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당연히 제정신이 아닌 상태의 판단이었기 때문에 군데군데 구멍이 많은 생각이었다. 일단 피투성이가 된 복장부터가 글렀다.
그럼에도 두 사람을 묻고 나서도 가람은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목이 잘렸던 가람의 옷은 마치 입고 있다가 몸만 사라진 것처럼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람은 땅에 남겨져 있던 운화의 목걸이와 정체불명의 열쇠를 챙겼다.
그 밖에도 몸에 지녔었던 물건들을 거두고 그 외의 물건들은 너무 무거워 동전 몇 개만 챙기고 모조리 묻어 버렸다.
사실 식량이나 여행 장비는 말의 피에 젖어 아주 못 쓰게 되어 버렸기 때문에 챙길 의미가 없기도 했다.
운화의 목걸이는 돌려줘야 했기에 챙겨 둬야 하는 물건이다. 열쇠와 목걸이가 한데 꿰여 있었기에 굳이 분리하지 않고 그냥 목에 걸었다.
차곡차곡 갈 길을 준비한다. 동이 트기 전에 이동해야 했다. 가람은 스스로를 다독이고 몰아치며 다음을 향해 시간을 진행했다.
옷을 꿰어 입고 짐과 돈을 챙기는 행동은 매우 이성적으로 보여 방금까지 울부짖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지나치게 건조했기 때문에 오히려 괴리감이 심했다.
시체 구덩이를 옆에 두고 마치 등교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짐을 챙긴다. 겉보기에 아주 이성적인 행동인 듯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도무지 이성적일 수 없는 환경에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오히려 섬뜩할 뿐이다.
그런 섬뜩함은 막 숨을 거둔 부모 앞에서 통곡하다 저녁 뉴스를 챙겨 봐야 한다며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기괴하고 이상했다.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이 모든 것을 묻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람은 이상해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 필사적임이 본인을 더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게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가람은 몸을 일으키고 숲 안으로 들어가 걸었다. 길을 따라가다가 혹은 길을 벗어나서 걷기도 했다.
울다가 웃다가 다시 표정을 굳히기도 하고 아예 넋을 놓아 버리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가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해가 뜨기도 하고 지기도 했다. 그러나 가람은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막 동이 트는 푸른 숲 사이로 작은 사람이 걷는다. 온통 검고 붉은 가람은 걷는 동안 점점 메말라 갔다.
옷을 흠뻑 적신 피와 가람의 표정 중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께 메말라 간다. 그러니 둘 다 비슷한 꼴이었다.
붉고 더러운, 어둡고 검은, 비릿하고 버석한 몰골.
가람은 방향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계속 걸었다. 그것밖에 없었다.
걸어서 이동하는 물리적인 거리만큼 마음의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처럼 맹목적으로 걷기만 했다.
길도 나지 않은 숲에 섬세하지 못한 걸음걸이가 남기는 흔적은 크다.
지나간 자리는 걸음이 남았다. 사람은 없고, 걸음만이 남았다. 그러나 곧 걸음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 * *
눈꺼풀이 메마른 눈을 닦아 낸다. 고정되는 시선에 담기는 것은 없다. 눈이 마르기 때문에 눈을 깜빡여야 한다.
현재 상태에서 필요한 일은 그 정도였기 때문에 가람은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안구에 맺히는 상은 낡은 여관의 나무 천장이다. 그러나 남는 기억은 없었다.
몸 위에 덮인 보송보송한 이불에서는 짚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났다. 방 한쪽에 난 나무창은 소담한 맛이 있다.
밀려오는 햇살은 포근하고 살랑거리는 바람은 상쾌했다. 좋은 날씨였다. 무엇을 해도 즐거울 것 같은 날인데도, 가람은 전혀 즐겁지 않았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관인 것 같았다. 늘 여관이다. 언제나와 같이 여관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여관이다. 경쾌한 날씨가 늪에 빠져들려는 생각을 끌어낸다.
