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상단에 넘쳐 나는 나무 궤짝에 불량한 자세로 걸터앉아 서기로 보이는 사람과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저쪽에서는 아직 가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소매치기가 상단에 있다니. 이 상단 괜찮을까. 역시 몇 달 뒤에 있을 여객선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까.
가람이 불편한 기분으로 고민하는 동안, 저쪽에서도 가람을 발견했다.
실실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던 웨이든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허옇게 질렸다. 뭐야, 저 여자.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가람과 웨이든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 웨이든의 시선을 따라간 서기도 가람을 발견했다.
그는 여간해서는 긴장하지 않는 웨이든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것을 보고 가람이 심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그는 자신의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궤짝을 옮기는 짐꾼과 탁상 위의 깃털 펜 너머에서 그가 상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람은 문에서 몇 걸음 더 걸어 서기의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배편을 좀 알아보고 있는데요. 동대륙으로 가는. 여기에 오면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데.”
말은 서기에게 하는 것이었지만 가람의 시선은 여전히 웨이든을 향해 있었다. 담담하고 날카로운 그 시선은 물고기를 꿰는 창처럼 웨이든을 꿰뚫었다.
그 시선을 받는 웨이든이 매우 어색하게 입 안에 든 사과를 어그적거리며 씹기 시작한다.
가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였다.
“아, 광고 보고 오셨군요. 예. 맞습니다. 일꾼을 몇 명 구하고 있긴 합니다.”
“출발일은 언제죠?”
“바로 출발하는 배가 내일 있는데.”
“그건 너무 일러요.”
“그럼, 잠시만. 음.”
서기는 서랍 속에서 서류를 몇 장 꺼내어 팔랑이더니 매끄러운 동작으로 가람 앞에 주욱 밀어 놓았다.
“오, 약 한 달 뒤 출발하는 배가 있군요. 이걸로 하시죠? 그다음 건 두 달 뒵니다.”
제대로 된 여객선이 세 달 뒤에 있다 했으니 저 배를 타면 두 달의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셈이다. 적절하다 판단한 가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했다.
“좋아요. 그런데, 혹시 선실을 배정받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좀 힘들겠는데요. 흠. 일꾼에게 선실을 배정하는 경우는 없는데.”
“혹시 남는 선실이라도 하나 얻을 수 없을까요? 돈을 지불할 생각도 있어요. 꼭 혼자 방을 써야 해서요.”
서기는 가람의 행색을 흘끔거리며 다시 서류를 들춰 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가죽옷 차림인데 어디 귀한 집 아가씨라도 되는 모양이지? 별실을 다 요구하고.
“몇 개 있긴 있군요. 상단 사람들을 위한 선실이지만, 결원이 생기는 경우에는 그냥 빈방이 되기도 합니다. 음, 좋습니다. 제가 위에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요.”
“꼭 부탁드려요.”
객실의 존재 여부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객실이 구해지지 않을 경우 3개월 뒤의 배를 타는 한이 있더라도 승선을 포기하는 것이 옳다. 배 위, 어디로 갈 수도 없는 한정적인 공간 안에서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같은 방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끔찍한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
“흠, 그런데 제 친구와는 무슨 일 있었습니까? 분위기가…….”
서기가 슬쩍 질문하자 옆에서 가람이 떠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웨이든이 펄쩍 뛴다.
“에헤이! 야, 야. 아무 일도 없어. 있긴 뭐가 있어.”
“너 그것도 거짓말이라고 하는 거냐? 딱 봐도 뭐가 있는데.”
옳은 말이다. 가람은 짧게 속으로 대답했다. 만약 이 상단의 배를 탈 거라면 저 남자의 정체를 미리 알아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혹시나 있을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아무 일도 없어.”
웨이든이 눈을 부라리며 엄포하자 서기가 코웃음 쳤다. 그는 웨이든보다 가람에게서 대답을 듣는 것이 더 빠를 거라고 판단했는지, 정중한 어조로 질문했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들을 수 있을까요?”
“제 지갑을 소매치기하려고 했거든요.”
가람이 냉큼 대답하자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던 서기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웨이든의 뒤통수를 딱 소리 나게 후려쳤다. 아욱! 하고 터지는 신음에 가람이 조용히 덧붙인다.
