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심장이 멎을 것같이 두려운데도 이 패스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다.
이 패스가 만약 모르드레드의 것이라면, 그는 이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까지 마주치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다. 가람은 망설이다가 결국 패스를 손등에 담았다.
50패스. 모두 합쳐 이제 150패스다.
이런 곳에 있는데도 큰 패스다. 이 와중에도 그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기쁨은 정말로 찰나의 것으로, 다시 고개를 든 가람의 얼굴은 땀에 젖어 비장했다.
“갑작스럽지만, 우리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아요.”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말입니까?”
뜬금없는 선언에 뮐러가 깜짝 놀랐다. 두 남자가 놀라거나 말거나 가람은 마냥 마음이 급했다.
금방이라도 모르드레드가 들이닥칠 것 같아 입 안의 침이 바짝바짝 마른다.
가람의 손끝이 달달 떨리고 겁먹은 시선이 사방을 살피자 그제야 두 남자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일단, 빨리 당장 여기를 떠나는 게 좋겠어요. 빨리요.”
“가람? 하지만…….”
오늘 막 이 도시에 도착했는데 바로 떠나자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뮐러가 토를 달자 가람의 얼굴이 거의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몰려 일그러졌다.
“빨리요, 빨리. 어서요! 그냥 일단 가요. 가자고요, 네?”
가람의 얼굴이 보통 심상찮은 것이 아니라 뮐러는 의문을 뒤로하고 일단 그녀의 말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도 두 남자의 행동이 느리고 굼떠 보여 그녀는 손수 뽀삐의 고삐를 잡고 일행을 이끌었다.
앞에 가득한 축제꾼들이 보이지도 않는지, 다급한 손길은 난폭하기 짝이 없어 몇 명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진다.
항의하는 음성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가람은 홀린 것처럼 서둘러 마을을 가로질렀다.
유명하긴 하지만 원래 큰 마을은 아니었던지라 빠져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문지기들은 한밤중에 마을을 빠져나가려는 가람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한 차례 범죄자들의 인상착의를 적어 놓은 장부를 뒤적이더니 순순히 내보내 주었다.
도망치듯 마을을 빠져나와 서늘한 관도에 서자 뮐러가 미뤄 놓았던 대답을 들으려고 다가섰다.
그러나 가람은 무작정 뽀삐의 짐을 파헤쳤다.
찾는 것이 꽤 깊숙이 들어 있는지 무심하게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물건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귀한 무화과 잼 병이 땅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날 뻔한 것을 뮐러가 간신히 받아 내자, 그런 보람도 없이 바랄라인 리큐르와 고기, 마른 빵 따위가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가람, 진정해요.”
미친 사람처럼 날뛰는 가람을 뮐러가 잡아 보았지만 가람의 얼굴은 비장하다 못해 흉흉하기까지 했다.
뽀삐마저 겁을 먹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와중에, 가람은 가방 아래에 있던 온갖 무기들을 꺼내어 무장했다. 그리고 바로 뮐러와 웨이크를 돌아보았다.
비장하기까지 한 시선에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는데 가람은 서슴없이 손을 뻗어 뮐러와 웨이크의 노예 족쇄를 잡아 뜯어 버렸다. 박살 난 족쇄에서 한 차례 빛이 솟아오르다가 사그라진다.
이제부터 두 남자는 자유였다. 가람은 아무 가치가 없어진 쇳조각을 바닥에 흩뿌리듯 내다 버리고 간소한 짐을 챙기더니 느닷없이 그들에게 뽀삐의 등을 떠밀었다.
“여기서 헤어져요. 이거 다 갖고 가구요. 난 다 필요 없으니까. 잘 지내요. 행복하고. 어서 가요. 빨리!”
겁에 질려 서두르는 가람이 가라고 해도 워낙 뜬금없는 상황에 내몰린 두 남자가 납득할 리가 없다.
뮐러와 웨이크는 팔목에서 사라진 노예 인장을 더듬듯이 쓸어 보다가 얼떨결에 따각따각 걸어 다가온 뽀삐와 말들의 고삐를 쥐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죠?”
가람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차분한 두 남자의 기운에 휩쓸려 조금 안정을 되찾았다. 공황 상태가 조금 잦아든다. 뮐러는 가람이 안정되어 가자 조금 안심했다.
“전에 그, 베녹사스에서 봤던 남자 기억해요?”
