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29화 (129/256)

19화

“화장실에요.”

식사를 하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허리춤의 주머니. 이제 일상처럼 변해 버린 일. 복 노인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끈질기게 뒤따라 붙었다.

가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화장실에 들어가 얼마 안 가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의 저녁 식사는 커다란 상을 줄줄이 이어 놓고 그 주변으로 하인이나 손님이나 너 나 할 것 없이 달라붙어 먹는 식이었다.

축제에서 이것저것 사 먹었던 탓에 배가 조금 불렀지만, 그래도 저녁을 무를 정도는 아니라 가람은 말없이 밥그릇을 들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같이 식사해 보는 것이 매우 오랜만이라서 빠지고 싶지 않기도 했다.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드는데, 운화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그 두 분은 같이 안 다니시네요.”

두 분.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가람의 얼굴이 잠깐 굳는다. 그러나 음식을 씹는 행동에 가려져 크게 두드러지진 않았다.

“떠났어요.”

가람이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대답했다. 주어가 빠진 문장이지만 운화는 나름대로 납득했다.

어차피 서대륙 사람이니, 자신처럼 집이나 어딘가로 돌아간 모양이지. 모든 사람들은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영원히 계속되는 여행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가람도 이번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이쪽으로 온 건가요?”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요.”

운화는 애매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추궁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궁금증을 뒤로 미뤄 버렸다.

그때도, 가람은 이렇게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쉽게 질문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참 어려운 사람이다.

운화는 그 뒤로 과거에 관련된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적당히 소소하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나 어린 시절의 추억 정도를 풀어놓았을 뿐이다.

웃음소리가 따스한 식사 시간이 끝나자, 또 하루가 저물었다.

Chapter 19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화기애애한 저녁, 그리고 다시 포근한 아침, 하얀 개가 뛰노는 마당과 축제의 나날들.

보석 만화경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아름답고 안타까운 나날 속에서 가람은 하루만 더, 이 나날이 조금만 더 연장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는 날 저녁, 패스의 충전이 완료되었다.

알록달록하던 나날을 커튼처럼 걷어 낸 후, 가람의 얼굴에는 깨끗하게 정리된 감정만이 존재했다.

이삿짐을 다 싼 후의 텅 빈 집 안처럼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표정이라 운화가 몇 번이고 떠나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가람은 짐을 싸고, 검을 차고, 총탄을 보충한 뒤 아침 일찍 방을 나섰다.

패스가 차면 길을 떠난다. 반드시 그렇게 했고, 그렇게 할 것이다.

가슴에 차오르던 정착에 대한 꿈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그 대신 냉혹하리만치 엄격한 패스파인더가 남았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른 때보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꼭 가셔야 하나요?”

여린 꽃잎처럼 가련한 태도로 운화가 말했다. 반쯤 울먹이고 있는 그녀는 조금만 더 머물라며 가람의 팔을 잡고 끈질기게 놓지 않았다.

“가야 해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부모님을 모시러 갔던 운랑 오라버니가 돌아오시는데!”

그동안 운랑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이었나. 가람은 짧게 깨닫고 대답했다. 정중하지만 단호한 대답이었다.

“여기에 지내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었어요. 그것만으로 보답은 충분해요.”

“하지만…… 노잣돈도 받지 않으시고.”

“어디서든 통하는 통행 패를 만들어 주셨잖아요. 이거 돈으로 살 수도 없는 물건이라고 들었는데.”

곡옥 두 개를 돌려주고 대신 받은 둥근 옥패를 가람이 내밀어 보인다.

각 가문의 가주급이나 발급할 수 있는 물건으로, 이것만 있다면 가람은 동대륙 어디에서든 내국인에 준한 수준의 통행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도시를 오가는 상인들이 꿈에서라도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다.

이것으로 인해 국경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물건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하지만……!”

“그럼, 잘 있어요. 복 할아버지도, 유가도.”

운화의 매달리는 시선을 가람이 부드럽게 인사하며 떨쳐 냈다. 쌀쌀한 새벽 날씨에도 불구하고 운화의 눈가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정말로 떠나야겠다 싶어 문을 나서려는데, 멀리서 강아지 한 마리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린 강아지는 한참 꿈나라에서 헤맬 시간인데.

“어머, 솜이가!”

솜이의 입에 물린 것을 본 운화가 짧게 감탄했다. 작은 참새였다. 심각하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겁에 질려 덜덜 떨며 솜이의 입 안에서 바짝 얼어 있었다. 어떻게 물어 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참새는 몸이 무거운 새도 아니고, 주변 분위기에 둔한 새도 아니다. 살짝만 다가서도 포르르 날아가는 새를, 이 작은 강아지가 어떻게 잡아 왔는지 불가사의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새는 솜이가 바닥에 뱉어 놓아도 어디로 날아가지도 못하고 달달 떨기만 했다.

