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바다에 관해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
특히 제대로 된 잠수 장비도 없이 시커먼 바닷속으로 뛰어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가람을 우울하게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이걸로 두 번째가 될 거라는 사실과, 그것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가람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다.
가람은 그렇게 조금 우울한 기분으로 칼츠버그에 도착했다. 정오가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가람은 자신이 어째서 칼츠버그에 오기로 했는지, 다른 도시도 아닌 칼츠버그로 가려고 마음먹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지은 것 같은 새하얀 건물, 물결치는 보석 같은 바다 위에 작은 배들이 가득하다. 멀리 보이는 작은 하얀 돛들이 아기자기한 맛이 있었다.
연안의 낚싯배들, 근처 도시를 오가는 작은 배들, 도크에 위세 좋게 정박하는 거대한 상선과 마치 새끼라도 된 것처럼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선박들.
높다란 건물도 많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세련되다. 가람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길거리에는 물자들이 풍족하고, 기기묘묘한 신기한 물건들도 많다.
가람은 남자 세 명이 자신의 키보다도 큰 기다란 생선을 어깨에 지고 옮기는 것을 바라보다가 제롬을 떠올렸다.
가람이 예전에 아무렇게나 둘러댄 이야기에 제롬이 칼츠버그를 언급했었다.
아마 그를 만난 것이 가람조차 잊고 있던 기억의 끄트머리를 자극한 모양이다. 무의식이란 어쩌면 이렇게 간사할까.
가람은 아름다운 도시를 바라보았다. 제롬은 이 아름다운 도시에 그의 사랑스러운 자식들과 함께 오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을 때, 가람은 그가 어린아이처럼 꿈꾸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음을 기억해 냈다.
그 말대로다. 꿈꿀 만한 도시였다. 베록과 같은 항구 도시인 덕분에 특유의 활기와 풍요로움이 가득하고, 바랄라인과 가까운 덕분에 무역 도시로도 이름이 높다.
베록이 생선이나 먹을거리로 생기가 있다면, 칼츠버그는 온갖 이국적인 귀한 물건들이 넘쳐 나는 부유한 도시 같은 느낌이다. 바랄라인보다 오히려 이쪽이 더 수도 같았다.
자신의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는 말에 제롬이 자연스럽게 칼츠버그를 떠올렸던 만큼, 거리 곳곳에서 심심찮게 동양인을 볼 수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질리도록 따라붙었던 신기해하는 시선이 이곳에서는 섭섭할 정도로 없었다.
대충 섞여 들기에는 좋을 것 같지만, 대신 이제 어설픈 동양인 행세는 끝이다. 얕은 거짓말은 금세 티가 날 테니, 될 수 있으면 말을 아끼는 편이 좋으리라.
가람은 깨끗한 길을 따라 걷다가 새하얀 모래로 만든 건물들에서 또다시 이 도시의 특별함을 발견했다.
보통 이쪽 세계의 창문이란, 벽의 옆구리에 난 환풍 구멍의 나무로 만든 덮개였다.
경치를 감상할 목적으로 유리로 창문을 해 넣은 것은 예전 마법 열차에서, 그리고 고급 여관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도시는 그냥 평범한 집도 유리로 된 창문을 달고 있었다. 예쁘장한 분홍색 커튼이 늘어져 있기도 했다. 창가에 놓인 자그마한 화분은 여유를 물씬 느끼게 한다.
색감 자체가 다르다. 아름답다는 단어가 그대로 어울리는 도시였다.
그 아름다운 도시의 아름다운 거리에서, 자신은 늙은 남자의 나이 많은 머리통을 가죽 주머니에 숨겨 들고 있다.
가람은 다시 우울해지려다가 한숨을 내쉬고 짧게 기합을 넣었다.
벌써부터 우울해지면 안 된다. 기운을 내야지. 언젠가 좋은 날도 올 것이다. 시간은 무한하게 있고, 가능성 또한 무한하다.