“아, 물론이죠. 가람과 같은 무언가를 찾아다니는 그 사람이요?”
“네. 두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그 미친놈이요. 아까 제가, 그 미친놈의 패스를 흡수한 것 같아요.”
“확실합니까?”
웨이크가 갑자기 진지하게 묻는다.
“몰라요, 하지만 확률이 높긴 해요. 만약 저 외에 다른 파인더가 또 있었다면 모르드레드가 몰랐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 제가 흡수한 패스가 다른 파인더의 것일 확률도 낮죠. 만약 이게 정말 모르드레드의 것이라면, 그가 이쪽으로 오고 있을 확률이 높아요.”
“그렇다면…….”
뮐러가 말끝을 흐린다.
“이번에 마주치면, 정말로 다 죽일 거예요. 사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빨리 헤어져야겠다고.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얼른 가요.”
“가람은 어떡하려고 그럽니까?”
뮐러가 어두운 얼굴로 질문한다. 모르드레드의 괴물 같은 힘은 가람보다 그에게 더 깊게 각인되어 있다. 단숨에 다라즈녹의 목을 자르던 그 광경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전 제 길을 가야죠.”
가람이 씁쓸하게 대답한다. 잠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 사이로 풀벌레 우는 소리가 파고든다. 침묵을 깬 것은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웨이크였다.
“이 밤중에 혼자 간다는 겁니까?”
마을이 떠들썩했기에 밤의 숲은 더욱 고요해 보인다. 새카맣게 죽어 있는 숲속은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도 들어가기 꺼려하는 장소다.
아무리 관도라고 해도 밤의 길을 홀로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리고 매우 쓸쓸한 것이다. 웨이크는 어둠 속을 홀로 걷고 있는 가람의 작은 어깨를 떠올렸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요.”
가람이 애써 대수롭잖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다. 뮐러와 웨이크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혔다.
“어차피 그 남자가 지금 당장 들이닥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이렇게 헤어지는 것은 너무 급합니다. 일단 이 마을을 벗어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뮐러가 조심스레 설득을 시도한다. 뽀삐가 긴 주둥이를 주억거리며 간절하게 응시했다.
갑자기 가람과 헤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새카만 눈망울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가람은 그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동조했다.
“그럴까요?”
“예. 이쪽으로 계속 가면 필모른에 도착할 테니, 그곳에서 제 여동생과 인사도 하고 그렇게 헤어지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웨이크까지 권하자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장 홀로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은 가람 본인이다.
아까는 너무 놀라 불에 덴 것처럼 황급해했지만 이 도시 인근만 벗어나면 괜찮을 수도 있다. 아니,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럼 가죠. 이거 참, 갑작스럽게 마지막 여행이군요.”
뮐러가 분위기를 좀 바꾸려는지 가벼운 목소리로 말한다. 뽀삐가 슬쩍 입을 열었다.
“누나, 저도 보내는 거예요?”
“응.”
“안 보내면 안 돼요? 난 말이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안 돼.”
가람이 단칼에 말을 자르자 뽀삐는 조금 시무룩해져서 괜히 앞발로 돌을 툭툭 걷어찼다. 가람은 슬쩍 미소 지으며 목덜미를 두드려 주었다.
“누나가 가끔 보러 갈게.”
“정말요? 언제요?”
“가끔, 갈 수 있을 때마다 꼭 갈게.”
뽀삐는 좋다며 푸릉푸릉 웃었다. 그러다 문득 어딘가에 생각이 닿았는지 다시 질문한다.
“그럼 누나 다른 말이랑 같이 다녀요?”
“아니, 혼자 다녀야지.”
“어……. 그럼 누나 밥이랑 침낭이랑 다 어떡해요?”
“내가 들고 다녀야지.”
가람은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뽀삐가 더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들어도 가끔 버거운 무게인데, 가람 혼자 그것들을 어떻게 감당한단 말인가.
가람은 그 마음이 예뻐서 다시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나 없어도 밥 잘 먹고, 강아지 당근 없다고 굶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가람의 어깨에 코를 쿡 처박고 뽀삐는 아무 말이 없다. 푸릉푸릉 귓가에 세게 울리는 소리가 마치 우는 것 같아 슬쩍 보니 말 특유의 기다란 속눈썹이 조금 젖어 있다.
그 광경에 가슴이 찡해져 뽀삐를 꽉 끌어안자니, 뮐러가 슬금슬금 끼어든다.