“두 번이나.”
서기가 다시 한 번 웨이든의 등짝을 후려쳤다.
“이거 참,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놈이 어릴 때부터 철이 없어서. 돈만 생기면 다 쓰기 바쁘고, 여자만 봤다 하면 아랫도리 휘두를 줄밖에 모르는 모자란 놈이니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혹시 경비대에 신고하셨다거나…….”
서기가 갑자기 굽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웨이든의 머리에 핏대가 선다.
“야, 야! 웃기지 마! 나 저 여자한테 죽을 뻔했다고!”
서기는 조용히 서류 뭉치를 집어 들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왁왁 소리치는 웨이든의 얼굴을 후려쳤다.
웨이든이 코를 부여잡고 나가떨어지자 그는 혀를 차곤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철딱서니가 없었답니다. 저 나이 먹도록 한심하지요. 괘씸하시겠지만,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제가 섭섭지 않게 편의를 봐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신 개인 선실도 꼭 좋게 말씀드리고요.”
가람은 한 편의 콩트 같은 두 사람의 행태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질문했다.
“그런데,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
* * *
세상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것들이 많다. 저렇게 망나니 같은 사람이 정확, 신뢰가 생명인 측량사라니.
직업과 얼굴만 보면 제법 멀끔하니 잘 어울리지만, 그래도 저 가볍고 무책임한 태도를 보면 역시 쉽게 믿어 주기 힘들다.
사실, 가람은 승선하기 전까지 그가 측량사라는 말을 거의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정말로 지도를 펼쳐 놓고 측량 기구를 꺼내 들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긴 이곳의 지도는 사실 그리 정확한 편이 못 된다. 어떤 도시의 어느 방향에 무엇이 있다는 정도를 표시하는 것이 전부고, 대단위 영역을 표시한 지도의 경우 그 비율이 엉망인 경우가 많았다.
패스의 바늘을 기준으로 측량을 통해 먼 곳에 있는 패스를 찾으려 한 적도 있지만 지도의 배율이 워낙 엉망이니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주 넓은 지역도 제멋대로 좁게, 그리고 좁지만 번화한 곳의 경우에는 제멋대로 넓게 그리기도 했다.
지도마다 땅덩어리의 크기가 다 달라서 직접 그곳으로 가 보기 전에는 어떤 곳인지 알기 힘들었다.
이런 마당이니 이런 녀석도 측량사라는 이름을 내걸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야, 너 방금 무슨 무례한 생각 했지?”
“아니.”
성의 없이 대꾸한 가람이 기름 먹인 천으로 총을 문지른다. 항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람이 아직 거세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풍이다. 소금기가 있는 바람은 금방 쇠를 상하게 하기 마련이다.
항해 중인 배 위는 좌표가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베이스캠프로 넘어갈 수 없는 가람은 가진 무기를 신중하게 다루었다.
갑판 위로 나와 마스트에 기대어 앉아 권총을 닦는 것은 그에 관련된 노력 중 하나다.
“그거 뭐야?”
“총.”
“총?”
웨이든은 내내 가람의 주변에서 알짱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가람은 보통 수상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다. 솔직히, 가람이 보기엔 웨이든이 더 이상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큰 배의 측량사라면 아쉽지 않게 벌 텐데 소매치기나 하고 돌아다니다니.
어쨌거나 가람은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꽤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갑판 위로 나와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바늘의 방향이 바뀌거나 했을 때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였다.
여객선도 아닌 상선이니 가람이 뱃머리를 돌려 달라고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만, 작은 보조선 하나를 빌릴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일단 고도를 보았을 때 높은 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지만, 그래도 주변의 섬이나 바다에 있을지도 모르니까.
확실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날씨도 이렇게나 좋지 않은가.
바람은 선선하고 하늘은 높다. 날씨도 좋고, 뱃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시원하다. 나무랄 데 없이 좋은 날이었다.
좁은 선실에 처박히기엔 아까운 날씨다. 굳이 패스의 바늘 때문이 아니라도, 밖에 나와 있고 싶은 날씨였다.
가람이 일꾼답게 일하지 않고, 바람 부는 선선한 제3갑판에서 경치나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모두 웨이든을 끔찍이 아끼는 그의 좋은 친구 덕분이었다.
