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창대를 이용해 먼지를 쓸어 내듯 자신을 밀어 내는 행동에, 가람이 다급하게 말했다.
“자, 잠깐.”
“안 돼.”
“있어요! 있다구요. 그, 패인지 뭔지.”
휘황찬란한 축제의 현장을 눈앞에 두고, 어두운 감옥으로 먼지처럼 쓸려 내려갈 뻔한 가람은 가까스로 목에 걸려 있던 곡옥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 그 직전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고, 경비병이 창대로 밀어 댈 때까지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가람의 기억을 뒤져 낸 섬광 같은 갈고리는 바로 창끝을 피해 고개를 들고 나서 본 깃발이었다.
동글동글하게 휘말린 형태의 곡옥. 사실 어두워서 곡옥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형태를 보니 해묵은 기억이 떠오른다.
분명, 흘려듣긴 했지만 하늘 운화와 그 오빠가 도움이 될 거라며 뭔가 주긴 했었다. 그것이 신분 패의 역할을 할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저 깃발의 그림과 딱 똑같다.
“이거요.”
옷깃을 젖혀 목걸이를 보여 주자 경비병이 미간을 모으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가람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살펴보았다.
그 안색이 점점 굳어지더니, 아직도 창대를 꼬나쥐고 있던 제 동료에게 눈짓한다.
눈짓을 받고 온 동료 경비병은 그와 교대해 목걸이를 살펴보았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단순한 곡옥 목걸이 두 개다. 운화의 것, 운랑의 것.
“하늘가의 사람입니까?”
경비병의 태도가 더없이 정중해졌다. 새똥에 구르는 구더기만도 못한 취급을 할 때는 언제고. 이번에는 가람의 심기가 조금 불편해진다.
“아니요.”
“그 목걸이는 가주의 목걸이라 불리는 겁니다. 어떤 연유로 소유하게 되셨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당신은 아무리 봐도 하늘가의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가람은 짤막하게 목걸이를 소유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고, 이야기가 중반 정도 넘어갈 때 경비 하나가 사라졌다.
아직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니, 하늘가에 찾아가 직접 물어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렇다면, 이 마을에 하늘가가 있다는 건가? 하늘 운화도, 하늘 운랑도 있다는 건가?
그 대답은 본인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다. 남은 경비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이 떠났던 경비병이 구르듯이 달려왔다.
그 뒤에는 오랜만에 보는 두 사람이 황급히 뛰쳐나온 것이 분명한 차림으로 헐떡이고 있었다.
흐트러진 옷과 머리, 제대로 신을 신지도 않아 운화의 고운 꽃신은 뒤가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서대륙에서 볼 때는 꼬질꼬질 거지나 다름없었는데, 고운 하늘색 베일과 하늘거리는 흰색 옷, 묘안석 목걸이와 단추로 옷을 지어 입어 신수가 훤하다.
가람을 앞에 둔 두 사람은 잠시 말문을 잃고 바라보다가 뒤늦게 벅차올라 와락 끌어안았다.
“왜 이제 오셨습니까!”
정작 가람은 그 사이에서 이 두 사람이 이렇게나 반기는 이유를 알지 못해 눈을 끔뻑일 뿐이다.
가람과 함께 열렬한 포옹의 시간을 가진 두 남매는 뒤늦게 그녀의 거지꼴을 발견했다.
가람은 ‘어떻게 이렇게, 지금까지 이런 거지꼴로 돌아다닌 거예요?’ 하고 탄식하는 운화를 향해 눈을 깜빡이다가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사실 거지꼴이라고 할 만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가람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바로 이틀 전에 마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먼지로 좀 더러워지긴 했지만 해어지거나 찢어진 곳은 없었다.
“옷 말구요.”
어리둥절한 표정의 가람에게 운화가 조용히 말했다.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얼굴이 이렇게 꼬질꼬질하다니. 머리카락도 산발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낭랑하고 고운 목소리. 가람은 괜히 꽁지로 묶은 머리끝을 잡아당겨 킁킁 냄새를 맡아 보았다. 땀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꼬질꼬질한 정도는 아닌데.
이런 지적을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제법 당황스러웠다. 가람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자, 운랑이 점잖게 끼어들었다.
“운화. 은인께도 사정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오라버니.”
“은인을 계속 여기 세워 둘 생각이냐?”
“아.”
운화가 짧게 탄성을 지르고 가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두 남매가 반가워하는 것에 비해, 가람은 조금 차갑다 싶을 만큼 담백한 태도로 서 있었다.
운화는 손을 내밀었다가, 가람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자 팔을 더 뻗어 가람의 손을 움켜쥐었다.
