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니 구할 필요가 없었지요.”
“호랑이가 그냥 떠났나요?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 제가 그 와중에 여길 찾아오기라도 했나요? 너무 많이 다쳐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다치게 한 것은 선호 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계세요. 하지만 그분도 많이 놀라셨다고 하더라고요. 당신이 큰 소리가 나는 쇠뇌를 쏘았다고 하던데.”
“선호?”
“이 분지의 주인이신 호랑이님이요. 당신을 물어 오셨지요.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가람은 갑자기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도 이제 모르겠다. 대답을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가람은 더듬더듬 떠오르는 하나의 가설을 질문했다.
“혹시 그 호랑이 좋은 호랑이예요? 새카만 것이 완전 까만 괴물처럼 보이던데.”
“외형이 좀 무섭게 생기시긴 했지요. 하지만 무척 아름다운 분이세요.”
여자가 동의하자 그제야 가람은 약간 의문이 가시는 것 같았다. 그럼 그 호랑이가 자신을 밟아 으스러뜨려 놓고 그게 미안해서 치료하도록 이 여자에게 맡겼다는 건가?
“그럼 여긴…….”
“맞아요. 여긴 산 제물들의 마을이에요. 호랑이 고개 마을에서 가장 약하고 설움받던 사람들이 사는 곳이지요.”
긴말을 듣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어째서 호랑이가 선호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가람은 이 세계 호랑이에 대한 편견이 생길 것 같았다. 여기 호랑이들은 모두 착하고 남 돌보기를 좋아하는 성격인가? 가람은 확인하듯 질문했다.
“산 제물……. 여기 사람들이 전부 산 제물로 바쳐진 사람이라는 건가요?”
“맞아요. 저희는 모두 마을의 쓰레기였죠.”
조금 과격한 문장으로 여자가 긍정했다. 선량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리 순탄한 삶을 살아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이곳에 있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청순한 얼굴로 섬뜩하게 입술을 비틀어 미소 지은 그녀는 저 먼 어딘가로 잠시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병신에 고아에 늙은이, 어디에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가난뱅이 부랑자들에 밥 빌어먹는 거지들까지. 아주 골고루 있어요. 그중에 전 고아였지요. 뒷배도 없고 아무렇게나 굴려 먹어도 어른을 상대할 필요가 없는 고아.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이죠.”
신랄하게 말한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대화 내용과 표정의 괴리감에 가람은 먹던 죽이 목에 걸릴 것 같았다.
솔직히, 그만 말해 줬으면 했다.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관심 없어요.’ 따위를 말했다간 죽이 아니라 죽 그릇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눈앞의 여자라면 웃는 얼굴로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깨어났을 때 물을 가져오겠다며 발랄하게 뛰쳐나가던 여자가 이 여자가 맞는 건가? 가람은 갑자기 일찍 정신을 차린 것이 몹시 후회되었다.
몸이 좀 낫고 나서 깨어났다면 이렇게 꼼짝도 못하고 피하고 싶은 이야기를 들을 일은 없었을 텐데.
그러나 가람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생각해 보면 산 제물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제 성격이 드세어지니 마을에서 노골적으로 저를 비난하기 시작했거든요.
아무도 저를 지켜 주지 않으니 저라도 싸워서 저를 지켜야지요. 드세어질 수밖에요.
제가 저를 지키는 일은 저를 마구 굴려 먹고 싶은 사람들에겐 드세고 버릇없는 일이 되었어요. 간이든 쓸개든 달라면 내어주어야 했고, 밥 한 숟갈 주고 하루 종일 부려 먹어도 불평해서는 안 되고, 마음 가는 사람을 좋아해도 버릇없는 일이 될 뿐이었지요.
언젠가 복수하겠다고 이 악문 적도 있었지만, 아무 소용 없었어요. 결국 산 제물이 되었으니까요.”
여자는 단정한 손놀림으로 가람의 입에 죽을 넣어 주었다. 가람은 죽 그릇이 빨리 비어 이 여자가 떠나 주기만을 바랐다.
갑자기 듣게 된 깊은 이야기에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안타까이 여겨야 함이 분명한 이야기였지만 모든 신경이 패스에 쏠려 있는 지금, 여자의 사연에는 눈곱만치도 이입이 되지 않았다.