웨이든의 친우인 상단의 서기는 출항하기 직전까지 웨이든이 경비병에게 잡혀갈까 몹시 걱정했다.
아마 웨이든을 이 배의 측량사로 끼워 넣은 것도 그가 붙들려 가면 출항에 차질이 생길 테니 가람이 신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극진한 친구 사랑만큼이나 그가 봐준 편의는 커서, 가람은 굳이 일꾼 노릇을 하지 않고도 배에 승선할 수 있었다. 특별 승객으로서.
물론 여관 점원이 으름장을 놓았던, 막 잡아탈 수 없는 상단을 가진 ‘대칼츠버그 공작가’의 공작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은 사실로, 가람의 승선은 오직 선장과 서기, 상단의 몇몇 사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 속에는 가람이 내민 거액의 객실료를 꿀꺽하기 위한 이해관계가 엮여 있었지만, 어쨌거나 가람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공작님이 직접 배에 탈 일도 없을 텐데.
그 외에, 아주 성공적으로 만들어져 더 손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모르드레드 절단용 금고도 가람의 여유에 크게 한몫했다.
설계자는 똑똑하게도 가람을 위해 예약 절단 기능까지 넣어 주었다. 태엽을 감아 두면 몇 시간 뒤에 칼날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식이다.
비록 여러 회를 미리 예약하거나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나절 후로 예약해 두면 시간을 크게 벌 수 있다. 일이 생겨 잘라 주지 못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안쪽에 머리를 고정하는 부분은 나사를 조여 너비를 조절할 수 있었고, 칼날도 높이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금고에는 필요가 없어 보이는 그 기괴한 기능들 탓에, 가람은 대장장이의 용도를 묻는 질문을 피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가람의 금고는 돼지나 큰 짐승을 도축하는 용도라고 보기엔 너무 은밀했고, 혹시 사람에게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을 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굳이 상상한다면, 어디 지나가는 갈매기나 한 마리 붙잡아다가 매달아 놓고 금고 문을 닫은 뒤, 두려움에 떠는 갈매기를 변태적으로 처형하는 용도가 대장장이가 상상한 가장 적절한 예였다.
대장장이의 용도를 알아내기 위한 열의가 너무나 대단했기 때문에 가람은 없는 대답을 대충 지어내었다.
너무 건성이라, 가람 스스로도 신뢰할 수 없는 대답이지만 대장장이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납득했다.
가람이 그런 대답을 한 이유는 별것 없다. 마침 근처에 야채 장수의 수레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가람은 튼실해 보이는 당근을 들이밀며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했다.
“불쌍한 강아지 당근을 맨손으로 자를 수가 없어서요.”
“뭐라고?”
“새도요.”
“…….”
“생선도요.”
그 후로 가람은 요리를 위해 무언가를 절단하는 행위가 초보 주부들에게 얼마나 큰 정신적 충격을 줄 수 있는지를 구구절절이 논한 뒤 문화 충격에 빠진 대장장이를 놓아두고 재빨리 도망쳤다.
사실 가람은 나오는 대로 지껄였을 뿐이지만, 대장장이가 초보 주부에 대해 알아봐야 뭘 알겠는가?
‘그게 그렇게 충격을 받는단 말인가? 동양이라 그런가? 아니, 그럴지도. 따지고 보면 시체를 만지는 거니까…….’ 하고 결론 없는 고민에 빠져들 뿐이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가람은 자그마한 선실에 잔뜩 사 들고 온 책을 읽거나 사격, 꾸준한 체력 단련을 하며 이렇게 가끔 밖에 나와 해를 즐기는 여유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감상이겠지만 매우 충만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과 총탄, 모르드레드가 든 금고와 출항하기 전 사 둔 기호품, 건조 식량 등으로 가득한 가람의 작은 선실은 사람이 자주 오가지 않는 구석에 있어 몹시 조용하고 아늑했다.
