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34화 (134/256)

24화

가람이 푹 고꾸라져 입에서 피를 줄줄 뱉고 있으니 기절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놈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가람은 아직 총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총알은 남아 있다. 가까이 오기만 하면 눈알을 터뜨려 줄 수 있겠지. 벼르고 있는 가람의 시야 안으로 놈이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어느 정도 다가왔을 때, 호랑이가 앞발을 내밀어 가람을 휙 뒤집었다. 진짜 죽었는지 확인하는 태도였다.

앞발이 다가오자 잠깐 긴장했던 가람은 곧 마음을 편히 먹었다. 죽으면 어차피 그뿐이다. 아쉽긴 하지만 그렇게 겁낼 일도 아니었다.

그대로 침착하게 기다리자 놈의 커다란 주둥이가 가까이 다가왔다. 한입에 씹어 삼킬 셈인가.

얼굴이 가까이 온다면 이쪽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가람은 충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놈의 숨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가람은 쏜살같이 총을 뽑아 들었다.

놈의 눈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손을 뻗어서 찔러도 될 정도로 가까이다. 지금이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그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호랑이가 조금 더 빨랐던 것이다.

놈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고개를 틀었다. 회심의 총탄은 놈의 코에 생채기를 내는 정도의 성과만을 얻었을 뿐이다.

숨죽인 일격에 대한 보복은 바로 돌아왔다. 커다란 앞발이 가람의 상체를 꾹 누른다.

언젠가 용에게 밟혀 죽을 뻔한 적도 있지만, 무언가에 밟히는 것은 정말로 유쾌한 일이 못 된다. 그것이 척추 건강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는 짐승이라면 더욱.

갈비뼈가 금이 가려는지 우득우득 비명을 지르고, 등 근육이니 배근육이니 할 것 없이 온 힘을 다해 갈비뼈가 부서지지 않도록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가장 아래의 갈비뼈 하나가 불길한 소리를 내었다. 가람은 신음하며 비명 대신 남은 숨을 토해 내었다.

호랑이는 뼈가 부러지기 직전,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발을 치워 냈다. 오랫동안 숨을 쉬지 못했던 탓에 가람은 파리하게 질린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에 붉고 푸르게 변한 가람을 호랑이가 다시 한 번 후려친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송곳니에 걸치듯 입에 물었다.

그리 편한 자세는 아니었다. 안락한 장소도 못 된다. 좁은 입 안에는 언제 물었는지 팔복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호랑이 입에서 풍기는 지독한 악취 때문에 옆에 있는 팔복이 약간 썩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살짝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코에 썩은 쥐를 처박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람은 입으로 피를 줄줄 흘리며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평가했다. 예전에 들어가 본 거북의 입 안이 이것보다 나았던가?

등에 닿는 입 안의 촉수나 혀가 징그럽긴 했지만 물속이라 그런지 냄새는 못 맡았던 것 같은데.

이왕 입 안에 물렸으니 입천장이라도 쏴 줄까 하던 가람은 양손이 허전한 것을 깨달았다.

솜씨 좋게도 어느새 호랑이가 총을 떼어 놓은 모양이다. 가불의 의미도 이해한다더니 정말 영악한 놈이다.

사람들도 가람의 손에 들린 것이 무엇인지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데, 이 호랑이는 단숨에 알아채고 자신에게서 떼어 놓았다.

어지간해서는 총탄과 총의 관계를 이해하기 힘들 텐데. 그것이 짐승이라면 더할 것이다.

가람이 통증과 출혈로 가물가물한 정신을 추스르는 사이 호랑이는 어느새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몸이 워낙 커서 그런지 얼마 걷지 않은 것 같은데도 벌써 동굴 안으로 꽤 들어온 상태다.

가람은 멀리 보이는 동굴 입구를 바라보다가 눈을 굴려 호랑이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노란 안광이 번쩍번쩍 빛난다. 손전등이 따로 없었다.

너무 얕봤던 걸까. 호랑이의 입에 헝겊 인형마냥 물려 덜렁덜렁 옮겨지던 가람이 조금 후회스러운 기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직은 괜찮았다. 집채만 한 호랑이와 싸운 것치고는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고, 결정적으로 허리 뒤에 총 하나가 더 있다.

