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가람이 구입하는 지도의 값을 생각해 보면, 지도를 만들고 파는 측량사라는 직업의 수입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보통 잘 알려진 마을의 지도만 해도 최소 10실버,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은 1골드에서 10골드도 넘어가는데, 해도라면 지도보다 훨씬 비쌀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리는 것은 그냥 해도가 아니다. 대륙과 대륙 간의 해도, 지금 가장 뜨거운 인기를 모으고 있는 교역로의 지도인 것이다. 그리면 그리는 대로 거액이 될 것이다.
“그게 궁금해?”
웨이든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냈다. 먹잇감을 노리는 표정이다.
가람은 대답하는 대신 닦던 총을 갈무리하고 마스트에 기대어 앉았다. 해가 기울면서 바다가 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질문 하나에 질문 하나. 나도 묻자.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됐어.”
가람이 단칼에 잘라 내자 웨이든이 혀를 찼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매정하군. 로아나와는 천지 차이야.”
로아나. 그 단어에 이끌려 가람의 시선이 웨이든을 향한다. 바람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던 웨이든이 그 시선을 느끼고 턱을 치켜들었다.
“왜?”
“로아나?”
“어? 아는 사람이랑 이름이 비슷하기라도 해? 내 애인이야. 편안하고, 안정적이고, 밝고. 누구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수상하거나 하지도 않지. 베록에서 여관 일을 하는데, 마을에서 아주 인기가 좋다고. 어? 표정이 왜 그래? 정말로 아는 사람이야?”
가람은 로아나가 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기억해 냈다. 뱃사람을 많이 대하는 직업이니, 그녀가 대한 뱃사람 중에 웨이든이 끼어 있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겉으로 보면 멀끔한 사람이라 혼기가 찬 로아나에게는 매력적인 남자였을 것이다.
그래도 하필, 이 남자라니. 일부러 피해서 돌아오기까지 했는데, 이런 곳에서 로아나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가람은 단호하게 대답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버석버석한 침묵이 이어졌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괜히 작도를 하는 척 손을 놀리던 웨이든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을 다문 후부터 가람에게서 오싹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살의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괜히 등 뒤에 앉아 있는 가람의 시선이 선뜩해서, 목덜미의 털이 쭈뼛쭈뼛 섰다.
“왜 내가 도둑질을 하냐고 물었었지? 취미야, 취미. 도둑질은 내 취미야. 내가 원래 좀 그런 사람이야. 궁금한 게 있으면 봐야 하고, 알아내면 내 것이 된 것 같고 그렇지. 그래서 측량사가 된 거기도 하고, 이게 또 비슷하게 통하는 구석이 있거든. 그게 그냥, 하다 보니까 그렇더라고. 살다 보면 말이야…….”
웨이든이 주절거리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그는 점점 더 뒤를 돌아볼 수 없어졌다. 손안에 땀이 쥐어지더니, 곧 등허리를 따라 식은땀이 흐른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돌변한 가람은 굉장히 무서웠다. 마치 골목길에서 ‘총’을 쏘던 때 같은 분위기였다.
한참 동안 주절거리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단어의 뜻을 쪼개어 설명하고, 괜히 과장되게 자신의 인생관을 토로하던 웨이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을 무렵에야 천천히 가람이 앉아 있을 마스트를 돌아보았다.
마스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판에서 웨이든이 바보가 된 기분을 만끽하는 동안, 가람은 자신의 선실에 돌아와 있었다.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선실은 좀 어두웠다. 라이터를 켜 초에 불을 붙이고, 유리를 씌운다. 문을 걸어 잠그고 가죽 부대를 꺼낸다.
일련의 동작들은 물 흐르듯 매끄러웠다. 촛불이 방 안을 어른거리는 빛으로 칠하자 가람의 얼굴에 그림자가 깊어졌다.
가람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금고를 내려다보았다. 감정도, 생각도, 의도도 없는 표정이었다. 시체의 얼굴이 이것보다 생동감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 금고를 내려다보던 가람이 금고 옆의 레버를 잡아당겼다. 가벼운 절삭음과 함께 무언가가 금고 아래로 떨어진다.
