아비를 변호하지 못했다. 마치 각본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의 수감은 술술 진행되었다.
감옥에 갇히기 직전까지 남자는 딸을 돌봐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영원히 자신이 나오지 못해도, 딸이 쓸쓸히 죽지는 않도록.
가람은 구구절절한 그의 사연을 다 들어 주었다. 식량을 먹을 시간도 필요했고, 휴식도 필요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1년 뒤 딸을 만나러 가겠다는 각오로 이 지옥에서 버텼다.
아귀다툼하며 싸울 때 조심히 몸을 낮추어 먹을 것을 훔치고, 굴을 파서 잠을 자는 등 정말로 치열하게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럼 길은 잘 알겠네요. 같이 가죠.”
람카차로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러나 웨이크는 걱정스러운 안색이다. 가람은 뛰어오를 듯 기뻐하는 람카차로를 바라보며 웨이크에게 지시했다.
“이 남자의 손을 묶어요.”
갑작스러운 말에 반색하던 람카차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몹시 당황했다.
“예? 저, 저는 나쁜 놈이 아니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는 누명을 썼습니다.”
손을 묶고 가다가 다른 죄수들이 나타나 습격하기라도 하면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람카차로의 애원에 가람은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믿어요?”
* * *
인간이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깊은 나락.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나은 지옥인데도 죄수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단 1년.
5년도 10년도 아닌 단 1년만 버티면 나갈 수 있다. 목숨을 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길이의 시간이다.
한 번쯤, 도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약한 놈들을 밟고 올라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을 꾸기에는 충분한 시간. 그 희망이 지옥을 만드는 재료였다.
이 지옥에는 의, 식, 주 그 어떤 것도 제공되지 않는다. 굴 안으로 공급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 굴러 들어오는 신참 죄수의 소지품 정도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입구 주변에 몰려 있는 광기 어린 죄수들 덕분에 가까이 가기 힘들었다.
죽음도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굶주림과 갈망에 미쳐 생귀신이 되어 버린 죄수들.
그들을 뚫고 1층까지 가는 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라, 아직 정신이 멀쩡한 죄수들은 그것이 멍청한 짓임을 알면서도 미궁 깊숙이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미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은 그 입구일 겁니다. 끝없이 몰려들거든요.”
람카차로가 기운찬 목소리로 설명한다. 가람이 준 빵과 마실 것으로 배를 채운 덕분에 한결 살아난 모습이다. 가람은 묵묵히 손등을 바라보며 방향을 지시했다.
람카차로는 가람이 가리킨 방향을 가늠하다가 그 길은 막혀 있다며 왼쪽 굴로 안내했다. 조금 돌아 나가자 좁고 조잡한 굴이 나타났다.
가람은 벽에 손을 짚고 균형을 잡으며 질문했다.
“한 달에 한 번만 죄수가 들어오면 그거로는 식료품 조달이 제대로 안 될 텐데요.”
“당연하지요. 어림도 없습니다.”
“람카차로도 사람을 먹었나요?”
좁은 굴을 들어서던 가람이 질문하자 람카차로가 갑자기 입을 딱 다물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혀로 느릿하게 말을 빚어냈다.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비난하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다. 탐색을 위한 것이었다.
만약 람카차로가 나는 그런 것 입에 대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면 오히려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생불도 아닌데 쫄쫄 굶으며 사람이 어떻게 사나.
“그래도 되도록 뱀이나 전갈을 먹으면서 버텼습니다. 아무리 여기라고 해도, 아주 먹을 것이 없지는 않거든요.”
람카차로는 전갈 한 마리로 일주일을 버틴 적도 있다며 자랑했다. 가람은 그 빈곤한 무용담을 들어 주다가 문득 조금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하지만 멈춰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소리가 좀 더 명확해졌다. 말도 안 되지만, 설마.
“이거 설마 물소리는 아니겠죠?”
지하수 같은 것이 근처에 흐르는 걸까. 가람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소리의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집중했다.
그러나 어디서 나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굴이라는 지리적 특성은 공간 감각을 쉽게 마비시킨다.
다니다 보면 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실제로는 아래로 나오게 되는 경우도 있고, 왼쪽으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에 도착하는 등 완전히 엉망이었다.
