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금고 안을 확인한 가람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모르드레드의 머리는 그대로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온 빛에 미간을 찌푸리는 반쪽짜리 얼굴.
가람은 그것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고 누가 볼세라 금고 문을 닫고 걸어 잠갔다. 마침 딱 잠금을 해제했을 때 자신이 웨이든을 걷어찬 모양이었다.
이번 일로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놀란 가람은 그 후 더욱 사방을 경계했다.
묵묵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풍기던 가람은 음침하고 살벌한 사람이 되었다. 그 분위기는 가람이 내린 어떤 결단과도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네 번째 용서는 없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네 번째로 웨이든이 접근한다면, 바다의 물고기가 포식을 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웨이든은 수상한 데다 위험하기까지 한 가람에게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치거나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때도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덕분에 가람은 몹시 평화롭게 선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굳이 모르드레드의 금고를 지키기 위해 핑계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이, 먼 바다로 나오자 거센 해풍이 불었기 때문에 가람은 내내 좁은 선실 안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먼 바다의 해풍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머리통을 휘날리게 할 정도라, 갑판을 거닐던 우람한 선원들도 연약한 체하며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조심했다.
몸을 사리는 우락부락한 덩어리들을 보며 웨이든은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다가 인적 드문 곳에서 몇 대 얻어맞기도 했다.
지나가며 그 광경을 목격한 가람은 웨이든이 보내는 구조 신호를 그대로 무시했다. 정말로 매를 버는 성격이다.
그렇게 지루할 정도로, 기나긴 평화로운 나날의 끝자락에 배는 정오의 항구에 닿았다.
가람은 적당히 뱃사람들과 섞여 짐을 나르는 척하며 하선했다. 선장이 보는 눈을 조심하라며 언질을 준 탓이다.
사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가람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의리가 있는 것이다.
여차저차 하고 내린 뒤 분주한 마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그제야 웨이든과 인사도 없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상관없다. 어차피 길 위의 인연은 짧은 법이다. 솔직히 별로 아쉬움이 들지도 않는다.
가람은 어느새 꽤 멀어진 배를 잠시 돌아보다가 인파 속으로 섞여 들었다.
항구는 저쪽이나 이쪽이나 똑같이 붐비는 모양이다. 배에 화물을 선적하는 일꾼을 피해 조심조심 걸어 나오니 그제야 집처럼 보이는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떡 사시오, 떡! 쫄깃쫄깃한 인절미가 있어요!”
눈을 현란하게 하는 새로운 풍경을 파악하는 사이 가람의 앞으로 목판을 목에 걸고 서넛의 상인이 지나쳤다. 음식 문화도 비슷한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떡을 하나 사 먹으려던 가람은 집히는 대로 돈을 잡다가 환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환전소가 어디인지 묻지도 못했다. 다행히 주막이 있어 묵을 곳은 해결할 수 있다 책에서 읽었으니 돈 문제만 해결되면 끝이다.
“저기, 저기요.”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걷던 남자가 갓 아래로 흘긋 가람을 내려다본다. 가람은 최대한 유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건이 있느냐?”
하대도 이만저만한 하대가 아니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붙잡은 이가 평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남자의 본래 성격 탓인지, 아니면 신분이 높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단히 오만한 표정이다.
동대륙은 워낙 작은 나라들이 많아 복식과 문화가 천차만별이었다. 덕분에 무엇이 귀한 차림이고, 무엇이 귀하지 않은 차림인지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혹시 이 근처에 환전소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흠? 어디 작은 소국의 역관인 모양이구나. 저쪽, 바로 앞에 엽전 모양 간판이 보이느냐? 저곳에서 하면 된다.”
남자가 턱 끝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리 멀지 않았다. 기와로 지붕을 해 넣은 으리으리한 건물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마당부터 줄이 길다.
덕분에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는데, 가람의 차례가 된 것은 뉘엿뉘엿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이곳의 돈이 없는 데다 줄을 서야 했던 탓에 가람은 아침부터 그때까지 생으로 굶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얼마나 바꿀 건가?”
