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삼킨 강은 곧 가람의 몸도 삼킬 수 있었다.
그러고도 배가 고파 거칠게 날뛰는 강물 속에서 가람은 한없이 휩쓸려 내려갔다.
하류에서 결국 다시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찾을 수 있었기에 보람 없는 일은 아니었다.
* * *
강력한 이유는 강력한 의지를 낳는다. 강력한 의지는 강력한 행동을 낳으며, 그 모든 것은 항상 필수적인 고통을 동반한다.
가람의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1천 패스를 모을 것. 단 하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쪽 세상이 멸망하거나 가람이 수백 번 죽음의 경험을 가진다고 해도 1천 패스를 모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 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가람은 견딜 수 있었다.
언젠가 펼쳐질 그 아름다운 미래가 조금씩이나마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떤 것이라도 견딜 수 있었다.
물살에 휩쓸리는 바람에 다 찢어진 옷이나, 흠뻑 젖은 옷을 입고 한밤중의 산에서 모닥불 하나에 의지해 앉아 있는 것 정도는 고생이라고 부를 것도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것보다 더 불편한 것은 갑자기 불쑥 나타나 모닥불 좀 빌리자며 엉덩이를 들이미는 오지랖 넓은 여행자였다.
“안녕하시오?”
해가 져도 한참 전에 진 시간이었다. 조금만 더 지나면 새벽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다니. 보통 수상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가람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대충 꾸덕꾸덕하게 마른 머리카락을 하고, 옷깃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앉아 있는 가람이 퍽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쉬어 갈 수 있겠소? 갈 길이 급해서 오긴 했는데. 더는 못 가겠소.”
가람은 가만히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남자를 관찰했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은 서른이 조금 넘어 보인다.
몸은 단련한 흔적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탄탄했다. 회색 계통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허리춤에는 천으로 둘러 감은 칼이 매달려 있었다.
가람의 시선이 자신의 무기에 머물자 남자는 주춤 허리를 뒤로 뺐다. 이어서 난처한 기색으로 제 머리를 슥슥 문지른다.
며칠간 감지 않았음이 분명한 떡 진 머리카락이 만지는 대로 모양이 났다. 머리를 문지른 손은 얼굴로 향했다.
얼굴에 붙은 피로를 떼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억세게 문지르는 것을 바라본 가람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하면 그냥 물러나 떠났으면 좋겠는데, 이 정도로 매달리는 것을 보면 억지로 떼어 내기 힘들어 보인다.
어차피 동이 트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내버려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짧은 고갯짓을 본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모닥불가에 다가앉았다. 가람은 남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모닥불만 바라보았다.
강 하류에서 땅 위로 올라오느라 고생한 덕분에 온몸이 노곤했지만 잠들 기분은 들지 않았다. 탐색하듯 자신을 흘긋거리는 남자의 시선이 성가셔서 더욱 잠들기 힘들었다.
밤을 새면 다음 날 움직임이 둔해지겠지만, 정말 쉬고 싶다면 밝을 때 얼마든지 잘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편이 밤에 숲에서 잠드는 것보다 더 안전할 것이다.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가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조금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다가 어딘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짧게 탄성을 발했다.
“아!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되오. 자, 여기. 보시오.”
남자가 내민 것은 황동으로 만들어진 손바닥만 한 금속 패였다. 옷 따위에 매달도록 패의 한쪽에는 끈을 꿸 수 있는 고리가 만들어져 있다.
패에는 두 자루의 칼과 저울이 새겨져 있었다. 가람은 남자가 왜 그것을 내미는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았다.
“연의 수사관이오. 수상한 사람이 아니외다.”
가람은 귀찮은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가람이 낯선 자신을 경계하느라 이렇게나 말이 없는 것이라고 추측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지금 누군가와 통성명할 기분이 아닐 뿐이었다. 반나절 전에 저지른 일은 뒤늦게 죄책감이 되어 가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내 이름은 황누요. 아가씨는?”