아래의 서랍을 열어 잘려진 고깃덩이를 받아 든 가람은 그것이 재생하지는 않는지 한참을 기다린 후 가죽 부대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것들은 작업이다. 선실 밖으로 나가 잘려진 모르드레드를 은밀하게 처리하는 것은 모두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모르드레드를 함부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지만, 이제는 별로 감흥도 없다. 그저 작업일 뿐이었다.
가람은 선실 밖으로 나가 어느새 어두워진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해가 없는 바다는 무서울 정도로 검다.
그러나 처음뿐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가람은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파도의 술렁거림이 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자 손에 든 가죽 부대를 들고 뱃전으로 다가선다.
내용물을 바닷속으로 비워 낸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무도 가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작은 고깃덩이는 포말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식으로 가람은 물고기들에게 꽤 많은 적선을 베풀었다.
이것이 복이 되어 돌아온다면 참 좋을 텐데. 가람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다가 짧게 웃고 돌아서 선실로 향했다.
배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그 말은, 불이 아주 잘 붙는다는 뜻이고, 배에서의 화재는 곧바로 난파로 이어질 수 있는 재앙이었다.
그 덕분에 인적이 드문 복도, 가람의 선실이 있는 장소 같은 외진 곳의 복도에는 불을 켜지 않았다.
새카만 길을 그저 걷고만 있는 것은 꽤 묘한 기분이다.
랜턴을 들고 나왔다면 어둠 속을 걸을 필요가 없었겠지만,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랜턴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차라리 보이지 않아 벽에 코를 찧는 편이 낫다.
가람은 벽을 더듬어 선실의 문을 찾아내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기름칠을 잔뜩 한 경첩은 아무 소리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덕분에 가람은 고요 속에서 자신의 빈방을 방문한 불청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랐으나 가람은 일단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불청객은, 웨이든이다. 가람의 금고 앞에서 금고를 열려고 시도하고 있다.
다행히 아직 열지는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웨이든의 행동은 지나친 것이다. 가람은 위험을 감지했다.
그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흥미를 가진다면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다. 떼어 내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은, 무엇이 좋을까.
그는 만용을 부리는 타입이 아니다.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의외로 쉽게 겁도 먹는다. 저번처럼 이번에도 협박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을 내린 가람은 거침없이 웨이든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단단한 부츠의 앞코가 갈비뼈 아래의 부드러운 복부를 후려친다.
급소를 발길질당한 웨이든은 숨 막히는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쓰러져 배를 감싼 그를 높게 들린 가람의 다리가 거듭 걷어찬다.
배와 몸통을 가리고 다른 손을 뻗어 가람의 발을 잡으려는 웨이든의 머리 위로 차가운 총구가 꾹 찍어 눌러졌다.
“웨이든 씨. 세 번째야. 나는 당신을 두 번이나 봐줬지. 주변에 사람이 많았거든.”
가람의 고저 없는 음성에 웨이든이 부르르 떨었다. 머리 위를 찍어 누른 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철도 부순 저 무기가 자신의 두개골을 부수지 못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왜, 왜 그래……. 악의는 없었어. 하, 하하. 이해하지?”
억지로 얼굴을 일그러뜨려 미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내는 그 얼굴을 가람은 총 아랫부분으로 후려쳤다.
“내 고향에서는 도둑질을 하는 사람은 죽여도 상관없어.”
“노, 농담이지?”
“아니.”
단호하게 대답한 가람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뻥일 뿐이지.
웨이든은 그제야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자그마한 총구를 사신의 눈동자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벌벌 기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빌듯이 사과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가람은 짧은 말로 그를 용서했다. 네 번째 용서는 없다는 경고와 함께.
가람은 어느 때처럼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웨이든을 바라보다 선실 문을 닫았다. 배에 모르드레드의 머리가 알려지는 것보다는 웨이든이 좀 얻어맞는 편이 낫다.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은 가람은 앞에 놓인 금고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것을 발견하고 얼어붙었다.
금고의 잠금은 해제되어 있었다.
Chapter 17
숨소리 하나 없는 긴장 속에서 가람의 손이 천천히 금고 문의 손잡이를 잡는다. 손은 한참 동안 문을 열지 못했다.
만약 열었는데 머리가 없다면,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로 없어졌다면 열어 봐야 소용이 있을까.
창백하게 떠는 가람의 턱 아래로 순식간에 식은땀이 맺힌다.
망설이던 가람의 손끝이 천천히 문을 잡아당겼다.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