“결과적으론 잘된 일이지만. 선호 님의 마을로 온 후로는 정말 행복해졌어요. 저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졌어요. 선호 님은 저희의 은인이에요. 그러니 아가씨가 선호 님을 해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결국 하고 싶은 말은 그거였나. 그녀는 가람이 몸의 상처에 앙심을 품고 호랑이를 공격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다.
사실 강한 화기를 동원하면 호랑이를 잡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호랑이가 정말로 선량한 성격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 몸 안에 패스를 품고 있거나 한 것이 아니라면.
“안심하세요. 저는 그럴 생각이 없어요.”
한 줄기의 속내를 감추고 가람이 상냥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표정의 여자에게 가람은 다시 너스레를 떨어 경계를 풀게 만들었다.
지금 자신은 환자이니 괜히 위험한 인상을 주면 오히려 손해다.
“제가 어떻게 그 커다란 호랑이를 해치겠어요? 지금도 발에 차인 것만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그렇게까지 말하자 여자는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었다. 가람은 미소 짓는 얼굴 그대로 확인하듯 질문했다.
“그럼 산 제물로 바쳐진 사람들 중에 정말로 먹혀서 죽은 사람은 없는 거군요. 어째서 굳이 산 제물로 사람을 받는 거죠?”
“선호 님의 지혜지요. 생각해 봐요. 마을에서 산 제물로 바쳐질 정도면 얼마나 약하고 핍박받는 사람이겠어요? 선호 님은 그런 사람들을 거두기로 한 거지요. 그리고 괜히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이 꼬여 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 사람 잡아먹는 호랑이가 산다고 소문을 퍼뜨리신 거예요.”
“그 호랑이가 직접 그렇게 말했나요?”
“네? 선호 님은 호랑이인걸요. 말씀을 못 하시지요. 저희 생각에는 그렇다는 거예요.”
아무래도 이곳의 호랑이는 말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유창하게 말하던 트리거와는 대조적이다. 무언가 종이 다르거나 한 것일까?
상념에 빠진 가람의 입 앞으로 다시 숟가락이 내밀어졌다. 가람은 얌전히 멀건 죽을 받아먹었다.
잠시 뒤 듣게 된 여자의 소개에 따르면, 그녀는 아화라는 약초꾼이라고 했다.
근처 산에서 약초와 나물을 뜯어다가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갔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가까이서 지켜본 그녀는 첫인상과 달리 그리 수다스러운 성격도 아니라서 죽을 먹여 주거나 간호하거나 하는 정도가 가람과 아화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이었다. 가람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여자는 놀랄 정도로 간호에 일가견이 있었다. 가람 자신보다 오히려 가람의 몸 상태를 더 잘 알았다.
목이 탄다 싶으면 어느새 물을 대령했고, 심심하다 싶으면 밖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덕분에 마치 아기처럼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매우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의 간호는 어떤 경험에 의해 숙달되었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날카로울 때가 있어서, 가람은 혹시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 곧 털어 버리긴 했지만 갑자기 불쑥 물어 오는 질문에 간이 툭 떨어질 만큼 놀랐다.
“제가 마음을 읽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하고 있죠?”
설마 했던 의혹이 사실로 드러난 것 같은 느낌에 가람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충격에 허덕이는 가람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비밀이라도 말하듯 슬쩍 귀띔했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답니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아화가 근래 보여 준 행동들을 보면 아예 거짓말 같지도 않았다.
사실일까 하고 의심하려던 차에 가람은 그녀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위화감을 깨달았다.
“잠깐, 목소리는 원래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죠.”
능청스럽게 대답한 아화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탁자를 닦기 시작했다.
가람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한 박자 늦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안 통하네. 마음을 읽는 능력 같은 건 없어요. 대신 눈치가 귀신같이 빠르죠.”
“눈치…….”
“그럼요. 평생 눈치만 보고 살았으니까요.”
자신의 슬픈 장점을 자랑한 아화는 먹을 것을 가지러 갔다 오겠다며 방을 나갔다.
그런 식으로 먹고 자고, 아화의 실없는 농담에 황당해하며 가람의 몸은 점차 나아 갔다.
붕대 아래에는 여기저기서 쓸린 상처의 피딱지가 얼룩처럼 잔뜩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3일 정도 지나자 약간이나마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할 수 있었다.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가람이 생각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패스였다.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지겨울 정도다.