황누는 어떻게든 통성명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람은 짧게 제 이름만 말해 주었다. 내내 걸어왔다면서 피곤하지도 않은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멀리 가는 여행자는 아닌가 보오. 짐이 거의 없는 것을 보니.”
가람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강물에 휩쓸리며 입고 있던 옷도 너덜너덜해진 마당에 짐 가방이 성할 리 없다.
무사한 것은 모르드레드를 담고 있는 가죽 주머니 하나뿐이다.
그나마도 여기저기가 해어져 접고 덧대어 겨우 내용물이 보이지 않도록 가려 놓았다. 나머지 큰 짐은 모두 강물에 휩쓸려 가 버렸다.
가진 것은 옷 안에 찬 총과 돈, 모르드레드의 머리뿐이다. 옷은 너덜너덜하고, 짐은 가죽 주머니 달랑 하나. 황누의 눈에는 그런 가람이 매우 이상하게 보였다.
무슨 말을 해도 가람이 대충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하거나, 혹은 아예 대답하지 않다 보니 아무리 붙임성 좋은 황누라도 대화를 이어 가기 어려웠다.
몇 가지 질문이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곧 뚝 끊긴다. 남은 것은 어색한 침묵뿐이었다. 물론, 어색해하는 것은 황누뿐이었지만.
침묵 사이로 갑자기 무언가가 불가로 날아들었다. 황누는 반사적으로 품 안에서 짧은 단도를 꺼내었다가 날아든 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다시 단도를 갈무리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람은 그의 행동이 매우 민첩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저 정도이니, 아마 한가락 하는 실력일 것이다. 어쨌거나 날아든 것은 의외의 손님이었다.
모닥불 근처로 종종 걸어 들어와 흘끔흘끔 눈치를 살피는 것은 따라쟁이 회색조라는 밤새의 일종으로, 매우 동글동글한 외견을 갖고 있어 애완조로 인기가 많은 새였다.
이 새는 사람에게 매우 친근하게 구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여행자의 모닥불을 발견하면 근처로 와 날아드는 벌레를 잡아먹거나, 혹은 여행자에게서 자투리 음식을 받아먹곤 했다.
매우 귀여운 외견을 가진 덕분에 여자 여행자라면 열에 열은 이 회색조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제법 영악해 말도 할 수 있는 이 새는 그런 이유로, 여자 여행자가 있는 일행 앞에만 모습을 보였다.
회색조의 눈이 가람을 빤히 바라본다. 조그마한 것이 새카만 구슬 같은 눈으로 또랑또랑하게 바라보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어지기 마련인데, 가람은 회색조를 바라보다가 다시 무심하게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회색조는 실망하지 않고 황누를 바라보았다. 황누 또한 회색조를 바라보았다. 적어도 가람처럼 무시하는 행동은 아니었다.
회색조가 그 사실에 약간의 희망을 품는 순간, 황누가 놀라운 속도로 손을 뻗어 회색조를 붙잡는다. 회색조는 곧 모닥불 안으로 던져졌다.
회색조의 봉변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람은 강에서 짐을 다 잃어버려 맨몸이나 다름없었고, 황누 또한 일의 시급함 때문에 요깃거리를 챙겨 오지 못했다.
혹시나 가람의 보퉁이에 먹을 것이 들어 있나 싶어 말을 붙여 보던 차에 이 회색조가 날아든 것이었다. 불 속에서 푸드득거리던 회색조는 곧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황누가 회색조를 산 채로 잡아 굽는 그 모든 과정을 가람은 황당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주먹보다도 작은 새에 먹을 것이 뭐가 있다고.
가람 또한 아침에 먹은 국밥 외에 먹은 것이 거의 없었지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런 가람의 시선에 황누는 조금 민망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배가 고파서 그만, 날개 한쪽 들겠소?”
가람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황누는 두어 번 더 권하다가 설익은 새를 통째로 붙잡고 뜯기 시작했다.
뼈째 씹어 먹을 기세라, 가람이 먹겠다고 했으면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걸스레 새를 먹던 황누가 조금 부끄러웠는지 반쯤 뜯어 먹던 새를 다시 한 번 더 권했지만, 가람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았다. 심리적인 문제였다.