언젠가 지금의 이 처지를 가벼운 농담거리로 쓸 수 있을 만큼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가람은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가람이 그렇게 전의를 다지는 순간, 갑자기 누군가가 가람의 어깨를 잡아 멈추게 했다.
손에 수상한 것을 들고 있는 가람은 지레 찔려서 잔뜩 경계하며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남자였다. 제법 잘생긴 남자. 깔끔한 베이지색 셔츠를 팔뚝을 걷어 입고, 가죽조끼를 걸쳤다.
밝은 금발에, 가람보다 흰 피부, 잘 정돈된 이목구비까지 흠잡을 곳 없는 준수한 남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가람은 이 남자를 처음 본다.
“누구시죠?”
“아, 발밑을 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남자는 짧게 설명하고 가람 앞의 돌부리를 눈짓하며 싱긋 웃었다. 조심해야지, 하고 등을 두드리며 빠지려는 손을 가람이 낚아채듯 잡아 비틀었다.
남자의 손에는 언제 빼내었는지 모를 가람의 돈주머니가 들려 있다.
사실 돈주머니 안에는 500골드 정도밖에 없지만, 보통 사람에게 500골드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가람에게 있어서는 도둑맞아도 별로 상관없는 푼돈일 뿐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이 잘생긴 소매치기의 손을 잡아 비튼 것은 이런 도시에서 풋내기로 소문이 나면 피곤해지기 때문이었다.
“이거 제 것 같은데.”
“아, 하하. 그러게. 손에 잘못 걸렸나.”
보는 눈이 많은 대로변이라 남자는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었다. 하지만 이곳이 인적이 드문 장소였다면 대번에 안면을 바꾸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가람 같은 작은 여자 하나, 가볍게 기절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가람은 남자의 뻔한 변명을 가소로운 웃음으로 받아 주었다. 인생이 불쌍해서 그냥 보내 준다는 표정이다.
가죽 주머니 속의 모르드레드가 본다면 없는 손을 짜내어서라도 박수를 치고, 트리거가 보았다면 혓바닥으로 박수를 쳤을 얼굴이었다.
“그냥 가요.”
남자는 두 손을 들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곧 쏜살같이 달려 사라졌다. 가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매콤한 냄새를 맡고 가판대로 향했다.
이곳의 길거리 음식은 베록처럼 대부분 해산물이 많았는데, 다만 향신료의 차이가 컸다.
베록이 흔히 볼 수 있는 잡풀로 향과 맛을 낸다면 이곳은 온갖 향신료로 화려하게 맛을 낸다.
가람이 다가간 가판대에도 온갖 먹을거리가 많았다. 숯 위에서 꼬챙이에 꿰어 구워지고 있는 바닷가재만 한 새우와 매운 양념을 끼얹은 커다란 게, 그 옆에는 야채와 볶아진 조개 관자가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거 얼마예요?”
가람은 커다란 게를 집으며 질문했다. 4실버. 길거리 음식치고는 꽤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이 게가 제법 고급에 속하는 먹을거리인지 주변 사람들은 그 가격을 듣고도 담담했다.
비싸긴 하지만,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바가지를 씌우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세요. 그리고 저것도.”
하루 종일 걸었더니 몹시 허기가 진다. 가판대의 음식들은 모두 맛있어 보이는 것뿐이라, 가람은 일단 이곳에서 허기를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가람은 그렇게 얼굴 두 개만 한 게 한 마리를 뽀득뽀득 소리 내어 먹어 치우고, 새우와 관자 볶음까지 시켜 먹은 후에야 여관을 찾아 떠났다.
살아 있다면 배를 채워야 하는 법이다.
Chapter 16
배가 차면 사람은 조금 더 여유롭고 느긋해진다. 딱딱하던 가람의 걸음걸이가 부드럽게 바뀌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무엇이든 불문하고 걷어찰 것 같던 사나운 걸음이 무릎을 부드럽게 휘는 매끄러운 것으로 바뀐다.
