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노동으로 다져진 투박한 손이 긴장을 한껏 매달고 느릿하게 뻗어진다.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치워 낸 다이덴은 깜짝 놀랐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여행자가 또렷이 눈을 뜨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고, 머리카락 속의 얼굴이 대단히 멀쩡했기 때문에 또다시 놀랐다.
땀인지 피인지 무언가가 꾸덕꾸덕 말라붙은 머리칼에 어울리는 더러운 얼굴이긴 했지만 그래도 눈알이 없는 마녀나 퀭한 해골 머리 같은 것을 상상했던 그에게는 너무나 의외였던 것이다.
굉장히 어려 보이는 여자의 얼굴. 풍파를 많이 거친 듯한 외양으로 봐서 성인은 맞는 듯했으나 원래 얼굴 자체가 동안인 듯싶었다. 심지어 여행자는 동양인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 밑은 벌겋다 못해 보라색이었고 얼굴은 눈물 자국에 먼지가 말라붙어 꼬질꼬질하다.
새카만 눈은 뜨고 있긴 하지만 전혀 깜빡이지 않았다. 죽은 눈은 아예 초점이 없어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일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이덴은 두려움이나 꺼림칙하던 감정이 급속도로 측은함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이런 몰골인 것은 어딘가에서 고약한 꼴이라도 당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옷과 머리카락은 온통 피였다.
이상한 복식 덕분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만약 이 피가 전부 이 여자의 피라면 좀 심각한 것 아닌가.
“손님. 목욕하셔야겠습니다.”
다이덴은 선고하듯 그렇게 이야기하고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 빈디와 하디에게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행자는 다이덴이 열고 뛰쳐나간 열린 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흩어 버렸다. 흐트러진 시선은 한참 동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빈디와 하디가 여행자를 씻겨 옷까지 입힌 뒤 침대에 올려 둘 때까지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Chapter 15
비 몇 방울이 떨어지면 털어 내면 된다. 물 한 컵이 쏟아지면 닦아 내면 된다. 그러나 쏟아지는 폭포 앞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가람은 무력하게 앉아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외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두 모순된 노력은 상쇄 효과를 일으켜 성과가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가람은 분주한 머릿속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완전히 실 끊어진 인형마냥 덩그러니 앉아, 아니 놓여 있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머릿속이 찢어발겨진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가람은 문득 상황을 불신했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럴 리가 없었다.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 가람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의 제 방을 떠나 차원 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일이었다. 뛰어든 문 안에는 잠깐의 기대조차 철저하게 부수어 줄 참혹함이 마치 전시된 것처럼 잘 정리되어 가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단숨에 현실로 돌아오는 동시에 쏟아지는 현실의 폭포 아래 쓰러져 나뒹굴었다.
모르드레드가 공격함을 알고 그 와중에도 차원 문을 열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어떻게 그 상황에 차원 문을 열려고 했는지, 그렇게까지 사고가 흘렀다는 것이 신기했다.
아니, 이미 사고나 생각의 단계가 아니라 위험에 처하자 늘 그래 왔듯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란 말이 옳다.
어쨌거나 차원 문은 그때 열었던 그 위치, 뮐러와 웨이크의 죽음 앞에 열려 있었다.
풀벌레 우는 소리까지 너무나 현실적이라, 차라리 비현실이기를 바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나 적나라하게 현실이라서 머리 위로 산이 쏟아져 내린 것처럼 아연했다.
어떤 형태로 이해하려고 해도 그저 끔찍하기만 해서 방법이 없다.
현실은 칼날이 되어 가람의 정신을 유린하고, 잘라 제멋대로 흩어 놓았다.
죽었다. 혹은, 끝났다. 마침내.
조금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두 사람이 토막 났고, 어쩌면 다른 세 마리도 같은 운명에 처했을지 모른다.
조금 철학적으로 말을 더하자면 동료 두 명이 벌레의 점심거리가 되었다. 호화찬란한 식단이 되었다.
어떻게든 끔찍함을 덜어 보려는 노력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진다. 가람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었으나 단단하지 않았다.
맨 처음 발 디딘 곳의 감촉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에 가람은 발밑을 확인했다.
