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실제로 할 기회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우울해서 무기력해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한껏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돌아오니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떠난 시간이 그리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가람이 당부한 대로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없었는지 문 걸쇠는 얌전하게 걸려 있었다. 굳이 들어올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가람은 길게 숨을 내쉬며 침댓가에 기대어 앉았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나니 그제야 피투성이가 된 발이 눈에 들어왔다.
이깟 상처. 치유 마법사에게 치료받으면 금방이다. 하지만 이 근방에서 치유 마법사를 구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작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만으로 이 마을의 아담함을 알 수 있었다. 높은 건물은 고사하고 1층짜리 건물 중에서도 번듯하게 지붕이 높은 건물이 없다.
얼기설기 손으로 짓고 돌을 올린 투박한 주택가가 서로 기대듯 다닥다닥 붙어 있다.
마법사 중에서도 고급인 치유 마법사이니, 베록 정도 되는 도시가 아닌 이상 볼 일이 없는 것이 보통이다.
상관없다. 발바닥의 껍질이 다 벗겨지는 중상이지만 통증 외에는 별문제가 없었다.
이대로 두면 썩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뼈는 상하지 않았는지 제대로 움직인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걸을 때마다 발이 욱신거리지만 충분히 외면 가능한 아픔이었다. 발바닥 좀 찢어졌다고 우는소리를 할 거라면 당장 모든 결심과 각오를 접고 이곳에 정착해 살 생각이나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람은 챙겨 온 물건들을 침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예전과 달리 등산 가방 반 개분도 되지 않는 양의 짐이라 숨기기는 쉬웠다.
침대 아래의 깊숙한 곳에 밀어 넣자 어둠과 먼지가 짐을 가려 준다. 등불이 그리 밝지도 않고 창문이 크지도 않으니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정말로 감쪽같을 것이다.
침대 아래로 깊이 짐을 밀어 넣은 가람이 몸을 빼낸 뒤 한숨을 내쉬었다. 공구를 둘러보긴 했지만 결국 챙겨 올 수 없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해서였다. 공구는 대부분이 무거웠고 작은 손 망치와 톱, 니퍼 등 두어 개를 손에 들자 그 묵직함에 현실감이 살아났다.
일단은 이것들을 들고 걸어야 하니 챙겨 봐야 체력 낭비인 것이다. 가람은 즐거운 상상만으로 만족하고 그것들을 두고 왔다.
이렇게 짐 무더기와 여관방에 홀로 앉아 있으니 처음 이곳으로 떨어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이랬다. 혼란스럽고 슬펐다. 혼자였다. 가느다란 몸뚱이에는 근육 하나 없고 자신은 무력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북받치던 슬픔이 구멍 뚫려 휑한 슬픔이 되었다는 것이다.
가람은 울지 않았다. 너무 울었기 때문인지 눈물이 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렇구나 하고 납득했다.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울부짖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울었고 자포자기하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오히려 잘되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면 목표를 못 이룰 일은 없으니까. 정말로 잘되었다. 시간문제다. 잘된 것이다. 정말로.
가람은 일부러 으쌰 소리 내어 몸을 일으켰다. 입을 벌리고 다물며 굳은 얼굴 근육을 풀었다.
눈을 꼭 감기도 하고 한껏 입매를 끌어 올리던 가람은 그대로 뛰쳐나가려다가 낡은 문고리를 붙잡고 우뚝 멈춰 섰다.
잡철로 만든 문고리다. 기름칠을 하지 않아 삐꺽이는 고리 부분이 녹이 슬었다. 가람은 우두커니 서서 그 부분을 바라보았다.
또다. 또 이 느낌이다.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아슬아슬하게 넘쳐흐를 것처럼 오가는 이 느낌.
찰랑찰랑 수위를 넘나드는 목 밖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메마르고 뜨거운. 마치 뱃속에 성난 황소가 사는 것만 같다.
