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28화 (128/256)

18화

은인이니 고맙다느니 하며 눈물을 찍어 내던 노인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부탁이라고 말은 하지만 은근슬쩍 거절하지 못하게 압박하는 것이 보통 솜씨가 아니다.

어느 부분이 보통이 아니냐면, 확실히 강압적이긴 한데 불쾌하지 않다는 점이 그렇다.

가람은 자신의 호기심과 부탁을 들어주는 수고를 저울 위에 올려 두었다. 한가하다는 이유 덕분에 저울추는 단번에 호기심 쪽으로 기울었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부탁이라면.”

“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게 어려운 것 아니고. 그, 흠. 내가 말이야.”

가람의 수락에 반갑게 웃은 노인은 막상 부탁 내용을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는 몹시 부끄러움을 탔다.

몇 번이나 더듬거리고, 했던 말을 반복하고, 또는 은근슬쩍 말도 안 되는 대명사로 주요 단어가 넘어가서 몇 번이나 다시 묻는 수고 끝에 가람은 노인이 건넨 작은 종이를 받아 들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연서다. 사그라지는 삶의 끝에서도 풋풋하게 피어난 연심이 편지 안에 가득 녹아 있을 것이다.

상대는 마을 외곽에 사는 선 할머니인데, 곱게 늙은 덕분에 인기가 매우 많다고 한다. 가람은 편지를 챙기고, 조금 망설이다가 칼을 풀어 마루에 올려 두었다.

밖은 축제다. 축제라고 해도 칼을 찬 사람 정도는 있겠지만, 아무래도 운화가 준 하늘하늘한 옷에 칼을 차고 다니면 그 이질감 때문에 쓸데없이 이목을 모으게 될 것 같았다. 별로 좋지 않은 의미의 이목을.

“칼은 아가씨 방에 잘 챙겨 둘게. 자, 어여 다녀와.”

밝게 웃으며 가람의 등을 떠밀던 복 노인이 갑자기 아차 하는 얼굴로 가람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직접 가람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을 펴고, 꼼꼼하게 무언가를 쥐여 준다. 가람은 손안의 물건을 보고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아까 노인이 떨어뜨렸다 주웠다 하던 동전이다. 설마 자신이 돈이 없겠는가.

노인의 푼돈을 빼앗고 싶지 않아 거절하려는데, 복 노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용돈이야, 용돈. 이거 갖고 가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그래. 축제니까, 맛있는 것도 예쁜 것도 많을 테니 먹고 구경하고 놀다가 와.”

복 노인은 이 좋은 날씨에 마루에 앉아 맥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가람이 안타까웠다. 차려입어 놓으니 이렇게 번듯하게 고운 아가씨인데, 축제 구경도 안 나가고.

편지도 편지지만, 저 편지를 전해 주려면 축제 중인 마을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그 참에 구경도 하고 좀 놀다가 오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가람은 마당을 가로질러 길을 나섰다. 발에 신은 예쁜 신발이 사뿐사뿐 부드러운 흙을 밟는다.

영 익숙해지지 않아서 차라리 손으로 걷는 것이 더 편할 것 같았다. 어차피 축제이니 붐빌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무슨 신발을 신었는지 신경 쓰는 사람도 없을 테고, 그냥 이 아래에 가죽 부츠를 신을까.

갈등하던 가람은 그냥 문을 나서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정 불편하면 시장에서 적당한 신발을 사서 갈아 신으면 그만이다.

가람이 문 앞으로 다가서자 문지기가 알아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굉장히 존재감 없이 서 있는 사람이었는데, 덕분에 지난밤에는 문지기가 있는지도 몰랐다.

“축제 구경 가십니까?”

“겸사겸사요.”

“운화 아가씨께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지만 가람은 그냥 끄덕였다. 그대로 문을 나서려는데, 무언가가 가람을 콱 붙잡는다.

치맛자락을 살짝 깨문 솜이가 끙끙거리며 가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워낙 작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가람과 눈이 마주친 솜이가 새하얀 꼬리를 팔랑거리며 두어 번 왕왕 짖었다. 노리던 개구리는 어쩌고 여기 있는 거지?

“왜 그래?”

대답이 돌아올 리 없다. 가람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문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작은 개가 필사적으로 치맛자락을 물고 당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왜?”

가람이 조금 거치적거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른 채, 솜이는 헥헥 혀를 빼고 이리 뛰었다, 저리 뛰었다 했다. 작은 앞발 두 개가 오른쪽, 왼쪽을 번갈아 찍고 뱅글뱅글 돈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몸이라 그렇게 돌고 있으니 꼭 하얀 공 같았다. 가람은 솜이가 돌고 있는 틈을 타 냉정하게 문을 나섰다.

