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32화 (132/256)

22화

다 안다곤 해도 가람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말하는 투를 보니 이 일대에서는 꽤 유명한 소문인가 보다.

가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강석은 더욱 신중한 얼굴로 속삭였다.

“바위산의 호랑이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날 말입니다.”

가람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관리하던 표정을 내던졌다. 순식간에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이 눈을 두어 번 끔뻑인다.

산 제물? 요즘 시대에? 그러고 보니 수향이 얼핏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도 같았지만, 갑자기 튀어나온 생뚱맞은 단어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가람이 눈짓했다.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는 뜻이다. 아무래도 더 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완전히 처음 들으시나 보군요. 보통은 마을에서 가장 뒷배 없고 힘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산 제물로 가지만 가끔 운 없는 이방인을 제물로 쓰기도 합니다. 연고도 없고, 흔적도 없고. 사라져도 깨끗하죠.”

“왜 사냥하지 않는 거예요? 그깟 호랑이.”

그깟 호랑이라고 해도 이 시대에는 아마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차라리 산 제물을 바치는 것보다는 나을 텐데.

가람은 산 제물보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데도 순순한 마을 주민들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깟 호랑이가 아닙니다. 덩치가 집채만 한 괴물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을 상대로 어떻게…….”

집채라는 비유는 분명 과장일 것이 분명했지만 가람은 모른 척하고 대답했다.

“그래도 나라에서 그런 것을 처리해 주지 않나요?”

“그런 것을 요청하면 세금이 많이 든다고…….”

“촌장이요?”

“예…….”

가람은 사람들의 꼴을 떠올렸다. 아니,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눈앞의 강석이 얼마나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는지만 봐도 촌장이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 밥이 되는데도 세금이 아까워 군대 요청을 못 하다니.

호랑이와 산 제물로 거래를 했다는 점을 차라리 높이 사야 할까. 짐승과 거래를 하기도 쉽지 않았을 테니.

“호랑이가 사는 바위산이 혹시, 아니, 혹시라고 할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저거죠?”

“그렇습니다.”

가람이 가리킨 것은 마을 뒤쪽에 혹처럼 솟아 있는 새하얀 바위산이었다. 그 바위산 너머로 분지 형태의 협곡이 펼쳐져 있었다.

잘하면 그 분지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 것도 같건만, 분지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인 바위산의 동굴을 호랑이가 막아 버린 바람에 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무서운 호랑이이길래.

잠시 생각하던 가람은 손등을 바라보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늘 끝이 가리키고 있는 바위산. 바늘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호랑이 소탕인가.

가람은 갑자기 트리거가 이 자리에 있다면 저 호랑이와 술이라도 한잔하고 길을 터 주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머리를 흔들어 털어 버렸다.

그리고 가방을 뒤져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꺼내어 앞에 늘어놓았다.

“저, 저기?”

가람이 갑자기 음식을 늘어놓자 강석이 기대와 당혹감이 섞인 목소리로 부른다.

그 앞에서 자세를 고쳐 앉은 가람이 찌를 듯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제안했다.

“밤새도록 이거 다 먹죠.”

“예?”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라는 뜻이에요.”

때로는 포기하는 것도 상황에 대한 좋은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가람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산 제물의 운명을 예감하며 촌장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자신을 효율적인 자살 희망자로 보이게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석의 시선이 가람이 내어놓은 것들에 잠깐 머무른다.

앞에 쌓아 둔 수많은 음식이 밤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찬란하게 보이는 듯했다. 굶주린 거지에게 그 광경은 너무나 매혹적인 것이다.

“제가 뭘 말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조금 긴장한 목소리에 묻어 있는 열망을 민감하게 감지한 가람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별로 어려운 건 아니에요. 제가 이 주변 사정에 대해 좀 어둡거든요. 그래서 이 마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궁금해졌어요. 그냥 여행자의 호기심이니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말을 마치며 가람이 권하듯 음식을 향해 턱짓해 보였다. 운화가 마구잡이로 쑤셔 넣어 준 이름 모를 열매 하나를 잡아 쪼개자 강석이 조금 망설이다 따라 하듯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저 산에 호랑이가 나타난 지는 이제 2년쯤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산 제물을 원하지 않았어요. 이따금씩 사람을 물어 가긴 했어도,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습죠.”

굵은 대추 하나를 베어 물며 강석이 이야기했다. 아삭거리는 소리에는 물기가 흠씬 배어 있었다.

“언제부터 산 제물을 원한 거예요?”

“1년 정도 되었습니다.”

가람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호랑이가 설마하니 배고프니까 도시락 좀 보내 보라고 요청하진 않았을 테고, 산 제물은 아마 이쪽에서 먼저 시작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가람의 예측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람 맛을 알게 된 호랑이가 자꾸 사람을 물어 가니 촌장님은 어차피 먹힐 사람이라면, 좀 더 하찮은 자를 먹게 하자고 생각하셨습니다. 처음에 제물이 된 것은 눈이 없는 장님 노인이었습니다.”

“저런.”

“그다음에는 앉은뱅이 청년, 머리가 좀 모자란 아가씨 등이 제물이 되었습니다. 한 주에 한 명. 잡아먹히는 사람의 수는 늘었지만 아무나 호랑이가 물어 가던 때에 비하면 오히려 나은 셈이었지요. 온전한 사람보다야 반푼이가 먹히는 게 낫지 않겠냐고 사람들은 쉬쉬하면서도 모이면 그렇게 수군거렸습니다.”