종종 이럴 때가 있다. 화날 일이 전혀 없는데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고, 소리를 지르고 싶고, 한없이 잔인해지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강하지는 않았다. 마치 스치듯이, 잠시 생각나듯 나타났다가 곧 사그라지던 느낌인데. 지금은 집중해서 삭여야 한다.
괜찮아. 괜찮다. 정말로 괜찮다. 금방 괜찮아질 것이다. 시간문제였다. 조금만 참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을 것이다. 웃을 수 있다.
괜찮다. 지금 그리 나쁜 것도 없다. 아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노력하면 다 되돌릴 수 있다. 찾아올 수 있다. 확신이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자신은 행복한 것이다. 특별하고 행복한, 행운아인 것이다.
행운아.
갑자기 떠오른 그 단어에 가람은 참을 수 없이 조소하고 싶어졌다. 동시에 그 뜨거운 느낌이 사라졌다.
새카맣고 뭉글뭉글한 그것은 만족할 만큼 가람의 신경을 갉아먹고 사라졌다. 봐, 역시 괜찮아진다니까. 모든 것은 다 제대로 되고 있다.
가람은 문밖으로 나섰다. 이 여관으로 들어올 때의 기억이 거의 없기 때문에 눈앞의 복도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리 큰 여관이 아니라 길을 찾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때마침 저녁이라 취객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그 소리를 따라서 모퉁이를 돌자 불쑥 계단이 나타났다. 녹슨 문고리와 마찬가지로 별 세공도 없이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나무 계단이었다.
이런 시골 동네는 신문이나 이야기꾼도 잘 없기 때문에 보통 유흥거리를 도시에서 자체 조달하곤 한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 음유 시인이나 작가를 하면 굶어 죽기 딱 좋기에 보통 하잘것없는 소문 한두 토막이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입이라는 한정된 매체로 순식간에 퍼져 나가는 소문은 바람이 들판을 지나는 광경을 방불케 한다.
따라서 여관이자 주점의 모든 사람들은 어제 가람이 여관을 방문했을 때의 몰골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몹시 과장되고 부푼 형태로.
낡은 계단은 소음이 심하다. 그래도 이야기 소리에 묻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중 귀 밝은 취객이 그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계단에서 내려오는 가람과 눈이 따악 마주치곤 그대로 멈췄다. 그와 대화하던 다른 취객도 그 시선을 따라간다.
가람은 순식간에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게 되었다. 그녀는 어정쩡하게 서서 손이라도 흔들어 줘야 하나 고민했다.
“500골드!”
누군가가 불쑥 외쳤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시골은 소문이 아주 빠르다.
“아, 500골드가 내려왔어.”
“빈디, 하디! 500골드 맞지? 그 마녀라던?”
“마녀 아닌데? 애 같은데?”
“어, 진짜네. 아니야. 그래도 몰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취객들의 화제가 순식간에 하나로 통일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람은 계단을 내려왔다.
하디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오는 가람을 질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연한 시선이 붉어진 발의 붕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독하다는 평가가 시선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가람은 그 시선을 따라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신발을 신지 않았다.
붕대 때문에 신을 수도 없었고, 일단 신발이 없었다. 하디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그 신발을 신으면 되리라.
“하디라고 했던가요?”
“아, 예.”
“내가 아까 부탁했던 물건.”
“어, 물건. 아! 사 뒀어요! 잠시 기다리세요. 저기 뒀으니 꺼내 올게요.”
“아니, 아예 내 방에 가져다 뒀으면 해요. 그리고 뭐 먹을 것 주세요.”
“아, 네! 포도주도 드시겠어요? 직접 담근 거예요. 아주 맛있어요.”
가람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하디가 짐을 꺼내러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여관을 한 차례 훑었다.
작은 탁자 네 개, 큰 탁자 두 개, 그리고 계산대 겸 바가 있는 흔한 구조의 주점이다.