흙의 감촉이 아니다. 그보다 좀 더 물컹하고 축축한, 마치 양말 바닥에 스며드는 것처럼 질척한 감각.
고깃덩이.
어떤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추하건대 허벅다리나 배의 살점이 아닐까. 발에 닿는 감촉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어중간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유해는 완전히 형체를 잃은 것보다 더 나빴다.
뇌를 다 쏟고 슬쩍 두개골의 일부를 내비치는 끔찍한 모습의 옆면에는 웨이크의 반쪽짜리 얼굴이 있었다. 반쪽인데도 늘 보던 얼굴이다. 그러나 반쪽이다.
잘생긴 얼굴이 완전히 엉망이다. 가람은 손을 뻗어 쪼개어진 얼굴을 맞추었다. 묘하게 단면이 어긋나 어색했지만, 그래도 훨씬 나았다.
여동생이 보면 놀라겠다. 이렇게 잘생긴 오빠니까, 분명 여동생도 자랑스러워했을 텐데. 집이 이 근처라고 했으니 어서 가야죠. 웨이크. 선물도 잔뜩 샀잖아요.
만족할 만큼 웨이크의 형태를 다듬은 가람은 뮐러에게 손을 뻗었다. 뮐러, 얼굴이 완전히 반쪽이 됐네.
걱정 말아요. 내가 맞춰 줄 테니까. 잘 할게요. 이제 곧 노예 계약도 끝나니까, 아니, 이미 끝났나?
내가 돈 두둑이 쥐여 줄 테니 고향 가서 떵떵거리며 살아야죠. 바랄라인에서 배고파서 풀 뜯어 먹을 일도 이제 없잖아요.
뮐러는 어슷 썰어져 있었기 때문에 형태를 맞추어도 자꾸만 일그러져 무너지기만 했다.
가람은 너무나 속상해서 두 손에 그의 머리를 꽉 붙잡고 한참 바라보았다.
이 얼굴로 웃고, 농담을 하고, 짓궂게 굴고, 많은 것을 설명했다. 풍요로운 삶을 늘 동경하는 듯싶었고, 늘 어쩐지 생활고에 찌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구김살 없고, 늘 사람을 진심으로 대해 주는, 손만 내밀면 언제든 도와주겠다며 장담하던, 왜 혼자서만 감당하느냐 화를 내던.
착한 사람이었는데. 정말로, 착한 사람이었는데.
알고 있었다. 위험하리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험하지만 아주 조금이나마 이 시간을 연장하고 싶었다.
일부러 정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의지할 것 없는 이 상황에 곁에 있는 이 사람들이 이렇게나 착한 사람들인데.
그래도 보내 주고 싶어서, 욕심으로 붙잡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다 하고,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지겠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이렇게나 질질 끌다가 결국은.
“흐…….”
울음소리 대신 가람의 목구멍에서 기묘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성대가 차라리 부수어졌으면, 가람은 두 손에 머리를 들고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간간이 목에서 끅끅거리는 울림이 터져 나왔으나 성대하게 울부짖지도 못한 채 조용히 울었다.
눈물만 뚝뚝 떨어지는 그 울음은 속으로 삭이면서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오는 슬픔의 진액이라 끈적끈적하게 마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진액 같은 눈물을 떨어뜨리던 가람이 갑자기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숲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날이 밝기 전이라 숲속은 매우 어두웠지만 가람은 어렵잖게 다른 잔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도망가려다가 그대로 끝을 맞이한 것으로 보이는 세 마리 말의 잔해였다.
깔끔하게 잘려 나뒹구는 말 머리 세 개. 베녹사스의 독룡, 다라즈녹을 처리했던 그 솜씨다.
그 아래의 몸은 잘게 다져져 어느 것이 누구의 몸인지 알기 힘들다.
울퉁불퉁한 내장 조각과 기묘한 형태의 폐, 심장, 굉장히 중요해 보이는 뼛조각들이 완전히 부서져 흩어져 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트리거에게 맡기는 거였는데.
그 자리에는 육편 말고도 다른 것들도 있었다. 뽀삐가 싣고 있었던 가람의 짐들이다.
사납게 날뛰었던 모양인지 주변에 마치 폭죽을 터뜨린 것마냥 물건들이 흩어져 있다.