무기도 있고 탈출로도 얼마든지 있기에 가람은 꽤 여유로웠다.

슬슬 호랑이를 처리할까 하고 가람이 총을 꺼내어 입천장을 겨누었다.

여기를 쏜다면 그대로 얇은 뼈를 뚫고 뇌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무슨 기척을 감지하기라도 했는지 호랑이가 거칠게 도약했다.

하마터면 총을 놓칠 뻔한 가람이 기겁했다가 호랑이가 착지하기가 무섭게 다시 입천장을 겨냥했다. 그러나 쏘지는 못했다.

꽉 막힌 동굴인데도 아래에서 바람이 휭 불어온다. 호랑이의 안광에 힘입어 희미한 동굴의 윤곽을 살피던 가람은 바닥이 뻥 뚫려 있음을 깨달았다.

낭떠러지였다. 그 사이사이로 침식된 돌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호랑이는 솜씨 좋게도 그 돌기둥으로 도약해 이동하고 있었다. 충격은 놈이 돌기둥 사이로 오가며 생긴 것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는 낭떠러지 아래로는 가늘고 빠른 바람이 불었다. 디딤돌 사이의 넓이도 널찍해서 사람의 다리로 뛸 만한 곳이 아니다. 동굴 속의 낭떠러지.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호랑이를 처리할까.

가람은 고민하다가 저 앞에 또 이런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잠자코 있기로 결정했다.

당장 호랑이가 자신을 씹어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적당히 패스 근처에 왔다 싶으면 처리하면 되겠지.

그러나 모든 일은 예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가람은 스스로가 조금씩 질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입으로 피를 토한 탓에 가뜩이나 상태가 안 좋은 폐로 악취 나는 공기를 맡고, 불편한 자세로 숨을 쉬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호랑이에게 물려 옮겨지는 바람에 운동량이 줄어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잠이 부족했던 탓에 피가 빠져나간 빈 혈관에 빠르게 피로가 차올랐다.

그다음 수순은 당연한 것이다. 가람은 호랑이가 가장 멀리 도약할 때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스스로의 정신력을 맹신한 결과였다. 가람의 기절은 정신력과는 상관없이 신체의 구조적인 문제였다.

언제든지 다시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육신의 취급을 방만하게 한 결과였지만 가람은 의식을 잃는 그 순간까지도 스스로가 정신을 잃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물론 정신을 잃은 후에도.

* * *

가람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만 하루 만의 일이었다.

짚을 채운 이부자리에 반듯하게 누운 채로 정신을 차린 가람은 눈꺼풀로 안구를 닦으며 시야에 담기는 것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나무 천장이었다. 그로 인해 가람은 자신이 나무로 만든 집 안에서 천장을 보고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의문이 꼬리를 문다. 의아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여기서 눈을 떴다는 이야기는 정신을 잃었었다는 것인데, 호랑이의 입 안에서 정신을 잃게 되면 겪을 수 있는 수백 가지의 끔찍한 일들 중에서 나무 천장의 집 안에서 눈을 뜬다는 것은 번외로도 끼워 넣기 힘든 일이다.

추측할 수 있는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가람은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일단 몸이 너무 아프니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이렇게 누워 기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경험상, 보통 이렇게 누워 있으면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 알아서 상황을 알려 주기 마련이다. 시야에 담기는 물건들은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역력했다.

머리에 뜨끈해진 물수건이 올라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 간호를 받던 도중인가 본데,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으면 자신을 간호하던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그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지 않았다면.

가람의 추측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삐꺽이는 소리와 함께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그제야 가람은 자신이 누워 있는 공간이 매우 훈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 밖,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마른 장작이 벽난로 속에서 마음껏 제 열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가람은 들어온 사람이 벽난로에 장작 몇 개를 더 던져 넣고 손을 터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 아니다. 팔복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팔복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졌지만 가람은 일단 눈앞의 사람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 의문은 이 사람에게 풀어도 늦지 않다.

펑퍼짐한 옷을 입고 있는 탓에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는데 장작을 넣고 뒤도는 얼굴을 보니 선이 고왔다.

갸름한 미인형 얼굴이다.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조그마해서 청순한 인상이었다. 살짝 처진 커다란 눈만이 얼굴에서 유일하게 큰 것이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갑자기 그녀의 눈이 확 부풀었다. 가람은 뒤늦게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을 깨달았다.