주점 건너편에는 주방으로 향하는 문이 뚫려 있고, 그 입구에는 마른 마늘이나 말린 풀, 마른 고기 따위가 매달려 있다.
그 외에 여러 가지를 더 발견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자신 있게 가람을 500골드라고 불렀던 주제에 이제 와서 한껏 조심스러운 태도로 소곤거리고 있는 수염 북슬북슬한 아저씨들 따위가 그러하다.
가람은 그중 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일부러 순하게 웃어 주었다. 상냥한 인상을 주고 싶어 한 일이었는데, 남자는 도리어 화들짝 놀라더니 더욱 가람을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의도치 않게 가람은 같은 방법으로 남자 세 명을 더 겁을 집어먹게 만든 뒤 하디가 가져다준 음식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침에도 느꼈지만 정말 보잘것없는 음식이다. 멀건 감잣국에 저급으로 보이는 허연 고기가 둥둥 떠 있다. 살코기라기보다 비계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고기인가 싶어 숟가락으로 떠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누군가 불쑥 말했다.
“땅 두더지 고기요. 오늘 아침에 몇 마리 잡았거든.”
이곳에 있는 자 중 드물게 젊은 남자였다. 어두운 등불 탓인지 남자의 머리가 검게 보였다. 실제로는 고동색 머리카락.
남자는 어깨에 기절한 뱀 두어 마리와 허리춤에 청설모 한 마리를 차고 있었다.
제법 단정한 이목구비까지 겹쳐, 가람은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북받쳐 오르다가 현실을 깨닫고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재가 된다.
“웨…….”
웨이크가 아니다. 가람은 거의 직전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너무 흡사했다.
마치 웨이크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아니, 살아 돌아올 리 없지. 직접 반쪽이 된 그를 파묻지 않았던가.
그러나 울렁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어서, 가람이 남자를 보는 시선은 자연히 물기가 어른거리게 되었다.
“음? 방금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뭐, 나는 다이덴이요. 나 알지?”
가람은 남자를 몰랐다. 하지만 낯익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어디선가 보았기 때문에 낯익은 것인지, 아니면 웨이크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낯익은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남자는 허물어진 표정으로 당황하더니 뒤통수를 벅벅 긁으려다 다시 당황했다. 남자의 손에 죽은 참새가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손에는 두더지가 들려 있다.
그는 쩔쩔매다가 결국 참새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 광경은 가람이 절대 참새 요리를 주문하지 않도록 결심하게 만들었다.
“난 어제 아가씨가 왔을 때 안내해 준 사람인데. 여긴 작은 마을이라 외지인이 올 일이 별로 없거든. 게다가 아가씨가 너무 대단한 몰골이었던 터라. 그냥 외지인도 경계할 판에 아가씨는, 내 말 알지?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말라고.”
남자는 웨이크와 달리 말이 많았다. 그는 음식 식겠다며 맛있게 먹으라고 당부하고는 빈디에게 뱀과 청설모, 두더지, 참새를 넘겼다.
그리고 잘 들리진 않았지만, 빈디의 머리를 쓰다듬고, 하디를 가볍게 포옹하는 등의 작별 인사를 건네더니 여관을 떠났다. 제법 친한 모양이었다.
가람은 거의 미지근해진 음식을 먹다가 하디가 포도주를 탁자에 내려놓는 틈을 타 질문했다.
“아까 그 남자는 사냥꾼인가요?”
“네에? 아, 아뇨. 그냥 그건 취미 삼아 하는 일이에요. 진짜는 식료품점에서 일하는데. 아, 혹시 다이덴 오빠한테 볼일이라도?”
하디의 설핏 경계하는 눈초리에서 가람은 어떤 감정을 읽었다. 막 태어난 병아리의 부리처럼 뾰족하고 가녀린, 부드러운 감정. 좋아하는구나.