양말 바람으로 걸었던 터라 너덜너덜해진 발은 그대로였지만 온몸에 치덕치덕 말라붙었던 핏물이나 몸에 남아 있던 흔적이 씻은 듯이 깨끗하다. 실제로 누군가가 씻긴 모양이었다.
상쾌했다.
가람은 이불 속에서 손을 꺼내었다. 삐걱이던 몸이 기름을 칠한 것처럼 매끄럽게 움직인다.
태엽이 다 풀리면 멈춰 쓰러지는 인형처럼 걷고 또 걷다가 쓰러지면 그대로 자고, 일어나게 되면 다시 걸었다.
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그저 그렇게 움직였다. 그런데도 고통은 닿지 않는다. 어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했다.
손등의 문양은 아직 충전 중이다. 그러나 곧 끝날 것 같았다. 바늘의 개수가 세 개밖에 되지 않는다. 이 정도면 하루, 혹은 길어야 사흘 안에 충전이 끝날 것이다.
늘 그렇듯이, 여관에서 일어나 아침부터 패스의 충전을 확인하는 그런 일상이다.
똑같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다. 몸이 깨끗하고 가벼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며칠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먹었던 기억이 없음에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득하다. 이전의 시간들을 떠올리면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들일 텐데도 찌를 듯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담담하다. 이렇게나 아픈데도 담담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가 이야기했듯, 가람이 자는 사이 가람의 뇌가 충실히 움직여 폭주하는 감정적인 일거리들을 잘 정리해 둔 모양이었다.
슬프고 아프지만 눈물은 나지 않는다. 그저 휑했다. 어리둥절한 것과 비슷한 기분인 것 같기도 하다.
마음만이 아니라 그 서늘함이 몸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이불을 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웠다. 휑한 곳에 들어차는 바람이 차고 시려 뱃속이 아플 정도였다.
너무 아파서 이불을 들추고 배를 봐도 어디에도 뚫린 곳은 없었다. 가람은 스스로가 한 행동이 바보 같아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같이 웃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웃어 주지 않는 사람도 없었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을 때, 심장이 찢어지고 배 속이 뚫린 듯 허전할 때 정말로 배에 구멍이 났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되었을 것이다.
피를 토하고 정말로 몸이 아플 정도로 괴로웠지만 가람의 심장은 조각나지도 폭발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가만히 누워 있자 창가로 들어오는 해의 기움이 느껴졌다. 천장에 드리우는 창틀의 그림자가 모양을 달리한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람은 등허리가 찌뿌드드해질 무렵 몸을 일으켰다. 배가 고팠다.
우스운 말이지만 정말로 그러했다. 위장이 무언가 넣어 달라며 아우성친다. 뭔가 먹어야 할 것 같아 침대에서 내려설 무렵 때마침 방문이 달칵 열렸다.
낡은 경첩이 죽는다고 소리를 지른다. 끼이이― 하는 거슬리는 소리 사이로 문틈에 작은 머리통이 삐죽 튀어나왔다.
“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얼굴은 작은 소녀의 것이다. 열서너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어린 얼굴이다.
복숭앗빛의 뺨이 제법 사랑스러웠다. 소녀의 밝은 녹색 눈동자와 가람의 메마른 검은 눈이 마주친다.
“손님, 일어나셨네요! 저는 하디라고 해요.”
잠시 망설이던 소녀는 경험이 엿보이는 노련한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디는 척척 걸어오더니 침대 아래로 내려오려던 가람을 다시 침대 위로 끌어 올려놓았다. 가느다란 팔인데도 힘이 엄청나다.
소녀는 마치 할머니처럼 혀를 차곤 짜랑짜랑하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지금 걸으면 엄청나게 아플 거예요. 세상에, 발이 빈디가 자수를 놓은 걸레짝 같다고요. 작은 마을이라 의사가 없어서 치료도 제대로 못 했어요. 아쉬운 대로 대충 습포를 붙여 두었으니까 꼼짝하지 말아요.”
