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30화 (130/256)

20화

“그런데요, 그런데요. 혹시 그거…… 술?”

말을 하는 도중에 침도 한 번 꿀꺽 삼켰다. 번쩍번쩍 빛나는 수향의 시선을 따라가니 챙긴 기억이 없던 술병 하나가 짐 가방 사이에서 빠끔히 주둥이를 내밀고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챙긴 적이 없는데. 짐을 줄여야 할 마당에 술 같은 쓸데없는 것을 가람이 챙겼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운화의 집에 있던 누군가인가.

손을 뻗어 주욱 끄집어내자 속에서 무언가 찰랑찰랑하는 것이, 틀림없는 술병이었다.

수향의 시선이 이제 폭발할 것처럼 뜨거워졌다. 열렬한 그 시선을 외면하기가 힘들어진 가람이 선심 쓰듯 술병을 내밀었다.

어차피 들고 다녀 봐야 짐이고, 술을 마실 생각도 없다. 그렇다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도 좋겠지.

“줄까요?”

“저, 정말요? 저 주시는 거예요? 진짜요?”

수향은 헉헉 숨을 몰아쉴 것처럼 잔뜩 흥분했다. 지나치게 좋아하자 오히려 가람이 당혹스러워졌다.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것이 마치 사랑에 빠진 것과 비슷한 모양새다. 시선은 술병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고, 손은 어쩔 줄 몰라서 바닥만 닥닥 긁는다.

솜이를 떠올린 가람은 다시 한 번 기시감을 느꼈다.

“가져요. 저한테는 쓸모없는 물건이니까.”

슬쩍 내밀자 사양도 않고 단숨에 낚아챈다. 수향은 술병을 마치 아기처럼 끌어안고 어화둥둥 하더니, 병마개를 뽁 뽑아서 코를 내밀어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 뒤에서 비현이 혀를 차며 낡은 술잔 세 개를 꺼내어 왔다.

“이강주네요? 이거 엄청 귀한 건데! 아, 진짜 못 참겠다. 잔 좀 빨리 가져와, 빨리!”

“대낮인데 지금 마시게요?”

아직 점심도 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10시에서 11시쯤일까? 가람이 당황해서 질문하자 수향이 씨익 웃었다. 오밀조밀 예쁜 아가씨인데도 웃을 때만큼은 호쾌하기 짝이 없다.

“바람 솔솔, 꽃잎 색이 아름다운 시간에 마시는 술이 진짜 풍류지요!”

너무 천연덕스러워서 딴죽을 걸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람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잘 정리된 길과 멀리 보이는 밭, 과수원을 보니 인적이 드물지 않은 곳이다. 그리 위험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위험을 대비해 샅샅이 훑어보다 고개를 돌리니 술잔이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드세요. 이거 진짜 귀한 술이라, 혼자 먹기 너무 아깝네요.”

하얀 술잔 안에서 노란 술이 찰랑찰랑. 주향이 그윽하게 코를 간질이자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술잔을 받아 들고 만다.

마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앉아 있자, 수향이 캬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채근했다.

“아, 끝내준다. 어서 먹어 봐요. 술 별로 안 좋아해요? 이게 얼마나 좋은 술인데.”

그렇게까지 말하니 가람도 호기심이 동해서 조심스럽게 술잔에 입을 가져갔다.

아주 조금 맛만 볼 생각이었다. 작은 잔에 따라 마시는 술일수록 도수가 높다 했으니, 조심할 생각이다.

슬쩍 맡은 향이 달달해서 그리 위험한 술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첫맛은 꿀을 연상시키는 것 같은 농밀한 단맛이었다. 그 속에 알코올 특유의 싸함이 묻어 있는데, 목구멍을 넘어갈 때는 화끈하더니 혀에 남은 맛은 생강차 같은 알싸함이다. 청량하고 깔끔했다.

“어때요? 좋죠?”

“괜찮네요.”

대답한 가람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수향이 얼른 그 잔에 술을 따라 놓았다. 그리고 제 잔을 단숨에 비워 내더니, 비현과 둘이서 시시덕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비현아. 이야기 하나 해 봐. 내가 음 넣어 줄게.”

“아, 무슨. 좀, 됐어. 미친.”

“손님이 돈도 주시고 술도 주셨는데 입 싹 닦을 생각이냐? 아니면 네 단골 이야기나 해 봐. 우리 비현이가 어떻게 이야기꾼이 되었는가? 별꽃마을 최고 사기꾼이 어떻게 이야기꾼이 되었는지 말해 봐.”

“사기꾼이요?”

그냥 넘길 수 없는 단어를 들은 가람이 예민하게 그것을 잡아낸다. 비현이 조금 부끄러운 듯 웃었다.

“뭐, 다 옛날이야기긴 합니다만.”

“비현이가 아주 대단한 거짓말쟁이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어찌나 거짓말을 잘했는지. 다섯 살 때부터 마을에 소문이 짜랑짜랑 했지. 그 싹이 어디 가나? 그대로 쑥쑥 커서 세기의 거짓말쟁이가 되었는데― 속여 먹은 사람이 백이 넘고, 이백이 넘고, 삼백이 넘고, 사백이 넘고…….”

