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난폭한 피가 혈관을 타고 흐른다. 눈앞이 새빨갛게 변했다가 하얗게 질렸다.
가람은 자신이 뭘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흥분해서 총을 뽑아 들었다.
총의 묵직한 감촉에 조금 정신이 들어 발포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총신을 잡은 손을 남자의 머리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자신의 손이든, 남자의 머리든 어느 쪽이라도 깨져 버리라는 듯 무식한 몸놀림이다.
모르드레드가 들어 있는 주머니에는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으니 절대 도둑맞을 일이 없지만 그래도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장이 펄펄 끓는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뜨겁고 거칠게 뛰었다.
남자는 이렇게 사나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좀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후려치는 가람의 손을 피해 몸을 뺐다.
그가 있던 자리에 가람의 총 든 손이 아슬아슬하게 지나친다. 바람 소리까지 났다. 맞았다면 아픈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으왓, 뭐 이런 무식한 여자가 다 있어! 손뼈 다 나간다고?”
호들갑 떠는 목소리가 귀에 익다. 가람은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가람의 주머니를 노렸던―그때는 돈주머니였지만―남자다.
잘생긴 얼굴이 어처구니없음으로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가람 쪽이었다. 뭘 믿고 이렇게 뻔뻔하단 말인가?
가람은 뻔뻔한 사람이 싫었다. 머리를 반쪽 내어 허리춤에 차고 다닐 정도로 싫다. 미친 사람은 더욱 싫다.
모르드레드는 그 둘을 다 갖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이 남자는 그중 하나를 갖고 있다.
“어제 본 그거.”
“그거라니. 난 웨이든이야. 웨이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마치 가람을 꾀기라도 하려는 태도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누군가와 너무 비슷해서, 가람은 흠칫했다.
“웨이든?”
자신도 모르게 반문한 가람이 그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음? 왜 그래? 내 이름이 옛날 애인이랑 같기라도?”
남자가 능글맞게 웃으며 가람의 어깨에 손을 두르려고 했다. 친근한 척,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은 자신의 매력을 잘 아는 사람의 태도였다.
확실히, 인기가 많을 얼굴이다. 그러나 반대편 손이 다시 가람의 주머니에 슬쩍 닿는다.
“만지지 마.”
가람이 차갑게 일갈하며 남자를 뿌리쳤다. 작은 몸인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가람의 떠미는 손에 주춤주춤 밀려난 남자는 그제야 가람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가람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시기에 비하면 대단히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얼굴만 보면 제법 귀염상이다. 눈매도 둥글고, 뺨도 동그랗고 턱도 동글동글, 어깨도 작고 체구도 작은 축에 속해서 아직 보호를 받아야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얼굴은 고생 한 번 한 적 없는 것처럼 고운데도 그 위에 그려진 표정은 갈라질 것처럼 건조하고, 섬뜩했다.
그래, 섬뜩하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은 그저 검은색이라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아주 잠깐, 그 속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언젠가 보았던 살인마들과 같이 인간미 없는 날 선 눈동자.
아니, 에이. 착각이겠지. 남자가 가볍게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동안 가람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내 주머니에 다시 한 번 손대면, 이걸 상대해야 할 거야.”
남자는 가람이 내민 것을 바라보았다. 뭉툭한 낫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접혀 있는 무언가처럼 보였다. 속이 뚫린 쇠를 꺾어 만든 것인가 싶었다.
남자는 그것의 앞에 뚫린 구멍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이게 뭔데? 혹시 이것도 보물 같은 거야?”
가람은 말없이 남자를 겨누고 있던 손을 옆으로 향했다. 목표는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는, 누군가 쓰다 버린 녹슨 쟁기였다.
이런 식으로 버려진 물건은 농기구, 혹은 낡은 의자나 가구 같은 것도 있다. 이렇게 버려두면 누군가가 가져다 쓰곤 했다.
가람은 남자를 바라보며 손만 움직여 농기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주머니, 아주 귀한 거라도 들어 있나 봐?”
바로 그 순간 가람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남자의 총에 대한 첫 인상은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었다. 녹슬긴 했지만 쟁기의 두꺼운 부분은 아직 단단하다.