누군가와 닿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손안에 차오른 낯선 온기에 가람이 흠칫했다.
가람이 뚫어져라 손을 바라보고 있자, 운화가 스스럼없이 그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저희 집에서 묵으실 거죠? 빈방은 아주 많아요. 일단 가서, 씻고 푹 쉬어요. 축제는 앞으로 열흘 동안이나 계속하니까.”
운화가 방실방실 웃으며 가람의 손을 잡아당겼다. 가볍게 채근하는 동작에, 얼떨떨하게 걸음을 옮기자 운랑이 그 뒤를 지키듯 막아섰다.
가람은 그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어색하게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 누군가가, 아는 사람이, 자신을 지키겠다고 서서 따라오는 느낌이 꽤 낯설다.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운랑과 운화를 만나느라 잠시 잊고 있었지만, 가람은 이 도시에서 빛나는 축제의 등불을 보고 찾아온 것이었다.
운화의 손에 이끌려 걷는 내내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좋다고도, 싫다고도 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손안에는 온기가 있고, 눈앞은 휘황찬란하다. 귀에는 웃음소리와 운화가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달라붙어 간질간질했다. 축제의 흥겨움이 흘러넘치는 마을.
하늘에 내건 종이 등의 붉은 색감 때문인지 어쩐지 따듯해지는 기분이었다.
골목과 골목을 돌아 소담한 담장을 따라 걷자 곧 커다란 집이 나타났다. 으리으리하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부유해 보이는 집이었다.
나무문으로 들어서자 널따란 마당 안에는 커다란 본채와 몇 개의 작은 건물들이 바로 보였다.
집에서 키우는 것인지, 하얀 개 몇 마리가 후다닥 달려와 헥헥거리며 운랑과 운화의 곁을 맴돌았다.
“솜이랑 운이에요. 얘는 몽.”
운화가 강아지를 소개하는 사이 본채와 작은 건물을 오가던 하인 몇 명이 운화를 보며 꾸벅 인사했다.
그대로 지나치려는 하인을, 운화가 손짓해 부르더니 방 하나를 준비하라 일렀다.
하인은 ‘예 아가씨.’ 하고 대답했는데, 운화의 하늘하늘 사뿐사뿐한 자태와 그 호칭은 꽤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가람은 새삼 역시 아가씨구나 하고 감탄했다.
사실 다른 대륙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재산이 받쳐 줘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라면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운랑과 운화가 제법 있는 집 자식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새삼 눈으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솔직히, 가람은 이 두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동대륙이 얼마나 넓은데, 어디 사는지도 모를 두 사람을 다시 만난단 말인가? 사실 가람은 운랑과 운화를 거의 잊어버린 상태였다.
“혹시 피곤하세요?”
가람이 외지에서 오는 길이라는 것을 뒤늦게 떠올린 운화가 걱정스레 질문했다. 조금 피곤하고 허기지긴 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가람이 고개를 가로젓자 운화가 손뼉을 치며 안도했다. 잘 됐다며 연신 박수를 치는 모습에 가람은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아, 드디어 웃으셨다.”
“네?”
“아까부터 굉장히 딱딱한 얼굴이셨거든요. 저희를 만나게 된 게 곤란하신 건가 했어요.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아요. 그때는 너무 상황에 치이고 지쳐서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는데, 그리고 저희 오빠까지 도와주셨다니 정말 저희 가족의 은인이세요.”
재잘거림 끝에 살포시 웃는 웃음은 소녀의 청순함과 아가씨의 우아함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가람이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을 준비해 오겠다던 하인이 운화의 뒤로 다가섰다.
“운화 아가씨. 손님방이 준비되었습니다.”
코 바로 옆에 커다란 점이 있는 하인이다. 턱살과 볼살이 많아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한 인상이었다.
축 처진 커다란 눈은 겁이 많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가람과 눈을 마주치고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유가예요. 유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있었죠. 가람의 방은 유가가 담당하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유가에게 말씀하시면 돼요. 아, 물론 저랑 오라버니에게 말씀하셔도 되고요.”
운화가 정식으로 유가를 가람에게 소개했다. 유가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기에 가람도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두 사람이 인사를 교환하는 것을 기다린 운화가 조근조근 지시했다.
“유가. 방을 안내해 드려. 아, 저와 오라버니는 잠시 볼일이 있어서 다녀올게요. 아까 급히 나가느라 하던 일을 마무리하지 못했거든요. 방에서 일단 좀 쉬시고, 같이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어요.”
가람은 어느새 이 집 안에 머무는 것이 기정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딱히 지적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운화를 다시 본 것이 반갑기는 하지만, 그만큼 불편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뛰쳐나가자니, 축제로 한창인 이 마을 여관의 빈방은 다 찬 지 오래일 것이다.
