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31화 (131/256)

21화

“이야, 맛있어 보이는 배네요!”

“안주로 먹어요.”

탄성을 터뜨리는 비현에게 둥근 배를 건네며 가람이 희미하게 웃었다.

강의 하류에서 가람은 결국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찾지 못했다. 강이 얼마나 넓은데, 셀 수도 없이 많은 갈래로 갈라진 하류에서 그 작은 것을 찾아낸단 말인가?

울고,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몸을 던져 나뒹굴었지만 사실은 명백했다. 찾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두려웠다. 그래서 마치 찾았던 것처럼, 둥근 무언가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힘겹게 외면해 왔던 것이다.

이제는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럴 용기가 아주 조금, 났다.

* * *

용기는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 이 간단하고도 고전적인 감정의 마법이 펼쳐 내는 일을 결코 얕봐서는 안 된다.

한 줄기 서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마음에 내리박히면 그 이전의 번민들은 거의 완벽하게 백지화된다.

그리고 당사자는 지난 두려움에 대한 원론적이고 이성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를 가진 사람이 두려움의 마물에게 행하는 첫 번째 공격이다.

이 변화는 지옥과도 같은 구렁텅이가 과거의 일이 되는 순간 추억이라는 안이한 단어를 입는 것과도 비슷했다.

한 번 용기를 내면 어째서 자신이 그토록 그것을 두려워했는지 쉽게 잊게 된다.

가람의 경우에는 그 속도가 보통보다 배는 빨랐다. 그녀의 용기가 감성이 아닌 이성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용기의 칼날을 꺼내 드는 순간, 가람은 더 이상 등 뒤를 쫓는 공포의 먹잇감이 아니었다.

이성은 많은 근거를 끌어다가 가람의 용기를 치장하고 살찌워 주었다. 용기의 칼날은 점점 두텁고 날카로워져 갔다.

운화의 집에서 돌봄 받으며 간신히 얻었던 보잘것없는 가시 조각이 번쩍이는 보검이 되는 것은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빨랐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일들 속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던 냉정한 이성이 천천히 벼려지자 가람은 오랜만에 정말로 차분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다.

처음 모르드레드의 머리를 잃었을 때, 그 머리통이 한 번도 떠오르지 않고 거센 물살 속으로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을 때. 가람이 느낀 것은 분노가 아니었다.

우주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막막함이었다. 그 뒤에는 두려움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억울한 울분이 깔려 있었다.

그 막막함을, 두려움을 그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입막음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핑계에 불과했다.

편리하지만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일에 이성적인 근거를 붙여 주는 핑계. 막상 저지르고 보니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살인이 꺼려지는 건 인간적인 유대감이나 감정적인 이유 외에 그 행위 자체의 불결함도 이유로써 한몫한다.

모르드레드는 그 불결함에 가람이 친숙해지도록 만들었다. 부츠로 피 웅덩이를 걷고, 총탄에 깨진 두개골에서 뇌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아도 별 감흥이 없을 정도로 친숙하디친숙하게.

그런 토대 위에서 계속해서 압박받아 온 정신이 결국 충동적인 살인과 모르드레드의 분실로 이어진 공포가 현실 부정의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사실 이쯤 되면 가람은 진지하게 고찰해 볼 필요성이 있었다. 자신은 대체 왜 모르드레드를 두려워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어째서 그렇게나 경계하고 휘청거리면서 금방 산산조각 날 것처럼 떨어 대며 모르드레드를 두려워했는지, 그의 머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에 갓 나온 경계심 많은 두 달배기 살쾡이처럼 굴며 노인을 경계하고 쏴 죽이기까지 했는지.

솔직히 노인을 죽인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미 잃어버린 머리를 잃어버릴까 봐 눈이 돌아가 노인을 죽이다니.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 두려운 나머지 초조해져 섣불리 총탄을 사용해 버렸다. 미쳐 있었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운화의 집에서 지낸 시간은 가람에게 정말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사람 목뼈를 매일 보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사실 아니었고, 세상에는 축제라는 것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라는 것도 할 수 있고, 웃으며 지나가면서 가짜지만 잠시만이라도 가족처럼 따듯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도 있었다.

따듯함. 세상에는 그런 것도 있었는데, 왜 자신은 코끝으로 피비린내만 맡고 눈으로는 바늘만 좇으며 발로는 용암이라도 디딘 듯이 조급하게 굴었던 걸까.

