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04화 (104/256)

104화

“저거 설마, 다 시체는 아니겠죠?”

물소리가 들리기에 지하수 물줄기 정도를 생각했던 가람은 충격적인 광경에 말을 잊었다.

몇 백, 몇 십 년 전부터 쌓여 왔는지 모를 사람으로 이루어진 산이 그 아래에 있었다. 바삭하리만치 메마른 시체의 산이었다.

“아직 물소리가 납니다. 바로 근처에, 물소리가 나요. 물소리…….”

람카차로가 갑자기 넋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가람은 손전등으로 람카차로를 비추었다. 눈이 부시지도 않는지 람카차로는 찡그림도 없이 멍하니 시체의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람은 처음으로 람카차로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비쩍 말랐다는 사실은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눈가의 커다란 초승달 같은 흉터는 의외였다.

얼굴의 거의 3할을 차지하는 큰 상처이니 다쳤을 당시에는 정말 심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괴한들과 다투다가 다쳤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주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는 람카차로가 가람은 걱정스러웠다.

“이봐요, 람카차로? 괜찮아요?”

가람이 말을 걸자 람카차로가 갑자기 내달리려고 했다. 그러나 웨이크가 슬쩍 발을 걸어 넘어뜨린 덕분에 호되게 구르기만 했다.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묶여 있는 덕분에 여의치 않다. 그는 넘어진 그 상태로 꿈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가람은 그가 왜 그러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것은 둘째 치고, 패스가 이 근처에 있었다.

람카차로를 내버려 두고 패스를 쫓으려는데, 그가 불쑥 소리쳤다.

“물소리, 물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들리긴 해요. 그런데 갑자기 왜?”

“드디어 물을 찾을 수 있는데! 나를 일으켜 주십시오. 나는 물을 찾아야 해!”

람카차로가 핏발이 불거진 눈으로 고함친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물소리가 멈췄다.

가람은 홀리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멀쩡히 있던 물줄기가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웨이크가 갑자기 어느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저쪽을 비추어 보십시오.”

웨이크가 가리킨 곳은 천장의 약간 아래쪽이었다. 전등을 비추자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웨이크는 더욱 자세히 살펴볼 것을 요구했다. 그랬더니 과연,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작은 검은 새였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참새만 한 크기인 듯싶었다. 천장 아래의 삐죽 나온 돌을 횃대 삼아 그곳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새처럼 보이긴 하지만, 저것이 정말 새인가 싶어 가람이 갸우뚱하는데 갑자기 새가 울기 시작했다.

몹시 특이한 울음소리였다. 여느 새들과는 완전히 다른 울음소리. 그러나 익숙한 소리.

가람이 이 공동까지 오면서 굴속에서 질리도록 듣고 들었던 물소리였다. 어떤 종류의 새는 사람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자연물의 소리까지 흉내 내곤 한다.

물소리는 바로 이 새가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물소리를 쫓아 마침내 도착했지만 물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물소리는 새가 꾸며 낸 소리였으니까.

죄수들은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어 땅을 파고, 또 파고, 마침내 지쳐 죽을 때까지 땅을 파 그 속에 스스로를 묻었던 것이다.

실제로 아래에는 크고 작은 구덩이가 즐비했다. 물을 향한 집착과 희망이 죄수들을 죽인 셈이었다.

새는 몇 번 소리 내어 울더니 푸드득 아래로 내려와 죄수들을 쪼아 먹기 시작했다. 그것이 새의 생존 수단이었다.

울어서, 죄수를 꼬여 내고 결국 죽은 죄수는 새의 밥이 된다. 람카차로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멍하니 새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람은 발밑을 조심하며 낭떠러지에 가까이 다가가 손등을 살피고 그대로 새를 겨냥해 총탄을 날렸다.

한 발의 총성은 작은 새의 몸을 그대로 찢어발겼다. 그 자리에서 작은 고깃덩이로 변해 버린 새를 향해 가람이 턱짓했다.

“저걸 주워 와야겠어요. 저쪽으로 가서 끈을 가져올 테니 도와줘요.”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가람은 웨이크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죄수들은 더 이상 물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다. 환청을 쫓는 죄수도, 실체 없는 물에 절망하는 죄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죄수들의 작은 거짓 행복 또한 없을 것이다.

그들이 어느 쪽을 더 기꺼워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람이 죄수들이라면, 거짓이라도 작은 행복이 있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그 끝나지 않을 거짓의 고리를 언젠가 부수어 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거짓임이 드러나기 전에.

