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베이스캠프에 갔을 때 새로 챙겨 온 것이었다.
아주 남루한 차림의 늙은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빛을 막는다. 매우 쭈글쭈글한 손이다.
대충 봐도 일흔은 넘었을 것 같은 노인이었다.
“이런 곳에 사람이 오다니. 못 믿을 일이군.”
가람이 할 말이었다. 노인은 이가 다 빠진 입으로 웃고는 가람을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와서 앉게. 나이가 드니 눈이 어두워.”
돌조각 사이에 앉은 노인은 사람이 아니라 마치 쓸모없는 물건처럼 보였다.
가람은 가까이 가는 대신, 손등을 바라보았다. 바늘은 노인 쪽을 가리키고 있다. 설마 노인이 패스를 가지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노인의 뒤쪽, 구멍이 나 있다. 그가 몸으로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 너머를 바늘은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뒤에 난 구멍으로 지나가야 하니 비켜 주세요.”
가람이 말하자 노인은 주름진 눈을 크게 떴다.
“여자? 여자아이인가? 어린 목소리인데. 이리, 좀 가까이 와 보지 않으련? 나는 다리를 지키는 노인이다. 먹을 것을 주면 네 짐을 갖고 있다가, 돌아올 때 돌려주마. 이렇게 바람이 부는데, 짐을 갖고 다리를 건너기는 힘들 게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손을 등 뒤로 돌려 무언가 작업을 했다. 굵다란 나무 같은 것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는데, 언뜻 보기에 몽둥이처럼 보인다.
이가 다 빠진 노인네가 덤벼 봐야 가람에겐 위협거리가 되지 못하지만, 그래도 노인의 주름진 살갗 아래에는 근육이 얼비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가람은 노인의 번들거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이런 곳에서 외줄 다리라니. 벌이가 시원치 않을 텐데요.”
“나는 늙어서 조금만 먹어도 돼. 흘흘.”
“다리가 있다면, 일단 다리부터 보여 주세요.”
“먹을 것이 먼저다.”
노인 강도. 가람은 눈앞의 늙은이를 그렇게 결론 내렸다. 어차피 보는 눈도 없고, 이곳을 지나가긴 해야 한다.
가람은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노인의 흐린 시선이 권총에 못 박힌다. 처음 보는 물건인지, 주름 가득한 얼굴이 갸우뚱했다.
“그건 뭐니, 아가?”
“비켜 주세요.”
“그럴 순 없지. 간혹 짐을 다 갖고 건너겠다고 치기를 부리는 아이들이 있단다. 짐을 내게 주면 비켜 주마. 자자, 다리는 정말로 있어. 보렴.”
노인은 슬쩍 엉덩이를 치워 가리고 있는 구멍 너머를 보여 주었다. 강풍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외줄 다리가 보인다.
다리라고 하기도 민망한 물건이었다. 어쨌거나, 다리가 정말 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거리낄 것은 없다.
가람은 눈앞의 수상한 노인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자신이 다리를 건너가고 있을 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탑 밖으로 나가요.”
“뭐? 아가, 그럴 수는 없지. 이 외줄 다리는 내 다리다. 그리고 최근에는 다리가 약해져서, 혼자 건너가면 위험해. 내가 다리를 잡아 주마.”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걱정스럽다는 듯 눈가에 능청스러운 주름이 진다. 뻔뻔하게도!
가람은 신경질적으로 경고했다.
“당장, 일어나서 나가요. 내가 다리를 건널 때 허튼짓을 하려는 생각이라면, 꿈 깨시고.”
“아가, 왜 이리 고집이 세? 그냥 먹을 것을 두고 지나가래도?”
노인이 호소하자, 가람은 코웃음 쳤다.
“내가 다리 중간쯤 가면 다리를 끊어 버리려고 한 거겠지? 안 속는다, 이 파렴치한 놈!”
노인이 손사래 치는 순간, 가람의 총이 불을 뿜었다. 탑을 무너뜨릴 것 같은 총성이었다. 메마른 노인의 몸에서는 피도 얼마 나지 않는다.
심장이 꿰뚫린 노인은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제 가슴팍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뻐끔거렸다. 그 사이로 피거품이 그르륵 일어나 침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자리에서 몇 번 꿈틀거리던 노인은 그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너무 충동적으로 총을 쏴 버린 가람은 쏘고도 스스로에게 놀랐다.
총을 쏠 일은 아니었는데, 죽일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위협을 해서 쫓아 버릴걸. 아니, 아니지. 어차피.
그래,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잖아. 내가 죽였다고 누가 알겠어? 그리고 곧 죽을 노인인데.