“아니, 별건 아니에요. 그냥 어제 날 챙겨 줬다는데 기억이 안 나거든요.”
“아아, 손님 정말 장난이 아닌 차림새였다고 빈디가 그러더라고요.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으음, 뭔가 할 말이 있으시면 오늘 이야기하시는 게 좋을걸요. 내일 새벽에 떠난다고 하더라고요.”
“딱히 할 말은 없어요.”
“음. 베록으로 갔다가 온다고 했으니 거의 보름 넘게 걸릴 거예요. 차암, 아빠 갈 때 부탁했으면 됐을 텐데.”
“아빠?”
“저희 아빠도 얼마 전에 포도주 팔러 베록으로 가셨거든요. 이런 작은 마을의 여관에선 만들어서 팔아 봤자 입에 풀칠하는 정도밖에 안 되니까, 돈을 벌려면 도시로 가서 팔아야 하거든요. 이맘때면 늘 가세요.”
“벌이가 괜찮은 모양이죠?”
“물론이죠. 벨바리아의 포도는 유명하니까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다. 벨바리아의 포도주, 포도. 가람은 저도 모르게 불쑥 질문했다.
“혹시 아빠 이름이 제롬이에요?”
가람은 스스로 질문하고도 아직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러나 가람보다 하디가 더욱 놀랐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툭 하고 눈알이 굴러 나오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우리 아빨 알아요!?”
“아, 예전에 잠깐 마차를 얻어 탄 적이 있어서.”
가람은 그렇게 대답하고 하디가 내려놓은 포도주를 한 모금 머금었다. 커다란 놋쇠 잔 뒤로 표정을 숨기고 찰랑이는 포도주를 내려다본다.
한때, 이 포도주가 담긴 통에 화살이 박혔던 적이 있다. 가람의 머리 바로 위로 박혀서 기겁하고 놀랐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만큼 놀랄 자신이 없었다.
가람은 잔 속의 포도주를 단번에 끝까지 비워 냈다. 포도주는 달고 깊으면서도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맛이었다. 자랑할 만한 맛이다.
가람은 입맛을 다시고 빈 잔을 내려놓았다.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러나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달콤한 술을 마셨는데도 입 안이 쓰고 떫었다.
다디단 술이라고 해도 기분을 띄워 주지 못하는 때가 있는 모양이다. 가람은 씁쓸한 기분에 술을 더 마시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와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던 하디는 김이 샌 얼굴로 가람의 등만 바라보았다.
어찌나 매섭게 일어나 계단을 오르는지 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가람은 계단 위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그 후의 일상은 대단히 단조로운 것이었다. 가람은 방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미친 사람처럼 몸을 단련했다.
발이 불편했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단련은 대부분 팔과 몸통에 집중된 것이었다.
목에서 쇠 맛이 나도록 몸을 움직이고 빈약한 식재료로 배를 채우는 사이 나침반은 부쩍부쩍 차올랐다.
가람은 매일 밤 근육통 속에서 잠들면서도 손등을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흘쯤 지나자 적당히 발바닥에 딱지가 앉고 굳어져 걷는 데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가람은 마을의 빈약한 대장간에서 적당한 검을 한 자루 샀다.
살짝 휜 환도의 형태로, 양날 검이다. 시미터와 매우 유사했다. 약간 무겁긴 했지만 잃어버린 메이스의 허전함을 채워 줄 만한 물건이었다.
가람은 한 뼘짜리 단검도 갖고 있었지만 우거진 숲에서 키 큰 잡풀을 헤치고 걷는 데는 이런 커다란 검이 더 쓸 만하다.
게다가 시골의 검이라곤 해도 대장장이의 역작이라 무기로서의 성능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기를 가진 여행자는 무기를 가지지 않은 여행자보다야 훨씬 시비에 말려들 확률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물론 가람의 무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가람이 가진 무기들은 이곳 사람들이 보았을 때 위협을 느끼기 힘들었다.
