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때부터 따라왔다는 건가. 가람은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토할 것 같으면 토하면 그만이다.
그런 가람을 보며 조금 머쓱해하던 모르드레드가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모르드레드를, 가람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를 내지도, 소리 지르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저 나무에 기대어 앉은 그 자세 그대로 모르드레드를 올려다볼 뿐이다.
가람의 맑은 시선이 모르드레드의 눈과 마주친다. 텅 비어 있기에 그보다 맑을 수는 없었다. 시선의 교환은 길지 않았다.
“으흠, 여기서 왜 이러고 있을까. 너 바쁘잖아. 빨리 움직여야지.”
채근하던 모르드레드가 주먹을 가볍게 쥐고 손바닥을 쳤다. 연극을 하는 것처럼 과장된 움직임이다.
“아. 알았다. 지금 너 곤란하구나.”
가람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만큼이나 반응이 없으면 흥이 깨어질 만도 하건만, 모르드레드는 끈질기게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이봐, 나한테 맺힌 것 많아 보이는데, 이렇게 하자. 내가 널 도와줄게. 그걸로 다 풀자고. 이번에는 그냥 진짜로 도와주는 거야.”
가람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눈이 가늘게 좁혀지고 미간에 주름이 진다. 어금니를 꽉 물어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모르드레드는 가람이 전혀 흥미를 나타내지 않자 조금 실망했다.
그 표정을 읽고, 가람은 맥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다 풀자고? 풀다니 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이나 한가.
“자아. 패스가 여기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이런 일 많이 겪어 봤어. 나 정도 되면 해결 방법도 간단하지.”
모르드레드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길이의 새카만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색을 또 바꾸었다. 눈 색도 그 전과는 다르다. 빨려들 것 같은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 그 너머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이 보인다.
제롬 씨의 집이, 여관이, 하디가 일하고 있을, 가람이 묵었던 마을이 보였다.
안 돼.
가람은 끔찍한 미래를 예감했다. 잠시, 라고 하기도 무안할 정도로 짧은 시간 후 저 평화로운 풍경은 사라질 것이다. 모르드레드의 얼굴에는 잔인한 빛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모르드레드는 지금껏 잔인한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공포감을 주려고 일부러 무서운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늙은이답게 투덜거렸고, 오히려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은 장난스러운 것이 많았다. 그 장난이, 가람은 두려웠다.
유쾌한 잔인함.
모르드레드는 달팽이에 소금을 뿌리는 꼬마였다. 가람의 눈에 모르드레드가 커다란 소금 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의 마을은 달팽이다. 조금만 있으면 모르드레드가 뿌린 소금에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달팽이다.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안 돼.”
“뭐?”
“안 돼. 하지 마.”
단호한 가람의 말에 모르드레드는 미끄러질 것처럼 매끄럽게 웃었다.
“싫은데? 부담스러워할 것 없어. 순수하게 돕고 싶은 거니까.”
그 순간 쿠웅, 하고 거대한 힘이 마을에 내려앉았다. 비명이나 절망은 없었다.
모르드레드가 구현한 힘은 갑자기 나타났다. 위에서 쏟아지거나 땅에서 솟아 나오거나 하는 연출도 없었다.
아주 조용히, 성질 나쁜 갓난아기조차 잠 깨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소리 없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눈에 다 담기도 힘든 넓은 대지가 시뻘건 화염에 살라 먹히고 있는 광경은 상상으로도 떠올리기 힘든 광경이다. 그런 비현실적인 화염을 실제로 목도하고 있는 가람은 차라리 이 순간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넋이 나가 버렸다.
화염에 잡아먹히는 마을은 마치 뜨거운 물속에서 녹아 가는 얼음 조각처럼 보였다. 언덕 바로 아래에서 마을이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언덕 위로는 어떤 뜨거움도 없다. 눈앞이 온통 새빨간데도 바람은 시원하다. 시원하고 상쾌했다.
모두 다 사라졌다. 식료품점 다이덴을 남몰래 좋아하던 하디도, 겁 많던 주민도, 지킬 것이 많아 꼬장꼬장하던 촌장도, 마을 사람들의 자랑이던 와인, 포도밭, 고향, 누군가가 태어났던, 울었던, 웃었던 모든 장소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새하얀 재뿐이다. 새빨갛게 불타더니 순식간에 하얀 사막이 생긴 것 같았다. 그 앞에서 모르드레드가 몹시 자랑스레 말했다.
“봐, 이제 깨끗해졌다. 들어가서 그냥 주워 오면 돼.”
