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가람은 나무가 드리운 그림자를 밟으며 사방에 깔린 안개를 마음껏 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깊게 스며들자 몸에 활기가 도는 기분이었다.
잠은 얼마 못 잤지만, 그래도 곧 패스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없던 힘도 솟는 기분이다.
이번 패스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한 달 안에 500패스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절반이었다. 딱 절반. 벅차오르면서도 가람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사실 되살아나서도 가람이 내내 안타까웠던 일은, 베녹사스에서 패스를 사용해 모르드레드를 처리한 일이었다.
그때 200패스를 쓰지 않았다면 가람은 절반이 아니라 700패스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용한 당시에도 속이 다 끓도록 아까웠지만, 지금의 안타까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딱 300패스, 1년도 안 걸려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후회할 때마다 가람은 절대 패스를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주 예전에 사 두었던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능력도 가능하다면 환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의 가람이라면 용암 속에 있는 패스를 가지러 가야 한다 해도 절대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살이 타는 고통조차 감수할 수 있었다.
그깟 용암, 뛰어들어 패스만 손에 넣은 뒤 한 번 죽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죽어도 몇 번이나 되살아나는데 어째서 아까운 패스를 쓴단 말인가?
힘이니 능력이니 하는 것에 대한 욕심도 사라진 지 오래고, 한때 잠깐이나마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공간 이동이니 하는 능력에도 흥미가 사라진 지 한참 되었다.
간절한 것은 이 부평초 같은 삶을 묶어 줄 집이다. 매일 밤 엄마 아빠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작은 거실이다.
빠르고 쉽게 패스가 있는 곳까지 이동하면 좋겠지. 더위도 추위도 느끼지 않게 된다면 정말 편리할 것이다. 나쁠 리가 있나. 뭐든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패스를 쓸 정도로 좋은 것은 아니었다. 두 다리가 있는데 어째서?
이동하는 시간을 좀 아끼려 쓴다고 해도 한 달에 한 번 이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 능력이 300패스였다. 다른 쓸 만한 능력들도 거의 그 정도 값은 했다.
언젠가는 구입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세상에는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마법사 길드에서 이용할 수도 있는 것을 위해 패스를 쓰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헛소리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나, 단기적으로 볼 때나 당장 능력을 구입하는 것은 메리트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가람이 가장 원하는 것은 베이스캠프를 되찾는 것이다. 가장 원하는 것을 내버려 두고 다른 것들로도 충분히 대체 가능한 힘을 어째서 구입한단 말인가?
물론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서라도 아껴 두어야 한다. 신중함이 필요한 때였다.
능력을 갖추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어차피 언젠가는 패스파인더의 삶을 살아야 한다. 죽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가 된다면 질리도록 힘을 구입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힘이든,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든 원한다면 닥치는 대로 모두 가질 수 있으리라. 홈쇼핑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힘을 모아서 전쟁이라도 할까. 가람은 실소했다.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거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생각이다.
힘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충동적인 파괴욕을 충족시키는 정도일 뿐이다.
총으로 상황을 해결한 일이 많지만, 가람은 그 무력에도 회의적이었다. 힘을 써서 굴복시킨다고 치자. 그래서?
세상에는 힘과 권력으로부터 저항한 일이 많고 가람 또한 그러했다. 모르드레드가 휘두르는 전지전능한 힘 앞에서 처음에는 공포로 굴복했으나 그리 길지 않았다.
저항이 시작되고 투쟁이 계속되면 남는 것은 없었다. 끝없는 투쟁의 끝에는 비참한 삶들과 거대한 무덤만이 남게 될 것이다.
만약 정말로 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면.
모르드레드는 왜 저 꼴이란 말인가?
가람의 눈에는 모르드레드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패스의 망령. 저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그의 모습이 좋은 본보기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르드레드가 없었다면, 어쩌면 모르드레드가 어떻게 하기도 전에 먼저 힘을 얻겠다고 날뛰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처럼 될지도 모르지만 될 수 있으면 그 때를 미루고 싶은 것이 사실이었다.