허리춤에 손을 얹어 가며 제법 야무지게 으름장을 놓은 하디는 은근슬쩍 제 동생의 자수 솜씨를 폄하했다.
가람은 그런 하디에게서 로아나를 보았다. 낡고 궁핍한 방이지만 그래도 상냥한 냄새가 나는 것이, 이 아가씨가 관리해서 그런 모양이다.
“여기는……?”
“여관이에요. 여관. 아, 여기 거스름돈은 머리맡에 뒀어요. 이거 바꿔 오느라 엄청 고생했다고요. 수수료 조금 떼고, 다녀오는 비용은 좀 제했어요. 아참, 거기 발에 붙인 약초도 손님 돈으로 산 거예요. 습포를 갈아 드리는 수고비랑 목욕물 값에 씻겨 드린 비용까지 다 뺐어요. 남은 돈은 495골드 50실버예요. 밤낮으로 간호하느라 정말 힘들었으니까 비싸다곤 생각하지 마세요!”
“아니, 어느 마을이죠?”
아, 하고 눈을 깜빡이던 하디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다. 워낙 ‘우리 마을’로만 불렀던지라 얼른 지명이 생각나지 않았던 탓이다.
“벨바리아예요. 작은 촌 동네죠.”
가람은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들었더라.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는 가람을 하디가 눈을 가늘게 뜨고 관찰했다.
좀 맹해 보이는데 대체 어디가 무서워서 빈디랑 다이덴 오빠는 그렇게 야단이람.
씻기고 나니 한결 사람 몰골이 된 가람이라 하디는 그녀가 별로 무섭지 않았다. 빈디가 엉엉 울며 난리를 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긴, 빈디는 원래 겁이 많고 야단스러운 구석이 있으니까. 그러나 하디는 곧 그 생각을 수정했다.
“아앗, 손님! 뭐 하는 거예요!”
믿을 수 없게도 가람은 하디가 퍼부은 잔소리를 말끔히 무시하고 침대 아래로 내려서려고 했다.
충전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버리고 온 물건들을 저쪽에서 다시 좀 챙겨 와야 할 필요가 있었던 탓이다. 충전이 되자마자 떠나려면 미리 손질을 좀 해 둘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가람을 하디가 무시무시한 손힘으로 끌어당겨 침대에 매어 놓는다. 새로운 몸이 되어 이전의 근육이 다 사라진 가람이 감당키 힘든 힘이었다.
“손님! 그러다가 정말로 아주 못 걷게 되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렇게 어디 좀 부서지면 다시 구할 수 있는 물건마냥 몸을 다루다간 정말로 후회할 거예요. 하나밖에 없는 몸인데 소중히 해야죠!”
예전이라면 가슴에 와닿아 훈훈한 온기를 남겼을지도 모르는 말이다. 짜랑짜랑한 와중에도 걱정이 섞여 있어 고마울 만도 하건만 가람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귀찮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모르니 그런 말을 할 만도 하지만, 하디의 걱정은 가람에게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이었다.
하나밖에 없지 않다. 잘렸던 손목이 매끈하게 붙어 있다. 손목이 잘렸던 것은 착각이 아니다. 토막이 났던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멀쩡하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몸은 얼마든지 있다. 죽어도 다시금 멀쩡하게 살아날 것이다.
차원 문을 여닫을 때마다 복구되는 것은 상점에 있는 물건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가람의 몸 또한 차원 문을 열었을 때 그 시점대로 그곳에 있었다. 이곳에서 몸을 잃게 된다고 해도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장소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하디는 가람이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자 한숨을 내쉬었다. 할 일이 밀려 있었다. 사연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사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하디는 들고 온 감자죽을 내려놓았다. 싸구려 베이컨이 멀건 죽에 둥둥 떠다니는 것이 맛이라곤 없을 것 같았지만 양 하나는 많았다.