말하자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 속에서 엉엉 울다가 밥을 먹고 났더니 갑자기 세상이 맑게 보이더라 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운화의 따스한 대접은 이불 속에서 엉엉 울던 가람을 단숨에 끌어내어 목구멍에 밥을 쏟아 넣은 것과 다름없었다. 정신이 번쩍 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똑바로 걷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비틀거리는 걸음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가람은 자신이 비틀거리다 못해 거의 걸어서는 안 되는 부위로 걸어서는 안 되는 장소를 걷고 있는 셈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대로 더 진행한다면 걷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어질 거라는 것도. 그래서 차근차근 자신의 상황을 점검해 보았다.

결론은, 별것 없었다.

정말로. 정말로 별것 없었다. 자신에게 해악을 끼치는 강력한 적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제외하고 이성적으로 정리하면 그렇게까지 그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모르드레드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차분하게 나열해 보니 첫 패스를 잃었고, 두 사람이 죽었고, 제롬이 고향과 가족을 잃었으며, 자신은 정육점 일이 적성에 맞게 되었다.

놈이 자신을 졸졸 따라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죽여 대고 있는 점이 문제긴 했지만, 어차피 가람의 주변에는 이제 아는 사람도 없다.

운화가 좀 걸리긴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모르드레드는 흙탕물 속에서 숨을 못 쉬어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베이스캠프에서 돌아오게 되는 장소는 마지막으로 차원 문을 열었던 곳이니 지금쯤 서대륙에 있을 테고.

운화를 본 적도 없는 놈이 운화의 집을 태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미친 척하고 세상 전체를 불태울지도 모르지만 그쯤 되면 이미 ‘운화네 집이 불탔어요. 너무 슬퍼요.’ 하며 울고 앉아 있을 일이 아니었다.

놈이 저지르는 일들은 비극이지만, 가람은 그 일을 제어할 수 없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어도 놈은 그것이 하고 싶다면 할 것이고, 눈물을 찍어 내며 애원해도 할 것이다.

두려움에 떨어도 할 것이고, 머리통을 도끼로 깨부수고 욕설을 퍼부어도 할 것이다. 놈은 미쳤으니까.

어쨌거나, 무엇을 해도 결과가 같다면 가람 자신도 이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택함이 옳다.

가람은 차분하게 다음에 모르드레드를 만났을 때 퍼부어 줄 욕설을 선별했다.

너무 상소리는 제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으니 제외하고, 나이에 민감한 것 같으니 언제 시간이 날 때 싸우는 노인들 곁에서 욕설을 주워 듣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예전에 입이 얼어붙어 더듬거리면서 어색한 비난을 퍼부은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과 같은 것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살다 보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전의 성격은 기억도 안 났다.

“어, 거의 다 왔네요.”

비현의 말에 길게 누워 있던 가람이 몸을 일으켰다. 수향은 남은 술을 다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혀를 차며 벌겋게 익은 수향의 뺨을 찰싹이는 비현의 뒤로 굴렁굴렁 굽이치는 오솔길이 보인다.

양옆으로 우거진 숲 탓인지 안개가 자욱했다. 한나절 전까지만 해도 햇볕이 쨍쨍했는데, 날씨 한번 변화무쌍하다.

음산하기까지 한 풍경이었지만 마음이 가벼워진 탓인지 가람은 매우 긍정적인 시선으로 안개를 평가했다. 공기가 촉촉하니 좋네.

두려움이 가시고 나니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힘껏 허우적거리고 있었는데, 늪의 깊이가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조바심과 두려움에 미쳐 현실을 부정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 어둡던 시간을 보상하듯 가람의 마음은 밝아졌다.

비록 햇살처럼 쨍쨍한 밝음은 아니었지만, 낮게 가라앉은 여명과도 같은 밝음이다.

잔혹한 사건에 놀라 정신이 확 나가긴 했지만 침착하게 점검하면 정말로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일단 베이스캠프를 되돌리고, 그곳에서 살며 출장을 많이 가는 직업인 척 꾸며 내어 이쪽 세계로 와 패스를 꾸준히 모아 뮐러와 웨이크도 살려 주자.

아니, 이건 역시 좀 생각해 봐야 할 일이다. 모르드레드가 있는 이상 살려 내어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그냥 그대로.

생전의 두 사람을 떠올리면 그 최후와 웃는 얼굴이 함께 떠올라 숨이 막혔기 때문에 가람은 되도록 두 사람과 세 마리 말에 대한 기억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기억하면 너무 아프니까, 아프기 싫으니 묻어 두었다.