“수사관이라고 하셨던가요?”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던 가람이 입을 열자 황누는 반갑게 그 말을 받았다. 그는 가람이 다시 입을 다물까 두렵기라도 한 듯 황급히 대답했다.
“그렇소. 아가씨도 조심하시오. 요 근처는 심성 나쁜 사람도 별로 없는 좋은 곳인데, 흉흉한 일이 생겼지 뭐요. 강줄기의 산 하나에 있던 여행자들 전부가 시체가 되었소.”
가람은 그 내용에 굳이 놀라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 지역을 지나는 수사관. 그렇게 급하다면 질이 나쁜 범죄일 것이고, 아마도 살인에 준하는 사건일 것이다.
반쯤 예상하고 있었지만, 직접 귀로 들으니 착잡했다. 가람은 어두운 얼굴로 모닥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갑자기 가람이 입을 꾹 다물자 황누는 이야기의 주제가 너무 험했던 모양이라고 자신을 탓했다.
황누가 지나가며 들었던 우스갯소리를 몇 개 했지만, 가람이 웃는 일은 없었다.
새벽 내내 황누는 가람의 침체된 기분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성실한 태도로 노력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가람은 그런 그의 노력을 줄곧 묘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살인귀도 보통 살인귀가 아니오. 아가씨도 혼자 다니지 말고, 적당히 일행이라도 구하는 게 어떻소? 혼자 다니는 것이 무섭지도 않소? 서대륙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선 세상이 참 흉흉해졌소이다.”
가람이 바로 그 살인귀였다. 산에서 발견된 시체들은 가람이 저지른 일의 결과물일 것이다.
엉거주춤 기듯이 도망치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가람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황누는 가람의 그런 모습을 슬픔으로 이해했다. 참담한 꼴을 당한 사람들을 애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슬픔이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죄책감. 딱 그 정도다. 뇌에 달라붙어 괴롭히듯 간질이는 그 기분. 그 느낌. 떨쳐 내려면 얼마든지 떨쳐 낼 수 있었다.
굳이 모르드레드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람의 찌들고 어두운 분위기는 사람을 사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가람 본인도 굳이 사람을 사귀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이성적인 결론이었다. 언젠가 돌아갈 텐데 굳이 이 세계에 정붙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가람의 이유였다.
그러니 정들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다. 사실 이제 왜 착하게 굴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죽음의 소실은 가람에게서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빼앗아 갔다. 물론 그런 것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제 가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마당에,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것도, 모르는 사람을?
만약 가람이 매일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잘라 내는 나날을 보내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졌을 것이다.
그것의 도덕적인 가치에 대해 굳이 논할 필요도 없이, 살인은 그리 쾌적한 행위가 아니다. 가람은 살인의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모르드레드의 비인간적인 생물학적 구조는 가람을 무디게 만들었다. 너무나 무디게 만들었다.
제 목숨이 별것 아니니, 다른 사람 목숨이라고 무거울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람은,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 뮐러가 이야기했듯, 지금은 피 냄새 나는 손을 하고 있어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꺼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필요한 만큼 행위를 재단하고, 계산하고. 만약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라면, 하는 것이다.
뮐러의 조언은 그런 것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가람에게 조금 어긋난 방향으로 조언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내 말 듣고 있소? 그냥 흘려듣지 말고, 꼭 일행 구하시오. 세상이 험해.”
가람은 고개를 들고 황누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느끼던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가람은 온통 젖어 있고, 강의 하류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한 번 정도는 가람을 의심할 법도 한데, 황누는 절대 가람을 범죄자로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이렇게나 가느다란 여자와 그런 끔찍한 일을 결부시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가람의 옷 아래에는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기가 잠들어 있다.
오직 살인을 위해 특화된 무기였다. 그리고 가람은 이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 무기를 활용할 생각도 있었다.
모르드레드처럼 마을 하나를 통째로 연소시키는 미친 짓거리는 절대 하지 않을 테지만, 그래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사용할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도 수사관은 모든 정황에 들어맞는 용의자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
가람은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수사관은 내내 가람을 걱정하다가 새벽녘에 떠났고, 가람은 그와 반대편으로 향했다.