환전소 사람은 다짜고짜 말을 놓았다. 새카만 눈과 마주하자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화려한 수가 놓인 노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옆에는 화폐에 대한 환전율을 적어 둔 나무판이 걸려 있고, 화폐가 아닌 물건으로 돈을 바꾸려는 사람들을 위해서인지 각종 기준이 적힌 책자가 놓여 있었다.
동대륙의 화폐는 나라가 많은 만큼 매우 다양했는데, 서대륙과 개항이 시작되면서 국제 화폐의 개념이 생기고 있긴 했지만 아직 전파된 정도는 미미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돈의 모양이 다를 뿐 단위는 같다는 점이다.
한 냥이 10전, 1전에 열 푼이다. 한 냥이 백 푼이라는 뜻이다. 나무판에는 한 냥에 55골드 70실버라고 적혀 있었고, 환전세를 뗀다고 적혀 있다. 오늘 환율로 한 푼에 55실버 70쿠퍼이다..
동대륙에서 서대륙으로 오는 사람보다,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향하는 상선이 훨씬 많으니 서대륙의 돈 가치가 더 낮았다.
아무래도 큼직큼직한 나라들로 어느 정도 통합이 된 서대륙보다, 아직 나라가 많은 동대륙이 다른 대륙으로 발 뻗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언뜻 책에서 보기에 주막에서 하루 묵는 데 열 푼에서 열다섯 푼 정도 한다 했으니, 하루 숙박에 서대륙 돈으로 대략 5골드에서 10골드 사이라는 뜻이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의 평균적인 수입이 한 달에 한 냥이라 했으니 실제적인 돈의 가치는 서대륙의 1골드 정도라 생각하면 될 것 같았다.
한 냥의 실물 가치가 1골드라 하면 한 냥에 55골드라는 현재 환율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아마 개항 초기라서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강한 서대륙의 돈이 일방적으로 동대륙에 쏟아지면서 생기는 현상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추가 기울어져, 서대륙에서 동양의 물건이 그리 희귀하지 않게 된다면 그럭저럭 화폐 가치가 안정화될 것이다. 뭐 어찌 되었건, 가람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다.
가람은 돈을 내어 180냥 정도 환전하고 3할의 환전세를 내었다. 그러고 나니 수중에 남는 것은 120냥 정도였다.
이곳의 동전은 마치 엽전처럼 중앙이 뚫려 있었는데, 환전상은 그것에 끈을 꿰어 한 꾸러미로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 환전소를 나서자 어느새 해가 다 떨어진 저녁이 되어 있었다.
밤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등을 내걸기 시작했다. 서대륙의 밤이 고독할 정도로 썰렁한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전혀 가슴이 설레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보아도, 새로운 것을 먹어도, 새로운 소리를 들어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한 번 죽었던 그날부터, 마치 마음속 어딘가가 죽어 버린 것처럼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해가 졌으니 잘 곳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가람은 싸리나무 담을 지나 노란 등을 내건 주막에 들어섰다.
주막의 마당에는 나무로 된 평상이 널찍널찍하게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작은 상에 요리나 술을 올려 두고 앉아 먹는 사람이 많았다.
밥으로 요기를 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시간이 시간인 만큼 나무 상에는 술병이 하나둘씩 올라앉아 간다.
“혼자요?”
가람이 입구를 서성이고 있자 주모로 보이는 허리 굽은 노파가 다가와 질문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가람을 끌어다 적당한 평상으로 밀어 넣었다.
그 자리에는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람이 돌아보자 주모는 무언으로 합석할 것을 권했다. 혼자 앉는데 상 하나를 다 내어주기에는 자리가 아깝다는 뜻이었다.
슬쩍 둘러보니, 이곳의 요리 솜씨가 꽤 뛰어난 모양인지 아직 초저녁인데도 빈자리가 별로 없었다. 주모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것이다.
“뭐 줄까?”
그럴듯한 메뉴판도 없고, 딱히 기억나는 음식 이름도 없어서 가람은 적당히 주위 사람들이 먹는 것을 가리키며 주문했다. 그리고 방이 있는지 물어보려는데, 바쁜 걸음으로 홱 떠나 버린다.
머쓱해진 가람이 평상 위로 엉거주춤 앉자, 시종일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던 선객이 입을 열었다.
“초행이요?”