“그걸 그냥 그렇게 하게 뒀어요?”

가람의 말에 강석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입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었다.

“계속해 봐요.”

“예……. 사실 보시다시피 가난한 마을입니다. 쌀독에서 인심 난다고, 제 일이 아니니 사람들은 다 등 돌렸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호랑이에게 물려 가지 않아도 얼마 못 살 병신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랬습니다.”

화는 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해가 간다고 해서 옳다는 것은 아니었다. 가람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에 그에게 질문했다.

“이번에 제물이 된 사람은 누구예요?”

강석이 잠시 침묵하다가 느릿하게 대답한다. 늪에 빠진 썩은 나무를 끌어내는 것처럼 힘겨운 목소리였다.

“팔복입니다.”

“팔복?”

이름을 말하는 것을 보면 강석이 잘 아는 사람인 듯싶다. 가람이 시선으로 묻자 그가 수긍했다.

“마을에 얼마 없는 거지 중 하나입니다.”

가람은 그제야 강석이 그토록 떨떠름해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처음에는 장애인, 그 후에는 거지. 약자를 산 제물로 쓴다 했으니 차례가 옮겨 오는 수순은 당연한 것이었다.

마치 나무 밑동을 타고 기어오르는 불길처럼, 언젠가는 제 차례가 온다.

여기까지는 오지 않겠지 하고 생각해도, 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차라리 기적을 바라는 것이 빠를 것이다. 그러나 당장 자신의 일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외면했다.

외면이 더 쉽기 때문이다.

불을 끄거나, 아니면 좀 더 높은 곳으로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하지 않으면 불길에 잡아먹히고 만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불행의 시간은 보통 가장 최악의 상황에 최악의 형태로 방문하곤 했다.

그러나 당장 뜨겁지 않기 때문에 안주하는 것이다. 아주 조금 가지고 있는 안락함마저 잃지 않기 위해서.

강석의 표정에서 가람은 불안함을 읽었다. 그 팔복인지 칠복인지 하는 거지 다음으로는 자신의 차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가람은 동정하는 대신 문득 의아해져 질문했다.

“이미 산 제물이 있는데 저에겐 왜 도망치라 하신 거죠?”

“다음번에 제물이 될 사람을 미리 잡아 두려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가람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어느새 짙푸르게 동터 오는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다음번이라. 그때까지 기다리며 시간 낭비를 할 생각은 없다. 가람은 당장 패스를 찾기 바랐다.

“호랑이 굴 근처에 사람 있어요?”

“아뇨. 보초도 물어 갈 텐데 설마 있겠습니까. 산 제물만 그날 동굴 앞으로 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산 제물이 되지 않아도 동굴에는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람은 촌장에게 가서 자신이 뛰어난 산 제물임을 어필하는 수상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잘됐네요.”

“잘됐다니, 그런데 그건 왜…….”

가람의 대답이 조금 이상했던 터라 강석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가람의 미소였다.

이 남자와는 여기까지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 가람으로서는 자신에 대해 더 떠벌릴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입을 닫은 가람의 시선이 호랑이가 살고 있는 바위산으로 향한다.

어느새 모여든 푸른 여명을 배경으로 바위산은 밤을 칠한 듯 검었다. 새카만 새벽안개는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의 집에 어울리는 장식물이다.

가람은 안개가 푸른빛으로 변할 때까지 잠시 기다리다가 숲이 어른어른 보이자 재빨리 굴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잠을 자지 않아 피곤하긴 하지만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총을 쏘는 것은 큰 체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트리거를 생각하면 어쩐지 좀 떨떠름한 일이었지만, 가람은 필요하다면 호랑이에게 총탄을 선물할 생각이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다. 선물할 이유는 충분했다.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가람에게는 자기 보호라는 훌륭한 명분이 또 있었다.

문득, 죽지도 않는 자신을 왜 보호해야 하는지 회의감이 들었지만 가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왜라니, 어차피 그 상황이 오면 회의감이고 뭐고 총부터 뽑아 들고 날뛸 것이 분명한데 쓸데없는 생각이다. 아마 잠이 모자라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가람이 바닥에 음식을 잔뜩 늘어놓고 일어서자 강석이 질문했다.

그는 이 음식들을 적선으로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니면 보관 물품으로 취급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모양이었다.

“아까 마을을 떠나라고 조언해 준 대로 따르려고요.”

“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강석은 어딘가 섭섭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람은 잠시 생각하다가 자신이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음식은 가져요.”

드디어 받은 공식적인 허가에 강석은 음식에 대한 제 권리를 마음껏 행사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는 그를 뒤로하고 가람은 그 자리를 떠났다.

세금이니 뭐니 하는 명목으로 빼앗길 금 한 푼보다는 당장 배를 채울 음식이 그에겐 더 보배롭겠지.

어쨌거나 잘되었다. 호랑이만 제거한다면 이번 패스는 간단하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총탄이 꿰뚫을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

아마도 그 호랑이는 한껏 제 가죽을 핥아 놓는 것이 좋을 것이다. 곧 그것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흔적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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