“잠깐, 역시 제가 내려갈게요.”

준비를 마치고 웨이크가 내려가기 직전 가람이 그를 붙잡았다. 늘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 일이 생기곤 했다.

물론 가람 자신보다 강한 웨이크이니 별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게다가 자신이 위쪽에서 총으로 엄호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혹시나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당연히 웨이크 또한 같은 생각이라, 짧은 실랑이가 있었다.

“위험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위험하니까 제가 직접 가야죠. 용건이 있는 건 저인걸요.”

웨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바꾸었다.

“별로 위험하지 않아 보이니 그냥 제가 가겠습니다.”

“그럼 제가 갈게요. 어차피 위험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리고 방금 생각난 건데, 새가 죽었으니 웨이크가 패스를 갖고 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자신의 언변이 참새만도 못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며 웨이크는 뮐러의 존재가 몹시 절실해졌다.

그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손쉽게 가람을 설득했을 텐데. 하지만 패스를 가져올 수 없을 거라는 말에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웨이크가 미간을 모으고 있자 가람이 웃으며 어깨를 두드린다.

“걱정 말아요. 그냥, 내가 웨이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끈을 놓치면 저 시체 구덩이에서 2일이나 있어야 하잖아요. 끈을 다시 가져올 때까지. 그게 싫을 뿐이에요. 어서 찾고, 빨리 나가야죠.”

가람은 떨떠름한 표정의 웨이크에게 끈을 쥐여 주고 먼저 몸을 움직였다.

일단 가람이 움직이자 웨이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순순히 가람의 몸에 끈을 묶고 고정한 뒤 내려보냈다.

그나마 등과 어깨를 이어 묶었기 때문에 끈이 심하게 조이지 않아 통증이 없어 다행이었다.

낭떠러지 아래는 푹 파인 모래 구덩이라서 잡을 만한 것이 없었기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은 자신의 허리에 묶은 끈을 붙잡은 웨이크의 완력 자체에 의지했다.

만약 가람이 끈을 내려 주는 역할을 맡았다면 일이 좀 더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막상 내려가자 푹 썩은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 새가 죽은 위치의 바로 지척에 끈을 내린 덕분에 멀리 걸어갈 필요는 없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쉽게 걸음을 뗄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가람은 몇 미터 내려왔을 뿐인데 확 바뀐 풍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반쯤 썩은 사람과 반쯤 썩은 낡은 옷가지가 뒤엉켜 눅진하게 진액을 흘려 대고 있다.

그것에서 풍기는 냄새는 코가 없어도 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지독해서, 실제로 아주 잠깐 머물렀을 뿐인데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가람, 시독 때문에 오래 있으면 좋지 않습니다. 빨리 찾으십시오.”

멀리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가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움직였다. 걸음을 내딛자 썩어 물러진 팔다리 따위를 밟고 발이 푹 들어간다.

가람의 발자국을 따라 진액이 고여 갔다. 한 걸음씩 뗄 때마다 소름이, 솜털이, 머리카락과 전신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그러나 삐걱대는 동작으로 가람은 그 상황 속에서도 새를 향해 걸음을 옮겨 갔다.

발밑에 산재한 팔다리들을 보고 있자니 가람 자신의 몸에도 팔 두어 개 정도는 더 돋아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름이 너무 심해 평소 몸의 감각을 잃어버릴 지경이다. 어금니를 너무 악물어서 두통이 일었다.

아니, 이 두통은 냄새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지독하다.

시체 위로 거무스름하고 샛노란 깃털이 흩어져 있다. 그 사이, 작은 고깃덩이 틈으로 패스가 보였다.

작디작은 살덩이는 바스러진 뼈와 한데 뭉쳐 있다. 아주 작은 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별로 관심이 없다.

가람은 한 손으로는 몸을 지탱하는 끈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 고깃조각을 집어 들어 패스를 흡수했다.

패스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려던 가람은 순간 이 장소의 고약한 냄새도 잊을 만큼 놀라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가람의 발목을 움켜쥔 때문이었다.

시체 더미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가람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잡힌 부분부터 바늘 같은 독이 온몸을 타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가람은 끔찍한 상황에 비명을 지르는 대신 그대로 힘주어 발을 놀려 그 손을 찍어 눌렀다.

푹 밟힌 손은 몇 번 바르작거리다가 가람이 다시 아득아득 소리가 나도록 푹푹 밟자 곧 뭉그러진 살덩이 사이로 파묻혔다.