“깨어나셨군요!”

반색하며 기뻐하는 얼굴을 보고 가람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싶어졌다. 나를 아는 사람인가? 왜 이렇게 기뻐하지?

의아해하던 가람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그냥 이 사람은 내가 깨어난 것 자체가 기쁜 거구나. 가람은 갑자기 입 안이 써지는 느낌에 입맛을 다셨다.

“네.”

대답하는 순간 갑자기 피 냄새가 확 올라왔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에 입으로 피를 줄줄 토했는데.

폐가 터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를 토했었다. 가람은 미간을 찌푸리고 침을 삼켜 피 냄새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아앗, 말을 하시면 안 돼요. 잠깐만요! 물을 가져올게요.”

아무래도 여자는 자신이 입맛을 다신 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잡을 새도 없이 그녀가 사라지자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기분 나쁜 적막은 아니었다. 포근한 이불 때문인지 몰라도 어쩐지 햇살 좋은 일요일 오후에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풀어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상황 파악도 해야 하고 패스도 찾아야 하는데, 어쩐지 서두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몸이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픈 탓도 있다.

슬쩍 눈알을 굴려 보니 옷 대신 붕대를 입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붕대에 둘둘 말려 있었다.

아마 정신을 잃은 후 더 다쳤던 모양이다. 호랑이가 자신을 좀 맛보기라도 한 모양이지.

몸도 움직이기 힘들고 자신을 간호해 주는 사람도 있으니 가람은 에라 모르겠다 하고 드러누워 여자가 물을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밖이 소란스러워진다 싶더니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물 콧물 흩뿌리며 달려든 자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낭자! 살아 있었군요! 정말로 걱정했습니다!”

팔복이었다. 원래 눈물이 많은 성격인지 턱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렇게나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가람은 갑자기 자신의 보호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그가 좀 불편했지만 선선하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일단 팔복은 살아 있고.

“네.”

가람이 매정하리만치 담백하게 대답하자 팔복은 무안한 얼굴로 물러났다. 뒤늦게 줄줄 흘리던 눈물을 자각했는지 급히 얼굴을 닦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 위로 각양각색의 얼굴들이 호기심을 담고 몰려들었다. 막 태어난 새끼 사슴이라도 구경하는 모습이다. 달가운 기분은 아니었다.

“이름이 뭐요?”

“몇 살이지?”

“어디 출신이오?”

“갈 곳이 없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요?”

“호랑이를 잡으려고 했다는 게 정말이오?”

정신없이 몰려드는 의미 없는 질문 사이에서 가람은 정확히 자신이 관심 있는 질문만을 꼽아 들었다. 호랑이.

“호랑이는 어떻게 된 거죠?”

가람의 질문에 호랑이를 잡으려 했냐고 물었던 남자가 빙긋 웃었다.

“호랑이는 무사하다네.”

“예?”

가람이 얼빠진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사람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쁘게도 가람의 그런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동조해 준 사람이 있었다.

물을 가지러 간다던 여자가 사람들 틈에서 불쑥 나타나더니 짜악 소리가 나도록 사람들의 등을 내리쳤다.

“아직 아픈 환자에게 무슨 짓이에요! 당장 나가요!”

철썩철썩 소리가 연달아 난 후 사람들은 울상을 하고 쫓겨났다. 등을 까 보면 모두 벌겋게 손도장이 나 있을 것이다.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여자가 가람에게 가볍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외지인만 보면 신기해서 저러니. 여기서 못 나간 지 꽤 되었거든요. 다들.”

“갇힌 건가요?”

가람의 질문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곧 아하하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럴 리가요. 다들 나가고 싶지 않아 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데요?”

“호랑이 바위 안에 있는 분지예요. 동굴을 지나오셨지 않나요?”

“중간에 의식을 잃어서……. 아니, 그보다 누가 절 구한 거죠? 전 분명 호랑이 입 안에 있었는데.”

여자가 조용히 미소 짓더니 가람의 등에 손을 넣어 일으킨 뒤 묽은 죽을 먹여 주었다.

이런 환자 대접은 오랜만이라 가람은 어색하게 여자가 하는 대로 따랐다.

“아무도 구하지 않았어요.”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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