마을을 좀 돌아보고 오겠다는 가람의 조심스러운 말에 아화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계속 방에만 있었던 환자의 답답증 정도로 생각했는지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점심을 먹어야 하니 너무 늦게 돌아오지 말라며 주의를 주었다. 마치 가족에게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말이라 가람은 묘한 기분으로 그 요청에 대답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오래 돌아다닐 체력도 없다. 걸을 수 있지만 그뿐이었다. 걸을 때마다 간신히 여문 살갗이 팽팽하게 아파 왔다.
피딱지가 갈라지는지 따끔따끔하기도 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다칠 때보다 다친 후 나을 때가 더 성가셨다.
사실 호랑이에게 차여 날아갈 때는 피를 토하긴 했지만 통증을 느끼지는 않았는데.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눈을 찌르는 것마냥 따가웠다. 순간 눈앞이 새카매져 잠시 문 앞에 서서 눈살을 찌푸린 가람은 현기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잠깐 기다렸다.
너무 누워만 있었는지 몸 상태가 엉망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누워서라도 운동을 좀 할 것을.
잠시 후회하던 가람은 손날로 차양을 만들어 해를 가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키 작은 풀꽃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집들 위로 노란 햇살이 흩어진다. 풀꽃 위에는 나비가 느긋하게 날개를 접고 있다.
분지의 한쪽에는 산을 희게 가르는 폭포가 쏟아져 마을의 풍부한 수원이 되어 주었다. 그 맑은 물은 밭 곳곳에 스며들어 작물의 목을 축여 준다.
“어― 아화가 돌보고 있다는 그 아가씨 아냐?”
얼마 걷지 않아 가람은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 두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귀가 어두운지 목소리가 매우 컸다.
덕분에 가람은 쓸데없이 많은 이목을 끌게 되었다. 모여서 소일거리를 하던 마을 주민 몇몇이 뼈다귀 발견한 강아지마냥 가람을 빛나는 눈으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가람은 적당히 인사를 하고 사람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자리를 피했다.
바늘이 매우 가까운 곳을 가리키고 있어서 이런 곳에 느긋하게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아쉬운 듯 마을 주민이 입맛을 다셨지만 가람은 눈길도 주지 않고 부지런히 바늘을 따라 걸었다.
바늘이 가리키는 곳은 마을 끝자락에 있는 소담한 언덕이었다. 자주 사람이 오가는지 발로 밟아 만든 길이 나 있었다.
등산을 하기에 적합한 몸 상태가 아니었지만, 가람은 일단 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아주 못할 짓도 아니었다.
그렇게 숨이 턱에 차도록 다리를 채찍질한 결과 가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언덕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다. 아화가 보았다면 기겁을 하며 가람을 이부자리에 묶어 놓았을 것이다.
언덕 꼭대기에 오른 가람은 뜻밖의 것을 발견하고 흠칫했다. 흑호가 등 돌린 채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이름이 선호라던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호랑이는 그 옆에 자리한 복숭아나무만큼이나 키가 컸다.
호랑이가 옆에 있으니 제법 굵다란 복숭아나무가 살구나무처럼 보일 지경이다.
복사꽃이 흐드러진 풍경 속에 앉아 있던 호랑이의 꼬리가 천천히 살랑였다.
살랑인다고 해도 워낙 거대한 풍채 덕분에 굵은 동아줄이 바닥을 위협적으로 쓸어 대는 모양새였다.
아마도 자신이 온 기척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가람은 그 옆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지만, 바늘이 가리키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착한 호랑이라고 하니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가람은 사람들의 호랑이에 대한 평가가 진실이기만을 바라며 긴장된 걸음을 옮겼다.
호랑이는 가람이 바로 옆으로 가서 설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석상이라도 된 것 같은 모습이다.
가람이 한시름 놓고 본격적으로 패스를 찾으려는데, 호랑이가 갑자기 휙 소리 나게 꼬리를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경계하던 가람은 호랑이 꼬리가 그 근처의 복숭아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에 감기는 것을 보았다.
가볍게 둥치를 휘감은 꼬리는 곧 좌우로 흔들리며 나무에게서 복숭아 열매를 갈취해 내었다.