쾌활하게 말한 모르드레드는 가람에게 패스를 찾을 것을 거듭 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미동 없이 앉아 있자 손수 가람의 손을 잡아끌고 공간을 넘어 하얀 마을 안으로 내려섰다.
지붕이나 문, 창문, 돌벽까지 모조리 하얗게 재가 되었기 때문에 새하얀 재로 만들어진 허허벌판에 서 있는 모양새였다.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촌장의 집이 있었을 만한 위치에서 패스를 발견하기란 정말 쉬웠다.
“자자, 챙기라고. 네가 좋아하는 패스잖아.”
모르드레드는 손수 가람의 손을 잡아끌어 패스를 흡수하도록 해 주었다. 가람은 넋이 나간 가운데에서도 반사적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행동에 모르드레드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러나 가람의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미소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목이 메여 말의 중간이 기묘하게 꺾였다. 모르드레드는 몸을 기울여 가람이 울고 있나 확인했다.
그러나 가람의 얼굴은 버석버석하게 메말라 곧 바스라질 것 같았다. 물기라곤 없었다.
“응?”
“왜 다 죽인 거야. 왜? 왜? 왜 다 죽인 거야? 당신한텐 목숨이 우스워? 사람 목숨이 우습냐고!”
좀 더, 좀 더 비난을 퍼부어 주고 싶었는데, 듣기만 해도 자살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심한 말을 퍼부어 주고 싶었는데.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아연한 머리통으로는 그리 많은 단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가람은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결국 원론적인 비난뿐이다. 사람 목숨? 저놈에게는 당연히 우습겠지!
“뭐, 우습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심각하지도 않지. 너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모르드레드가 오히려 타이르자 가람은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어찔해졌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가람은 허리춤에서 긴 검을 한 자루 꺼내었다. 풀을 헤치고 다니기 위해 구입한 검이다.
막 구입한 신품이라 날이 파랗게 서 있었다. 물론 무력으로 모르드레드를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분노에 휩싸여 뭐라도 하지 않으면 몸이 펑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그래, 그럼 안 심각하니까 어디 한번 죽어 봐.”
“원한다면.”
모르드레드는 별일 아닌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가람은 검을 치켜들고 체중을 실어 단숨에 휘둘렀다.
모르드레드가 자르라며 정말로 목을 주욱 내밀어 준 덕분에 단단한 뼈에도 불구하고 목이 단숨에 뎅겅 잘려 나갔다.
마치 공처럼 튕겨 나간 그 머리는 몇 바퀴 구르며 허연 재를 콩고물마냥 묻히더니 작게 불평했다.
“아, 입에 재 들어왔잖아. 어때, 기분 좀 풀려?”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몸이 그 머리를 찾아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목을 잘랐는데도 피가 별로 안 난다. 그러고 보니 불사라고 했던가.
“아니, 이 정도로는 안 돼.”
“이봐. 날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별로 상관없어. 하지만 좀 힘들긴 할 거야. 보다시피 나, 어지간하면 안 죽거든.”
저 머리는 폐도 없는데 말을 한다. 그렇다면 피가 흐르지 않는 것도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가람은 재투성이가 된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집어 들었다.
“아니, 그래서 다행이야.”
가람은 짐에서 모포를 꺼내어 펴고 그 위에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올려놓았다. 불사라고 했으니 이대로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쪽이 난 상태로 계속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가람은 믿을 수 없게도 자신이 즐거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르드레드는 뒤늦게 가람의 의도를 깨달았다.
“아하, 날 이렇게 갖고 다니려고? 좋은 생각이긴 한데, 어차피 내가 차원 문을 열고 저쪽으로 돌아가면 별 소용 없는 거 알아?”
“머리만 돌아가겠지. 죽지 않았으니 몸이 생길 일도 없을 거고. 아무도 없는 베이스캠프에서 머리만 있는 상태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가람은 처음으로 모르드레드의 얼굴이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가람이 머리를 갖고 다니는 이상 저 몸이 모르드레드와 달라붙을 일은 없다. 그리고 회복하지도 못할 것이다. 가람이 그렇게 만들 거니까.
어쨌거나, 모든 것을 장난처럼 여기던 그 잘난 낯짝이 굳은 것을 보니 모처럼 즐거웠다.
가람은 등짐을 메고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그 손에는 도시락 가방 같은 보퉁이가 들려 있다.
딱 사람 머리 하나가 들어간다면 적당할 것 같은 크기였다. 그것을 가볍게 흔들며 가람은 아름다운 포도의 도시 벨바리아를 떠났다.