가람은 양념 묻은 손을 우물가에서 씻어 버리고 물가에서 빨래하는 아낙에게 괜찮은 여관을 알아보았다. 우물터에 물값을 받는 사람 따위는 없다. 바랄라인보다 훨씬 좋은 도시다.
“여관? 글쎄, 여기 여관은 대부분 다 고만고만하지. 저쪽, 빨간색 등잔걸이가 달린 집 보여? 그 옆에 난 길로 쭉 가면 ‘노래하는 부지깽이’가 나온다네.”
“노래하는 부지깽이요?”
괴상한 이름이라 생각해 가람이 되묻자 아낙은 귀찮은 손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가 말없이 빨래를 두드리자 그 옆에서 야채를 다듬던 여자가 대신 대답했다.
슬쩍 얼굴에 주름이 비칠 만한 나이대로 보였지만, 주근깨와 순박한 갈색 눈 덕분에 나이답지 않게 순진한 인상을 주었다.
“이상한 이름이지? 이 동네에 와서 그 여관 이름 들은 외지인들은 열에 아홉은 꼭 되묻지. 그러곤 궁금해서 찾아간다니까. 그런 것 보면 그 주인의 상술도 보통이 아니야.”
“칼츠버그에서 나고 자란 칼츠버그 토박이니까 당연하지. 열두 살 먹은 칼츠버그 꼬맹이가 크페타인 상인을 홀랑 벗겨 먹는 모습을 아가씨도 봤어야 해. 순진한 척하면서 10골드짜리 가죽을 2골드에 후려쳐서 사더라니까?”
“크페타인 사람들이 어린아이에 약한 게 하루 이틀 일이야? 그래도 칼츠버그 어린애들은 양반이야. 내가 분명 서른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일곱 살인 척하는 동양인도 있다니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크페타인 사람들은 너무 불쌍해.”
그렇게 말한 여자는 가람을 빤히 바라보더니 충고했다.
“아가씨도 순진한 크페타인 사람 속여 먹지 말라고. 지금이야 홀랑 속아 넘어가지만, 나중에 크페타인에서 동양인에 대한 소문이 안 좋게 나면 결국 손해 보는 건 그쪽이야. 알겠어? 흠, 그럴 생각 없었다면 내 괜한 노파심이겠지만. 그래도!”
찔리는 구석이 있는 가람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후로, 올해 감자값이 너무 올랐다느니, 내일 그물 털이를 가야겠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람은 적당히 그것들을 주워듣다가 시간이 되었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노래하는 부지깽이이다.
노래하는 부지깽이는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여관이었다. 아담하고 정갈한 모습에 가람은 일단 여관이 마음에 들었다.
집 주변에 술꾼이 토해 놓은 토사물도 없고 유리창으로 보이는 실내도 깔끔하다.
비록 기포가 가득한 저급의 불투명 유리였지만, 문 안으로 들어서 확인해 보니 역시 괜찮은 여관이었다. 이 정도면 베개 속에 벼룩이 있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이라 여관 안에는 늦은 점심을 먹는 몇몇 손님밖에 없었다.
한쪽에 놓인 기다란 바는 완전히 텅 비어 있고, 여덟 개 남짓 되는 테이블의 절반 정도가 차 있다.
낮인데도 이만큼이나 손님이 있다면 대단히 장사가 잘 되는 여관에 속한다.
여관 안으로 들어선 가람이 내부를 두리번거리고 있자 점원이 다가왔다.
저녁에 몰려들 손님 맞이할 준비 하느라 정신없이 바쁜지 손에는 맥주 통에서 뽑아 온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코르크 마개가 들려 있었다. 주방에서 일을 돕다가 누군가 문으로 들어오니 그대로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어서 오세요. 묵으실 건가요? 식사만 하시는 분인가요?”
