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16화 (116/256)

6화

“제롬…….”

아저씨.

가람은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누군가의 농간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옆에는 다이덴도 앉아 있었다.

베록으로 간다더니, 오는 길에 만난 모양이었다. 가람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두 사람을 맞이했다.

수레에서 내린 두 남자도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제롬은 곧 표정을 풀고 밝게 웃으며 가람에 대한 반가움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아가씨였구먼! 다이덴이 고약한 일을 당한 것 같은 동양 여자애가 우리 여관에 묵고 있다고 했었는데, 어쩐지 아가씨일 것 같은 생각이 들더라니. 내 감이 아직 죽지 않았군!”

“아……. 안녕하세요.”

가람이 어색하게 마주 인사하자 다이덴이 까딱 고개를 숙였다. 답지 않게 쑥스러움을 타는 태도라, 제롬이 철썩 소리 나게 그 등을 후려쳤다.

“어서 앉아. 아가씨, 불 좀 빌리겠네. 이야, 못 본 사이 더 예뻐졌군. 이맘때 여자애들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예뻐진다니까. 자자, 내가 베록에서 먹을 것을 잔뜩 사 왔네. 이것도 인연이니 같이 맛보세나.”

그렇게 말한 제롬은 다이덴과 가람을 모닥불에 앉히더니 수레에서 무언가를 잔뜩 꺼내 들고 돌아왔다.

가람은 그가 불가에 그것들을 늘어놓을 때까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가까스로 진정하고 그가 꺼내 놓은 것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 보지 못하고 결국 탁탁 튀는 불똥으로 시선을 옮기고 말았다.

“으음, 별론가? 내 딸애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 샀는데. 아무래도 여자들 눈이랑은 달라서.”

머리를 긁적거리는 제롬이 꺼내 놓은 것들은 한눈에도 앙증맞은 장신구와 군것질거리, 알록달록 색색으로 아름다운 사탕이었다.

가람은 그가 실망하며 걱정스러워하자 손사래 치며 부정했다.

“아니에요. 다 예쁘네요. 다들 좋아할 거예요.”

죽었지만.

가람은 목 안으로 치미는 말을 꾹 삼켰다. 제롬은 가람의 말이 너무나 기쁜지 박수까지 치며 웃더니 꺼내 놓은 장신구들 중 동글동글한 유리구슬을 내밀었다.

“이것 참, 고마워. 이건 아가씨가 가져. 머리에다 달아서 장식하는 거라는데, 난 어떻게 쓰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니, 따님 주려고 사신 건데…….”

“아냐, 아냐. 많으니 아가씨가 가져. 한창 예쁜 옷 입고 멋 부릴 나이인데, 차림새를 보니 가슴이 아프구먼. 내 딸애들은 바쁜데도 이렇게 예쁜 것들을 잔뜩 사다 주면 하루 종일 머리를 만진다네. 작은애가 큰애를 꾸며 주기도 하고, 큰애가 작은애를 꾸며 주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건 싸구려지만, 좋아해 주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 그렇게 꾸미며 노는 모습을 보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가 버린다네. 너무 귀여워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겠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제롬의 입가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었다. 얼굴도 행복에 흠뻑 취한 모습이다.

잠시 그 행복에 젖어 있던 제롬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급히 군것질거리를 권했다.

“이런, 오면서도 산 장신구들을 애들이 좋아할까 하고 너무 걱정이 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안부도 안 물었군. 정신없는 아저씨를 용서하게나. 그러니까 내 말은, 아가씨도 이걸로 꾸며 주면 다음에 볼 때 내가 더 기쁠 것 같아. 베록에서 우리 마을로 가는 길이 이 길뿐이라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응?”

가람은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다이덴이라는 남자가 전했다는 자신의 끔찍한 몰골은 어찌 된 건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제롬에게서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한 배려를 읽었다.

자신이 질문했다가 혹시나 좋지 않은 기억을 꺼내기라도 할까 봐 너무나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딸이 둘이나 있으니 그런 면도 단련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네. 그럴게요.”

