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06화 (106/256)

106화

람카차로는 쭈뼛거리며 조심스레 가람을 안내했다. 아주 늦은 밤이라 골목에는 사람이 없었다. 람카차로가 향하는 곳은 하층민들의 주거 밀집 지역이었다.

집들은 작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데다 언뜻 보이는 세간은 몹시 허름하고 빈약했다. 드문드문 벽의 일부분이 뜯어져 나가거나 문이 아주 낡았는데도 고칠 형편이 되지 못해 그대로 방치해 둔 것 같은 집들도 많았다.

“여깁니다.”

마침내 작은 집 앞에 멈춰 선 람카차로는 매우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가람은 묵묵히 서서 람카차로가 낡은 문을 떨리는 손으로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낡은 집이긴 하지만 버려진 집 같지는 않다. 누군가 살고 있는 기척이 느껴졌다. 별다른 잠금장치도 없는 문은 조금 세게 당기는 것만으로 거친 소리와 함께 열렸다.

“헤람?”

딸의 이름인 듯싶었다. 가람은 슬슬 의심을 접고 상봉의 감동적인 순간을 축하할 말이나 표정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문 앞에서 휙 둘러본 거실은 돌 탁자와 돌 의자 두 개, 선반과 그 위에 모래를 구워 만든 그릇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덕분에 비스듬하게 비친 빛이 있어 괜찮았다.

거실에서 보이는 방문은 단 하나였다. 람카차로는 현관문을 열 때보다 더 긴장해서 조심스레 방문을 잡아당겼다. 방 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숨소리가 있었다.

“헤람? 아빠야. 헤람이니?”

가람은 강도로 오인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손전등을 켰다. 그 빛에 마침내 침대에 누운 사람이 드러나자 람카차로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가람은 다른 의미로 눈물을 쏟고 싶었다. 람카차로가 소중하게 어루만지는 그의 딸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러나 눈꺼풀의 한쪽이 잘려 나가 있다. 입술을 통째로 도려내어 입 부분은 아예 구멍이 뻥하니 뚫려 있었다.

다물 수 없어 메마른 입 안에는 치아가 하나도 없었다. 보통 참혹한 짓을 당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헤람, 살아 있었구나! 보탄덴이 너를 돌봐 주겠다는 약속을 지켰어!”

람카차로의 딸은 간신히 살아 있긴 했다. 비록 신체가 7할 정도밖에 없었지만 살아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마침내 딸 쪽에서도 반쪽짜리 눈으로 람카차로를 확인하고 눈물을 쏟아 냈다.

커다란 눈에 눈물이 고일 새도 없이 후두둑 떨어진다. 말을 할 수 없는 입에서는 기괴한 끅끅거림이 흘러나왔다. 온몸을 가늘게 떨며 그녀는 격렬하게 아버지를 반가워했다.

“헤람! 헤람!”

람카차로는 딸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어루만졌다. 딸도 아버지를 어루만지고 싶었는지 필사적으로 팔을 꿈틀거렸다.

람카차로는 젖은 눈으로 가람을 돌아보더니 머리를 찧으며 거듭 감사 인사를 올렸다.

덕분에 오히려 의심했던 것이 면구스러워진 가람은 마법사에게 치료받게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제안했지만 이미 다 아문 상처라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럼 이제 어떡하실 생각이에요?”

“여기를 떠날 생각입니다.”

손전등 불빛 속에서 람카차로의 표정은 결연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이다. 남아 있다가는 다시 미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가람은 람카차로의 상처 많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가의 초승달 모양의 상처, 처음 볼 때는 그 상처가 참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 딸의 상처를 보니 아무것도 아니어 보였다.

“딸은 어쩌고요.”

“날이 밝기 전에 짐을 챙겨 딸을 수레에 싣고 나갈 생각입니다. 다행히 미르드는 오가는 사람을 확인하지는 않으니, 다른 마을에 가서 물건을 보충하고 멀리 떠나야지요.”

그렇게 말한 람카차로는 곧바로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감자를 실었던 수레인지 커다란 수레를 가져와서 딸을 조심스레 눕히고 이것저것 쓸모 있을 만한 세간을 챙겼다.