그러나 총탄이 닿자 갈기갈기 찢기기라도 한 것처럼 산산조각 나 부서져 버렸다. 그러고도 힘이 남은 총탄은 쟁기 아래의 바닥을 조금 부숴 놨다.
가람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총을 쓰면 늘 기물 파손을 일으키게 된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체술 따위를 배워 두는 것이 좋을까.
가람의 느긋한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입이 벌어진 것도 모르고 부서진 농기구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마법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동양 쪽의 신기술 같은 건가?
“하, 하, 하. 위협은 인상 깊었어, 아가씨. 그런데 그런 거 사람한테 쏠 배짱은…….”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사그라졌다. 가람의 얼굴에선 정곡을 찔린 사람의 분노나, 위협에도 불구하고 태연한 상대에 대한 당황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여전히 섬뜩할 정도로 담담한 표정만이 있었다. 그리고 가람의 팔이 담백한 동작으로 움직이고, 남자는 새카만 총구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어딜 쏘면 안 죽는지는 알고 있어.”
“…….”
얼어붙은 남자에게 가람은 담담히 덧붙였다. ‘사람을 어떻게 죽여. 경비병도 이렇게 많은데.’
그러나 그 말이 남자에게는 ‘경비병이 못 보는 장소에서 다시 만나면 네 목숨은 없단다.’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남자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빳빳한 자세를 잡았다. 곧 허리가 직각으로 곱게 접힌다. 아니, 직각보다 더 접혔다. 머리가 무릎에 부딪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대단히 실례했습니다.”
그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치는 남자를 바라보며 가람은 모르드레드가 든 주머니를 쓰다듬었다.
잘생겼는데 얼굴이 아깝네. 주머니에 든 잘생긴 얼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망치고 있는 잘생긴 얼굴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잠깐 사이 남자는 자취를 감추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벌써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는 실력 하나는 일품이다.
잠시 숨을 고른 가람은 가방과 주머니를 고쳐 메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상단 건물은 커다란 칼을 든 여신상 근처에 있다 했으니 가람은 일단 그리로 향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도는 순간 보이는 대장간에 일정을 재고할까 고민했다.
막 풀무를 밟아 화덕에 불을 지피던 대장장이가 멀뚱하게 선 가람과 눈을 마주치곤 슬쩍 눈인사를 건넨다. 그 배경으로 가지런하게 매달린 잡다한 철 기구들이 번쩍였다.
“여, 아침부터 부지런하구만.”
그렇게 말하는 대장장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을 바라보던 가람은 상단을 방문하는 것을 나중으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점원이 한 말에 따르면 동대륙을 오가는 상단의 배는 상시 있는 듯했으니 이왕 대장간을 먼저 발견한 김에 금고 제작 기간부터 알아 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새벽이다. 해가 뜬 지 얼마 안 되어 자욱하게 깔린 찬 공기 속에서 출근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걷고 있었다.
지금 가 봐야 하루 업무를 준비하느라 상단 사람들은 바쁘겠지. 오후쯤 가는 게 나을지도.
“뭐 찾는 거 있나?”
가람이 가만히 가게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 있자 대장장이가 제법 친절한 척 질문했다. 가람은 대답하는 대신 눈으로 가게를 훑어보았다.
보통 대장간이라 하면 칼날이나 투구, 무기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것만을 전문으로 만드는 대장간은 거의 없다. 있다 하더라도 보통 귀족가와 전문적인 계약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이 시대는 전쟁이 끝난 시대다. 대장간이 무기를 팔아 돈을 벌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였다.
귀족과 계약도 되어 있지 않은데 취급하는 품목을 그따위로 했다간 굶어 죽기 십상이다. 보통은 호미나 쟁기, 쇠로 된 솥이나 말편자, 작은 주방용 칼을 취급한다.
무기는 간혹 여행자가 찾을까 싶어 한두 자루 만들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잘 팔리지 않아 무기점에 헐값으로 팔아 치우는 경우가 많다.
“금고를 찾는데요.”
“금고? 어느 정도 크기의?”
둘러봐도 금고가 없어 그냥 꺼낸 말인데, 당연하다는 듯 질문이 되돌아왔다. 꺼내 놓지는 않았지만 금고가 있긴 한 건가?