먼저 입을 연 것은 두 명의 선객 중 남자 쪽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거의 그에 준한 관계 같았다. 아마 약혼한 사이쯤이 아닐까 짐작하며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조금 멍청해 보일 정도로 선량한 인상이었는데, 그에 비해 여자는 조금 표독스러워 보일 만큼 차가운 인상이었다.
“차림을 보니 서대륙에서 온 것 같은데.”
“네.”
“몇 년이나 있었소?”
“한 1년 있었습니다. 그쪽은?”
“아, 나랑 이 사람은 보부상이오. 서대륙엔 간 적 없지만 소식은 많이 들었지. 염료를 가져다가 팔면서 짭짤한 재미를 보는 사람 중 하나였거든.”
서대륙에 비해 동대륙은 염색 재료와 기술이 매우 발달했다. 이곳 주막에 앉은 사람들의 옷차림만 봐도, 붉은색, 푸른색, 서대륙에서는 그렇게 귀한 새하얀 색, 노란색, 꽃분홍, 연분홍, 쪽빛 등 알록달록하다.
서대륙의 의복이 주로 가죽과 나무껍질로 염색을 해 갈색투성이인 것과는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동대륙에서는 주로 염료를 값비싸게 수출하고, 대신 서대륙에서 마법을 수입한다.
하지만 마법 특유의 불가사의함 때문에 마법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직 적어서 그리 인기 있는 교역품은 아니었다.
“그렇군요.”
가람이 대답하자 그사이 주모가 앞에 음식을 놓아 주었다. 가람이 주문한 것은 국밥 한 그릇이었는데, 나온 모습이 마치 한국의 뚝배기와 닮아 있었다.
가람과 겸상을 하는 두 사람이 먹는 음식은 진달래 화전에 국물이 있는 고기 국수다.
가람이 살던 곳과 비슷한 것은 음식뿐만이 아니었다. 주거 환경도 몹시 비슷해서, 기와를 올리거나 혹은 짚으로 지붕을 올린 집이 대부분이다.
마치 조선 시대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저쪽 차원의 어떤 시간대와 겹쳐지는 문화를 발견할 때마다, 가람은 기분이 묘했다.
이대로 계속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가람이 살던 현대처럼 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가람은 죽지도 늙지도 않으니 아마 시간이 지난다면 언젠가 그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쪽도 보부상이오?”
국밥을 한 입 떠 넣는데, 남자가 질문했다. 국밥은 사골을 우려내 배추를 넣어 끓인 것 같았는데, 구수하고 따듯해서 한 숟갈 먹자 속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운 맛이다.
“네. 한번 해 보려고요.”
남자에게서 쓸데없는 흥미를 자아내고 싶지 않았던 가람은 적당히 꾸며 내어 대답했다. 가람을 보는 남자의 눈에 순식간에 친밀함이 스며든다.
“그럼 서대륙에 간 것도 상행을 위해서였구먼? 젊은 친구가 대단한데! 대단한 아가씨야!”
남자 쪽이 이런저런 사실을 추측해서 떠들어 대는 반면에 여자는 시종일관 작은 입으로 음식을 오물거리며 가람을 관찰했다.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가람은 내색하지 않았다.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허기졌던 것처럼 국밥을 삼키는 것에 집중했다. 실제로 매우 배가 고팠던지라,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아, 이거 통성명도 안 했군. 나는 비랑, 이쪽은 향우. 오랫동안 같이 상행을 한 동료지. 수완이 보통이 아니야. 나도 존경할 정도니 많이 배울 수 있을 걸세.”
가람은 남자가 마치 자신을 후배나 동생 보듯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가 없어 합석했을 뿐인데, 지나친 친밀함을 내보인다.
아마 남자는 가람에게 아쉬운 것이 있거나 혹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이다.
가람은 조용히 밥그릇을 비우며 남자가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가람의 밥그릇이 거의 다 비어 갈 무렵에, 남자가 은근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런데, 어느 쪽으로 가나? 다시 서대륙으로 떠날 참인가?”
가람은 남자의 질문에서 목적을 간파했다. 남자는 가람이 자신이 가는 방향으로 동행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긴, 두 명이면 단출한 모임이다. 그렇다고 남자를 동행으로 하기에는 좀 위험한 감이 있으니, 가람을 끌어들여 머릿수라도 늘려 보는 것이 목적인 것 같았다.