“드세요. 그리고 옷값은 20실버예요. 돈 많으신 분 같아서 마을에서 제일 좋은 옷 가게의 제일 좋은 천으로 만들어진 걸로 사 왔어요. 손님 옷은 도저히 못 입을 상황이라. 어떻게 해도 피가 지워지지 않더라고요.”
가람은 문득 자신의 옷차림을 자각했다. 제일 좋은 천이라더니 하얀 면 셔츠에 조금 펑퍼짐한 치마다.
다리 사이가 휑한 것이 기분이 이상했다. 고급 천으로 만들었다는 말답게 옷감이 도톰하고 보드라웠다.
하지만 쓸모없다. 이런 옷차림으론 하루도 여행하기 힘들다. 거추장스럽고, 총을 멜 곳도 없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어쩔 수 없어요. 상단에서 사람이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걸요.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머리핀이랑 나무 조각은 돈주머니 옆에 뒀어요.”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가람에게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다.
“사야 할 것들이 좀 있어서. 근처에 가죽옷 상점 있나요?”
짐 가방을 가볍게 싸야 한다. 홀로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목숨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차원 문이 원래 담당하던 비상구로서의 역할은 사라졌다.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물건을 조달해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생필품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쪽에서 판매하지 않는 물건들도 꽤 있다. 그건 이쪽에서 구입해야 했다.
할 일이 많았다. 슬픈 일이지만 살아 있는 이상 흐르는 시간에 몸을 실어야 했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패스가 필요했다. 아주 많은 패스가 필요하다.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움직여야 한다.
“있긴 하지만…….”
하디는 못마땅한 얼굴로 가람의 발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가람은 얼굴을 풀고 유순하게 웃어 보였다.
알맹이라곤 없는 웃음이었지만 야무지긴 해도 갓 스물도 되지 않은 하디가 알아챌 수 있을 만한 성질은 아니다.
“제가 가서 사 오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가씨가 심부름 좀 해 주겠어요? 심부름비는 줄 테니까.”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바빠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저녁에 가져다줘요. 밤도 좋고. 너무 피곤해서 그렇게 자도 아직 더 자야 할 것 같은데, 저녁까지 아무도 오지 않도록 해 줄 수 있죠? 내가 좀 예민해서 누가 오면 깨거든요. 그건 싫으니까. 푹 쉬고 싶어요.”
“아, 맞아요. 더 쉬셔야죠!”
가람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디는 그 미소에서 기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곧 가람이 불러 주는 물건들을 기억하느라 재빠르게 털어 버렸다.
“그러니까 질 좋은 가죽옷, 무기 차는 벨트, 부츠 한 쌍, 날카로운 짧은 단검, 가죽 가방, 지도 말씀이시죠? 지도는 없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있는 것만 사다 줘요.”
하디는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갔다. 혼자 남게 된 가람은 잠시 기다리다가 하디가 완전히 멀어졌음을 확인하고 방문에 걸쇠를 걸었다. 조잡하긴 하지만 잠금장치가 있어 다행이었다.
그냥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할 수도 있었지만 괜히 수상한 기운을 풍길 필요는 없다.
아프고 피곤해 쉬고 싶다고 호소하는 편이 더 좋은 해결 방법이다. 그리고 귀찮긴 하지만 걱정해 주는 사람에게 괜히 무례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걸쇠를 잠그려고 잠깐 걸었을 뿐인데도 발을 감은 천에 설핏 핏물이 비친다. 하디의 당부가 헛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가람은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차원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챙겼다. 걸을 때마다 발에 감은 헝겊에 붉은 기가 더해졌다.
기본적으로 권총 네 자루와 소총 하나, 굴러다니고 있는 수류탄도 하나 챙겼다.