조금만 더 숲의 아침이 상쾌하다고, 사람들의 농담이 재미있다고, 나무 위의 다람쥐가 귀엽다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즐겁다고, 고생 끝에 취하는 휴식이 달콤하다고, 낯선 사람과 인사할 때 조금은 부끄럽고 설렌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예전보다 그런 아름다운 것들을 바라보는 눈이 차가워졌지만 그것들이 좋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될 수 있다면 조금만 더, 영원일지도 모를 삶에서 1년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러려면 결국은 소중한 가족을 되찾아야 한다. 가람의 단단한 걸음이 숲을 야무지게 밟아 나갔다.
해가 뜨자 숲 안에 빛이 스며들었다. 황금빛으로 너울거리는 안개 틈으로 바위산이 보인다.
바위산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풀을 헤치고 조금 더 걷자 굵기가 다양한 잡목들 사이로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슬쩍 눈대중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지름이 8미터는 넘어 보였다. 뻥 하니 뚫려 있는 것이, 철도만 깔려 있었다면 갱도의 입구라고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호랑이가 자주 드나드는 모양인지 근처에는 험하게 팬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 있었다.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을 바라보며 가람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향수에 젖어 들었다.
갑자기 아주 예전에 크페타인의 얼음 동굴 안을 걸었던 일이 기억났다. 습기와 이끼가 가득한 이곳과 달리 칼날같이 날카로운 추위가 빗발치는 곳이었지만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동굴 끝에는 얼음 속에 갇혀 말라 죽은 나무들의 군락이 있었고, 그곳에서 곰과 눈사태를 겪었다.
두려움과 불안함과 비참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스에 대한 열망에 젖어 아무것도 모른 채로 걷던 시절이 있었다.
얼떨결에 시작하긴 했지만 어떻게 계속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침반이 충전될 때마다 패스를 얻는다는 설렘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곳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간들을 버티게 해 준 것은 곁에 있던 두 사람이다. 가람은 상냥하던 시간을 고통스럽게 떠올렸다.
오랜만에 꺼내어 보는 기억이지만 무딘 칼끝이 심장을 저며 내는 듯한 고통은 전혀 약해지지 않았다.
실제로 통증이 오는 것 같아 심장 위에 손을 가져다 댄 가람이 꽉 눌렀다. 그렇게 누르면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통증이 멎었다.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해 이성과 감성을 정리한 사람이 단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말간 검은 눈동자가 눈앞을 직시한다. 그 끝에는 동굴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가람은 단숨에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생각은 나중에 침대에서 이불을 끌어안고, 혹은 한가한 정오에 해도 된다.
지금은 사람을 즐겨 먹는다는 호랑이가 사는 동굴을 어떻게 무사히 통과할지를 생각할 때였다.
일단 들어가야 할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막상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는 시커먼 동굴을 보니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를 동굴 안으로 선뜻 걸음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동굴 속을 전등 하나에 의지해 걷다가 갑자기 호랑이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사양이었다.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어두운 동굴보다는 훤히 드러나는 야외 쪽이 자신에게 유리하리라. 총은 근거리 무기가 아니었다.
가람은 입구 쪽에서 기다리다가 호랑이가 나타나면 원거리에서 저격하는 방법으로 해치우기로 결정했다.
권총이긴 하지만 곰도 잡았던 전적이 있는 것이니 다른 무기가 더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놈만 잡으면 해결이다.
호랑이가 무리를 짓는 생물은 아니니 두 번째, 세 번째의 동굴 속 호랑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이제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가람은 괜한 체력 소모를 막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거슬리는 높이의 풀이 시야를 가리긴 했지만 그래도 약간의 은신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앉아 슬쩍 나무둥치에 기대니 훨씬 덜 피곤했다.
사실 새벽부터 강석의 이야기를 듣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잔 탓에 좀 힘들던 차였다.
잠을 자고 오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방법이겠지만, 모처럼 산 제물이 바쳐져 동굴 앞까지 호랑이를 끌어내어 줄 텐데 아까운 기회를 놓칠 필요가 있을까.