“둘 다 할 생각인데. 혹시 목욕도 가능한가요?”
“아, 되긴 하는데, 지금은 좀 바빠서 기다리셔야 해요.”
“그럼 일단 방부터. 제일 좋은 방으로, 3일 선불 낼게요. 식사는 하고 왔으니까 됐고. 아. 맛이 좀 연한 마실 거리 있으면 줘요.”
“아. 그럼 쌀차가 있는데 그걸로 드릴게요. 남아 있는 방 중에 가장 좋은 방은 1박에 12실버예요. 3일 치면, 하루 12실버씩이고 목욕까지 같이 계산하면, 아, 음, 잠시만요.”
점원이 투박한 종이에 열심히 계산하는 것을 가람은 묵묵히 서서 기다렸다.
가람은 이미 암산을 끝냈지만, 굳이 입 아프게 이야기해 봐야 믿지도 않을 거다. 식사에 목욕까지 포함하면 대략 40실버 조금 못 되게 나올 것 같았다.
베록보다 조금 비싼 감이 있지만, 도시의 특성을 생각하면 오히려 저렴한 편에 속했다. 이곳은 무려 공작령인 데다, 사람들의 수입 수준도 베록보다 훨씬 높다.
“38실버 50쿠퍼예요.”
가람은 주머니에서 1골드를 꺼내어 건네었고, 점원은 다시 한참 동안 끙끙 계산했다.
가람에게는 벨바리아에서 쓰고 남은 돈이 있었다. 크게 낭비하지 않으면 책이나 지도, 여행 물품을 사고 여관을 이용하며 대충 6개월 정도 지낼 수 있는 금액이다.
하지만 이왕 도시에 왔으니, 가람은 날이 밝는 대로 은행으로 갈 생각이었다. 가람의 금고는 베록에 있지만, 이곳에서도 베록의 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거스름돈 61실버 50쿠퍼입니다. 일단 쌀차부터 한 잔 드릴게요. 여기 앉아 계세요. 목욕이랑 방은 함께 준비해 드릴게요.”
가람은 점원이 대충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투박한 나무 의자다.
가람이 앉은 자리 근처에는 텁석부리 중년 남자 둘과 모험가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 넷, 상인처럼 보이는 사람 둘이 앉아 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그들을 관찰하는 사이 점원이 급히 가져온 차가 앞에 놓였다.
쌀차라고 나온 것은 완전히 숭늉이었다. 물에 쌀을 넣고 오랫동안 끓인 것이다.
입에 넣어 보니 맛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래도 오래 끓여 냈는지 고소하긴 하다.
가람은 뜨거운 김이 풀풀 나는 그것을 후후 불어 가며 맛보았다. 사실 차가운 것을 먹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리운 느낌에 가람은 조용히 쌀차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맛이 좋다거나, 뭔가 먹고 싶다거나, 몸이 힘드니 쉬어 가야겠다거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나서야 생겨났다.
머리를 터뜨릴 만큼 쌓여 있던 고민들이 한 번 죽음으로써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목숨이 오가는 위험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죽기 전에 패스를 다 모아야 한다는 초조함이 파도처럼 일어났고, 만약 패스를 다 찾았을 경우 늙고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가족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걱정되었다.
200패스를 모으는 데 1년이니,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1천 패스는 5년이다. 가람은 그때쯤이면 서른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다. 혹은 그 이상이거나.
하지만 한 번 죽고 나서 그런 고민들은 모두 사라졌다.
가람에게 일어난 가장 끔찍했던 일은 가람을 메마르게 하는 동시에 등 뒤에서 추격해 오는 초조함의 칼날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전에 없이 차분한 기분이라, 가람은 이것을 여유라고 불러야 할지 무심한 상태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반반씩 섞였다고 하는 편이 나을까.