물건 하나에 추억 하나, 혹은 둘, 셋. 어제까지만 해도 먹고 쓰고 보던 물건들.
살까 말까 하며 구입하던 고민에 휩싸인 어깨. 기차의 소파에 늘어져 넘기던 책장들.
감자와 말린 고기들, 찢어진 침낭, 컵 세 개, 웨이크가 즐겨 먹던 간식거리와 책장이 다 찢어진 뮐러의 책들.
언젠가 웨이크가 선물했던 다산의 상징도 삐죽이 튀어나와 있다. 가람은 그것을 주워 들다가 문득 옅은 빛을 반사하는 물건을 발견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것이 눈에 들어온 것은 공교롭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검붉어진 벨벳 주머니 밖으로 반쯤 삐져나온 그것은 얇은 몸체를 가진 나비와 꽃잎으로 장식된 머리핀이었다.
아쉬움에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던 물건.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챙겨 주기 위해 구입했을 가능성은 주머니 속에 함께 동봉되어 있던 작은 쪽지가 완전히 날려 버렸다.
가람은 고깃덩이를 뒤적이면서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손을 옷에 급히 닦고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열어 보았다.
손이 너무나 떨려 종이가 제대로 펼쳐지지 못해 몇 번이나 구겨졌다.
마침내 펼쳐 읽은 그 속의 글씨는 이렇게나 어두운 밤인데도 신기하리만치 잘 읽혔다.
너무 급하게 헤어져 섭섭하다는, 하지만 언제라도 좋으니 자신의 고향으로 꼭 놀러 와 달라는 내용.
이미 가람을 여동생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짧은 내용에 가람의 집이 없다면, 대신 자신의 집을 진짜 집처럼 여겨 주었으면 좋겠다는 몇 줄 글이 짤막하게 이어졌다.
이미 없는 사람의 기다리겠다는 말은 얼음으로 살을 파는 듯이 아프다. 이미 죽은 사람이 미래를 생각했던 흔적은 너무나 날카로워 차마 마주할 수 없었다.
편지를 읽은 눈이 너무나 아파,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서, 가람은 마침내 소리 내어 울었다.
울음이라기보다 울부짖는 것에 가까운 형태였다. 쓰라린 상처에 염산을 끼얹은 것마냥 가람은 고통에 차 나뒹굴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로 몸속에 있긴 한 모양인지 쓰러져 뒹굴던 가람은 어느 순간 왈칵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피거품과 함께 터져 나온 울음은 채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삼켜졌다.
장이 끊어질 것처럼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뒤에는 눈알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처럼 격렬한 분노가 찾아왔다.
무슨 짓이라도, 무엇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은 분노. 어떤 극악한 행위에도 당위성을 부여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분노가 심장을 터뜨려 버릴 것처럼 후려친다.
실제로 그것이 고통스러워서 가람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얼어붙는 것보다 더, 까마득하게 냉혹한 이성이 가람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선 이성적일수록 오히려 더 미친 법이다.
그 와중에도, 당장 두 사람을 되살려 내고 싶은 그 와중에도 가람은 생각했다.
패스로 모두를 되살려도 모르드레드가 이 땅에 있는 이상 몇 번이고 죽게 될 것이다.
만약 되살린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다행히 두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없었다.
언제가 되든 두 사람을 되살리려면, 두 사람은 세상에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정도로 알려져야 한다. 그래, 언젠가 되살리려면.
기약 없는 단어에 눈동자가 단단하게 굳어진다. 새파란 독기를 품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났다.
가람은 홀린 사람처럼 바닥을 파헤쳤다. 누군가 보기 전에 빨리 이 죽음을 은닉해야 한다는 생각에 행동은 그저 맹목적이었다.
손톱이 다 뒤집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덩이를 파헤치고 대부분의 물건들을 땅에 묻어 흔적을 지워 버렸다.
뮐러와 웨이크의 몸을 옮겨 와 묻는 과정에서 셔츠와 바지가 온통 진액과 피에 젖었지만 찝찝함도 몰랐다.
벌써 동이 트려고 하는지 지평선 너머로 어슴푸레한 빛이 보여 마음이 급박했다.
누군가 보기 전에, 들키기 전에 오늘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