분명, 여행자 여럿 골려 먹었을 거야. 이렇게 처리하지 않았으면, 다리 건널 때쯤 내가 죽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면 모르드레드의 머리도 잃어버렸을 테고. 안 돼, 안 돼. 모르드레드의 머리는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
그 속삭임은 언젠가, 아주 옛날 바랄라인에서 가람에게 비아냥대던 킬킬거림과 닮아 있었다. 가람은 그 목소리를 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성심을 다해 가람을 칭찬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잘해 나가고 있다고.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꿀을 바른 듯이 달콤하던 그 자기 합리화는, 노인의 시체를 넘어서는 순간 시커먼 독액이 되어 가람의 심장으로 스며들었다.
외줄 다리는, 노인이 경고했던 대로 약하디약했다. 홑몸으로 건너간다면 몰라도, 짐까지 함께 넘어가는 것은 무리다.
스며든 독액은 의혹이었다. 혹시 내가 쓸데없는 의심을 한 것은 아닐까?
가람은 의혹을 뒤로한 채 흔들리는 외줄 다리 위에 몸을 실었다.
혹시나 도중에 곤두박질칠까 봐 저쪽 세계에서 끈을 가져다가 허리에 묶고 외줄 다리에 엎어져 기듯이 이동했다. 그 결과 가람은 정말로 간신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나마 건너기 직전, 바람에 섞인 다리의 위태로운 비명을 듣지 못했다면 다리를 건너지 못할 뻔했다.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투둑거리는 소리에 얼른 그 낭떠러지에서 몸을 날려 반대편 땅으로 손을 뻗었던 것이다. 삐죽 튀어나온 돌에 손이 걸리지 않았다면 미끄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반대편 벽에 몸을 날림과 거의 동시에, 얇은 외줄 다리는 제 목숨을 다했음을 알리고 끊어져 늘어져 버렸다.
거센 바람에 아직 팔랑거리고 있긴 했지만, 워낙 낡아 다시 이어서 쓰지는 못할 것 같았다.
외줄 다리는 많이도 낡아 있었다. 정말로, 많은 여행자들이 이용했던 것처럼 낡아 있었다.
그리고 절벽 반대편에서, 가람은 노인이 가람에게 휘두르려고 했던, 아니, 휘두르려 한다고 짐작했던 몽둥이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외줄 다리가 묶여 있는 기둥 아래에 줄을 받치듯이 놓여 있었는데, 위아래로 쌓아 올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하는 용도였다.
노인은 가람이 흔들리지 않고 줄을 지나게 해 주려고 쌓아 두었던 나무를 갈무리해 줄을 팽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용도를 모른다면, 영락없는 몽둥이였다.
가람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참 동안 노인이 죽어 있는 반대편 절벽의 탑 아래를 바라보았다. 구멍 사이로 노인의 시신이 슬쩍 보인다.
금방이라도 그의 유령이 일어나 달려올 것만 같다. 스산하게 절벽 아래를 휘도는 바람이 노인의 호통 소리처럼 들렸다.
죄책감이 구름처럼 일어났지만, 구름이라 가람의 마음에 어떤 상처도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마음이 5년은 늙어 버린 가람은 한참 동안 노인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손등의 바늘을 따라 걸었다.
가람의 마음 근처에 굴러다니던 슬픔과 죄책감은, 곧 빗자루로 쓸어 낸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졌다.
근처 풀숲에서 찾아낸 패스가 200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400패스를 가지게 된 가람이 드물게 밝게 웃었다.
오랜만에 즐거운 기분으로 산 아래의 마을을 향해 걷고, 웃으며 즐겁게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잘라 내었다.
400패스라니! 벌어지는 입을 감추기가 힘들다. 이제 600패스만 더 모으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미치광이 같은 짓거리도 끝인 것이다.
가람은 너무 기분이 좋아 지치는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걸었다. 하루라도 일찍 주점으로 가서 맥주라도 한잔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다.
모르드레드도 맥주 통에 담가 주면 좋아하겠지. 방으로 맥주를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한 통 가득히! 통째로 말이야.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람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째, 이곳은 동대륙이다. 그러니 맥주는 없었다. 둘째, 일단 가람은 아직 바람이 불어닥치는 고산 한복판에 있었다.
물론 원한다면 마트로 가서 맥주 정도는 얼마든지 가져올 수 있지만, 불어닥치는 바람은 으레 체감 온도를 낮추기 마련이다.
흥분으로 달아올랐던 기분이 가라앉자 가람은 조금 숙연해졌다. 그러나 죽은 노인을 떠올리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극기를 요구할 만큼 가파른 돌산은,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더 힘들었다.
흙더미, 말라비틀어진 잡초 따위에 빠끔히 숨어 있는 돌부리들은 호시탐탐 가람의 발을 노리고 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눈에 담고, 세세한 주의를 기울이며 걸어 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람은 걷는다기보다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경사는 가속도를 붙여 주었고, 가람의 발은 어느새 제 의지가 아닌 기울어진 산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가람이 별걱정이 없었던 것은, 조금만 더 뛰어 내려가면 완만한 언덕과 오르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로 힘을 받아 달려가다 보면 적당히 오르막을 오르다가 멈출 것이다.