하얀 강아지는 앞발로 새를 꾹 밟고 가람에게 자랑스레 왕왕 짖어 보였다. ‘이 정도라면, 거절하지 못하겠지.’ 하는 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찌나 뿌듯한 표정인지, 가람은 차마 이번에는 그 성의를 무시하지 못했다.

가람은 참새를 집어서 대충 먹는 시늉을 하고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많이 다치지 않았다면 적당히 어딘가에서 풀어 주면 될 것이다.

어쨌거나 선물을 받아들인 가람을 보고 솜이의 꼬리가 불붙은 듯 흔들렸다.

하얀 강아지의 찬란한 눈빛과 운화의 미련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가람은 그렇게 겁에 질린 참새 한 마리와 대문을 나섰다.

“그럼, 갈게요.”

멀리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이건만 홀로 걷고 있자니 갑자기 적적함이 몰려왔다.

괜찮다고 연신 되뇌어도 그 고독함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모르드레드의 주절거림이라도 듣고 싶을 정도로 쓸쓸했다. 요 며칠간 온기에 차 있던 마음이 구멍이 난 듯 시리고 차다.

패스가 차면, 방향을 가늠하고 그곳으로 갈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한다. 간단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반복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일이 쉽지가 않다. 걸음이 너무 무거워 앞으로 가는지, 뒷걸음질 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앞으로 가고 있긴 했는지 어느새 성문을 빠져나와 외지로 들어서 있다.

바람과 풀과 땅. 덜 익은 것 같은 풋풋한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근처에 과실수가 있는 모양이다.

걷는 것도 지겹던 차에 눈 돌려 과실수를 찾아보려 하는데, 등 뒤로 말 특유의 따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운화가 말을 타고 따라왔나 싶어 가람이 돌아보니, 보이는 것은 기괴한 형상의 수레였다.

아니, 수레라고 하기도 뭣하다. 마치 원두막처럼 생긴 것을 말 두 마리가 끌고 있었는데, 통풍 하나는 끝내줄 것 같은 그 안에는 이부자리와 각종 악기가 들어차 있었다. 유랑 악단인가.

가람이 그 수레를 발견한 것과 비슷한 때에, 그쪽에서도 가람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말의 걸음이 서서히 느려지더니 곧 가람의 옆에 바짝 붙어 느릿느릿 걸었다.

“어! 설마 했는데, 그 손님이시네!”

낯익은 얼굴이다. 축제 판에서 본 그 가희였다. 그리고 돈을 걷던 남자.

“절 기억하세요?”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기에 마주 웃어 줘야 하나 고민하던 가람이 대신 질문하는 쪽을 택했다.

“당연하죠. 그렇게 거액을 준 손님은 처음이었어.”

“아, 지금은 차림이 좀 다르네요. 그래도 알아보는 데는 문제없어요. 우리 눈썰미 좋거든요!”

두 남녀는 수레 가장자리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람에게 시시덕거렸다. 거액이라, 한 냥 정도 던져 준 것뿐인데 무척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축제를 거닐던 하늘하늘한 차림과 달리 지금은 거무튀튀한 가죽옷을 입고 있는데도 알아보는 것을 보면 눈썰미가 좋다는 말은 인정할 만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세요? 같은 방향이면 태워 드릴게요.”

가람이 망설이자 남자가 덧붙였다.

“같은 방향이 아니라도 뭐, 우리가 가고 싶은 쪽이면 태워 드리고요. 어차피 발길 닿는 곳으로 가는 거니까.”

반짝반짝 빛나는 두 쌍의 눈동자. 가람은 갑자기 솜이가 떠올랐다.

동행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행동일 테지만, 솔직히 쓸쓸하던 차에 들어온 이 제의가 가람은 퍽 반가웠다.

“탈게요.”

“아싸! 손님이다! 그런데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데요?”

“저쪽이요.”

가람이 길 끝을 가리키자 여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비스듬하게 찔러 넣은 나비 비녀가 그 바람에 팔랑팔랑 춤을 춘다.

“그쪽은 호랑이 고개인데, 호랑이 고개를 혼자 넘으시려고요?”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지만, 그쪽은 워낙 흉흉해서. 거기 다스리는 사람도 성미가 고약하고, 성격 나쁜 호랑이가 산 제물을 바란다고 하던데. 어지간하면 그쪽으로는 가지 않는 게 좋아요.”

“가야 해요.”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고 묘한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수레가 완전히 멈췄다.

“타세요. 들렀다 가면 되니까. 아, 그냥 타기는 좀 힘드시려나? 비현! 나무 사다리 좀 내와!”

여자가 그렇게 외치는 동안, 가람은 수레의 가장자리를 잡고 가볍게 힘을 썼다.

겉보기에는 연약하지만, 그 속에는 궂은 길 위에서 담금질된 탄탄한 근육이 들어차 있다.

벼랑을 외줄 하나로 건너기도 했는데, 그에 비하면 이 정도 높이는 별것도 아니었다.