무언가를 기다릴 때 시간은 가장 더디게 가는 법이다. 앉아 있은 지 한참이 지난 것 같은데도 눈앞의 풍경은 많이 바뀌지 않았다.
가람은 반쯤 졸다가, 깨다가를 반복해 가며 훌륭한 미끼가 되어 줄 산 제물을 기다렸다. 호랑이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오는 순간이 가람이 노리는 때였다.
그렇게 졸며 기다리기를 한참, 문득 기묘한 소리에 가람은 눈을 떴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입가에 흐른 침을 닦으며 앞을 보니 키 큰 잡초 사이로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보였다.
가람이 들은 기묘한 소리는 남자가 내고 있는 울음소리였다. 보는 사람도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다 생각했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음을 삼키고 뱉으면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저자가 팔복이겠군.
주먹만 한 코에 눈은 부리부리하다. 스킨은 반드시 두 손바닥을 짝짝 부딪쳐 얼굴에 팍팍 바를 것 같은 쾌남형 얼굴로 눈물 콧물 다 짜내며 정신없이 울고 있으니 좀 안쓰럽기도 했다.
어쩔까 하던 가람은 팔복이 호랑이가 물어 가지 않아도 탈수로 죽겠다 싶을 만큼 울어 대자 점점 보고 있기가 곤혹스러워졌다.
저렇게나 무서워하는데 혼자 내버려 둘 필요까지 있을까. 어차피 팔복이 있는 곳은 동굴과 꽤 떨어진 곳이다.
팔복의 옆에서도 저격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척을 죽이고 다가가자 팔복이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떨기 시작했다. 원래도 떨고 있긴 하지만 저대로 분해되어 사라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자신의 기척을 호랑이의 것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눈을 들어 앞을 보면 호랑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호랑이를 쳐다보는 것도 버거운지 눈을 질끈 감고 눈물만 줄줄 흘린다.
“저기요.”
안 되겠다 싶어진 가람이 조용히 팔복을 불렀다. 그 순간.
“으허어어엉! 어머니! 으우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바닥에서 펄쩍 튀어 오른 팔복이 정신없이 살려 달라 빌기 시작했다. 한참 머리를 박고 빌던 그는 뒤늦게 상황을 깨닫고 가람을 올려다보았다.
멍한 그 얼굴에 가람은 자신에 대한 호칭을 담담히 수정했다.
“아닌데요.”
가람이 무엇을 부정했는지 몰라 팔복의 표정이 멍청해졌다. 잠시 멍하니 눈을 끔뻑이던 그는 뒤늦게 무언가에 생각이 미쳤는지 낡은 옷깃으로 제 얼굴을 문질러 대었다.
손길이 어찌나 거친지 얼굴을 지워 버릴 기세다. 가람은 잠시 동안 남자가 눈물의 흔적을 지우도록 기다려 주었다.
“나, 낭자는 누구시오?”
팔복이 더듬더듬 질문하자 가람은 어깨를 으쓱하며 턱 끝으로 제 차림을 가리켰다. 팔복이 수동적인 태도로 가람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행색을 훑었다.
“보시다시피.”
여행자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지만, 그런 호칭으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이 어쩐지 불편해서 가람은 적당히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면 대개 알아서 가람의 정체를 짐작하곤 했다. 지금처럼.
오히려 지어내서 말하면 쓸데없이 자세한 사항까지 말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불편했다.
이렇게 말해 주면 상대가 추측하는 것에 대해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면 되어서 편리하다.
“옆 마을로 가던 길이오? 길을 잘못 들었군. 여긴 위험한 곳이니 얼른 떠나시오!”
말하던 팔복이 갑자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제 처지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가람은 잠깐 말하는 사이에도 그의 시선이 몇 번이나 시커먼 동굴 입구로 향하던 것을 기억해 냈다.
금방이라도 호랑이가 튀어나올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무리도 아니지만.
“길을 잘못 든 건 아닌데…….”
어디까지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 가람이 가늠하며 남자를 살폈다.
그사이 팔복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태도에 당황했다.