가람은 조금 불편하고도 편안한, 공존할 수 없는 마음으로 유가의 뒤를 따랐다.
유가는 가람의 발밑에 노란 등을 비추어 주었다. 이제는 밤눈이 어두운 편이 아닌지라, 가람은 그 호의가 조금 쓸데없게 느껴졌다.
그러나 대각선 방향으로, 앞을 막지 않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 안내하는 모습이나, 간혹 뒤돌아보며 가람이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숙련된 하인의 모습이다.
이보다 더 뛰어난 길 안내는 없으리라. 그래도, 침묵은 조금 불편했다. 가람은 유가에게서 옅은 경계의 향기를 맡았다.
가람에 대해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가는 가람을 경계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무 말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냥 겉모습만 보면 가람은 대단히 수상한 사람이었으니까. 경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경계를 풀기 위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겠지만, 가람은 자신의 대화가 그런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딱히 경계를 풀 필요도 못 느꼈다.
어차피 바늘이 충전될 때까지만 머물 곳이다. 가람의 시선이 유가를 떠나 동대륙의 기묘한 건축 양식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동대륙의 일반적인 건축물이야 주막에 묵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잔뜩 보았지만 이런 고급 주택의 안쪽까지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복잡하고 기묘한 세공으로 장식된 창문과 커다란 나무 기둥들, 처마에 매달린 풍경은 서대륙과는 완전히 다른 양식의 건축물이다.
서대륙이 건축 자재로 돌을 선호한다면, 동대륙은 주로 특수한 가공을 거친 목재를 사용했다.
철목이나 강목, 한목이라고 불리는 여러 종류의 목재들을 잘 다듬어 특수하게 처리를 하면 강철보다도 단단해진다고 한다.
동대륙은 그 목재로 기둥을 만들어 벽 안에 숨겨 놓거나, 혹은 밖으로 빼어 놓았는데 그 나무 기둥의 속은 텅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비어 있는 곳은 수납공간으로 쓰는 것이다. 덕분에 동대륙의 고급 저택에는 옷장이나 서랍이 없다. 벽장이라는 이름의 나무 기둥 안에 모두 수납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람이 안내받은 방도 마찬가지였는데, 서랍이나 옷장이라곤 없었다.
대신 매우 쓸데없어 보이는 장식물이나, 잔뜩 세공을 한 간이 가리개 따위가 가구들이 차지해야 할 공간을 대신 차지하고 있었다.
유가는 가람이 방을 둘러보는 사이 어딘가로 떠나 버렸는데, 가람이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자신의 짐을 풀려던 때였다.
그냥 바닥에 먼지 가득한 이 가방들을 내려놓아도 되는지 물어보려는데, 유가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짐을 계속 들고 있을 수 없었던 가람은 최대한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방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걸을 때마다 모르드레드의 머리가 담긴 주머니가 가람의 허리춤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이 도시에 들어오기 직전에 한 번 잘라 주었으니, 아직 잘라 줄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은 그녀에게 작은 여유를 주었다. 그 여유와 더불어 방 안의 훈훈한 온기는 가람을 나른하게 늘어지도록 만들었다.
잊었던 피로를 불러오는 것 같은 온기에 가람은 그 근원을 찾아 방을 돌아다녔으나 벽난로나 화로 비슷한 것도 찾지 못했다.
황동 장식을 단 나무 가리개 뒤에 조그마한 화로 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불씨는 모두 죽어 있었다.
조금 더 둘러보던 가람은 문득 열기의 근원을 발견했다. 바닥이 따듯하다.
신발을 신고 들어와 있었던 탓에 알아채는 것이 늦었다. 열기는 방바닥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온돌처럼.
그러고 보니,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면 안 될 것 같은 장소였다. 매끈매끈한 대리석 바닥에는 온통 자신이 찍어 놓은 흙 발자국이 가득했다.
사실 유가가 사라진 이유는 가람이 서슴없이 찍어 놓은 발자국을 닦기 위해 걸레를 가지러 갔기 때문이다.
불쌍한 하인은 도련님과 아가씨의 손님인 가람의 그 무식한 짓에 감히 제동을 걸지 못했다.
언제부터 신발을 신고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에 이렇게 익숙해졌지.
자문했으나 대답할 수 없었다. 가람은 그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신고 있었던 부츠를 벗어 버렸다.
언젠가부터, 운동화가 아닌 부츠를 신게 되었다. 물이 스미지 않도록 기름을 먹이고 불에 달구어, 왁스 칠을 잔뜩 한 부츠다.