그 와중에 딸을 돌보았던 누군가에게 짧은 편지를 써 서랍 속에 넣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워낙 짐이 단출해 준비는 순식간에 끝나 버렸고, 람카차로는 집에서 갈아입은 품이 넓은 로브의 후드를 푹 눌러쓰고 딸을 실은 수레를 잡아끌었다.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제 딸과 함께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조금 밝아진 람카차로가 인사했다. 가람은 인사를 받으며 그를 배웅했다. 벌써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

날이 밝게 되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서둘러야 했기에 작별 인사는 짧았다.

“이제 저희도 갈까요? 두 사람 다 좀 씻어야겠습니다.”

“제 생각도 그래요.”

뮐러의 말에 가람이 동의했다. 두 사람은 정말로 오랜만에 휘황찬란한 황금 모래 여관으로 돌아왔다.

객실에 딸린 하인들은 지저분한 가람의 몰골에 기함을 하며 서둘러 씻기려고 들었다. 값비싼 객실의 벨벳이나 침구에 냄새가 스미기라도 할까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아무튼 그들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덕분에 가람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겨졌다. 온몸에 장미유를 붓고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져지기까지 했다.

호사스럽기 짝이 없는 대접이라, 가람은 씻김 받는 내내 꿈속에 머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지하 미궁과 이곳이 한 도시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비현실적이기까지 했다.

그렇게 씻고 나오니 완전히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새 옷까지 걸치고 거실에 해당하는 방으로 오니 기다란 좌식 식탁 위로 한껏 음식이 차려져 있다.

먼저 온 뮐러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고급스러운 카펫 위에서 뒹굴거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지 얼마나 됐죠?”

자리에 앉은 가람이 앞에 놓인 견과류 경단 하나를 입에 집어넣으며 질문했다.

“거의 20일 정도 되었습니다.”

“그것밖에 안 됐어요? 한 한 달은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저는 충분히 길다고 생각합니다.”

뮐러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은 갑자기 그의 마음고생이 와닿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해졌다.

“웨이크는 안 나오나요?”

“아까 보니 완전히 기절해서 자고 있던데요.”

가람은 으쓱이는 뮐러를 바라보다가 한쪽에 놓인 은주전자를 집어 들었다. 곁에 놓인 도자기에 따르자 맑은 호박빛의 술이 가득 담겼다.

가람은 그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리고, 다시 잔을 채웠다. 그리고 거푸 다섯 잔 정도를 마셨을 때 갑자기 가람이 조용해진 것에 이상함을 느낀 뮐러가 고개를 들었다.

“……뭐 합니까?”

“술 마셔요.”

“안 피곤합니까? 일찍 자 두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 뭘 마시고 있는지는 압니까?”

“씻고 나니까 상쾌해서 그런가. 잠이 잘 안 오네요.”

웨이크였다면 가볍게 납득하고 ‘전 졸리니 자러 가겠습니다.’ 하고 말했겠지만 뮐러는 단숨에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았다. 그는 읽던 책을 덮고 가람의 앞에 마주 앉았다.

“이거 엄청나게 독한 술인데.”

“아, 그래요?”

대답은 했지만 가람은 크게 술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삼킬 때마다 목구멍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며 화한 느낌이 피어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배 속이 뜨끈해지는 것이 기분이 좀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새 풀린 얼굴로 비실비실 웃는 가람을 뮐러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꼭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시네.”

“어, 잘못 짚었나요? 독한 술을 퍼먹는 사람한텐 효과가 좋은 말인데.”

다음 잔을 따르던 가람은 벙찐 표정으로 뮐러를 바라보다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뮐러는 따라서 미소 짓다가 제 앞에도 술잔을 놓고 술을 따랐다. 가람이 먹고 있는 것과 같은 독주는 아니고, 도수가 낮은 과실주였다.

“그냥, 언제부터 이렇게 되어 버렸나 해서요. 전 그냥― 주말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적당한 걱정거리도 가지고 있고,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연애도 꿈꾸던 평범한 여자였는데. 생각해 보면 참 재미없는 사람이었긴 한데, 그래도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되다니요?”

“이 악물고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니 살리니 생각하는 그런 거요. 제가 이쪽으로 오기 전에는 벌레 한 마리 못 잡던 사람이라고 하면 믿으실까요?”