신나게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던 강아지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았다. 가람의 뒤통수에 낑낑거리는 애달픈 울음소리가 매달린다.

슬쩍 뒤돌아보니, 대문의 높은 문지방을 넘으려고 두 발로 일어서 키를 늘리고 있는 강아지가 보인다.

그래도 워낙 작은 몸이라 한참은 부족했다. 하얀 강아지는 안간힘을 쓰다가 가람이 돌아보자 반갑게 꼬리를 팔랑거렸다. 그 바람에 발랑 넘어지고 만다.

“같이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요.”

가람과 솜이 하는 양을 다 보고 있던 문지기가 웃음을 참으며 말한다.

“밖에요? 끈도 없이 데려가도 돼요?”

“물론입니다.”

가람은 조금 미심쩍은 기분이었다. 동물을 한 번도 키워 본 적 없지만, 집 나간 개, 고양이를 찾는 벽보는 꽤 많이 보았다. 목줄을 해 두지 않으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동물일 텐데.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간에게, 솜이는 열과 성을 다해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한 번만 믿어 줘요. 축제 구경 가고 싶어요. 저 잘할게요.

비록 말은 없었지만, 열렬하게 팔랑이는 꼬리가 하늘로 날아오를 기세다. 가람은 조금 망설이다가, 솜이를 안아 들었다.

“다녀올게요.”

문지기는 대답 대신 미소로 배웅했다.

소담한 담장을 따라 다박다박 걷는다. 그 발치에는 솜이의 작은 발자국이 향기처럼 옅게 남았다.

솜이는 걷는 내내 길가에 핀 민들레로부터, 돌멩이로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느긋한 고양이로부터 가람을 지키기 위해 매우 분주했다. 어쨌거나 신이 난 모양새였다.

들뜬 그 모습을 보며 걸어오다 보니 어느새 축제 판이다. 환한 대낮인데도 떠들썩하다.

아니, 대낮이라서 떠들썩한 건가? 어쨌거나 먹고 마시고, 구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이 매달려 있다.

“여기서부터는 길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복잡하게 교차하는 인파의 걸음 사이로 파고드는 것은 가람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작은 강아지 한 마리 정도, 저 북새통에서 밟혀 죽는다고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가람은 손을 내밀어 솜이를 안아 들었다. 강아지는 조금 수줍어하다가 얌전하게 몸을 맡겼다. 품 안의 온기는 생각보다 더 가볍고, 따듯하다.

머리에는 따듯한 햇살이, 품 안에는 따듯한 강아지가, 걷는 길에는 향긋한 축제 음식이, 귓가에는 이야기꾼들이 펼치는 낭랑한 이야기가 스며든다.

그렇게 말없이 걷고 있자니, 갑자기 품 안의 솜이가 몸을 뒤틀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봐 황급히 쫓아가니, 돼지를 통째로 구워서 썰어 파는 노점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앉아 있었다. 사방에 솔솔 퍼지는 돼지고기 냄새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확실히 냄새가 기절할 만큼 좋긴 한데.

“놀랐잖아.”

콧등을 툭 쳐 주자 잠깐 풀이 죽더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람을 올려다본다. 꼬챙이에 꿰어진 채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는 돼지를 한 번, 가람을 한 번 쳐다보더니 왕왕 짖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돼지가 보통 맛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다. 밥을 먹고 왔지만, 벌써 좀 출출하던 참이라 가람도 식욕이 동했다.

“얼마예요?”

“한 접시에 닷 푼. 다리랑 다 섞어서 썬 것은 한 전.”

다른 손님에게 돼지고기를 썰어 준 주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대답했다. 기름을 바르랴, 술독에서 술을 퍼 주랴 몹시 분주해 보였다.

어쨌거나 빠르게 일을 보고 싶어 하는 눈치라 가람은 돈을 꺼내 들었다.

“한 전어치 주세요.”

“마실 것도 좀 줄까?”

“술은 좀 그런데.”

“술 아닌 것도 있어. 과일즙도 있고, 탄산수에 타서 먹으면 좋아.”

“그럼 주세요.”

“두 푼만 더 주면 돼.”

돈을 건네자 주인이 잽싼 손놀림으로 돼지를 썰어서 향초 소금에 버무리더니 고깔 모양의 종이 그릇에 담아 주었다.

야채와 버무려져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는 것이 굉장히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하나 찍어 먹어 보니, 약간 매콤하다. 그래도 막 만든 음식 특유의 온기 덕분에 별미였다.

