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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10화 (1부 완결) (110/256)

110화

생각 같아서는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다. 관도를 따라 내려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한다고 해도 이미 늦은 상황이다. 저쪽에서도 가람을 알아차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제발 저 사람이 모르드레드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지금만큼 간절하게 불러 본 적이 없다.

모르드레드가 아닐 수도 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사람이 다 모르드레드일 리는 없다. 저런 차림은 흔한 차림이니까, 그러니까.

모닥불가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가람은 그 모습이 너무나 느리게 보였다.

모닥불을 따라 여러 갈래로 나눠진 남자의 그림자가 마치 귀신처럼 검은 숲을 할퀴어 댄다. 그 광경에 뮐러는 이 광경을 어디에서 봤는지 드디어 기억해 냈다.

“너무 늦었어…….”

뮐러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베녹사스가 아니었다. 예전, 거대한 거북을 보았을 때 꾸었던 꿈속의 숲은 베녹사스가 아니었다.

검고 두려운 숲.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하기 짝이 없는 풍경. 그것은 뮐러가 자신의 죽음을 보았던 꿈속의 숲.

로브의 남자가 천천히 후드를 들춘다. 가람은 바짝 긴장해 패스를 끌어모았다. 만약 모르드레드라면 이번에도 같은 방법을 쓸 생각이다.

하지만 제발 아니기를, 부디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약 모르드레드라면 이렇게 얌전할까 하는 희망도 슬쩍 부풀었다. 섣불리 아까운 패스를 쓰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손목이 시큰했다.

“아?”

정확히는 손목이 아니었다. 가람의 손목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손목부터 그 위쪽으로 한 뼘가량이 없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잘린 뼈의 단면이 제 손이 아닌 것 같다.

믿기지가 않아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데, 남자의 얼굴이 후드를 벗어났다.

그토록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허무하리만치 깔끔하게, 드러난 얼굴은 모르드레드이다.

충격은 연쇄적으로 찾아왔다. 멍하니 손목과 모르드레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가람이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람은 자신의 고통만을 울부짖지 않았다. 가라고, 도망치라고 외치는 비명이 숲을 뒤흔들었다.

모르드레드는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줄어드는 거리에 가람은 피가 철철 흐르는 손목을 붙잡고 공포에 떨었다. 뮐러와 웨이크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필 정신도 없었다.

꾹꾹 눌러두고 담아 두었던 거대한 공포를 대면하자 두렵다 못해 체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저 단 하나의 단어만이 머릿속을 헤엄친다. 도망쳐.

그는 자신을 죽일 것이다.

“네 문양이 거기 있다는 걸 알아서 다행이야.”

다가온 모르드레드는 너무나 평화로운 어조로 이야기했다. 정말로 다행스럽다고, 안도하는 목소리는 일견 듣기에 걱정해 주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그래서 더욱, 두려웠다.

“모르드레드.”

“음. 그래. 아직도 저 쓰레기들과 함께 다니고 있었군.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말에 정신이 든다. 가람은 황급히 두 남자를 살폈다. 그러나 가람의 시선이 닿기가 무섭게―

웨이크의, 뮐러의 몸을 세로로 길게 자르는 붉은 선이 무엇인지 가람은 몰랐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뮐러와 웨이크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뻐끔 벌린 입이 다물리는 순간, 맞물리지 못하고 세로로 어긋난다. 그리고, 쪼개어졌다.

모르드레드는 기다렸던 것이다. 가람이 두 사람을 바라보기를. 그 눈앞에서, 그 광경을 보여 주려고 기다렸던 것이다.

내장, 눈알, 심장, 분비액, 피 등등 속에 담겨 있어야 할 것들이 바닥에 쏟아져 내린다. 뮐러였던, 웨이크였던 것들.

가람은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니 그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거짓말, 이거 꿈이지? 저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사람 속이 제일 모를 것이라고 하잖아. 어때? 동료들의 속을 본 소감이.”

여상스럽게 이야기하며 흐드러지게 웃던 모르드레드는 뮐러와 웨이크의 시체 사이로 걸어가 무엇인지 모를 내장 기관을 슬쩍 걷어찼다. 방금까지 펄떡이던, 심장이었다.

“이렇게 더러울 줄이야. 안 그래?”

잔해들 사이로 반쪽이 난 뮐러와 웨이크의 얼굴을 발견한 가람은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삐걱삐걱 고개를 드는 가람 앞으로 어느새 모르드레드가 다가와 선다.