“여기에 볼일이 있단 말이오? 여기가 어딘지는 아시오? 저 아래 보이는 마을이 호랑이 고개 마을이오.”
“그럼 저 동굴이…….”
가람이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었다. 순박해 보이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다. 가람은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래, 호랑이 동굴이지. 나는 산 제물이오.”
침울한 낯으로 그가 절망스럽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만큼이나 말했으면 알아서 떠나라는 표정에 가람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팔복의 표정에는 진정성이 뚝뚝 흘렀고, 그는 무장도 하고 있지 않았다. 너무 깐깐하게 굴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그럼 제가 잘 찾아왔네요. 사실 하도 호랑이가 안 나타나서 동굴을 착각한 게 아닌가 싶던 참이었거든요.”
“뭐라고?”
팔복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이 여자가 정신이 이상한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이상해진 것이 틀림없다는 가정을 떠올리고 있는 얼굴이었다.
가람은 그가 그 터무니없는 가정을 신뢰하기 전에 얼른 쐐기를 박았다.
“저 여기 사는 호랑이 잡으러 왔거든요.”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지 그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 너무 쉽게 받아들여서 가람이 오히려 얼떨떨할 정도였다.
“그게 정말이오?”
“네.”
진짜 믿는 건가? 이번에는 가람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바라보던 가람은 그가 정말로 자신의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팔복은 대답하는 가람의 태도가 너무 태연했던 터라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가만히 보니 차림새도 범상치 않은 것 같고, 믿어서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어쩌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희망이 차오르고 여유가 생겨나자 그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던 부끄러운 일을 기억해 냈다.
갑자기 팔복의 얼굴이 벌겋게 익자 가람은 이유를 알 수 없어 의아해졌다. 그러나 성심을 다해 얼굴을 문지르는 옷깃에서 금방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울었던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했다. 가람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죽는 마당에 담담한 게 더 이상하니까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가람이 실소하며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팔복은 한동안 붉게 익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얼굴을 보며 가람은 작게 미소 지었다.
하긴, 너무 어린애처럼 울긴 했지. 눈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었으니까. 그래도 거지라고 해서 부끄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여기 그냥 있었던 거예요? 그냥 다른 마을로 도망치면 안 되나요?”
이것은 가람이 내내 궁금했던 것이다. 어째서 사람 목숨을 사료 취급하는 마을에서 산 제물이 되라 명하는 것을 순순히 따르는 건가?
향토심? 아니면 마을에 대한 애착? 협박? 어떤 협박도 죽음 앞에서는 효과적이지 못할 텐데.
“통행 패가 없으니 어차피 다른 마을에 가도 감옥행이거나 이 마을로 압송될 뿐입니다. 도망쳤다는 이유로 돌팔매질을 당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어차피 죽은 목숨입니다.”
팔복이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대답했다. 가람이 제 목숨을 살려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투도 공손해졌다.
가람은 납득했다. 타당한 이유다. 바로 얼마 전 자신도 감옥에 갈 뻔했지 않은가. 운화가 준 패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잡혀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도 산 제물이 된다고 며칠 밥도 잘 먹었습니다. 호강했지요 뭐.”
방금 전까지 엉엉 울고 있었던 주제에 넉살은 좋다. 가람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애매하게 웃어 주었다.
그러나 그 순간 따라 웃으려던 팔복이 흠칫 굳어졌다. 얼어붙은 눈동자가 가람의 어깨 너머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동시에 무언가에게 강렬하게 응시당하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가람의 등을 긁어내렸다. 순식간에 전신의 솜털이 바짝 곤두선다.
요란하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위압감만으로도 알아채기 충분한 등장이었다.
순식간에 긴장을 머금은 땀방울이 솟아올라 옷에 스며든다.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그대로 머리가 날아갈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간신히 등 뒤의 기척만을 살피던 가람은 허옇게 질린 눈앞의 팔복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목구멍이 타는 것같이 초조했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이 남자는 죽는다.