“그 정도는 아니거든. 좀 닥쳐.”

“그럼 네가 말하던가. 사기꾼.”

“이야기꾼이거든, 이 거지야.”

“지금은 거지 아니거든. 사기꾼.”

“나도 지금 사기꾼 아니거든.”

투닥거리는 폼이 어린아이가 따로 없다. 그래도 재미가 없지는 않아서 가람이 멀뚱히 보고 있으니, 뒤늦게 가람의 존재를 떠올린 비현이 한 수 접고 들어갔다.

거지로 살면서 얼굴에 합금으로 코팅을 한 수향보다, 말랑한 낯가죽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만해. 그냥 내가 이야기할게. 흠흠,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군요. 저 원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뒤늦게 점잔을 빼도 이미 한참 늦었다. 가람이 애매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비현이 수향을 노려보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수향의 말대로 저는 예전에 사기꾼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기꾼 싹수가 다분한 녀석이었죠. 하지만 돈이나 금전적인 걸 노리고 사기를 친 건 아니었어요. 그냥 없는 사실을 꾸며 내어 말하면,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이 재밌었거든요.”

어릴 때 하면 장난이지만 커서 하면 범죄가 된다. 비현의 머리가 커 가면서 그에 대한 나쁜 소문이 마을에 자자해졌다.

그래도 비현은 부모님이 모르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모른 척해 줄 뿐이었던 것이다.

정말 큰 사고를 쳐서 결국 부모님이 불려 오게 된 그때서야 그는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날벼락이 떨어지리라 생각했지만 어머니는 매우 차분했다. 자신이 입힌 손해를 다 물어 주고, 고개 숙여 사과한 뒤 집에 들어와 비현을 앉혀 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비현은 그 시선이 더 불편했다. 가만히 눈을 깔고 처분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손을 뻗었다. 때리려나 하고 움츠리자 그녀가 비현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 주며 말하기를.

‘남의 것을 빼앗거나, 나쁜 의도로 하는 거짓말이 아니지? 왜 거짓말을 하는지 엄마한테 말해 볼래?’

그제야 컸지만 아직은 어렸던 비현이 엉엉 울며 토해 놓았다. 정신을 차리면 거짓말을 하는데 이제 습관이 되어 고칠 수도 없다고.

차라리 혼내 달라고 우는 비현에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비현이는 상상력이 아주 풍부한 모양이야.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이야기꾼을 해 보는 게 어떠니? 마치 진짜 같은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꾼 말이야.’

그렇게 열세 살에 옆 마을까지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유명하던 어린 사기꾼 비현의 진로가 바뀌었다.

비현은 처음에는 속는 셈 치고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 거짓 이야기에 울고 웃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점차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똑같이 거짓말인데, 둘 다 없던 일을 지어낸 것인데 이번에는 아무도 나쁜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꾼을 하고 있지요. 재미있지 않습니까? 둘 다 거짓말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하나는 좋은 것이고 하나는 나쁜 것이라니.”

“어머니가 굉장히 현명하시네요.”

“예. 하늘이 탐내어 일찍 데려갈 만큼 현명하신 분이었지요.”

가람은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는 것이 몹시 안타까워졌다. 갑자기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겼던 것이다.

자신은 어느 쪽일까? 모르드레드만큼 잔인하지는 않으니 그보다는 나은 축에 드는 것일까? 아니면…….

술잔을 집어 들던 가람이 흠칫했다. 손이 피에 젖은 듯이 붉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안색이 푸르게 질리자 비현이 걱정스레 안부를 물었다. 그 뒤로 반쯤 술에 취한 수향이 낮게 탄성을 터뜨린다.

“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네.”

가람은 그제야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붉은 꽃 무더기를 발견했다. 그에 내리쬐는 햇볕이 붉게 물들어 수레 안으로 스며든다.

피에 젖은 것 같던 붉은 손이 예쁜 꽃잎 색으로 보였다. 손안 가득 드리운 붉은 꽃 그림자.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갑자기 수향이 벌떡 일어나 악기를 잡고 앉았다. 순식간에 노래가 시작되더니, 제멋대로 높낮이가 변하는 피리 소리가 술잔의 찰랑거림 위에 올라탔다.

말발굽 소리를 박자 삼아 곡조는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가람이 수레 옆의 기둥에 기대어 가만히 눈을 감는데, 수향의 노래를 배경으로 비현이 질문했다.

“그런데 그 주머니 뭡니까? 허리에 불툭 튀어나온 것이. 배라도 들었습니까?”

가람은 흠칫하지도 얼어붙지도 않았다. 차분한 시선으로 되물었을 뿐이다.

“궁금해요?”

“그게, 솔직히……. 예.”

오래도록 외면했던 일이다. 가람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주머니를 끌러 낸다. 비현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가람이 주머니를 펼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주머니가 펼쳐지고, 둥근 것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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