“그래, 아마 끈이나 핀에 꿰어서 쓰는 물건인 것 같아. 이크, 밥은 먹었는가?”

가람은 문득 자신이 점심도, 저녁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르드레드를 굽느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제롬은 가람의 표정을 읽고 주섬주섬 먹을거리를 꺼내 놓았다.

“이거 내장 빼고 반훈제한 숭어라는데, 이번에 가니까 새로 나왔더군. 역시 베록은 신기한 것들이 많아. 생선을 어떻게 훈제할 생각을 했지? 내가 먹어 보니 아주 맛있더군. 이거랑, 빵이랑, 과일 조림이랑 먹으면 될 것 같아. 예전보다는 훨씬 진수성찬이지?”

제롬은 환하게 웃으며 흰 빵을 넓게 잘라 숭어 살과 과일 조림을 올려 주었다.

분명 자식들을 위한 음식일 텐데 아낌이 없었다. 가람은 말없이 제롬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빵을 받아 들었다.

다이덴은 보지 않는 척하면서 그런 가람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완전히 마녀 같은 몰골이더니, 좀 씻고 제대로 된 옷을 입었다고 예쁘장해졌다.

딱히 미인은 아니었지만, 이국적인 얼굴이라 신기해서 자꾸 눈이 갔다. 진짜 외국인이었구나 싶어서.

“자, 어서 들어. 내가 여관에 같이 있었으면 대접을 잘해 줬을 텐데. 하디가 밥은 잘 주던가?”

“아, 예.”

가람은 어색하게 빵을 씹었다. 그전의 이빨도 들어가지 않던 빵에 비해 정말 좋은 음식이었다. 그래서 더 삼키기가 힘이 들었다.

가람은 천천히, 아주 오랫동안 그 빵을 먹고, 형식적인 대화로 제롬에게 장단을 맞춰 주었다.

제롬은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자신이 눈치 없이 피곤할 사람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손수 모포를 깔고 자리를 정비해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밤새 잠을 자고, 다음 날 제롬이 챙겨 준 아침을 먹고,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 그에게 가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말을 할 수 없었다. 기쁨에 부풀어 피곤한 줄도 모르는 이 사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가람은 그저 떠나는 제롬에게 보잘것없는 인사 한마디밖에 해 줄 수 없었다.

“아저씨, 몸 건강히 잘 지내세요.”

제롬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곧 크게 웃으며 가람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가람의 망토도 더 여미어 주며, 아가씨야말로 찬 데서 자지 말고 몸조심하라며, 늘 걱정이라고 눈썹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수레 위에서 내내 가람을 뒤돌아보며 아쉬워했다.

자신의 자식들을 보고 싶어 하는 와중에도 그렇게 가람을 걱정했다. 그저, 예전에 길 위에서 한 번 만난 사람일 뿐인데.

가람은 그가 떠난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수레가 능선 너머로 사라져 자취를 감출 때까지 내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잿더미만 남은 고향으로 힘차게 떠난 제롬 아저씨를 하염없이 보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 있는 것들은 이렇게나, 쉽게 잃을 수 있는 것들인데.

가람 자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리함이나 오랜 세월 닦아 온 통찰력, 이 세상에 관한 지식들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늘 가람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었고, 그들은 기꺼이 그것들을 가람에게 빌려 주었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그림자를 따라다니며 그들을 모두 죽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재미있는 게임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이곳에 와서 소중해진 사람들을 되도록 그 게임판 위로 올려놓고 싶지 않았다.

가람은 자신 앞에 놓인 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외면했다. 길의 끝에는 베록이 있다.

길만 따라가면 베록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다면 지나는 길에 트리거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의 발은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강을 건너서 칼츠버그에 도착할 것이다.

베록의 위쪽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 하지만 가람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도시.