“요 정도요. 그리고 개조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가람은 허공에 손짓으로 대충 크기를 그려 보였다.
“그 정도 크기라면 있지만, 개조라니?”
“옆에 구멍을 내고, 레버를 달고, 안쪽에 칼날을 달아서 레버로 조작하고 싶어요.”
대장장이는 면도를 하지 않아 까칠한 턱을 손으로 매만지다가 망설이며 대답했다.
“그건 좀 힘들겠는데. 아, 잠깐. 가지 말고 들어 봐. 다른 대장간에 가도 똑같을 거야. 금고가 무슨 나무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이만큼 두꺼운 쇠판으로 만든다고. 굳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걸 흙 주무르듯 주물러 개조하겠나? 차라리 하나 새로 만드는 게 좋을 거야.”
“그러면 얼마나 걸릴까요?”
“시간이야 뭐, 별로 걱정 안 되지만 나는 오히려 다른 게 걱정이야.”
“어떤?”
대장장이가 진심으로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가람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돈이 꽤 많이 들걸. 잠금쇠야 뭐 그렇다 쳐도, 그걸 주물로 만들려면 설계도도 필요하고, 새 틀을 만드는 건 아가씨 생각보다 돈이 훨씬 많이 들어. 솔직히, 대량 생산도 아니고 그거 하나 만들자고 주물을 다시 제작하는 것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해. 차라리 그냥 금고를 구입하지 그러나?”
“돈은 상관없어요.”
대장장이는 눈을 크게 떴다. 가죽 부츠에 가죽옷.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옷차림이라 그저 그런 여행자인 줄 알았더니 말하는 투가 꼭 어딘가의 귀족 나으리라도 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동양인이다. 칼츠버그에서는 모험을 떠나온 귀한 집의 부유한 동양인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비단옷이나 귀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지 저런 냄새나는 가죽옷은 입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 가람이 입은 가죽옷은 벨바리아에서 구입한 것으로, 그렇게 질이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대장장이가 가람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면 내가 설계자를 소개시켜 줄 테니 그 사람한테 가서 의뢰해 봐. 설계서가 나오면 이리 가져오고. 주물은 쇳물을 부어서 찍어 내면 그만이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래요. 그런데, 얼마나 걸릴까요?”
대장장이는 조금 곤란한 얼굴로 턱을 긁었다. 턱이나 배, 어딘가를 긁는 것은 습관인 모양이었다.
“설계도가 얼마나 복잡하게 나오느냐에 따라 다르지. 그래도 열흘은 넘지 않을 거라고 보네. 아가씨한테는 다행이게도, 요즘 일이 별로 없거든.”
고개를 끄덕인 가람은 대장장이가 말한 설계자를 찾아가 일을 의뢰했다. 설계자는 매우 주의 깊은 얼굴로 가람의 말을 듣더니 100골드와 7일의 시간을 제안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조금 놀랐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급할 것도 없었다. 빨리 가면 더 좋을 뿐이지, 늦게 간다고 해서 곤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 신중하게 준비하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시간은 썩어 문드러질 정도로 많다.
다음으로 가람이 향한 곳은 은행이다. 동대륙에 은행이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가람은 은행에서 모든 장신구를 되찾았다.
그리고 부피가 많이 나가는 금괴나 은괴, 보석이 붙어 있지 않은 가락지와 목걸이 따위를 팔고, 보석이 붙어 있는 것도 알만 빼내고 금과 은 등 금속 부분은 모조리 팔아 버렸다.
그러고 나니 손에 남는 것은 한 줌도 되지 않는 보석 알맹이뿐이다. 금화는 모두 고액 화폐로 바꿨다.
미리 동대륙의 돈으로 바꿔 두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환전은 동대륙에서만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가람이 상단으로 향한 시기는 정오가 한참 지날 무렵이었다.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 데다 시간도 많이 지났기 때문에 가람은 아침에 있었던 소매치기의 일을 거의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금속으로 멋들어지게 양각된 ‘에르비에르만 상단’ 간판 아래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악연이라면 대단한 악연이다. 웨이든이라고 했던가. 그 소매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