패스로 무언가를 사려고 해도 문양이 없다. 날아간 팔목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일한 방편인 차원 문을 열었지만, 모르드레드가 가람을 잡아채는 것이 더 빨랐다.

“내가 기억하기론, 내 차례인 것 같아.”

가람은 멍하니 모르드레드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저 손이 단두대의 칼날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째서일까. 왜 이런 순간에, 기차에서 뮐러와 웨이크의 농담 따먹기가 생각이 나는 걸까.

어째서 이런 순간에,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거지. 왜 이런 순간에…….

가람의 목이 바닥을 구른다. 그 외의 것들도 차례로 바닥을 굴렀다. 고통은 없었다. 지나치게 상실한 현실감이 고통마저 앗아 갔기 때문이다.

다만, 가람은 마지막까지 우스웠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렇게 다 끝났으니 이제 그런 끔찍한 곳도 가지 않아도 된다고, 패스를 찾으려고 악다구니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이제 쉬어도 된다고.

아침에 일어나면 시끄러운 알람이 울고, 엄마가 밥 먹으라며 잔소리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가람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리면서도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식탁에 앉을 것이다. 가십거리로 수다를 떨고, TV를 보다가 지각을 하고.

아니, 거기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여관에서, 기차에서, 웨이크와 뮐러와 같이 셋이서 실없이 웃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다.

아니면 차라리 팔탐에 도착했던 순간으로 시간을 옮겨서 그곳에서라도 세 사람과 헤어지고 싶다. 아, 이제 모르겠다.

끝이다.

가람의 눈이 천천히 닫혔다. 모르드레드는 무슨 이유인지 끝까지 가람의 얼굴을 마주했다.

가람은 그것이 꼴 보기 싫어 더 빨리 눈을 감아 버렸다. 암전, 그리고 적막. 조용해서 좋구나.

모두 죽었기에 슬퍼하는 이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에필로그

언젠가, 너무나 힘들고 고되어 차라리 목숨을 끊어 버리면 어떨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번뿐인 목숨 소중하게 여기자며 추슬렀는데. 이럴 줄이야.

가람은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분노나 충격도 없었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심장조차 뛰지 않는 것처럼.

머릿속을 달구는 분노는 없다. 오히려 차갑다. 너무나 차가워 얼어붙은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뇌 대신 얼음덩어리가 들어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차가웠다. 침착해서 한없이 가라앉고 가라앉는다.

단단하게 굳어진 눈으로 방을 무감각하게 둘러보던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침대를 짚고 일어나는 팔은 근육 하나 없이 매끈하다. 몇 번이나 땀 흘리며 만들었던 근육은 흔적조차 없다.

작은 가람의 방 한쪽에는 이제 너무나 익숙해 그냥 풍경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보이는 차원 문이 열려 있다. 저 문 덕분에 가람은 꿈이라며 외면할 수도 없었다.

그 날, 그 날의 풍경이다. 감정이 없어 차갑게 얼어붙은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가로지른다.

슬픔이 이리도 차가운데 눈물이 뜨겁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슬픔이 가져야 할 뜨거움을 모두 빼앗아 간 것만 같다.

가람은 창백한 뺨에 용암처럼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차라리 눈물이 뺨을 모조리 태워 버렸으면 좋겠다.

가슴이 아파 죽어 버릴 것 같은데 몸이 멀쩡한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명.

오직 그 길밖에 갈 수 없는.

모르드레드가 했던 그 말이 옳았다. 그 말보다 더 옳은 말은 찾기 힘들다. 죽음 따위로는 그 숙명을 이길 수 없다.

가람이 천 번, 만 번 죽는다고 해도 가람은 처음 이 세상이 베이스캠프가 되고, 자신이 패스파인더가 되었던 그 고정된 시간 속으로 돌아올 것이다.

가람은 멍하니 손을 들어 패스를 확인했다. 여전히 150패스가 있다. 패스는 초기화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패스만 생각하면 차라리 편하다. 가람은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문은 어디로 통하는 걸까. 죽을 때 열었던 그곳으로 연결되는 걸까? 죽은 지 얼마나 지난 걸까.

아니,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람. 지금 이 마당에 그런 것이 다 무슨…….

단 한 번도 쉬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극심한 피로감이 영혼을 짓누르는 것 같다.

그런데도 끝은 없었다. 모두 끝났지만,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 1부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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