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웨이크와 뮐러를 부르려던 가람은 말 세 마리를 끌고 오기가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자신이 다가가기로 했다.
오랜만에 가람을 본 뽀삐가 고양이라도 된 것처럼 머리통을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그 콧잔등과 귀 사이를 긁어 주며 가람은 날이 서 있는 웨이크를 타일렀다.
“그만해요. 뮐러도 장난이었을 거예요.”
“그럼요. 당연히 장난이지요.”
뮐러가 말을 받으며 히죽 웃어 보인다. 고지식한 사냥꾼을 놀리는 것이 재미나 죽겠다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웨이크는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가람은 뮐러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웨이크가 몹시 안타까웠지만, 사실을 이야기해 주지 않기로 했다.
“일단 좀 둘러봐요. 말들은 여관에 안 맡겨도 될 것 같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여관 구할 수 있을까.”
뽀삐의 고삐를 느슨하게 쥔 가람이 역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걸으며 걱정했다. 멀리서 보기에도 마을은 붐비고 있었다.
이 마을에 여관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붐비는 여행객을 모두 거두기는 힘들 것이다.
“이맘때면 팔탐의 집들은 모두 민박을 하지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뭐, 여관은 이미 다 찼을 테지만요.”
“그래요? 그럼 천천히 구해 봐도 되겠군요. 길도 넓어 보이니 뽀삐와 같이 축제를 돌아다녀도 될 것 같아요.”
“그러시죠. 돌아다니면서 민박할 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반보 뒤에서 걷고 있던 뽀삐의 입술이 뒤집어진다. 좋아라 투레질을 하고 흥에 겨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었다.
꼼짝없이 또 마구간 신세인가 싶었는데 이게 웬 떡인가 해서 뽀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지나던 암말 몇 마리가 그런 뽀삐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팔탐은 조금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고 있었는데, 특산물이 치즈라는 것에 어울리게 집들 또한 그런 형태였다.
초록 잔디 여기저기에 놓인 노랗고 둥글넓적한 집은 초원에 치즈가 흩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로 만들어진 것만 아니라면 몽골의 게르처럼 보이기도 했다.
널찍널찍하게 간격을 두고 지어진 둥근 집들 사이로 축제의 물결이 흐른다.
딱히 어디가 시작이고 끝이라고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흩어지고 뭉쳐져 한껏 이 풍요로움을 즐기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있던 자신이 바보 같다 여겨졌다.
“일단, 저기부터 가 볼까요?”
가람이 가리킨 것은 한껏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사람에 가려져 멀리서는 무엇인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장신구를 판매하는 좌판이었다.
유리알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값이 싸면서도 예쁜 것들이 많아 인기가 아주 좋은 듯했다.
“여기, 이쪽은 모두 5실버, 여기는 10실버입니다. 골라요, 골라!”
산업화가 진행되지 않은 이곳은 대량 생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하잘것없는 구리 반지 하나도 10실버를 호가했다. 보석이 박혀 있지 않아도 그러했다.
그러니 유리알로 장식까지 되어 있는 장신구들이 이만한 가격이라면 대단히 저렴한 것이다. 비록 조잡하긴 했지만, 그래도 심플한 맛이 있었다.
“좀 사다가 여동생에게 선물하는 게 어떨까요?”
가람은 나비 모양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다가 웨이크에게 권했다. 웨이크는 그제야 생각이 닿았는지 짧게 깨닫고 곧 장신구에 집중했다. 가람은 만지작거리던 나비 브로치를 그 자리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물건이다. 제대로 씻을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인 처지에 이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얼굴에 분을 바르고 다녔던 시절이 까마득했다. 거친 생활에 피부 또한 꺼칠해졌지만 가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장신구라면 이런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짜 금, 은, 보석으로 만든 것들이 은행에 가득하다.
장신구로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서 갖고 있는 것들이지만,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래, 없어야 하는데.
이 싸구려 장신구에 자꾸 손이 가는 이유가 뭘까. 가람은 유난히 눈에 밟히는 매끈한 머리핀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값싼 물건인데도 필요가 없다 생각하니 손이 가지 않았다. 어차피 구입해 봐야 이런 섬세한 머리핀은 가람의 머리에서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괜한 짐이다.
얇은 몸체에 주석으로 만든 나비와 함께 구리와 청동으로 만든 꽃잎이 섬세하게 장식된 머리핀이었다.
어차피 낄 일도 없고, 가죽옷을 입고 이런 것을 착용하면 어울리지 않아 우스운 꼴이 될 텐데도 가람은 한참 동안 그 머리핀을 만지작거렸다.