괜찮을 것 같다. 책에서 보기에도 좋은 도시라 했다. 어차피 남는 것은 시간이고, 식량이나 여행 물자 조달도 걱정 없다. 가람은 자신 앞의 풀을 으스러져라 밟았다.

* * *

시간이 뱉어 내는 많은 찌꺼기 중 하나가 망각이라는 의견은 꽤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찌꺼기는 대부분 기억해야 하는 사실을 잊게 하거나, 혹은 새 물건들을 낡게 하는 등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저지른다.

그러나 가람에게 있어서 이번만큼은 그 찌꺼기가 거름이 되어 주었다. 메말라 갈라지기 직전의 마음에 양분이 되어 주었다.

시뻘건 피가 뚝뚝 떨어졌던 자리라도 다음 날 일어나 보면 검은 얼룩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 얼룩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질 것이고, 종국에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떠올리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게 얼룩이 된 핏자국을 점점 걸어가며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것.

그것이 가람이 그날의, 두 사람을 묻었던 날의 기억을 바라보는 자세였다. 비록 핏자국이 아직 덜 말라 선명하게 남아 있더라도.

가람은 해야 할 일도,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람이 하는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틀에 한 번 베이스캠프로 돌아갈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세 명이서 하던 일을 혼자 하려니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여섯 시간에 한 번씩 모르드레드를 잘라 주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모르드레드를 자르고, 생수병의 물로 천을 적셔 대충 얼굴을 닦고 입 안도 헹구고, 무기를 정비하고, 아침 먹을 준비를 하면서 지도를 보고 불을 피우고, 저쪽 세계로 넘어가서 장을 봐 오고, 적당한 방향을 가늠하면서 날씨를 살피는 등 가람이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다.

거기다 간혹 음식 냄새를 맡고 나타난 라쿠카는 가람을 매우 귀찮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격 연습하기 좋은 대상이 되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놈을 서너 발로도 죽이기 힘들었지만 이제는 제법 멀리 있는 놈이라도 한 방에 머리를 날려 버릴 수 있다.

거의 열에 한 번 정도 실패할까 말까 하는 실력이 된 것이다.

어깨를 기준으로 팔을 곧게 뻗으면 몇 미터 앞 어느 곳에 명중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제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어서, 그에 따른 성취감도 꽤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총알을 아끼지 않고 쏘아 댄 지 벌써 1년이 넘었으니 실력이 늘 만도 한 것이다.

길을 벗어난 것에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가람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숲속에서 지내는 시간을 늘렸다.

무리해서 걸으면 하루 만에 넘을 수 있는 봉우리를 일부러 이틀에 걸쳐 넘고, 도망가는 라쿠카를 일부러 잡아 죽였다.

사격 연습 겸, 도망간 놈이 많은 숫자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예방하는 차원에서다.

사실 그 직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라도 선뜻 마을로 들어가긴 힘들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참새 눈곱만도 못한 처지가 되었다고 해도, 그 원흉을 갖고 마을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더욱 꺼려졌다.

그 꺼림칙함은 가람의 발을 붙잡아서 패스가 충전될 때까지 숲속을 헤매게 만들었다.

그렇게 스무 날이 지났을 무렵, 가람의 나침반이 충전되었다. 바늘의 길이는 둘러싼 테두리를 찌를 듯했다.

원을 한참 벗어난 듯 그 방향으로 아무리 걸어도 바늘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무작정 걷기를 3일,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숲이 사라졌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더니,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이 나타났다. 눈앞이 온통 새파랗다.

길의 끝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붉은 바다 바위로 만들어진 절벽 아래에 파도가 사납게 부딪힌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했다. 가볍게 봐도 20미터는 넘을 것 같은 높이다. 덕분에 이렇게 파도가 강한데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붉은 바위를 후려치는 푸른 파도. 깎여 나간 절벽 아래는 둥글게 패여 있다.

가람은 파도의 신경질적인 흰 포말을 바라보다가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바늘은 곧게 수평선을 가리키고 있다.

또 바다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