노란 램프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면 공기가 따듯하게 데워지는 것같이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매일 아침, 이렇게나 긴 기간 동안 같은 잠자리를 사용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가람에게 마치 집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어차피 곧 떠나야 할 곳, 가람은 마음을 풀고 잠시나마 이 안정적인 생활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아침이면 바닷물이 눈부시고, 선원들의 성격은 시원시원하다. 만족할 만큼 홀로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가람을 성가시게 만드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파도에 느긋하게 흔들리는 배 덕분에 요람처럼 술렁이는 침대 또한 근사했다. 가람은 이 환경이 꽤 마음에 들었다. 새똥만 아니라면.
가람의 바로 옆에 하얀 갈매기 똥이 철푸덕 떨어진다. 무릎 바로 옆이었다. 머리나 몸에 맞았을 수도 있었다.
케르타가 좋아할 곳이군. 가람이 짧게 평가했다.
칼츠버그에서 따라온 갈매기들은 이런 식으로 내내 배를 따라다녔다. 별로 주는 것도 없는데 신기할 정도로 마스트를 휘휘 돌며 떠나질 않는다.
대체 언제까지 따라오는 걸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가람 옆에 떨어진 새똥 위로 육중한 무언가가 쿵, 떨어져 뒹굴었다.
즉사한 것이 분명한 갈매기다. 마스트를 돌다가 떨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낙하의 충격으로 부리로 피를 토하고 있는 것 외에는 상처 없이 멀쩡해서, 도무지 왜 떨어졌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놀랄 법도 하건만, 총을 닦는 가람의 손길은 여전히 차분하다.
오히려 놀란 것은 측량기를 바라보던 웨이든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호들갑스러운 동작으로 기겁하곤 담담한 가람의 표정을 보고 다시 기함했다.
“넌 무슨 여자가 놀라지도 않냐!”
“그냥 새잖아.”
“죽은 새라고!”
웨이든은 양손으로 과장해서 가리켜 보이며 소리쳤다.
가람이 코웃음 치니, 스스로도 호들갑 떤 것이 부끄러워졌는지 죽어 가는 갈매기 옆으로 다가앉은 그가 설명했다. 흥분이 가라앉고 나니 겸연쩍었는지 억지로 아무렇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별거 아니군. 이런 식으로 종종 마스트에 부딪혀서 떨어지는 갈매기들이 있어. 보통 딴 놈들보다 덩치가 커.”
“해풍 때문에 잘 못 나는 건가?”
“그건 아니고. 마스트랑 싸우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는데, 돛이 커다란 날개처럼 보이나 봐. 제 딴에는 큰 새와 다퉈 본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그냥 그의 예상일 뿐이겠지만,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칼츠버그 갈매기들은 모자산맥 지빠귀에 비해 정말 지나치게 멍청하다.
“불쌍할 정도네.”
“뭐가? 멍청한 게?”
“그래. 예전에 본 모자산맥 지빠귀는 간단하게 말도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모자산맥에 가 봤어?”
점묘로 그린 것 같던 도시, 하늘을 가리키던 바늘, 바람술사, 마법사의 탑, 그리고 죽은 성녀.
짧게 기억을 흘려보낸 가람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
웨이든은 의외라는 표정이다. 서대륙어가 자연스러워서 이쪽 대륙에서 지낸 시간이 제법 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모자산맥까지 가려면 꽤 남단으로 내려가야 했을 텐데. 보통 동양인들은 칼츠버그를 잘 벗어나지 않으니까.
“흠흠, 그래도 모자산맥 지빠귀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어.”
웨이든이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가람이 기대하기를 바라는 듯했으나, 안타깝게도 가람은 슬슬 이 쓸데없는 대화가 귀찮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여 의문을 표했다.
“맛이 아주 좋아.”
본인들, 아니, 본조들은 절대 장점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은 장점이다. 그러고 보니, 맛있었던가?
가람은 칼츠버그에서 사 먹었던 갈매기의 맛을 떠올렸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
하지만 지빠귀와의 지능에 대한 격차를 메울 정도로 높은 점수는 줄 수 없는 맛이었다.
가람은 이미 갈매기의 맛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저 갈매기가 좋을 것 같았다.
“왜 하는 거야?”
갈매기를 바라보던 가람이 불쑥 질문했다. 주어 없는 물음에 웨이든의 얼굴이 멍청해진다.
“어? 뭐?”
“도둑질. 수입이 적은 직업은 아닐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