일주일 후, 수배지에는 건장한 남자로 추정되는 범죄자가 산에서 대량 살인을 저질렀다는 내용이 쓰여졌다.
바늘이 가리키는 높은 산으로 떠난 가람이 수배지를 보게 될 일은 없었다.
Chapter 18
바늘은 높이, 더 높이, 손등에 달라붙어 날아오를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운지 한없이 높은 곳만을 가리켰다.
가람은 바늘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렇게나 오랫동안 하나의 패스를 찾아다니는 것은 처음이다.
배를 구하고, 바다를 건너고, 산을 오르는 동안 벌써 서너 달이 지나 버렸다. 어깨에 간신히 닿던 머리칼이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후.”
숨을 토해 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기압 차이 때문에 폐가 자꾸 헛부푼다. 폐에 잔뜩 든 바람을 내보내고자 한 행동인데,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후려쳐서 뺨이 화끈화끈하다. 따귀라도 맞은 것 같았다.
메마른 이끼로 뒤덮인 돌을 잡고, 가람의 걸음이 잠시 멎는다. 앞으로 나가는 짓을 그만두자 바람이 조금 잠잠해진 것 같았다.
잠잠해졌다 해도, 저쪽 세상에서 가져온 외투를 찢어발길 듯이 사나운 건 마찬가지다.
누가 이 바람을 잡아다가 고삐라도 매어 줬으면 좋겠다. 아마 이곳이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것도 다 이 성질 나쁜 바람 탓임이 분명했다.
벌써 스무 날쯤 지났나. 드물게 운이 좋았는지, 길을 잘 든 탓에 끊기는 일 없이 꾸준히 고도를 높여 가며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었는데, 깎아지른 절벽을 몇 개 넘어오자 그나마도 사라졌다.
절벽 사이를 이어 주던 외나무다리의 상태로 봐서는, 앞으로도 이쪽에 길이 날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오가는 사람이 없는 덕분에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자르는 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어 좋다.
좋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모르드레드의 머리가 바람에 날아갈까 봐 오랫동안 저쪽에 있지는 못하지만, 이틀마다 꾸준히 먹을 것을 가지고 올 수도 있고 씻을 수도 있다.
이 주변에는 먹을 것이라곤 없어서, 자주 식량을 가져올 수 없었다면 난감할 뻔했다.
들리는 건 바람 소리와 거친 자신의 숨소리, 보이는 것은 돌과 그 사이에 난 명줄 질긴 잡초 몇 포기뿐이다.
돌 아래에 토끼나 들쥐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걸 먹느니 마트에 한 번 다녀오는 것이 훨씬 낫다.
하지만 그 생활도 이제 끝이다. 가람은 황금빛으로 빛나는 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패스가 아주 가까이 있다.
가람은 기운을 쥐어짜서 다리에 실었다. 부스러질 것처럼 흔들리던 두 다리가 단단하게 굳는다.
메마른 입술을 질끈 물고, 가람은 다시 위로 걷기 시작했다. 패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잠깐 멈춰 둘러보니 있을 만한 곳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가 지었는지, 다 허물어져 가는 돌탑이 산꼭대기에 보였다. 구름마저 발아래로 보일 만큼 높은 곳에, 낡은 돌탑 하나. 외견이 좀 멀쩡했다면 신선이 사는 곳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가 보니, 탑은 그냥 낡은 것이 아니라 거의 무너져 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가람이 발을 디디면 그 진동에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세찬 강풍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보면, 골격은 제법 튼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바로 뒤에 깎아지른 절벽이 보여서 이 탑의 최후를 예상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마모되다가, 언젠가 이 탑은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절벽 귀퉁이에 서 있는 낡은 탑. 발뿐 아니라 털끝 하나 들이고 싶지 않은 장소였지만, 바늘은 그 안을 가리키고 있으니 싫어도 들어가야 했다.
“사람인가?”
탑 안, 그림자로 가려진 벽에서 꺼끌꺼끌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