그사이 웨이크는 머리핀이며 손목 장식, 겨울옷의 목에 다는 커프스단추까지 좌판을 휩쓸 기세로 잔뜩 쓸어 담았다.
가람은 아직 더 고를 생각으로 보이는 웨이크와 좌판에 집중하고 있는 뮐러를 흘깃 바라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 것 같던 가람이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구입하지 않자 주인의 시선이 점점 따가워졌고, 등 뒤에서 밀어닥치는 사람을 견디기도 힘이 들었던 탓이다.
가람이 뽀삐에게로 돌아가자 장신구를 들여다보던 뮐러가 슬쩍 손을 뻗었다.
어렵지 않게 손에 넣은 장신구는 방금까지 가람이 들여다보던 머리핀이다. 가람이 떠난 자리를 잠시 응시하던 뮐러는 그 머리핀 하나를 챙겼다.
곁눈질로 그 광경을 목격한 웨이크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뮐러는 사실 저런 머리핀을 좋아했던 건가.
눈치가 없어 가슴이 아픈 남자 웨이크. 뮐러는 웨이크가 왜 자신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았다면 기가 찼을 노릇이지만 웨이크의 입이 가볍지 않아 뮐러가 그 이유를 알게 될 일은 없었다.
정작 안타까운 시선을 받아야 할 웨이크는 뮐러의 비밀을 가슴 깊이 묻겠다고 다짐했다. 쓸데없는 다짐이었다.
두 남자가 한껏 장신구를 챙기고 나오니 가람과 말 세 마리가 입 안 가득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다.
몫을 챙겨 놓았다며 내미는 것을 받아 드니 한눈에 보기에도 단 기운이 훅 끼치는 음식이다.
얇게 구운 팬케이크에 딸기와 생과일을 잔뜩 올리고 생크림을 치덕치덕 발라 놓았다. 일종의 크레페 같은 것이었는데, 가람은 이런 음식을 이곳에서 처음 보는지라 몹시 반가웠다.
“아, 그러고 보니.”
크레페를 우물거리던 웨이크가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다. 입가에는 크림이 잔뜩 묻어 있었다. 가람은 그 모습이 축제에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왜요?”
“예전에 뮐러와 가람의 이야기를 편지에 적어서 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그럼 우릴 알겠군요.”
가람이 반가운 기색이다. 뮐러도 흥미를 보였다.
“늘 사냥꾼 사이에서 자라 학자나 마법사를 동경하던 아이인데 뮐러 씨에게 관심을 보이더군요.”
“아, 그래서 뮐러를 그렇게 경계했던 거예요?”
가람이 질문하며 납득한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뮐러는 조금 들뜬 얼굴이다.
“그런, 정말입니까?”
장난이었는데 사정이 그랬다니 뮐러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교차할 필요가 없는 만감이었다.
“아니요.”
웨이크가 뮐러의 설렘을 단숨에 자른다. 반쯤 입을 벌리고 멍해진 뮐러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달은 뮐러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사이에서 가람의 웃음보가 뒤늦게 터졌다. 크레페의 딸기가 다 떨어지도록 가람은 길가에서 배를 잡고 크게 웃었다.
“아, 진짜. 푸― 미안해요. 뮐러가 이렇게 당하는 건 처음 봐서.”
가까스로 웃음을 멈춘 가람이 사과하자 뮐러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 버렸다.
가람은 한바탕 웃었던 여운이 가시지 않는지 밝은 얼굴로 노점상에서 무언가를 하나 또 샀다.
정확히는 열두 개를 샀다. 인원이 인원인지라 한 개 정도로는 양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뽀삐는 크레페를 한 입에 한 개씩 먹어 치웠기 때문에 뽀삐의 몫만 이미 세 개다. 나머지 말들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축제는 풍요로움을 풍경으로 쓴 것 같은 모습이라 한 발짝 뗄 때마다 처음 보는 음식들이 눈과 입을 유혹한다.
이번에 가람이 구입한 것은 새고기로 만든 소시지였다. 돼지와 달리 아주 담백하다. 그 외에 치즈를 끼얹은 과일과 구운 감자 따위가 많았다.
하늘을 가득 메운 헝겊 치즈와 지푸라기 새 다리로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 축제의 주제는 치즈와 새였다.
마을 공동 목장인지 멀리 보이는 초원에는 젖소와 양들이 뒤섞여 풀을 뜯고 있다. 숫자가 아주 많았는데, 덕분에 이렇게나 치즈와 크림 따위가 흔한 모양이었다.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가람이 어느 한 곳에 못 박힌다. 돈 주고도 못 볼 진기한 광경이라, 두 남자도 멈칫했다.