산을 돌아다니는 내내 벗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악취가 코를 찔렀다. 악취가 나는 것은 비단 부츠만은 아닐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틀에 한 번 정도는 집에서 씻을 수 있었지만, 바깥 생활은 가람의 청결에 대한 기준을 매우 낮추어 두었다. 운화가 거지꼴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신발을 벗자 바닥의 온기가 그대로 스며든다. 가람은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듯 주저앉았다. 갑자기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되는데, 운화와 이야기해야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가람의 손은 바닥을 더듬으며 그 온기를 쫓기 바쁘다.
잠시 멍하게 손바닥과 엉덩이로 온기를 느끼던 가람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스스로 눈을 감는지조차 모르게, 그리고 그 몸이 옆으로 서서히 기울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걸레를 찾아 들고 돌아온 유가는 방바닥에 널브러지듯 누운 가람을 발견했다.
그 와중에도 보따리는 꼭 끌어안고 있었다. 아마 그 안에는 여행자에게 소중한 무언가가 들어 있을 것이다.
보석이나 반짝이는 금, 혹은 고향의 가족들 초상화 같은 것. 실제로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가람만이 알 일이다.
유가는 가람의 품에서 보따리를 빼내고 그녀를 곱게 눕히려고 했다.
그러나 보따리는 가람의 품에서 빠지지 않았다. 끈을 허리춤에 묶고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있다. 정말로 잠든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힘이다.
잠시 끙끙거리던 유가는 가람의 품에서 보따리를 빼내는 것을 포기하고, 잠든 가람의 위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잠이 들어서도 보따리를 챙기다니. 야무지기 짝이 없다. 만약 다른 곳에서 누군가가 가람의 보따리를 빼앗으려고 들었다면, 가람은 바로 눈을 떠 총을 뽑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닥의 뜨거움은 가람을 실신에 가까운 수면으로 빠뜨렸다.
저가 방바닥에게 목숨의 빚을 졌다는 것을 모르는 유가는 가람의 머리 밑에 베개까지 곱게 넣어 주고, 소리 나지 않게 조용히 방바닥의 발자국을 다 닦아 내었다.
그러고 나서도 어쩐지 악취가 코를 찌르기에, 이불을 들추어 보니 가람의 발에서 썩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심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어째서 인간에게 코가 달려 있는 것인지 원망스러울 정도로 심각한 악취다. 곱게 생긴 여자 발에서 이런 악취가 나다니. 멀쩡하게 생겼는데.
유가의 시선이 가람의 얼굴을 한 번, 호리호리한 몸을 한 번, 다시 썩은 내가 나는 발을 향했다.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집게손가락으로 가람의 발을 뒤집어 가며 들고 있던 걸레로 꼼꼼하게 닦아 내었다. 몇 번이나 닦아 내고 나니 그래도 닦았다고 냄새가 좀 덜하다.
유가는 뿌듯하게 허리를 펴고 방을 나섰다. 미닫이문이 닫히기 직전, 유가의 입에서 풋, 하고 웃음이 터진다.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문틈으로 길게 꼬리를 달고 들어와 가람의 발을 간질였다.
* * *
가람은 조금 나른한 기분으로 마루에 앉아 볕을 쬐었다. 오늘의 햇살은 꿀처럼 달고 진해서 황금이 쏟아지는 것만 같다.
정오의 햇살을 이렇게 만끽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운화가 구해다 준 꽃신을 신은 발이 가볍게 달랑달랑 흔들린다. 그에 맞춰, 때마침 바람이 풍경을 흔들고 지나갔다.
맑고 청량한 풍경 소리 위로 강아지들의 헥헥거리는 소리가 작게 겹쳐진다.
가람은 마당을 돌아다니는 하얀 덩어리를 바라보았다. 꼬리가 빠져라 흔들어 대는 강아지들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마치 솜뭉치처럼 둥글둥글했다.
그중 하나가 사냥을 성공했는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가람에게로 걸어왔다. 그 자랑스러운 얼굴 아래로 다른 강아지들이 낑낑대는 애달픈 소리를 내며 쫓는다.
“솜이가 가람이 마음에 드나 봐요.”
모두 희고 둥글둥글해서 누가 솜이고 몽인지 가람은 도저히 구분해 낼 수 없었지만, 옆에서 과일을 깨물던 운화가 그렇게 말하자 그런가 보다 하고 끄덕였다.
가만히 보니 다른 놈들보다 눈이 더 크고 덩치도 약간 더 큰 것 같다.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솜이 왕! 하고 한 번 짖었다.
앞발로 바닥을 탁탁 두들기기에 보았더니, 겁에 질린 메뚜기 한 마리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걸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