가람도 이들과 함께 다니는 것이 더 편리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생각하면 동행하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모르드레드의 머리도 잘라야 하는데. 허리춤의 주머니가 묵직한 것을 보니 벌써 꽤 재생을 한 것 같다.
“서대륙은 아니고, 이쪽을 좀 돌아다닐 생각이에요.”
남자는 가람의 말에 반색했다.
“그러면 우리 나루터까지만 동행하지 않겠나? 내가 부탁함세. 보아하니 아직 숙소도 못 잡은 것 같은데, 지금 나가 봐야 방을 잡기는 힘들어. 우리 묵는 데 같이 자고, 내일 같이 떠남세. 1년 만에 왔으니 이곳 물정도 들어야 할 것 아닌가? 응? 나루터는 반나절 거리야.”
거의 사정하다시피 매달리는 남자를,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수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일단 가람은 수락했다.
어차피 마을 근처에서는 늘 사람의 눈을 조심해야 한다. 함께 다니면서 망을 보게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반나절 정도의 동행이라면, 그리 부담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보부상이라 밝혔으니 들을 거리도 많을 것이다.
“좋아요.”
가람이 수락하자 남자는 반색을 하고 즐거워했다. 차가운 인상의 여자도 그 순간에는 슬쩍 웃는 것 같았다. 향우라고 했던가.
가람은 국밥값 다섯 푼을 내려놓고, 남자가 알려 주는 숙소를 잘 기억한 후 은밀히 질문했다.
“그런데,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자를 시간이었다.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자르는 일은 단추를 끼우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목뼈 사이로 칼날을 넣거나, 입 안에 칼을 넣고 날을 돌려 세운 뒤 한계까지 늘어난 턱관절 틈으로 날을 쑤셔 넣어 위아래를 분리시킨다. 칼의 크기가 좀 클 뿐, 조개를 까는 것과 비슷했다.
가람은 비랑이 알려 준 화장실에서 그렇게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잘라 내었다. 옷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을 만큼 간단한 작업이었다.
만약 피가 튀더라도 변명할 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여자와 피는 가까운 법이다.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가람의 옷에 묻은 피를 보고도 수치심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놓고 가람에게 ‘그’ 피가 묻었다고 직언할 것이다.
가람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는 것만으로 의심을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어쨌거나 다음 날의 이른 출발을 위해, 가람은 주막 옆에 마련된 따듯한 방에 녹아들듯 누워 잠들었다.
밤늦도록 주막은 소란했지만 고단한 여행자를 덮치는 수마보다는 약했다.
온천물처럼 뜨끈한 방바닥은 몸을 노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람은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 수 있었다.
* * *
늘 그렇듯, 가람의 눈꺼풀은 동이 트기도 전에 뜨였다. 아무리 깊이 잠들어도 칼날처럼 예리하게 다듬어진 정신은 늦잠을 허용하지 않았다.
반드시 다섯 시간에 한 번씩은 깨어난다. 그녀는 일종의 강박증을 앓고 있었다.
그 강박증은 스스로가 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정신병들과 구분이 된다.
죽음의 위기가 사라짐으로써 갈 곳을 잃은 긴장은 모두 모르드레드를 감시하는 것에 쓰이고 있었다.
가람은 패스를 이용하기보다 스스로를 사용해 모르드레드를 감시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약간의 패스를 지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모르드레드를 좀 더 확실하게 구속하는 방법을 강구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가람은 모르드레드에게 단 1패스도 더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판단이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단 1패스도, 모르드레드에게는 사용하기 싫다. 그 생각은 설득의 여지도 없이 명료했다.
보통 홀로 잠들 때는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어딘가에 매달아 둠으로써 그의 도주를 방지했지만, 이런 식으로 여러 명이서 잠들 때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어젯밤,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머리가 든 주머니를 소중하게 안고 잠들었다.
여행자가 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퉁이를 끌어안고 자는 것은 그리 의심스러운 광경이 아니라서 비랑은 가람이 자신들을 아직 신뢰하지 못하는 사실에 대해 약간의 섭섭함만 내비쳤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되었는데, 믿느니 마느니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가만히 검은 천장을 올려다보던 가람은 어둠이 눈에 익어 어슴푸레하게 사물이 구별되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끈한 잠자리가 늪처럼 몸을 휘감고 끌어당겨도 꿈쩍도 않는 단호한 몸놀림이었다. 그 몸놀림은 소리 없이 작은 주머니와 칼을 차고 방문을 나섰다.