차라리 같은 부피의 벽돌 한 개가 가람의 권총보다 더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것이다.
가람이 직접 총을 쏴서 성능을 확인시켜 주면 확실한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만, 그때마다 일일이 총을 쏴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이유로, 허리에 검을 차고 있으면 조금 멍청하고 얼뜨기 같은 시비꾼들은 그것만으로 물러날 것이다.
마을에 머문 지 일주일.
가람은 언덕 위의 미루나무에 기대어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발치에는 딱 필요한 물건만 싼 짐이 놓여 있다.
사실 오전에 이 마을을 떠났던 가람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람은 마을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남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것 때문이다. 패스.
감사히도 이번 패스는 이 마을에 있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마을 촌장의 집이 바로 그 위치였다. 난이도로 따지면 최하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가람이 준 좋지 않은 인상 덕분에 일이 어려워졌다. 조용하게 지내면서 마녀니 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늙은 촌장은 끝까지 가람을 날 선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돈을 주며 회유하면 어떨까 했지만 가람은 쉽게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아마 가람이 큰 금액을 제시하면 할수록 그 꼬장꼬장하게 생긴 늙은이는 금액만큼의 불행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돈으로 사람을 쓰면 늘 의심을 산다.
그러나 호감으로 사람을 쓰면 정을 얻는다. 가람은 정을 원하지 않았다.
따뜻하고 몽실몽실한 그것은 끈끈하게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아무리 단단하게 굳은 마음이라도 말랑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가람은 그 힘을 원하지 않았다. 지금은 마음이 굳어 있기를 바랐다.
굳고 굳어 강철보다도 단단해져 어떤 것도 접근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좋았다.
그러는 편이 좋았다. 닿을 때마다 시끄럽게 텅 빈 울림이 퍼지더라도, 그래서 사람들이 꺼려하며 멀어지더라도 그것이 나았다.
사람은 복잡하다. 결코 쉽지 않다. 가람이 웃어 봐야 순식간에 간파당할 것이다.
실제로 촌장은 가람의 가면 같은 웃음을 금세 눈치채고 혀를 찼다. 그러니 촌장을 설득하는 것보다 그 집에 몰래 침입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촌장의 지혜는 깊지만 그 육신은 보잘것없기 때문이다. 잘만 숨어들어 간다면 그 어두운 귀는 가람이 내는 소리를 듣지 못할 것이다.
아침을 먹고 점심때쯤 여관을 나섰는데 어느새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먼 길을 가는 여행자가 느지막이 떠나면 그것도 의심스러운 일이라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노을에 점점 푸른 기가 도는 것을 보니 이 기다림도 얼마 남지 않은 느낌이다.
바람도 서늘한 것이 정말로 밤이 머지않았다. 이 서늘한 바람은 검은 밤을 끌어다가 마을에 덮어 놓을 것이다.
바람이 한 차례 미루나무 잎을 흔들어 놓았다. 가람은 다시 짧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는 마을이지만, 역시 포도나무가 많다. 포도 외의 과일을 키우고 있기나 한가 싶을 정도로 포도 일색이었다.
키 작은 포도나무와 키 작은 집들.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빵 연기가 구수하다.
언뜻 포도 향이 함께 날려 오는 것도 같았다. 평화롭고 평화로운 풍경.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뭐가 즐거워?”
모르드레드는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공간을 열고 나타난 것이다. 차원 문을 연 것 같지는 않고, 그가 가진 능력 중 하나를 사용한 모양이었다.
가람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모르드레드는 그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쾌활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전에 보니까 네 일행들 바닥에 묻던데. 이름이, 웨어카? 말레? 아무튼 잘 묻었더라고. 내가 확인해 보고 왔어. 내년쯤이면 좋은 나무가 자라서 네 강아지 같은 일행들이 주렁주렁 열릴 거야. 하하, 아. 농담이었는데 안 웃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