하나 더 찍어서 입으로 가져가려던 가람이 문득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솜이 간절한 시선으로 가람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는 조금 난처해졌다. 이렇게 양념에 버무려진 것을 개에게 줘도 되는가?

예전에 아주 잠깐, 동물에게 자극적인 음식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주기가 꺼려졌다.

그러나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저렇게나 원하니까, 양념하지 않은 것으로 하나 사서 주면 되겠지.

돼지고기를 하나 더 주문하려는데, 주인이 마실 것과 함께 종이 그릇을 하나 더 내민다. 안을 보니 적은 양의 양념하지 않은 고기가 들어 있었다.

“이건 덤이야. 이 녀석이 손님을 데려왔으니까, 삯이라고 생각하시게. 돌아다니면서 먹으면 힘들 테니까, 저쪽에 이야기꾼이 왔다고 하니 그거라도 들으면서 먹어.”

“아, 감사합니다.”

가람이 얼떨떨하게 인사하자 돼지고기 파는 주인이 넉넉하게 웃어 보였다. 바쁜 와중에도 몹시 친절한 사람이다. 그녀가 몇 번이나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가니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있었다.

길거리 한복판에 이렇게 둘러앉은 사람들이 영 어색해 어정쩡하게 서 있으니, 솜이가 어서 고기를 달라고 재촉했다.

“천천히 먹어.”

사람의 발길을 적당히 피할 수 있는 곳에 종이를 풀어 주자 얼른 머리를 박고 고기를 흡입한다.

가람은 작은 강아지가 발에 챌까 봐 행인들과 강아지 사이에 서서 그 자리를 지켰다. 그러는 사이 이야기꾼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람이 왔을 때는 이미 초반부 얘기를 끝낸 직후라 무슨 내용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래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형태라 내용을 몰라도 즐길 수 있었다.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일품이다. 돼지고기를 먹는 동안만 들을 생각이었지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공연이 끝나 돈을 걷고 있었다. 오랜만의 문화생활이라 너무 즐겨 버렸다.

가람은 제 앞에 내밀어진 바구니에 한 냥을 던져 주었다. 이곳의 동전들은 다 비슷비슷한 색이라 던져지는 도중에 그 모양을 파악하기 힘들었을 텐데도 돈을 걷던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남자는 놀란 눈으로 가람을 보고, 그녀의 곱게 차려입은 모양새에 납득했다.

고급 옷을 보니 어디 귀한 집의 아가씨인 모양이지. 그는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 다음 사람에게 돈을 걷으러 갔다.

공연도 봤고, 돈도 냈고, 먹을 것도 먹었으니 이제 정말로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였다.

가람은 설렁설렁 걷던 걸음을 재촉해 복 노인이 일러 준 길을 따라 걸었다. 물론 걷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판대에서 콩고물을 조물조물 묻혀 놓은 인절미도 사서 먹고, 곶감도 사서 우물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이다.

연서의 주인은 느티나무 앞의 작은 초가집에 살고 있었는데, 가람이 편지를 전해 주자 알 만하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고운 얼굴이라, 가람은 인기가 많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젊었을 때는 정말로 대단했을 것 같다.

할머니인데도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고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어디 험한 곳 하나 없이 예뻤다. 예쁜 할머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오시느라 수고했네. 조심해서 가.”

할머니는 짧은 말로 가람의 수고를 치하한 뒤 쌩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뿐사뿐 걷는 걸음이 도도해서, 가람은 그 와중에도 조금 감탄했다.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하라고 권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쩐지 조금 섭섭하다.

어쨌거나 일이 끝났으니, 가람의 걸음은 곧게 운화의 집으로 향했다.

소중하고 소중한 평범한 하루가 끝나 간다. 대문을 들어서자 노을을 배경으로 운화가 달려 나왔다.

왜 혼자 가셨냐며 타박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복 노인이 입을 떡 벌리고 나와 등을 가볍게 후려쳤다.

“아니, 축제장을 혼자 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운화 아가씨랑 같이 가지!”

“그러니까요! 혼자 나갔다는 말 듣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운화의 호들갑을 덤덤하게 받아넘기고 복 노인에게 편지의 반응을 전하니 두 사람의 잔소리가 한층 더 높아졌다.

그 와중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강아지 떼가 몰려와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왕왕 짖어 대었다. 정신없이 소란한데, 또 그게 싫지가 않다.

가람이 애매모호하게 간지러운 기분에 빠져들어 있는 동안, 두 사람은 제풀에 지쳐 버렸다.

잔소리를 퍼부어도 반응이 있어야 흥이 나는 법이다. 이건 무슨 벽에다 대고 하소연하는 것만도 못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어 버리니 할 말이 없다.