초식성인 주제에 게걸스레 소시지를 먹어 치우던 뽀삐도 멈칫.
일종의 싸움판 같은 노란 단상 주변으로 구경꾼들이 둥그렇게 늘어서 있다. 씨름판 위에는 웃옷을 벗어 던진 남자 둘이 손에 든 것을 서로에게 겨누고 사나운 기세로 대치 중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검투와도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두 남자가 손에 든 물건이 모든 살벌한 기운을 없애 버린다.
두 싸움꾼은 잘 구워진 새 다리를 마치 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꼬나쥐고 있었다.
가람은 자신이 잘못 보았나 해서 몇 번이나 눈을 비볐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나 새의 다리였다.
심지어 맛깔나게 향초 기름까지 바르고, 잘 구워져 노릇노릇하기까지 한 새 다리 구이였다. 다만 어디 타조의 다리라도 잘라 왔는지 아주 기다랗다는 것만 제외하면 흠잡을 것이 없는 멋진 새 다리였다.
“저거, 뭐죠…….”
“그러게요.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췄네요.”
뮐러의 말대로 싸움꾼은 방패까지 들고 있었다. 다만 그 방패가 둥근 치즈라는 점이 조금 어색한 점이다.
“걸 거요?”
대체 저게 뭘까 하고 골몰하고 있자니 곱사등이 남자 하나가 불쑥 머리를 들이민다.
회색 머리칼에 회색 수염, 나이를 꽤 먹은 것 같은 남자다. 중년과 노년의 경계에 선 남자는 조잡하게 만들어진 종이 뭉치를 흔들었다.
“배당이 높은 건 저 남자요. 으음, 오늘 경기는 이게 마지막이 될 것 같으니 거는 것이 좋을 거요. 다음 경기 선수가 ‘질풍의 흔들림’인데 실력이 보통 아니라 아무도 대전 상대로 나서려고 하지 않거든.”
“이거 도박이에요?”
“그냥 구경하는 것보다는 역시 돈을 걸어야 재미지지 않겠소? 안 걸 거면 관두시오.”
“아니, 그건 아닌데, 배당 높다던 그 남자 거 여기 열 장 줘 봐요.”
“10실버요. 배당은 지금 세 배 정도 되고, 경기 끝나면 저쪽으로 와서 돈으로 바꿀 수 있소.”
“저기 잠깐, 여기 경기에서 우승하면 대체 뭘 주기에 저러는 거예요?”
새 다리를 손에 든 몰골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엇이 저 사람들을 저렇게 진지하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진 가람이 질문했다.
표를 세던 도박꾼은 귀찮은 듯 단상 위 남자들의 발아래를 턱짓했다.
“저거요.”
“아무것도 없는데요?”
가람이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뮐러가 깨닫고 설명한다. 그사이 도박꾼은 다른 사람에게 표를 팔기 위해 멀리 사라져 버렸다.
“발밑에 저것, 그냥 돌이 아닙니다. 저거……. 믿을 수 없지만 거대한 치즈 같군요.”
뮐러의 말에 다시 한 번 발밑을 살피니, 과연 돌이라고 생각했던 단상은 커다란 치즈였다. 두 싸움꾼은 지금 상품이자, 음식인 치즈 위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나 크면 옮기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닐 터인데. 옆의 구경꾼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자니 저 치즈는 팔탐의 치즈라고 불리는 것으로, 축제의 명물로 인기가 높았다.
“우승하면 준다 이거죠?”
가람은 싸움꾼의 맨발을 바라보며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무리 크다고 해도 누군가의 발에 밟힌 치즈를 먹고 싶을까.
그래도 맛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혹시 웨이크가 나갈 생각이 있나 싶어 슬쩍 바라보니 웨이크는 이미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축제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 많다. 웨이크의 시선을 붙잡은 건 작은 인형극이었는데, 코 찔찔 흘리는 아이들이나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넋을 놓고 있었다.
인형극이라고 해서 무시할 것도 못 되는 것이, 거의 사람만 한 인형도 나오고 작은 인형이라고 해도 사람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인형인 데다 손가락까지 정교하게 조종하는 것이라 보는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이름난 음유 시인까지 함께 흥을 돋우니 홀리지 않을 수가 없다.
경쾌한 선율 위로 박자들이 올라탄다. 흥겨운 가락을 듣고 있자니 마음이 노곤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가람은 어린아이들 틈에 끼어 가판대에서 파는 음식을 가득 끌어안고 우물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극의 내용은 닭 다리 하나로 황소를 때려잡은 플루자라는 청년에 대한 것으로, 풍운의 꿈을 안고 세상으로 나가 얼마나 고생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연을 보고 돈을 던져 주고 나오니 이번에는 치즈 굴리기 대회가 있다고 해서 직접 참여해 보기로 했다.