막 잿더미로 변했음에도 열기 하나 없는 그 마을의 바람은 청량하고 맑아 여행자의 걸음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 * *
“이봐,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서 재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 안 들어? 날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야?”
모닥불 위에서 익어 가고 있는 모르드레드가 불평했다. 가람은 그의 목 아랫부분이 더 잘 익도록 나뭇가지로 각도를 바꿔 누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재생 못 하잖아.”
가람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며 모르드레드의 목을 모닥불 안으로 좀 더 파묻었다. 그는 재생하지 못한다. 절대로 할 수 없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불사의 몸이었다면 몰라도, 그 능력이 패스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리고 재생과 같은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한 부분이라면 절대 불가능이었다.
베이스캠프에서 패스로 구입한 능력은 아무 쓸모 없었다. 차원 문을 열었을 때 그대로 고정되어, 패스로 인한 어떤 힘도 유동하지 않는다. 마치 그 부분만 정지를 시킨 것처럼 멈춰 버린다.
무슨 소원이라도 가능하다는 그 패스의 힘은, 우습게도 베이스캠프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람 또한 아주 예전에, 바다거북 때 구입한 능력인 물속에서 한 시간 이상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시험해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패스의 나침반 또한 저쪽 세상에서는 전혀 충전되지 않았다.
만약 충전이 되었더라면 가람은 내내 베이스캠프에 있다가, 충전이 되었을 때만 이쪽으로 넘어와 패스를 찾으러 다녔을 것이다.
“헤에, 알고 있었어? 저축만 하는 줄 알았더니 쓰기도 하는 모양이네. 그래, 뭘 산 거야? 치유 능력? 아니면 매혹술?”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
가람은 의외로 흔쾌히 대답해 주었다. 그것에 놀라 잠시 침묵하던 모르드레드가 곧 조롱 투로 입을 열었다.
“뭐야? 그 쓸모없어 보이는 능력은? 너무 보잘것없잖아.”
“그러게. 무한히 되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구입한 반불사의 능력보다는 덜하겠지.”
가람의 대답에 모르드레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얼굴에 가람은 괜히 나무 꼬챙이로 뜨거운 재를 뿌려 주었다.
재 가루가 코와 눈에 들어갔는지 눈을 깜빡이고, 퉤퉤 침을 뱉으려던 모르드레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으윽, 심술부리지 마. 이봐, 내가 내 몸을 소환해서 가져다 붙이면 어쩌려고? 사실 힘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는 것 하나 없지 않아?”
“전에 베녹사스에서 네 머리 잘랐을 때 잠깐 느꼈는데, 머리 자른 후에 네 힘이 다 사라졌었지. 널 조각내고 1초 정도는 패스로 산 힘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었어. 아마, 네 능력은 네 몸을 매개로 하는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무력하게 변했고.”
“…….”
두 사람 다 조용해졌다. 특히 모르드레드는 더욱 조용해졌다. 짙은 낭패의 기운에 가람은 모닥불을 헤집던 나뭇가지로 그의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좀 더 폭 파묻혀서 잘 익어야 한다.
“……내가 패스로 뭔가 구입하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
“패스로? 너 패스 못 쓰잖아. 문양도 없고.”
“문양이 왜 없어. 사실 문양은 내 눈 안에…….”
“아니, 손등에 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전에, 생각 안 나? 치매가 왔나? 내 패스 가로챌 때, 손등으로 흡수했잖아. 기억하고 있어 아직도. 그런 주제에 마치 다른 곳에 문양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려고, 내 문양이 손등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둥 헛소리했었지.”
다시 조용해진 가운데 모닥불 불똥 튀는 소리만 탁탁 이어졌다.
막다른 길에 몰린 듯 보이는 모르드레드지만 사실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패스로 구매한 능력은 베이스캠프에서 사용할 수 없다.
즉 모르드레드가 이렇게 목이 잘린 채 나불거릴 수 있는 것이 패스의 힘이라면 그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순간 즉사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 돌아오겠지.
그래서 가람은 그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관리하고 있었다.
사지가 없는 동그란 머리통이 갈 수 있는 방향이라고 해 봐야 땅바닥이다. 바닥에 차원 문을 열고 그리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을 우려해 가람은 그를 늘 허리춤이나 나뭇가지 등 아래로 떨어질 수 없는 어딘가에 매달아 두었고, 혹은 제 몸에 올려 두기도 했다. 차원 문을 열어도 자신의 몸에 막혀 들어갈 수 없도록.
그 외에도 번거로운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것은 모르드레드의 재생 능력이다.