가람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달려 내려간 끝에, 가람은 열흘 동안 올라왔던 높이를 한나절 만에 내려갈 수 있었다. 한계까지 움직인 몸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가람은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이마와 땀에 떡이 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오르막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그렇게 높지는 않은 언덕이다. 아주 야트막한 동산쯤 되는 크기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선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순간 간이 서늘하게 식었던 가람은, 불타고 있는 마을의 이질감을 깨달았다. 활활 불타고 있는데도, 연기나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도망쳐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어디 모르드레드 같은 미친 마법사라도 들이닥친 걸까 하고 눈을 가늘게 뜨자, 그제야 못 보던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가람이 마을을 불태우는 화마라고 생각했던 붉은 것은,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을 정도로 주렁주렁 매달린 등불이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흥겨운 소음이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잊고 있던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해졌다.
땀이 식고 나자 허기와 피로가 몰려온다. 가람의 걸음이 그곳으로 향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멈추시오.”
끝에 수술이 달린 창대가 가람의 앞에서 교차했다. 홀린 듯이 걷고 있던 가람은 미간을 찌푸리고 급히 멈춰 섰다. 하마터면 교차된 곳에 얼굴을 부딪칠 뻔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치안대인가? 그러고 보니 그냥 마을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큰 도시다. 돌로 둘러서 만든 성벽도 있다.
마을이라기보다 성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지붕에 기와를 올리고 알 수 없는 장식을 주렁주렁 붙여 둔 점이 서대륙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성벽은 성벽이다.
그렇게 도시를 둘러보는 가람이 자신의 질문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는지, 경비병이 딱딱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디서 오는 길인지 말하시오.”
심기가 불편해진 경비병의 어조는 준엄했다. 안내가 경고가 되고, 경고가 위협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다행히도 아직은 안내와 경고 사이에 위치했기 때문에, 가람은 얼른 대답했다.
“저쪽이요.”
가람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을 본 경비병의 표정이 묘해진다. 무언가 질문하려던 그는, 턱 밑을 잠깐 쓰다듬다가 손을 내밀었다.
가람은 그 손바닥을 보고 조소했다. 뇌물을 달라는 건가? 아니꼽긴 하지만 돈을 주고 소란을 피하는 편이 나을 테지.
“여기요.”
가람이 동전 한 냥을 손바닥에 올려놓자 경비는 멍한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다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제 옆에 서 있던 경비에게 동전을 내밀어 보였다.
하, 하고 짧게 헛바람을 내쉬기까지 한다. 가람은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슨 헛수작이오! 어서 패를 보여 주시오!”
“패요?”
얼떨떨하게 되물으니 단번에 노호성이 터진다.
“패! 국경을 넘을 때 발급받았던 패 말이오. 설마하니 칼바람 산맥을 넘어오진 않았을 테니, 수상한 자가 아니라면 패를 갖고 있겠지.”
안타깝게도, 가람은 경비병이 말한 두 가지 사항 모두에 해당되었다.
일단 가람은 정말로 칼바람 산맥을 넘어오느라 군데군데 위치한 국경 초소를 단 하나도 거치지 않았고, 실제로 정말 수상한 자였기 때문에 여느 서대륙 여행자들처럼 마을을 따라다니지 않았다.
덕분에 동대륙에서 패가 필요한지, 왜 필요한지, 발급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에 쓰는지 등의 기초적인 지식을 전혀 알지 못했다.
솔직히, 몇 나라로 통합된 서대륙에서 지내던 가람에게 국경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소한 개념이었던 것이다. 알고는 있지만, 겪어 보진 못한.
“설마, 패가 하나도 없나? 불법 입국자는 아니겠지?”
아닐 거라 가정하는 질문이었지만, 경비병의 어조는 가람이 틀림없이 불법 입국자일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가람은 당황했다.
“저, 저기. 패가 없으면 어쩌죠? 길을 잘못 들어서 국경 초소를 못 들렀나 봐요.”
당황한 가람을 한 번쯤 안타까이 여겨 줄 만도 하건만, 경비병은 코웃음 쳤다. 늘 그렇듯, 공권력은 그 대상의 사정을 생각해 주는 일이 없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무관심한 눈이 정말로 아니꼽다. 가람의 표정이 설핏 굳어졌다가 풀어졌다.
갑자기 무언가가 확 치솟았다가 급히 가라앉는다. 덕분에 꽉 깨물었던 어금니가 욱신거렸다.
“알았어요. 그럼 그냥 들어가지 않을게요.”
축제가 좀 아쉽긴 하지만, 돌아가면 그만이다. 가람이 그런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자, 들어가려고 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창대가 그 앞을 막아섰다.
“왜요?”
“불법 입국자라는 게 밝혀진 이상, 그냥은 못 간다. 넌 감옥에 가야 해.”
“뭐? 정말로 몰랐다구요.”
“다시 말하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경비병의 몸짓이 이제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