자신이야 다시 살아나지만 이 남자는 이게 한 번뿐인 삶이었다. 거지로 살다 산 제물로 마감하는 삶이란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가람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권총 두 자루를 뽑아내었다. 동굴 쪽으로 뒤돌자 시커먼 어둠 속에서 노란 눈 두 개가 빛난다. 그 터무니없는 눈의 높이에 가람이 움찔했다.
빛나는 눈은 가람의 예상보다 훨씬 높은 곳에 달려 있었다. 적어도 5미터는 넘을 것 같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있어도 그 크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커다란 동굴의 구멍을 몸으로 거의 다 막고 있다시피 했으니 가람조차도 잠시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집채만 하다고 했던 것은 조금의 과장도 없는 담백한 사실이었던 것이다.
팔복은 이미 넋이 나갔다. 실제로 호랑이를 보니 승산이 전혀 없어 보였는지 그의 얼굴에서 희망이 사라졌다.
체념과 공포로 얼룩진 얼굴에 가람은 자신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팔복을 제 뒤로 슬쩍 밀어 놓았다.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상대 때문에 아연하기도 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들개를 잡으러 왔는데 성난 코끼리를 만난 꼴이었다.
저 커다란 몸으로 달려들어 후려치면 자신 같은 건 뼈도 추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죽지는 않는다. 아니,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얻어맞으면 아프겠지만 그뿐이었다.
달달 떨며 숨어 있을 이유가 없다. 아까울 것 없는 이 육신을 숨겨서 뭣 하겠다고? 고통은 어차피 잠깐이다.
그래. 잠깐이다. 가람은 새기듯이 되뇌었다. 괜찮아. 죽지 않아. 잠깐이야.
가람이 심기일전하는 동안 호랑이는 가만히 동굴 속에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은 탐색 중인 모양이다.
다행한 일이었다. 가람은 그 점을 감사히 여기며 천천히 총을 들어 올렸다.
놈과의 거리는 30미터쯤. 저만한 크기의 호랑이라면 한두 번의 도약으로 먹잇감을 없애 버릴 수 있을 만한 거리였다. 시간을 끌면 거리를 줄이게 될 뿐이다.
잘게 떨리는 총구가 호랑이의 미간을 겨냥한다. 곧 컴컴한 총구 속에서 총탄이 소리 지르며 달려 나왔다.
폭음과 동시에 호랑이가 동굴에서 뛰쳐나왔다. 미간에 맞긴 한 모양인지 크게 우는 소리에 귀가 멍멍해졌다.
가람은 정신 차리려고 노력하며 두 발, 세 발째의 총탄을 발사했다.
빛 아래에서 보니 이건 완전히 괴물이었다. 아무리 쏴도 총탄은 생채기 정도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용도 잡아먹을 수 있을 것 같은 풍채의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들자 팔복은 현실을 부정하며 혼절해 버렸다.
가람은 총탄이 호랑이를 얼마나 상처 입혔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호랑이의 색 때문에 여의치 않았다.
흑호. 동굴의 어둠을 빨아들인 듯이 새카만 호랑이였다. 검은 몸체에 약간 밝은 색의 잿빛 털이 줄무늬를 그리고 있다.
놈은 어지간히 놀랐는지 가람에게 달려들어 단숨에 앞발을 휘둘렀다. 그 몸짓이 말도 안 되게 날렵했던 터라 가람은 어떻게 피하거나 자세를 잡을 여력도 없이 발에 채여 날아갔다.
“우윽!”
그대로 4미터쯤 주르륵 날아간 가람은 근처 잡목을 부수며 등으로 착지했다. 충격 때문인지, 혀를 깨물었는지 입 안에서 피가 왈칵 터져 나온다.
피비린내를 외면하며 가람은 날려 가기 직전 가까이서 보았던 호랑이를 떠올렸다. 뼈가 얼마나 두꺼운지 총탄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는다.
어째서 마을 뒷산에 이딴 게 살고 있는 거지. 이런 것이 호랑이라면 가람은 트리거를 고양이라 부르고 싶었다. 놈은 트리거보다 세 배는 큰 덩치를 갖고 있었다.
놈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새카만 몸을 우아하게 움직여 가람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