모르드레드가 구입한 불사, 아니, 반불사의 능력은 온몸이 재가 되어 그 형질이 변해 버리지 않는 이상 끝없이 재생하는 끈질긴 능력이었다.
머리를 자른 지 3일이 되었는데, 가람은 벌써 그 목 아래를 열 번도 넘게 칼질해야 했다.
반나절 만에 머리 아래로 검지 두 마디 정도이던 목이 어느새 쇄골쯤까지 재생되어 버렸다. 혀를 내두를 만한 일이다.
번번이 재생한 그 아래를 칼로 베어 내기를 반복하던 가람은 결국 귀찮음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목을 굽고 있는 것이었다.
불에 익어 표면에 화상을 입으면 그만큼 회복 속도가 더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솔직히 다 핑계였다. 그냥 모르드레드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뿐이다.
살아 있는 머리를 굽고 있는데도 기괴하다는 생각보다 재미있다는 감정이 앞섰다. 이번에 소금 주머니를 들고 있는 사람은 가람이었다.
“산 채로 머리가 구워지는 기분은 어때?”
“아프지.”
모닥불 위에서 목이 익어 가는 남자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작은 여자.
목이 잘린 당사자도, 목을 자른 당사자도 너무나 태연해 일견 화기애애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차분하고 평화로워서 차라도 한 잔 앞에 놓여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가람은 화를 내지 않았다. 상대가 이만큼이나 악의가 없으면, 도리어 기운이 빠지는 법이다. 싸워도 그저 혼자 싸우고 있는 것 같은 씁쓸함만 맛볼 뿐.
흥분할수록 모르드레드는 자신을 저 위에서 내려다본다. 그에게는 분노 한 조각, 감정 한 자락마저 아까웠다.
화를 낼수록 상대가 좋아한다면 오히려 기운 빼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실속을 챙기는 편이 좋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속으로 쌓이고 있지만, 화를 내고 모르드레드에게 조롱당한다면 이성을 잃고 그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
유일한 탈출구를 제 손으로 열어 주게 되는 것이다.
가람은 적당히 익은 모르드레드를 모닥불 위에서 내려놓았다. 계속 익히다가 정말로 완전히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갈색으로 잘 익은 아랫부분을 꾹꾹 누르자 육즙이 흙바닥을 적셨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정말로 잘생긴 머리통이다. 가람은 그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곳은 벨바리아에서 사흘 떨어진, 북쪽의 길가로 야수들판과 제법 가까운 곳이었다.
이대로 계속 북쪽으로 걷다가 동쪽으로 가면 베록에 닿게 된다.
가람은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다가 주먹으로 흙을 한 움큼 퍼 모르드레드의 입에 처넣었다.
갑자기 흙을 퍼먹게 된 모르드레드가 항의하려고 했지만, 거푸 먹여진 흙이 입 안을 가득 채워 버려 말을 할 수 없었다.
“으읍, 읍?”
“조용히 하고 있는 거야.”
가람은 강하게 경고하고 피가 새지 않도록 가죽 천으로 그 머리를 싸매었다. 꽁꽁 묶어 두니 영락없는 짐 보따리다.
꼼꼼하게 잘 싸매어진 것을 확인한 가람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한다. 야수들판과 거의 맞닿아 있기 때문인지 이곳은 우거진 숲이 별로 없었다.
나무가 있긴 했지만 듬성듬성해서, 시야를 가릴 만한 것이 거의 없다. 키 작은 풀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은 모습을 감춰 줄 수 없다.
누군가가 다가온다면 멀찍이서부터 그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가람은 마음 놓고 모르드레드의 머리통을 꺼내 놓았던 것이다.
다가오는 인영은 노새가 끌고 있는 수레였다. 해가 떨어져도 한참 전에 떨어졌는데, 어두운 길을 잘도 그렇게 가고 있구나 싶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가겠군. 가람은 짧게 생각하고 멀리 보이는 수레 양쪽에 매달린 램프의 노란 불을 바라보았다.
그림자로 작은 말의 인영과 사람의 다리 부분이 슬쩍 나타났다가, 어둠 속으로 가려지길 반복했다.
램프가 많이 흔들리는 모양이었다. 길을 밝히기 위한 용도인 것 같은데, 기름이 아니라 양초인지 그리 밝지 않았다.
기름 램프를 살 수 없을 정도의 형편인데, 무리해서 양초를 켜고 지나가고 있다면 그냥 스쳐 갈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가까이 온 수레는 가람이 피워 둔 모닥불로부터 1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점점 속도를 늦췄다.
수레가 모닥불로 더 가까이 오자 가람은 수레에 탄 두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