그 두 사람을 흙에 묻었던 것처럼 기억 속 어딘가 깊고 깊은 곳에 묻어 버리고 일상의 기억들을 잔모래 뿌리듯 뿌려 계속해서 그 위에 쌓았다.

그 결과, 가람은 웨이크와 뮐러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얼룩이 되어 버린 그날의 기억 위를 덮어 버리고 다시 들추어 보니 어느새 얼룩이 사라져 있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었다. 지금에 와선 그 흔적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뮐러가 무언가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 모습은 기억나지만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다. 서글프고 슬픈 느낌이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은 슬픔은 아니었다. 조용히 가볍게 가라앉아 마음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살짝 빼어내 버리는 슬픔.

그러면서도 이대로 계속 묻어 두면 언젠가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

아마도 살려 줄 수 없겠지. 언젠가 상황이 바뀐다면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무리이다.

그 언젠가가 오더라도, 시간이 얼마나 지나 있을지 모르지. 두 사람이 알던 사람들이 모두 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거나, 혹은 다 죽어 없어졌을 때거나.

“저기, 미안한데.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진짜로.”

비현이 말고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주눅 든 목소리는 한껏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까마귀가 갑자기 까악까악 울어 대자 음산한 분위기가 딱 적절하게 완성된다.

“안개 때문에 그래요?”

“그거도 그렇고. 느낌 안 와요? 딱 가면 망할 것 같잖아요. 기분도 나쁘고. 여기 굳이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니라면 다른 길로 가시죠? 저는 정말로 아닌 것 같습니다. 이건 아니에요.”

비현이 어두컴컴한 오솔길 안쪽을 흘긋거리며 거듭 거부했다. 그 시선을 따라 오솔길을 바라보았지만 가람은 비현의 공포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냥 평범한 숲길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요.”

가람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비현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며 간곡한 어조로 그녀를 만류했다.

괴물이라도 나오면 어쩌냐느니, 영 기분이 나쁜 곳이라느니, 나와 수향은 절대 죽어도 못 가겠다고 죽는시늉까지 한다.

가람은 그 모습을 보며 안개가 낀 오솔길을 다시 관찰했다. 약간 스산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이런 곳보다 훨씬 무서운 곳도 많이 다녔는데, 새삼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불멸자였다. 죽음도 의미가 없는.

“가지 마세요. 제 말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정말이에요. 가면 진짜 더럽게 재수 없는 일이 생길 것 같다니까요!”

호들갑 떠는 비현을 바라본 가람이 무심하게 손등을 바라보고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수레에서 훌쩍 뛰어내리는 그녀를 보고 비현이 기겁해서 소리를 지른다.

그 바람에 수향이 부스스 일어나 눈을 끔뻑였다. 자고 일어나니 벌어져 있는 소란 통이 이해가 안 가는 얼굴이다.

“진짜 가려고요?”

“네. 이쪽 방향으로 꼭 가야 하거든요.”

대답하는 가람의 눈은 가라앉아 있다. 확고한 목소리에 비현은 설득의 강도를 더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있는데 저 안개가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수향이 거들어 주기를 바랐지만, 아직 술이 덜 깬 것 같은 얼굴을 보니 그 기대는 접어야 할 것 같았다.

“호랑이 고개 밑에 있는 마을은 인심도 안 좋아요. 외지인을 얼마나 험하게 다루는지, 안 좋을 때에 찾아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사람도 많다고요. 그러지 말고, 그냥 돌아서 가요. 그렇게 많이 돌아가지도 않는데.”

철컥.

비현이 애원하는 내내 총에 총탄을 채워 넣던 가람이 약실을 닫았다. 차가운 금속음에 비현이 흠칫 입을 다문다.

숙련된 손놀림으로 두 개의 권총을 허벅지에 매단 가람이 비현에게 짧게 인사했다.

“충고 고마워요. 잘 가요.”

“후회할 거예요. 험한 일 당할 거라고요! 돌아와요! 무슨 일 생겨도 전 모릅니다. 이봐요!”

가람의 등 뒤로 비현의 우는소리가 길게 따라붙는다. 담담한 걸음이 빚어내는 거리가 그 소리의 마침표를 찍었다.

한참 걷던 가람이 문득 돌아보니 어느새 비현의 수레가 보이지 않는다. 떠난 모양이었다. 등 뒤에는 가람이 걸어온 길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비현은 비현이 갈 길을 가고 가람은 가람이 갈 길을 간다. 결국은 그뿐인 일이다.

걱정을 해도 따라올 정도로 걱정하진 않고, 슬퍼해도 저를 내던질 만큼 슬퍼하진 않는다. 결국 그런 것.