“제가 지금 가람을 만났다면 믿지 못했겠지만, 처음 가람을 만났던 때를 생각하면, 예. 믿깁니다.”

“처음이라.”

가람의 시선이 몽롱해졌다. 어느새 아주 옛날 같다. 처음 이곳에 떨어져서, 트리거와 고기나무 열매를 구워 먹을 때까지만 해도 어디 동화 속에라도 떨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지.

“우리 셋도 참 오래됐어요. 거의 1년 됐나요?”

“이제 조금 지났습니다.”

“뮐러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부드럽게 웃고 있던 뮐러의 얼굴이 멈칫 굳어졌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술로 입술을 축였다.

“당연히 가고 싶지요. 부모님도 보고 싶고, 어릴 때 뛰놀던 녀석들이 어떻게 됐는가도 궁금하고, 잠깐 좋아했던 로라는 결혼했나 궁금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사실 제가 제법 출세했지 않습니까? 시골 마을에 이만한 마법사가 나오면 굉장히 출세한 겁니다. 게다가 집 떠난 지 오래되니 부모님이 가장 보고 싶군요. 잔소리도 그립고요.”

“맞아요. 잔소리가 그립네요.”

“가람도 잔소리를 많이 들었습니까?”

“물론이죠. 일이 없을 때 소파에서 뒹굴면서 과자를 먹고 있으면 가루 떨어진다고 등짝에 불이 나도록 맞기도 했어요. 방에서 게으름 피우고 있으면 엄마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저를 호떡 뒤집듯이 뒤집기도 했고요. 이렇게 지저분하게 살면 병 걸린다고 카랑카랑 말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한걸요.”

“많이 게을렀나 봅니다.”

“다른 날엔 늘 일을 했으니까 피곤해서 쉬었을 뿐이에요. 나와서 저녁밥 만드는 거라도 도우라고 했었는데.”

“같이 요리를 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 술잔이 비워져 간다. 가람은 은주전자 하나를 다 비우자 다른 술병을 끌어다가 따랐다. 이번에는 새빨간 색의 투명한 술이다. 루비처럼 붉었다.

“그리워요.”

술잔을 집어 들고 빙글빙글 돌리던 가람이 불쑥 말한다.

“집이 말입니까?”

“그냥, 다요. 총을 쏠 필요도 없고, 이런 고민 같은 것도 없고, 감옥에도 안 가도 되고, 낯선 것 하나 없는 늘 봐 왔던 그곳에서 평화롭게 지내던 시절이 그리워요. 가족도 그립고, 그냥 그때의 삶 자체가 전부 그립네요. 그때의 제가 그리워요.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때의, 그 시절이.”

“이런 사람은 뭡니까?”

가람의 술잔이 비워진다.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지만 그래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아니, 멈출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사실 이렇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저는…….”

가람은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백했다.

“미궁 속에서 사람을 죽였어요.”

뮐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람은 잠시 자신의 고백을 각인시키듯이 가만히 있다가 덧붙였다.

“아무렇지도 않게요.”

“어쩔 수 없었잖습니까.”

“그래요. 맞아요. 그렇긴 한데, 아니. 뮐러는 몰라요. 그냥 죽였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그냥, 난 지금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니 안 하니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사실 지금도 상대가 범죄자였던 데다 상황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는걸요. 중요한 건 정말로, 그게, 그 일이 이제 저한테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 학살이, 맞아요. 그건 학살이었어요. 아니, 학살도 아니지. 그냥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쐈다고요. 예전이라면 절대로 못 했을 일인데, 나는, 나는…….”

말을 하면 할수록 가람은 그 단어들이 채찍이 되어 자신을 후려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가람의 말이 점점 빨라진다. 채찍질당하는 말처럼 격양되어 말을 쏟아 내던 가람은 급기야 숨을 몰아쉬며 혼란을 뱉어 내었다.

“가람, 진정해요.”

“내가 너무 바뀌었어요. 너무 달라져서…….”

가람은 말을 뚝 끊었다. 숨이 뜨거웠다. 비단 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떨리는 검은 눈동자가 뮐러의 녹색 눈을 마주한다.

가람은 깊이깊이 숨겨 놓았던,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고 그토록 외면하던 사실을 고백했다.

“무서워요.”

뮐러는 가람이 울고 있지 않아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보다 가람이 훨씬 고운 환경에서 자랐음에 조금 놀랐다.