“그, 물은 어쩌려고요. 씻을 때나 마실 때나……. 이런 산에서도 물 잘못 마시면 배탈 날 텐데…….”
“저쪽에서 생수라도 가져다 마셔야죠.”
“그건 비상구 아닙니까. 비상구를 그렇게 막 쓰면 안 되지요.”
가람은 어깨를 으쓱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이러다간 한 달이 지나도 필모른에 닿지 못할 모양새다.
“빨리 가요. 일단 이 근처만 좀 벗어난 다음에 자자고요. 하루 종일 놀고, 놀랐더니 너무 피곤하네요.”
그렇게 말하며 뽀삐의 등에 훌쩍 올라타니 두 남자도 뒤이어 말에 오른다.
뮐러는 말에 오른 후 잠시 망설이다가 작은 종이를 꺼내어 가람이 선물한 볼펜으로 무언가를 끄적끄적 적기 시작했다. 그사이 가람의 옆으로 웨이크가 슬쩍 따라붙는다.
“괜찮다면 여동생의 집에서 좀 묵다가 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민폐예요. 그리고 그냥 이건 노파심인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제가 옆에 있으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요.”
“그래도…….”
웨이크가 아쉬움에 쉽게 포기하지 못하자 가람이 가볍게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이렇게 인정 많은 사람일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짐짓 짓궂게 말하자 웨이크도 드물게 웃었다. 고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엷은 웃음이 번진다.
“저도 가람을 처음 봤을 때는 좀 수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요?”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웨이크는 턱짓으로 뮐러를 가리켰다. 무언가를 끼적거리던 뮐러가 황급히 종이를 접어 작은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예? 제 이야기 하는 겁니까?”
“가람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수상했는지 이야기하고 있던 참입니다.”
“아, 확실히 좀 수상한 사람이었죠.”
뮐러까지 동의하자 가람은 궁금해졌다.
“제 어디가 그렇게 수상했어요?”
“오히려 안 수상한 부분을 찾으라고 하는 것이 더 빠를걸요.”
가람은 후 웃어 버리고 말 등에서 허리를 젖혔다. 밤공기가 시원하다. 마음은 이리도 불안한데,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벗어난 후의 안도감이 밀려든다.
만약 그 패스를 보지 못하고 도시에 내내 있다가 모르드레드와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려 몸이 부르르 떨린다.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면 가람도 처음과는 많이 달라져서, 지금 보면 정말 어엿한 여행자처럼 보입니다.”
“그래요?”
“예. 아마 예전의 가람이 혼자 두고 떠나라고 했으면 절대 안 갔을걸요. 많이 늠름해졌죠.”
“늠름…….”
가람이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 단어를 되뇌자 갑자기 웨이크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소리 내어 웃는 웨이크는 처음이라서, 뮐러와 가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이거, 헤어질 때쯤 돼서 진귀한 모습 많이 보는데요.”
“그러게요. 평소에도 그렇게 좀 웃고 다녀요.”
웨이크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더니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밤인데도 알 수 있을 만큼 두 뺨이 발그레해서 이번에는 뮐러와 가람이 웃었다.
“그나저나 저녁은 안 먹어도 되죠? 워낙 이것저것 많이 사 먹었더니 배가 안 고파요. 그냥 조금 더 가서 자리 깔고 자면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동감입니다. 관도면 근처에 야영할 만한 곳이 있을 테니 거기서 잠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실제로 대단히 피곤했기 때문에 가람은 뽀삐에게 서둘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부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달리면 누나와 더 빨리 헤어지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아는 뽀삐는 좀처럼 걸음에 속도를 붙이지 못했다.
가람은 닦달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서 오랜만에 뽀삐의 등에 엎드려 천천히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쓸어 주었다.
“어?”
한참 뒤 뮐러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한다. 턱을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 고심하는 모양새다.
가람은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 싶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요?”
“아뇨, 그게. 제가 이 근처에 처음 와 보는데, 이상하게 길이 낯익어서요.”
그렇게 말한 뮐러는 다시 미간을 모았다. 가람은 그가 고민하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흠칫.
모닥불 끝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불을 지키는 것은 단 한 명이다.
길게 후드를 드리운 모습에 심장이 조여들었다. 긴장으로 침을 삼키자 웨이크 또한 뒤늦게 가람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바짝 긴장했다.
웨이크가 검대에 손을 가져다 대는 사이, 가람은 말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