잠시 빈 길을 바라보던 가람이 다시 걸었다. 오솔길을 따라 안개 안으로 훌쩍 들어서니 비현이 그렇게 걱정하며 소리친 것이 무색하게도 잔잔한 공기가 꽤 기분 좋은 장소였다.

촉촉하니 버섯도 있고 배설물의 흔적을 보아 동물도 제법 살 것 같은 평범한 숲일 뿐인데 무엇이 그렇게 두려워 자신을 잡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현지인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이겠지만 정말로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오솔길 너머 멀리에 커다란 바위산이 보인다. 그 아래에서 오후의 노을을 배경으로 하얀 연기 뭉치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밥 짓는 연기다. 바위산 아래에 마을이 있는 모양이었다.

여느 때라면 해가 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곳에 야영지를 꾸렸겠지만 가람은 밥 짓는 연기를 따라 좀 더 걷기로 결정했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오늘 안으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녁도 거르고 계속해서 걸어간 결과, 가람은 해가 지기 직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변변한 입구도 없는 마을이라 들어서니 바로 민가가 보인다. 숲 안에 적당히 나무를 잘라 내어 공터를 만든 뒤 조성한 것 같은 마을이었다.

그만큼 가난한 마을이었다. 담도 없이 성성하게 선 빈약한 싸리나무 한 겹이 길과 집을 구분하는 유일한 구분선이다.

마당이 훤히 보이는 그 안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주민의 마른 시선이 가람을 경계했다. 해 질 녘에 나타난 이 이방인이 몹시 불편한 기색이었다.

한 번 휙 둘러보는 것만으로 가람은 마을의 분위기를 단숨에 파악했다.

외지인을 꺼리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주막이나 그 비슷한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민박은 당연히 기대할 수도 없으리라.

비현의 충고가 없었더라도 한눈에 외지인에게 친절하지 않은 마을임을 알 것 같았다.

마당의 솥에서 끓고 있는 것은 궁색한 곡물 죽이다. 바로 지척에 축제를 여는 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비하면 이곳의 가난은 비현실적일 정도다.

하지만 어딜 가든 부자는 더욱 부유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기 마련이다. 이곳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어디서 오셨소?”

불현듯 누군가 말을 걸기에 내려다보니 가람의 가슴팍에나 올 것 같은 노인이 하얀 수염을 들썩이며 다가왔다.

“저쪽 오솔길 너머에서 오는 길이에요.”

“오솔길?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가?”

가람은 어깨를 으쓱이고 대답 대신 통행 패를 보여 주었다. 운화가 만들어 준 통행 패다. 가람이야 어디를 가든 외국인일 테니 이 패는 아주 요긴한 물건이었다.

“흐음. 말썽 피우지 말고 조용히 있다 가시오.”

가람은 노인의 낡은 옷소매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주민 중에는 헐벗은 사람도 많이 보인다. 노인의 차림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다.

주변의 숲이 이렇게나 풍요로운데 어째서 주민들은 이렇게나 굶주리는 걸까.

그 점이 조금 궁금했지만 어차피 패스만 찾고 떠날 곳이다. 가람은 깊게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해서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까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묵을 곳을 찾아보았지만 너 나 할 것 없이 가람을 보면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꽁무니가 빠져라 집 안으로 도망치니 뭘 물어볼 수도, 청할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외지인을 거부하는 분위기에 가람은 결국 적당히 인적 드문 곳의 흙바닥에 앉아 오늘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앉고 보니 찬 기운이 물씬 올라왔지만 그래도 앉으니 하루 종일 걸었던 다리가 지친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쪼그리고 앉으니 눕고 싶은 욕심이 났지만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바닥에서 드러누워 자는 것은 보기에 별로 좋지 않다.

마을 안이니 산짐승 따위의 피해를 입을 일은 없을 거라 해도, 그 외의 위험은 존재했다. 경계할 필요는 있는 것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반쯤 선잠을 자던 가람은 공기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예민하게 읽고 눈을 떴다.

어둠 속, 어른거리는 인영이 손아귀를 뻗어 오고 있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그 손의 손목을 잡아채 확 당겼다.

가람을 향해 굽혀져 있던 몸은 무게 중심 덕분에 손쉽게 딸려 왔고, 가람은 그대로 그를 걷어찬 다음 바닥에 찍어 눌렀다.

스스럼없는 폭력. 거의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것에 이전 같은 망설임이라곤 없다.