뭐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다. 솔직히, 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끔찍한 시체 더미 속에 사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거나 하는 상상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죽은 시체 사이로 가스라도 찼거나, 아니면 자신이 걸음을 옮기느라 파묻힌 어딘가를 밟아 버려서 저런 팔이 불쑥 올라왔을지도.

“올려 보내요!”

그렇게 외친 가람은 천천히 멀어지는 발밑을 바라보다가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시선은 손등을 향했다.

새의 몸 안에 있던 패스는 30패스로, 가람이 먼저 얻었던 70패스와 합쳐져 비로소 100패스가 되었다.

손등의 문양이 삐죽삐죽한 모양으로 되돌아가자 가람은 마치 오래 숨을 참았던 사람처럼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며 갑자기 급속도로 피로가 몰려왔지만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지하 미궁을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밖의 간수를 매수해 두었기 때문에 별 걱정은 하지 않았다.

“간수를 매수해 두었단 말입니까? 정말입니까?”

시체가 가득한 공동을 벗어나 위쪽으로 향하는 굴을 걸으며 람카차로는 천천히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넋을 잃었던 것을 몹시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얼핏 수줍어하는 듯한 목소리 덕분에 가람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 수 있었다.

“정말이에요.”

“하지만 돈이 정말 많이 들었을 텐데.”

“돈은 꽤 있거든요.”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달려드는 죄수를 가람이 발로 차 넘겼다. 입구 근처에 있는 죄수들에 비해 정신 상태는 양호한 것 같았지만 하는 행동은 들짐승만도 못하다.

굳이 총을 쓸 것도 없이 손에 든 메이스로 후려치는 것만으로 손쉽게 기절시킬 수 있었다. 피가 튀는 것 같은 소리가 났지만 어두운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요컨대, 가람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를 저질러도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라면 마음의 가책은 훨씬 줄어든다.

실제로 가람은 이제 거의 밥 먹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게 죄수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튈 때마다 람카차로는 묶인 손을 무릎 사이에 두고 한껏 웅크리며 몸을 사렸다. 잘못 휘말리면 상처를 입을 수 있다. 이런 곳에서 상처는 곧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다.

“저, 가람.”

한 차례 죄수 떼가 지나간 후 웨이크가 가람을 불렀다. 그가 먼저 가람을 부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가람은 걷던 걸음까지 멈추고 웨이크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굴속에서 웨이크의 얼굴 윤곽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닙니다. 다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뭘 딱딱하게 그래요. 웨이크의 말이라면 최대한 들어주도록 노력할게요.”

어느새 앞에 가던 람카차로도 되돌아와 귀를 기울이고 있다. 웨이크의 시선은 그 람카차로를 향해 있었다.

“나갈 때 저 사람도 함께 나갔으면 합니다.”

며칠간 람카차로와 함께 다녀 본 결과 람카차로는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어 보였다.

식량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축내어도 되는가 하며 눈치를 살피는 면이라거나 다른 죄수들을 동정하는 인간적인 모습, 그리고 가람에게 자신도 함께 내보내 달라 요구를 하지 않는 염치 있는 모습이 제법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웨이크의 말을 들은 람카차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있었다.

가람이 고민하며 비스듬히 턱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람카차로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와들와들 떨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목소리로 애원했다.

“염치없지만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제가 드릴 것은 없고, 나간다고 해도 도망자의 생활이라 은혜 갚겠다는 말도 쉽게 못 드리겠지만 밖으로 나갈 때까지 몸을 다 바쳐 안내하겠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간 후에는 어쩌시려고요.”

람카차로가 자신과 간수 간의 거래를 발설할까 가람은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한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람카차로가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오히려 간수에게 가람의 비리를 발설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정말 두고 가야 한다면 그가 앙갚음하지 못하도록 나가기 직전에, 손을 써 두어야 할 것이다.

“사실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누를 끼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딸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여기서 반년 뒤 살아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지금까지는 어떻게 버텼지만 더 이상은 힘들지도 모르고, 딸이 살아 있는지도 궁금해서…….”

웨이크도 딸처럼 보살피는 여동생이 있다. 그 점이 그의 동정을 끌었던 것일까. 가람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이렇게 통성명까지 한 사람을 이 지옥 같은 굴에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설사 그가 치러야 할 죗값이더라도, 가람이 돈을 써서 이곳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에게는 그것에 대해 논할 자격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좋아요. 일단 나갈 때는 같이 나가요. 단, 간수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했을 때만이에요.”