총탄은 각각 100발 정도로 챙기고 마트에서 작은 팩에 든 여행자용 세면도구, 라이터, 가벼운 코펠, 고체 연료, 통조림, 가벼운 건조식품 등을 챙겨 넣었다.
저쪽의 음식은 무거운 것들이 많다. 그전에는 위급 상황을 위해 최대한 차원 문을 아껴 놓아야 해서 저곳의 음식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위급 상황이라는 것이 아예 없어져 버렸으니까.
가람은 담백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욕심부릴 이유도 없기에 딱 이틀 치 정도의 분량만 확보했다.
그렇게 물건을 챙기는 사이 점점 우울한 기분이 가시기 시작했다. 죽었어도 되살릴 수 있다.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영영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눈앞에서 시체가 사라졌다고 제법 밝은 기운이 솟아오른다.
모르드레드를 처리하고 나면 반드시, 방법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희망이었다.
사실 두 사람과 말들을 잃은 것은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 일 자체가 충격적인 것이지 전체적인 상황이 아주 안 좋아진 것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우울하게 땅을 파고 괴로워하기에는 당장 닥친 고민거리들이 많다.
이곳의 열서너 살 아이보다 약해진 몸의 근력이나, 앞으로의 대비책 등등. 홀로 다녀야 하니 고민거리가 많았다.
새로운 일행을 구한다면 모르드레드에 의한 희생자를 늘리게 될 뿐이다.
모르드레드를 처리해야 한다. 현재 가장 고민스러운 주제였다. 죽여도 그뿐, 금세 다시 나타나는 그를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나무에 매달아 놓고 입에서 총알을 토할 때까지 쏴 주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다.
만악의 근원인 모르드레드만 처리한다면 여행이 이토록 힘겨워질 일은 없을 텐데.
그 개자식은 대체 어떤 부분이 뒤틀려서 그런 몰골이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면전에 나타나면 온갖 욕을 다 퍼부어 주고 싶었다.
300년 가까이 살았다더니 겉은 멀쩡해 보여도 노망이 난 모양이지. 노망난 노인네 같으니.
그 얼굴의 이빨을 모조리 다 뽑아 주고 엉엉 울며 기어 다니게 만들어 주고 싶다.
불사라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다. 그러면 한참 밖으로 나간 것 같은 그놈의 정신도 좀 돌아오지 않을까.
속으로 차갑게 뇌까리던 가람이 오랜만에 웃었다. 비릿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지만 더없이 밝았다.
그것은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즐거운 악의였다. 피투성이가 되어 널브러져 있는, 오물 속을 뒹구는 그 잘난 낯짝을 상상하면 끔찍하거나 가엾다는 생각보다 즐거움이 앞섰다. 어떤 고결한 선의나 비난도 이 악의 앞에는 정당함을 잃게 된다.
예전이었다면 모르드레드를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며 저도 모르게 얼마나 아플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생각보다 훨씬 아팠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가람은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는 것 같았다. 모든 원인이 그 남자다. 지금까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 남자가 원인이었다. 전부, 다. 그전에는 마주치면 죽을까, 손에 쥔 따듯한 것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 먼저 찾아 나설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차라리 좀 더 일찍 죽어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빨리 알았더라면 그렇게나 두려워하고 몸을 사리며 살지 않았을 텐데.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증오의 구덩이가 되어 주었다. 혀로 뱉기도 쓴 어두운 감정들이 몸 안에 괴이고 괴여 독이 되지 않도록 증오가 흐르는 물꼬를 터 주었다.
모두 다 그 때문이다. 모조리 정신 놓은 그놈 때문이었다. 지금까지의 고생과 고통, 근심과 눈물은 모두 그놈 때문이었다.
그놈만 아니었다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슬픈 다섯 개의 시신이 생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람의 시선이 빠르게 마트의 안내 간판을 훑는다. 경쾌한 걸음이 공구 코너로 이어졌다. 짧은 콧노래가 그 뒤를 따르다가 곧 사그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