검은 꼬리가 바닥에 후드득 떨어진 열매를 쓸어다가 제 앞에 몰아 놓는 것을 지켜본 가람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호랑이의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하고 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능청스러운 태도였다.
가람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그 근처 복숭아나무에서 패스를 손에 넣었다. 호랑이가 앉아 있기에 호랑이 배 속에라도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인 일이었다.
복숭아나무에서 얻은 패스는 150패스였다. 어째 요즘 얻는 패스는 대부분 금액이 큰 것 같다.
어쨌거나 이로써 손에 넣은 패스는 마침내 550패스가 되었다. 이제 450패스만 모으면 정말로 끝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가람은 호랑이가 모아 준 복숭아 더미에서 가장 알이 굵은 것을 하나 집어 크게 베어 물었다. 과육이 부드럽고 단맛이 강한 복숭아였다.
손등의 문양은 다시 충전 상태로 돌아갔으니 당분간은 느긋하게 지내도 된다.
가람이 다시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어디선가 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와 지저귀었다.
“비! 비!”
울음소리가 특이한 새다.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새가 불쑥 말했다.
“비 와여!”
가람은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평가를 수정했다. 울음소리가 특이한 새가 아니라 혀가 짧은 새로군.
“비 와여! 비! 비 와여!”
혀 짧은 새는 가람의 어깨에서 그렇게 지저귀다가 호랑이의 귀에다 대고 연신 떠들었다. 그리고 그 경고대로 정말로 빗줄기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기에는 나무 잎사귀가 그렇게 촘촘하지 못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힘들더라도 바로 하산할 것을. 근처에서 비를 피할 곳을 찾지 못한 가람이 후회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떨어지던 빗방울이 사라졌다.
벌써 그친 건가 싶어 위를 올려다본 가람은 커다란 호랑이의 아래턱을 보게 되었다.
제 얼굴로 비를 막아 준 호랑이는 복숭아를 선물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표정이었다.
가람은 우산 역할을 하고 있는 그 무뚝뚝한 턱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풋, 웃음을 터뜨렸다.
가람의 웃음과 동시에 호랑이의 커다란 입이 다물린 채로 씨익 미소 짓는다. 그 아래에서 새가 다시 촐싹맞게 지저귀었다.
“차칸 호랑이! 차칸 호랑이!”
새는 전체적으로 노란 빛깔에 날개 양 끝에 둥근 흰 점이 찍혀 있는 종류였다.
무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리가 짧고 작은데도 말하는 솜씨가 제법이라 가람은 그것이 놀라웠다. 아마 모자산맥 지빠귀와 비슷한 과에 속하는 동물이 아닐까 싶었다.
호랑이는 늘 이곳에서 마을 전체를 관찰하며 어디선가 어둡고 비참한 일이 생기지 않는지 예의 주시하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람이 알고 있는 또 다른 호랑이가 떠올랐다. 온갖 동물들이 모여 술을 마셨던 야수들판의 그 밤.
그 후로는 야수들판으로 가지 못했다. 아니, 가지 않았다는 표현이 올바르다.
앞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를 뒤쫓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조금 기다리자 비는 금세 그쳤다. 내리는 시간이 짧고 빗줄기가 굵은 것을 보아 소나기인 모양이다.
촐싹맞은 새는 내내 호랑이를 칭찬하다가 갑자기 가람의 소매를 물고 재촉했다. 호랑이의 굵은 눈알이 슬쩍 아래로 향했다가 다시 마을을 바라본다.
“가자! 가자!”
목적지가 빠진 말에 의아했으나 가람은 일단 선선히 새가 이끄는 대로 따랐다. 어차피 패스도 찾았으니 어디에 있든 별로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적당히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충전이 끝나면 다시 패스를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물론 이 마을 주민들이 가람이 머무는 것을 허락해야겠지만, 현재 분위기를 봐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가람은 떠나기 전 복숭아를 몇 개 챙겼다. 워낙 맛이 좋았던 것이다.
새가 가람을 이끈 곳은 언덕을 올라오기 전 한 번 눈길을 주었던 커다란 폭포였다.
폭포의 아래에는 커다랗고 튼튼한 물레바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 근처에는 혀 짧은 새와 동족으로 보이는 노란 새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물레방앗간 근처에서 찧고 남은 곡식 부스러기를 쪼아 먹는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시야 밖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인사해 왔다.
“안녕하세요?”