야트막한 언덕에서 치즈를 굴리고, 따라서 뛰어 내려가 잡으면 되는 단순한 경기인데, 둥근 치즈를 사람이 뛰어가 잡는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라 여기저기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가람은 반쯤 뛰다가 포기했는데, 의외로 뮐러는 악착같이 뛰어 상품을 타 왔다.
“살림 잘하겠어요.”
“제가 좀.”
뮐러는 쑥스러워하며 상품으로 받은 치즈를 말 등에 실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커다란 빵 먹기, 사람 키보다 큰 샌드위치 만들기, 날달걀 깨지 않고 머리에 얹고 옮기기 등 기상천외한 대회들이 줄 지어 나타났다.
홀린 듯이 그것들에 참가하고 나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어 가람은 깜짝 놀랐다.
“이런, 너무 늦은 거 아니에요? 민박 못 잡으면 어쩌지!”
“그걸 대비해서 야숙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으니 너무 걱정 말아요. 그나저나, 저 서커스 안 볼 겁니까?”
“아뇨, 봐야죠.”
냉큼 대답하는 가람의 뒤에서 뮐러가 소리 죽여 웃는다. 어느새 야시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헝겊 사이사이에 등이 끼어들어 어두운 길을 밝힌다.
램프와 마법 등으로 밝힌 길거리는 낮과는 다른 장소로 탈바꿈했다. 작은 애완조와 밤에만 문을 여는 음식점, 술집, 물 담배, 마술과 도박꾼 따위가 섞여 들었다.
그 사이에서 불이 붙은 창을 휘돌리며 시선을 모으는 서커스단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가람은 유연하게 몸을 움직여 불붙은 원을 통과하는 광경에 감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구경꾼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돈을 던져 대자 서커스 단장은 입이 귀에 걸렸다. 가람 또한 은화를 아낌없이 던져 주었다.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나저나, 저쪽으로 가는 게 좀 더 잘 보일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길까요?”
웨이크가 몸으로 막아 주어 지금 자리도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뮐러의 제안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서커스 천막 뒤쪽이라 그런지 사람이 없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어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망설이자 뮐러의 눈짓을 받은 웨이크가 길을 뚫기 시작한다.
얼마나 요령 좋게 길을 뚫는지 사람들은 자신이 밀쳐지는지도 모르고 길을 내어주었다.
마치 다른 사람에게 떠밀린 척 슬쩍슬쩍 몸을 놀리는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뮐러와 가람은 이것도 서커스 못지않다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확실히 여기가 더 낫죠?”
“그러네요. 앞에 가리는 게 없어서 훨씬 더 잘…… 보이…….”
흔쾌히 대답하던 가람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그 끝은 의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시선은 서커스 천막 뒤쪽에 고정되어 있다. 말뚝을 박아 천막을 고정하는 부분이었는데, 그렇게 뚫어져라 볼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서 두 남자는 의아해졌다.
“가람?”
동시에 부르자 넋이 나가 있던 가람의 눈이 달캉 흔들린다.
그래도 초점은 돌아와서 두 남자가 안심하는데, 가람은 사나운 기세로 왼쪽 가죽 장갑을 벗고 손등을 살폈다.
손등은 아직 톱니바퀴 형태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늘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모습이다. 아직 충전이 완료되지 않았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가람? 왜 그럽니까?”
가람이 갑자기 식은땀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하자 저만치서 구경하던 뽀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허옇게 질린 얼굴의 가람은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부서져 무너질 것 같았다.
두 남자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가람의 눈에는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 그것.
잠시 랜턴의 불똥이라도 튀었나 싶어 착각했지만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니었던 그것은, 패스였다.
심장이 뱃속으로 쿵 떨어져 쑥 꺼진다. 손끝부터 차가움이 밀려들었다.
사방의 축제 기운은 여전한데, 갑자기 상자 안에라도 갇힌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즐거움으로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순식간에 꺼져 든다.
세상의 모든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적막 속에서 패스와 부서질 듯이 심장이 뛰는 가람 둘만이 남았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아득해져, 어찔했다.
자신의 패스는 충전 중이다. 그렇다면, 저 패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자명한 사실이다. 패스는 패스파인더의 것이고 언제나 바늘 끝에서만 나타난다.
이 세계에 가람이 아닌 다른 패스파인더는 그녀가 알기로 한 명뿐이다.
유예되었던 집행이 벌컥 눈앞으로 다가온 것 같은 기분이라, 가람은 손을 떨며 천천히 패스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