가람의 앞에는 이제 무한한 시간이 놓여 있다. 무한한 시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슬픈 이유는 그것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 기억하고, 어제 밥도 먹었고 농담도 한, 어디에 가기로 약속까지 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사라진다.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 손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가능성도 없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 것.
그러나 가람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참을 수 없이, 정말로 참을 수 없이 보고 싶어지면, 보면 된다.
가람은 쌀차를 마시며 모르드레드의 머리통을 싼 가죽 모포 보따리를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누군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마 지금 가람이 가진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모르드레드의 머리일 것이다.
가람은 보따리 안에서 모르드레드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재생됐을까. 슬슬 잘라 줘야 할 때가 되긴 했는데.
그래도 쇄골까지 재생되나 어깨까지 재생되나 그리 다를 바는 없다. 어차피 입에는 흙을 채워 놓았으니 말도 못 한다.
무릎 위의 작은 보따리를 소중하게 안고 있는 가람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영락없이 제 보물을 소중히 하는 동양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보따리 속에 대륙을 건너오며 챙겨 온 거액의 전 재산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가람은 자신의 가죽 보따리를 흘긋흘긋 곁눈질하는 사람들을 가느다란 시선으로 관찰해 새겨 두었다. 가람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쓰다듬는다.
바지 앞 춤에 매달린 것을 가만히 만지던 그녀는 방아쇠에 손가락 끝이 달칵 걸리는 느낌에 자신이 하고 있던 행동을 자각했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가람은 권총을 옷 안으로 잘 숨기고 자신의 보따리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들과 직접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었다. 송곳니까지 다 드러내고, 밝디밝게 웃어 주었다.
눈이 마주친 몇몇이 헛기침하며 급히 시선을 피한다. 괜히 말을 돌리며 어색하게 앞에 놓인 음식을 떠먹는 사람도 있었다.
가람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들을 좇다가 곧 손등으로 향한다.
바늘은 아직도 동쪽을 향하고 있다. 길고 길다.
이번 패스는 예상과 다르게 바다가 아니라 땅 위에 있었다. 손등을 세웠을 때 바늘이 바닷속을 가리키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섬, 아니면 동대륙 어딘가.
만약 섬이라면, 운이 좋다면 승선한 배에서 작은 배를 구해 섬으로 갈 수 있을 것이고, 나쁘다면 수영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람이 물속에서 한 시간 이상 숨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뭐가 있을지 모를 물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지만, 거북의 입 안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는 가람에게는 꺼림칙함을 넘어서서 두렵기까지 한 일이었다.
그나마 죽어도 베이스캠프에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이 위안이긴 했지만 그렇게나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죽지 않는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님, 이제 목욕물 올려 드릴게요.”
앞치마에 물기를 닦으며 다가온 점원이 눈짓했다. 그 눈짓에 따라 일어서며 가람이 슬쩍 질문한다.
“여기 여객선을 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아, 동쪽으로 가는 분이세요?”
“네, 뭐 일단은…….”
점원은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곧 안타까운 어조로 대답했다.
“때를 잘못 맞추셨네요. 어제 막 출항했으니까, 다음 배는 3개월 후에나 있어요.”
“저렇게 배가 많은데 3개월 후에나?”
3개월.
시간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아낄 수 있으면 아끼고 싶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 방법이 없다면 3개월간 이 도시에서 체력을 단련하며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가람의 얼굴에 서린 곤란한 표정은 얼른 없어지지 않았다.
“동양으로 가는 배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그렇게 먼 거리를 항해하려면 뛰어난 사람들이 필요하거든요. 그래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점원이 넌지시 운을 띄운다. 가람이 시선으로 묻자 자신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에르비에르만 상단의 화물선이 늘 오가긴 해요.”
“탈 수 있나요?”
“그게, 사실은 안 돼요. 대귀족가의 배인걸요. 여객선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타고 싶다고 해서 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방법이 되는 건가요?”
“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