운화는 어울리지 않게 혀를 차고는 저녁을 준비하겠다며 자리를 떴고, 가람은 심부름의 대가를 듣기 위해 복 노인과 마루에 앉았다.

“축제 구경은 잘 했어?”

“네. 이것저것 많이 먹고, 보고. 어쨌든 이제 대답해 주세요.”

“정말로 그게 그렇게 궁금해? 별것 아닌 이야기인데.”

노을의 끝자락이 서서히 식어 간다. 가람은 담장 위로 펼쳐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말없는 긍정에 복 노인이 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람은 노인의 구수한 목소리와 축제에서 들었던 이야기꾼의 낭랑한 목소리를 겹쳐 생각하다가 이야기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예전에 한 번 시장에 갔다가 바닥에 떨어진 공돈을 주운 적이 있어.”

“네.”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이었는데, 기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 아가씨는 돈 주워 본 적 있어?”

가람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없는 것 같아요.”

“저런, 꼭 한 번 주워 봐. 기분이 정말 좋아. 어쨌든, 한 번 그렇게 횡재했으니 며칠 동안 바닥만 보고 다녔지. 그래도 어디 그렇게 쉽게 돈이 눈에 들어오나? 당연히 번번이 허탕 쳤지. 그러던 어느 날!”

가람은 정말로 바람직한 청중이 되지 못했다. 목소리를 높여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한 얼굴로 복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은 김빠진 얼굴로 짧게 혀를 차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내 주머니에 있던 돈을 바닥에 쏟았어. 앉아서 주섬주섬 줍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돈이 내 돈이 아니라 남의 돈을 줍고 있는 거면 어떨까. 이렇게 많은 돈을 주우면 정말 기분이 좋을 텐데.’ 하고 말이야.”

“그래서요?”

“나는 줍던 돈을 내버려 두고 허리를 펴고 섰지. 그렇게 내려다보니, 흙바닥에 뒹구는 돈이 꼭 누가 버리고 간 돈처럼 보이지 않겠나? 내가 떨어뜨리긴 했어도 내가 떨어뜨린 돈이나 남이 떨어뜨린 돈이나 보기엔 매한가지지. 그래서 그걸 남의 돈이라 생각하고 주워 봤더니.”

“기분이 좋으셨군요.”

“그래. 그랬지. 기분이 정말로 좋았어. 부자가 된 것 같더라고. 물론 내 돈이라는 걸 알고 있지. 그래도 그냥 잠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푼돈을 주웠는데도 기분이 좋았던 건, 돈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 공것을 얻었다는 기분 때문이니까. 잠깐 흉내 내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그리고 깨달은 건데, 잘 듣게. 이제부터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네.”

“요즘 젊은이들의 삶은 산꼭대기에 매달린 목표를 위해서 맨발로 산을 오르는 고통의 나날이지.

젊어서 많이 고생하라는 말도 있는데, 사실 난 그게 다 헛소리라고 생각한다네. 조금쯤이야 고생하는 것도 괜찮지만,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젊었을 때는 한 천년 살 것 같지? 안 그래. 길게 살아야 백 년. 그나마 그중 절반은 골골거리면서 살지. 어차피 절반 삶을 골골거리면서 사는데, 그나마 안 골골거리는 삶이라도 즐겁게 보내야지.

그러니까, 득실 따지지 말고 나처럼 하는 것만으로 즐거운 것을 좀 하면서 살아.

젊어서 고생한 뒤에 늙어서 편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편해 봐야 늙은이 몸인데 얼마나 편하겠나?”

길게 살아야 백 년이라는 말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지만, 가람은 복 노인의 조언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아주 예전에 비슷한 말을 들어 봤던 것 같은데.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즐겁게 살라는 말.

“아가씨 보면 어깨에 짐이 한가득이야. 찾아보면 좀 덜어 줄 사람도 있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것 아니겠나? 젊은이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게 안타까워 잔소리 좀 했어.”

조금쯤은, 이렇게 지내도 좋지 않을까. 매일매일 새로운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이곳에서 몇 십 년 산다 생각하고 집도 사고, 아는 사람들도 사귀면서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니, 만약 그게 안 된다면 단 1년 정도라도 가족처럼, 이렇게 지내면 안 될까?

깊이 잠겨 드는 가람의 상념을, 운화의 저녁 먹으라는 소리가 깨워 냈다. 눈앞에는 조금 걱정스러운 낯빛인 복 노인의 얼굴이 있다.

가람은 자신이 순간적으로 넋을 놓았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달콤한 상상이던가.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놔두었던 칼을 챙겨 들고 나왔다.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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