바닥에 상대를 메다꽂은 가람은 뒤늦게 그가 남자임을 깨달았다. 매우 말라 꼬챙이 같은 남자다.

이만큼이나 비쩍 말랐으니 제압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정도는 총도 필요하지 않다.

총.

가람은 자신이 어느새 권총을 뽑아 들어 그의 관자놀이를 찍어 누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남자의 머리가 땅에 쓸려 옅은 피를 내보인다.

“뭐지?”

어둠 속에서 자는 사람에게 손을 뻗어 온 인간이다. 존댓말을 써 줄 기분은 들지 않았다.

“자,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앙상한 팔다리를 그러모으며 남자가 빌었다. 동정심을 구하며 필사적으로 자비를 애걸한다.

가람은 총부리를 거두고 남자를 풀어 주었다. 남자를 동정해서가 아니라, 그에게서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냥 배가 고픈 좀도둑인 듯싶었다.

자다가 일어난 바람에 피곤했지만, 눈앞에 좀도둑을 두고 다시 잠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람은 일단 남자에게서 이야기를 좀 듣는 것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음식이라면 이 굶주린 남자는 쉽게 정보를 줄 것이다.

“배고파요?”

가람의 어조가 누그러지자 남자가 살아났다는 듯 얼굴을 폈다.

“예. 예. 벌써 사흘간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풀뿌리도 못 먹었습니다, 나으리…….”

남자의 마지막 말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같은 애절함이 묻어 있었다. 가죽만 입혀 놓은 것 같은 팔다리는 그의 고백에 신빙성을 실어 주었다.

가람은 가방에서 수수떡을 한 덩이 꺼내어 건네주었다.

“먹어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가람의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수수떡으로 손을 뻗었다.

그 와중에도 그의 눈에는 이것이 함정이나, 어떤 나쁜 종류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빼앗긴 것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다.

가람은 그가 수수떡을 받아 들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사실 이 수수떡은 가람이 떠날 때 운화가 싸 준 것으로, 차게 식어 별맛이 없었던 탓에 적당히 떼어 먹고 남은 덩어리였다.

버리기엔 아까워 갖고 있던 것인데, 남자가 하늘에서 내린 음식이라도 된 듯 허겁지겁 먹으니 지켜보는 가람도 꽤 뿌듯했다.

가람이 마음이 바뀌어 돌려 달라고 말하기라도 할까 봐 남자는 입 안에 수수떡을 욱여넣다시피 했다.

그러다 목이 막혀 가슴을 두드리며 숨넘어갈 듯 꺽꺽거리기에 가람은 가방에서 캔 주스도 하나 꺼내어 권했다.

“이것도 마셔요.”

그 와중에도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는 가람의 눈을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주스를 받아 들고 마셨다.

마시던 도중 단맛에 흠칫 놀란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새가 모이를 쪼듯 조금씩 아껴 마신다.

어쨌거나 한바탕 배를 채운 그를 앞에 두고, 가람은 자신의 볼일을 볼 차례라고 생각했다.

“이름이 뭐예요?”

가람의 어조는 친절했다. 남자는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말해 주었다.

“강석……. 성은 없습니다.”

“멋진 이름이네요. 이것 좀 더 드세요.”

“가, 감사합니다.”

뜻밖의 친절한 태도에 남자는 눈앞의 여자가 자신을 흙바닥에 메다꽂았다는 사실을 반쯤 잊어 가고 있었다.

그는 가람이 내민 경단을 받아 들고 급히 입에 넣었다. 언제 다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니 생기는 대로 배 속에 보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배가 많이 고프셨나 봐요.”

“예. 제대로 된 음식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저런, 마을 사정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옆 마을은 굉장히 풍요롭던데.”

“그렇습니까? 통행 패가 없어 가 보진 못했지만 들리는 풍문에 좋은 곳 같더군요.”

남자의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는 것을 느낀 가람은 슬슬 본론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남자가 불안한 시선으로 조심스레 조언했다.

“저, 이건 은혜 갚는 차원에서 말씀드리는 건데 날 밝기 전에 이 마을을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건 왜요? 아, 안 그래도 마을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곤 생각했어요. 옆 마을과는 너무 다르던데요.”

드디어 원하던 정보가 나오자 몹시 반가웠지만 애써 그런 기색을 감춘 가람이 능청스레 대답했다.

강석은 잠시 주변을 살피며 밤 귀가 없는지 확인하더니 가람에게 속삭였다.

“내일이 바로 그 날입니다.”

“무슨 날이요?”

“그 날 말입니다. 호랑이 고개의 그 날 하면 다 아는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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