특히 소리 같은 경우는 굴의 곳곳을 타고 회절하기 때문에 더욱 심했다.
“물소리가 맞을 겁니다.”
시냇물 같은 경쾌하게 졸졸 흐르는 소리는 바로 지척에서 흐르는 듯 선명했다. 그러나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물이 나올 만한 곳은 없었다.
람카차로는 어리둥절해하는 가람을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 물소리를 듣고 아래로 계속 내려간 죄수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물론 저도요. 물소리는 들리는데 마실 수 없으니 미칠 것 같았지요. 저도 처음에는 정말로 미칠 것 같아서 모래를 퍼먹기도 했습니다. 무작정 소리가 나는 쪽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했고요. 결국 지쳐서 넋이 빠져 있는데, 갑자기 소리가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몇 주 후에 다른 곳에서 물소리를 발견했습니다.”
“물이 이동한다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그냥 환청이라고 생각했지만, 집단으로 환청을 듣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요.”
람카차로는 웃고 있었지만 이를 갈고 있는 것 같았다. 살이 빠져 홀쭉해진 입술이 송곳니를 드러내게 한다. 해골의 형상이 드러날 정도로 비쩍 마른 얼굴에는 증오와 원망이 덧칠되어 있었다.
시름의 손톱이 할퀸 흔적은 주름이 되어 남았다. 가볍게 말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정말로 악마의 속삭임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물을 쫓아 달렸습니다. 피나 구정물, 소변 따위도 없어서 못 마시는 통에 들리는 물소리라니. 얼마나 간절했는지. 차라리 듣지 않으면 편해질까 싶어 귀를 잘라 버리고 싶었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람카차로의 목소리 뒤로 물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진다. 가람은 웨이크가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것은 물 따위가 아니었다.
가람은 묵묵히 걷는 길을 선택했다.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머리를 조심하며 걸어야 했기에 신경 쓸 일은 한두 군데가 아니다. 물소리 따위에 정신을 팔 여유 따위 없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물소리는 계속해서 커지고 있었다. 어딘가 아주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점점 귀에 또렷하게 박혀 든다.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가람뿐만이 아니었다. 람카차로 또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세 사람은 침묵을 지키며 신중하게 걷기 시작했다.
굴에서 선두에 선 것은 람카차로이다. 그 바로 뒤를 가람이 따르고, 웨이크가 마지막으로 뒤를 가로막는다. 두 사람은 등짐을 메고 총칼을 빼 들고 있다.
그러나 쇠붙이는 그리 큰 용기가 되어 주지 못했다. 가람은 땀 때문에 미끄러워진 손바닥이 총을 놓치지 않도록 힘을 줘야 했다.
앞서 걷던 람카차로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가람은 가볍게 람카차로의 등을 밀며 재촉했지만 람카차로는 굴 앞을 막고 넋이 나간 것처럼 서 있을 뿐이다.
물소리는 이제 아주 가까이서 들린다. 가람은 그가 폭포라도 발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람카차로를 밀치고 굴을 나섰다.
갑자기 눈앞이 탁 트였다. 별다른 광원은 없어 희미하게 보였지만 아득하게 펼쳐진 어둠이 공간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드러난 것은 거대한 공동이었다. 마치 커다란 국자로 푹 퍼낸 것 같은 낭떠러지와 제법 매끈하게 마감된 것 같은 천장이 어슴푸레하게 보였다.
“이건…….”
뒤이어 굴을 빠져나온 웨이크가 설명을 요청했다. 그러나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상태로 더 가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가람은 아주 오랜만에 손전등을 켰다.
그동안은 불을 켜면 자신도 잘 보이지만 죄수들도 그녀가 잘 보였기 때문에 은신을 위해 전등을 켜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빛 없이 가다가는 뻥 뚫린 낭떠러지로 발을 내디딜 판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손전등에서 터져 나온 밝은 빛에 가람은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신음했다.
빛줄기를 멀리 보내어 매끈하게 다듬어진 천장을 살펴보던 가람은 반대쪽에서도 굴과 통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몇 개의 구멍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빛을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