아무도 없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주막의 마당은 매우 분주한 눈치였다. 마당 전체에 새하얀 안개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텁게 깔려 있다.
안개에서는 희미하게 국밥과 고기 노린내가 났다. 가마솥에서 끓이는 육수에서 솟아난 김이 마당에 안개처럼 깔린 것이다.
뒷간으로 향하던 가람은 안개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솥의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커다란 네발 동물의 다리 하나가 통째로 솥에서 끓고 있었는데, 파를 다듬던 주모가 가람의 기척을 느끼고 알은체를 해 왔다.
마주친 김에 아침 식사를 부탁하고 뒷간에 다녀오니, 비랑과 향우가 짐을 챙겨 평상에 앉아 있었다.
“나루터에서 산을 타면 어제 아가씨가 가려던 방향까지는 금방이야.”
비랑이 목젖이 다 보이도록 하품하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요컨대, 갈 길이 그리 멀지 않으니 너무 서둘지 말고 잠 좀 깨고 가자는 뜻인 것 같았다.
향우는 분도 찍어 바르지 못한 상태로 잠이 덜 깬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덕분에 깐깐하게 보이던 첫인상이 조금 귀엽게 덧씌워지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밥 먹고 가요.”
가람이 선선히 동의하자 비랑이 우드득 뼈 소리가 나도록 기지개를 켠다. 가람은 그 앞에서 다른 짐을 더 챙기고 떠날 채비를 마무리했다.
향우가 분첩을 꺼내 얼굴에 두드리는 사이, 주모가 엄지손가락이 푹 잠길 정도로 그릇에 넘치게 많은 국밥을 내어놓았다.
워낙 아침부터 떠날 준비를 했던 탓에, 천천히 밥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도 아직 세상이 새파랬다.
비랑과 향우가 보퉁이를 메고 싸리문을 나갈 때쯤에야 잠이 깬 주막 사람들이 비틀비틀 기어 나왔다.
덕분에 마을에서 나루터로 향하는 길목에는 가람과 비랑, 향우뿐이었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곧 시끌시끌해질 것이다.
“저쪽에 1년 있었다고 했던가?”
“네. 그쯤이요.”
“그럼 말도 꽤 하겠구먼. 말이 제일 걱정이지. 그래, 그쪽 사람들은 뭘 먹고 사나?”
비랑은 말이 꽤 많은 성격이었다. 사실 이것저것 질문하며 두 사람에게서 동대륙의 정보를 좀 들을 생각인 가람이었지만, 워낙 말이 없다 보니 오히려 반대로 비랑이 가람에게서 서대륙의 정보를 얻어 내고 있었다.
거침없이 질문해 오는 것을 보면 애초에 가람의 옷차림을 보고 그런 목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냥, 평범하게, 치즈나 빵이나.”
“빵? 아, 예전에 먹어 본 적 있지. 영 못 쓰겠던데. 그런 걸 먹고 산단 말인가? 향우도 생각나지? 그 버석버석하고 종이 같던 음식. 냄새는 그럴듯했는데 맛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신 비랑이 다시 질문했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걸으며 말을 하면 힘들 텐데, 지치지도 않는지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계속해서 대답하던 가람이 슬슬 이 두 사람과 동행한 것을 후회하고 있을 무렵, 눈앞에 거대한 강이 나타났다.
건너편에 땅이 보이지 않았더라면 가람은 바다로 다시 돌아온 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강폭이 무시무시하게 넓었다. 물살 또한 미친 듯이 빨라서, 돌도 없는데 수류가 얽혀 여기저기서 물결이 튀었다. 사방팔방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강이었다.
이런 강에서 배를 몬다면 얼마나 사공의 기술이 좋아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가람이 아연하게 강을 바라보고 있자, 비랑이 씨익 웃으며 어깨를 툭 쳐 왔다.
“어? 이쪽은 처음인가?”
“예……. 나루터는 어디죠?”