그토록 서슴없이 행동하기에 어느 정도 이곳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것일 거라고 지레짐작했었다. 뮐러는 손을 뻗어 가람의 머리에 올려놓았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무섭습니까?”

가람은 사실 지금까지 뮐러가 자신보다 네 살 많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부드럽게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그 나이 차가 확 느껴졌다.

“맞아요.”

정답이었기에 순순히 인정하자 뮐러는 가람에게 과실주를 따라 주고 독한 술을 치워 버렸다. 그는 최대한 다정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안 좋은 상황에서는 안 좋게 변하기 마련이지요. 이렇게까지 급격한 변화를 처음 겪어 본다면 충격적인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가람, 중요한 건 변했다는 거예요. 나쁜 상황에서 나쁘게 변했다면, 다시 말해 좋은 상황에서는 좋게 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아.”

“너무 안 좋게만 생각하지 말아요. 물론 지금은 현재가 모든 것처럼 느껴질 테지만, 나중에 가람이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간다면 그때는 다시 가람이 그리워하는 시절의 가람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환경에 둘러싸인다면요.”

“좋게도 변할 수 있다고요…….”

“당연하지요. 사람이 계속 나쁘게만 변하면 어떻게 삽니까. 그때가 되면 또 다른 방법이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인데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만으로 가람은 크게 위안이 되었다.

갑자기 모든 고민에 명쾌한 해답이 내려진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변했지만, 예전이라면 자신이 이렇게 변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에도 지금의 자신은 상상도 못 했던 자신이 있을 수도 있겠지.

“고마워요.”

가람이 인사하자 뮐러는 입가를 당겨 웃으며 술잔을 들어 올려 답례했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급격히 술기운이 몰려와 가람은 그대로 자리를 떠나 오랜만에 푹신한 이부자리에 누웠다.

마음도 깨끗, 머리도 상쾌, 독한 술로 속은 좀 쓰렸지만 푹신한 침구에 휩싸여 잠을 청하니 행복해지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오후 늦게까지 깊게 숙면을 취할 예정이었는데, 가람은 작은 소곤거림에 부스스 눈을 떴다.

가늘게 뜬 시야로 하인의 옷이 보인다. 방의 물건들을 다시 채워 주고 정리해 주는 하인들이었다.

도자기에 싱그런 꽃을 꽂아 장식하거나 새로운 실내복, 가운 따위를 배치하고 여기저기를 닦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보통은 정오쯤에 아무도 없을 때 하는데 가람이 자고 있으니 자는 사이 끝내려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가람을 깨운 소리는 하인 둘이 나누는 작은 수다 소리였다.

“정말 어떻게 그런 일이? 범인은 잡혔대?”

“용의자도 제대로 없다지 뭐야.”

가람은 반쯤 잠에 든 상태로 비몽사몽 대화를 들었다. 무슨 범죄에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다. 어차피 이 도시에서 범죄란 드문 일도 아니다. 별것 아닌 가십인가.

“밤중에 그렇게 사라지다니. 움직일 수도 없는 아이라며? 보살펴 주던 사람들이 아주 발칵 뒤집혔대. 이름이, 레함?”

“헤람.”

가람의 정신이 설핏 깨어났다. 들어 본 이름이다. 아니, 정확히는 아는 이름이다.

가람은 이야기 속의 범죄가 무엇인지 단숨에 깨달았다. 용의자도 제대로 없다는 이야기는, 람카차로는 도시를 잘 빠져나갔다는 건가.

헤람이라는 그의 딸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보살펴 주던 사람들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 빈약한 세간과 문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환경을 생각하면 아버지와 있는 것이 훨씬 나을 테지.

가람은 흐뭇한 마음으로 푹신한 이불을 껴안고 돌아누웠다. 이불 속에 든 것이 짚이 아닌 천연 솜이라 감촉이 매우 좋았다.

그나저나, 범죄자가 엮였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직 람카차로가 작성해 서랍에 넣어 둔 편지는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다.

“안됐어. 괴한에게 양친도 잃고, 심지어…….”

다시 잠을 청하던 가람은 문장 사이에 끼어 있는 한 단어에 잠이 확 달아났다. 양친을 잃어?

“잠깐, 양친을 잃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