람카차로의 고개가 번쩍 들린다. 그대로 뽑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그가 흘린 눈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며 희미하게 반짝인다.

가람은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에 흐른 눈물 자국을 발견했다. 그래, 한 명 정도는 괜찮겠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정말, 어떻게 갚아야 할지. 감사합니다.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뜨거운 기운이 왈칵 밀려 나온 듯 람카차로는 다시 울었다. 가람이 간수의 허락이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이미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 결정 나기라도 한 듯 기뻐했다.

캄캄한 우물 속에 드리운 한 줄기의 빛. 희망이라고 흔히 부르는 그것이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 후로 람카차로는 희망이 사람에게 끼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몸소 보여 주었다.

그를 잘 관찰한 다음 논문을 쓰면 큰 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변화는 극적이어서, 그에게 감자 장수가 아니라 광대나 웃음꾼을 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진지하게 진로에 대해 제안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쨌거나 극심한 피로에 즐거운 기운이 끼얹어진 것은 좋은 일이었다.

행운은 겹치는 것인지, 원래대로라면 입구 주변에 가득해야 할 죄수 떼도 평소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숫자만이 남아 있었다.

제정신인 사람들도 몇몇 섞여 있는지 겁도 없이 달려드는 일이 없어 진입하기 편했다.

비쩍 마른 이들에 비해 비교적 단단한 체구의 웨이크가 스윽 나서서 검을 몇 번 휘둘러 주는 것만으로 길은 쉽게 뚫려서, 거의 한달음에 가람과 웨이크는 입구까지 이르게 되었다.

길을 잘 알고 있는 람카차로가 아니었다면 몇 주 정도는 헤매게 되었겠지만 그가 있는 덕분에 시간은 3일 하고도 한나절로 단축되었다.

그는 정말로 성심성의껏 안내를 도왔던 것이다. 거의 제육감이라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의 생존 본능이 가람이 준 기회를 붙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잠재력을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가람은 매우 빠르게 들어올 때 보았던 둥근 문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암호가 두 번 두드리고 다시 세 번, 두 번이었죠?”

“예. 그러면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는 감옥지기가 끌어 올려 줄 거라고 했습니다.”

저 멀리 위에 붙어 있는 문을 두드리려면 뭔가 던져야 할 텐데, 애석하게도 바닥에는 돌멩이가 없다.

가람이 짐 꾸러미라도 풀어 뭐라도 찾아보려는데 웨이크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손을 집어 들었다.

살점의 대부분은 뜯어 먹힌 데다 약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이 없었지만 그래도 손이었다.

“그거 던지게요?”

가람이 떨떠름하게 질문한다. 이 안에 있는 동안 인간들의 잔해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만지기는 싫다.

그러나 웨이크는 가람보다 더 감각이 무뎌졌는지 저가 손을 집어 들고도 그것의 이상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예.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뇨.”

가람은 람카차로도 똑같이 아무렇지 않아 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절실하게 뮐러가 그리워졌다. 말은 안 했지만 웨이크 또한 그녀와 마찬가지라는 게 재미있는 점이다.

웨이크는 손과 갈비뼈 파편 따위를 몇 개 더 찾아낸 뒤 천천히 뚜껑을 향해 집어 던졌다.

뚜껑에 닿게는 할 수 있어도 소리가 나도록 두드리게 할 정도의 팔 힘은 없었던 가람은 멀찌감치 서서 그 모습을 구경했다.

한 번, 두 번, 다시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또다시 한 번, 두 번.

약속된 노크가 끝나자 가람과 웨이크는 잔뜩 긴장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가람보다 웨이크가 훨씬 더 긴장했다. 가람은 여차하면 패스를 쓰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웨이크는 오직 이 방법이 전부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패스가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으리라 생각했다.

노크는 효과가 있었다.

문이 천천히 밀려난다. 둥글게 맞물린 뚜껑이 슬쩍 옆으로 밀려나더니 무겁게 끌리며 틈을 벌려 가기 시작했다.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아 시간은 야심한 밤인 듯했다. 천천히 움직이던 문은 마침내 절반 정도로 열렸다.

절반의 틈으로 무언가가 보인다. 가람은 그것이 팔쿰이거나, 팔쿰의 동료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환희하던 가람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곧 깨달았다.

문이 다시 닫히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