이만한 물살을 뚫고 가는 대단한 사공을 한 번 보고 싶어진 가람이 질문했다. 비랑은 마치 재밌는 장난이라도 치는 악동처럼 싱긋 웃었다.
“맞춰 보게.”
“개뿔.”
비랑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향우가 쌀쌀맞게 받아쳤다. 캑, 하고 비랑이 혀를 깨물고 혀 짧은 소리로 엄살을 부리는데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나 혀 깨무더따. 혀!’ 하고 난리를 쳐도 ‘이건 내가 아는 병신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요하게 바라볼 뿐이다.
“나루터는 여기예요.”
향우의 말에 가람은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강변을 따라 시야를 가리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배도 사공도 나루터도 없음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설마 나루터도 없는데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강에 배를 대겠다는 건가?
“기다려 봐요. 곧 오니까. 나루터에서 산 타러 온 거 맞잖아요?”
“네. 여기 강을 넘어서 산을 타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산을 타야 강을 넘죠.”
가람은 어딘가 중요한 부분에서 의사소통에 문제를 겪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도저히 어느 부분인지 설명하기 힘들었다.
분명 그리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충분히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했는데 왜 벽에다 대고 말을 하는 기분이란 말인가?
그러나 향우는 더 설명할 생각이 없는지 바닥 근처의 적당한 바위에 앉아 강 상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같은 곳으로 시선을 던지던 가람은 곧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풍경이 조금씩 변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피곤해서, 혹은 착각인가 하고 넘겼지만 결코 착각이 아니었다. 멀리 보이는 산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산이었다.
그 비상식적인 광경에 가람은 할 말을 잃었다. 분명 이 강폭이 무시무시할 정도로 넓어서 마을이라도 수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 강을 따라 산이 떠내려오고 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산을 탄다는 의미는 등산을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정말로 강물에 떠내려가는 산에 ‘타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가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산이 강의 가장자리에 댄 뿌리를 타고 올랐다. 막상 오르고 보니 정말로 산은 산이었다.
흙도 있고, 나무 어딘가에서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린다. 다만 여느 산과 다른 것은, 산의 주변에 나무뿌리가 빙 둘러쳐져 있는 것뿐이다.
비랑과 향우, 그리고 상류에서부터 산을 타고 내려온 몇 명의 선객은 가람이 충격에 빠진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가람은 믿기지 않는 기분으로 산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분명 땅 위에 서 있는데, 주변의 풍경이 천천히 멀어져 간다.
정말로 산이라도 내려보낼 수 있을 것 같은 거친 물살이지만, 문자 그대로 정말로 산을 떠내려가게 하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그런데, 강 위에 이렇게 떠내려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산은 정말로 산 자체라서 가람은 이 단단한 땅이 물살에 따라 옮겨 가고 있다는 사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산 처음 타요?”
호의 어린 태도로 질문한 것은 선객 중 스물서넛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충격에 빠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강물에 손을 넣고 휘젓는 가람의 모습이 퍽 순진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아니, 맞는 걸지도.”
“차림을 보니 서대륙에서 오는 길이신가 봅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가람에게 말을 건넨다. 가람이 보인 순진한 태도 덕분인지 사람들은 꽤 호의적이었다.
연거푸 튀어나오는 질문과, 여기저기서 권해 오는 마른 음식, 누군가가 들으라며 이야기해 주는 산에 대한 얘기를 듣다 보니 벌써 하늘이 노르스름했다.
수다를 떨며 하루 종일 길 음식을 집어 먹고도 모자랐는지, 그 시간이 되자 또 저녁을 먹어야 한다며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람은 그제야 슬슬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잘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른 아침에 잘라 주고 안 잘라 줬으니 벌써 여덟 시간 넘게 지났다. 아마 아래턱이 거의 재생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볼일을 본다는 핑계를 대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을 본다고 했으니 누가 따라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충분히 깊은 숲으로 들어가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꺼냈다.
그러나 가람은 간과했다. 다른 사람 또한 일을 보기 위해 충분히 깊은 숲을 찾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막 모르드레드의 입 안에 칼날을 쑤셔 넣으려던 참에, 등 뒤에서 미심쩍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설마…….”
풀숲에 몸을 숨기고 은밀한 일을 보는 것은 가람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