“와, 대단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 한가락 하시나 봐요? 어, 그러고 보니 옆구리에 칼도 있네. 검사예요?”

가람이 쉽게 수레 위로 몸을 올리자 여자가 가볍게 탄성을 내질렀다. 그 뒤에는 곧바로 질문이 따라붙는다. 말 많고 궁금한 것 많은 여자였다.

“검사는 아니에요.”

“헤, 그렇구나. 몸 진짜 가볍네. 혹시 우리랑 같이 재주꾼 해 볼 생각 없어요? 이야기꾼은 비현이 하고 노래꾼은 내가 하는데 재주꾼이 없어서 아쉽던 차였거든. 어때요?”

“사양할게요.”

조용히 사양하자 여자가 정말로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붙임성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가람은 조금 질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해서 캐묻는다면 성가실 테지만, 질문은 얕고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다.

올라앉고 보니 꽤 쾌적한 수레였다. 통풍도 잘 되고, 지붕도 꽤 높다. 앉은 자리는 짚으로 자리를 해 넣어 적당히 폭신했다.

춥지 않은 계절에 다니기에는 좋을 듯싶었다. 겨울에는 좀 춥겠지만, 이 정도라면 비를 피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을 것 같았다.

“삼 전만 주세요.”

가람이 수레 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비현이라 불린 남자가 슬쩍 손을 내밀었다.

씨익 웃는 특유의 미소가 무척 시원해 보인다. 가람이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자 슬쩍 덧붙였다.

“태워 주겠다고는 했지만 공짜로 태워 드리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아하하, 미안해요. 우리 가난하거든. 돈이 없어요. 한 푼만, 응?”

어처구니없어하는 가람에게 여자가 슬쩍 애교를 섞어 부탁했다. 가난하다는 말대로 입고 있는 옷이나 갖고 있는 물건들은 손질을 잘 해 깔끔하긴 했지만 낡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마을에서 보기엔 돈 꽤 번 것 같던데, 그 돈이 다 어디로 가는 건가?

어쨌거나 그 넉살이 그리 밉지가 않아서 가람은 돈주머니에서 엽전 세 개를 꺼내어 건네었다.

“와! 돈이다! 고마워요. 틈틈이 안 벌면 먹고살기 힘들거든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밥 먹을 수 있겠다. 며칠 동안 고구마만 먹었더니 고구마처럼 변할 것 같아요. 정말.”

눈물까지 글썽이며 요란하게 좋아하는 통에 가람은 아연함 반, 황당함 반으로 가볍게 웃었다.

“돈도 주셨으니, 이야기나 하나 해 봐, 비현.”

여자가 앉은 자세 그대로 발로 툭툭 치자 비현이 정중하게 요청했다.

“족발 치워.”

말하는 내용은 매우 험악한데, 표정이나 어조는 굉장히 정중하다. 그게 또 황당해서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옆에 내려놓은 가람의 가방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잽싸게 도망쳤다. 솜이가 물어다 준 참새다.

반쯤 잊고 있었던 가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 참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다. 그런 가람을 보던 두 남녀의 머리가 갸우뚱한다.

“참새를 왜 갖고 다녀요?”

“좀 이상한 사람인가 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가람이 조용히 속으로 대답했다.

“뭐 어쨌든, 당분간 같이 갈 건데 통성명이나 해요. 전 수향. 이쪽은 아까 들었죠? 비현이에요.”

비현이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다. 가람은 대충 인사를 받아 주고 제 이름을 말해 주었다.

“가람이에요.”

수향과 비현은 가람의 이름이 여자 이름치고는 좀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보니 동양인은 동양인인데, 이 근처에서 볼 수 있는 종류의 생김새는 아니었다. 눈시울이 좀 더 둥글고 전체적으로 털도 좀 더 적다.

게다가 짧게 꽁지로 묶은 머리카락도 독특했다. 여행을 다니면서 머리칼을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릴 수는 없겠지만, 보통은 질끈 묶어 올릴지언정 저렇게 짧게 자르지는 않는다.

“여행을 오래 하셨나 봅니다.”

가방에서 짐을 풀어 놓던 가람이 비현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뜻밖의 말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가람이 가진 물건들은 대부분이 새것이다. 낡은 것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물건 자체에 구애받지 않는 형편이라 좀 더러움이 타기만 해도 그때그때 구입해서 교체했기 때문이다. 금전적으로 아쉬움이 없으니 전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지금 가진 물건들만 해도 운화의 도시에서 구입한 것들이 많았다. 가진 물건이 새것이니 당연히 여행을 오래 한 것처럼 보일 리가 없을 텐데.

“낯선 사람이랑 길에서 만나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러워 보여서요.”

자연스러워도 수향만큼이나 자연스러울까. 물론 어색하지는 않지만.

가람이 대답 대신 픽 웃자 아까부터 초롱초롱한 눈으로 가람의 짐을 바라보던 수향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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